비의(秘儀)가 숨쉬는 절대장소
- 설치미술의 활로
김영재 / 미술평론가
장소는 시각예술이라는 표상개념에서 볼 때 종속개념이지만 장소 자체의 의미가 극대화하는 이른바 절대장소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현상이 특히 설치, 환경, 야외작업을 통해 부각되고 있다. 이것은 내가 '국적 확인기'라고 부르는 1990년대에 필자가 「현장·환경」이라고 부른 미술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대우 옥포조선소의 「야외설치미술제」와 포항제철 광양만 제철소의 「야외 철조각전」은 장소의 절대성이라는 대전제에 따라 어떠한 미술의 양상이라도 문제제기의 내용과 의미지향의 형식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으며, 우리의 체취와 신명에 연결될 수 있는 절대장소의 개념이 민족미술의 세계화라는 대전제를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비춰지고 있는 것이다.
이 장소에 대한 집착은 90년대 미술의 특징적인 면모의 하나이되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80년대의「겨울대성리전」, 82년의「현장에서의 논리적 비전」, 84년의「격포해안 작업」, 85년의「공주산성작업」, 86년의「천마산 작업」등이 지역과 장소를 내세워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작업은 상대장소로써 지역의 장소를 선택한 경우로 판단된다. 반하여「야외설치미술제」와 「 야외 철조각전」은 작업현장의 환경을 절대장소로 선택했으며, 수원성벽의 테마이자 역사적, 시각적 배경으로 벌어진 「교감예술제」, 광안리의 바다와 해변이 장소이자 소재였던 「바다미술제」는 장소에 따른 분위기를 절대장소로 선택한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장소라는 것은 우리 민족에게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그것은 한민족의 5천년 역사가 바로 농경사회의 정착문화를 지키고 길러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문화의 치맛자락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되어온 미술의 양상이 환경과 야외미술을 포함한 설치미술일 수 있다는 가정이 가능하다.
설치작업이 농가의 부엌이나 무당의 신당, 굿당, 서낭당 등을 연상케 한다면 환경이나 야외미술은 다분히 싸리 울타리에 금기를 친 마당과 장승이 서 있는 동구 밖을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생적 미술이라는 말을 음미해보자. 그것은 우리의 핏속에 면면히 흐르는 전통이 감수성의 이름으로 시각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점은 설치미술(Installation Art)이나 환경미술(Environment Art) 등으로 불리고 있는 서구의 미술양상에서 장소성과 절대장소에 대한 관심, 그리고 아키타입을 찾아보면 쉽게 알 수 있다.
Installation이라고 불리는 서구의 설치미술은 작가나 관중, 혹은 작가와 관중이 어떤 상황을 설정하고서 일정시간의 프로세스를 보여주는 형식의 미술이라고 정의되며 표출 양상에 따라 수식어가 붙지만 가장 중요한 개념은 무엇보다도 관중이다. 피터 캠퍼스(Peter Campus), 댄 그레이엄(Dan Graham), 부르스 노만의 작품을 비디오 인스텔레이션, 로리 앤더슨(Laurie Anderson)의 작품을 음향 인스텔레이션으로 부르지만 관중이 없는 전시를 떠올릴 수는 없다. 여기서 관중은 하나의 분위기로서, 작품의 활력을 돋구는 역할을 할뿐만 아니라 의미를 구축하기 위해서 관중이 필수적으로 현장에 참석해야만 한다는 필연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설치미술이나 환경미술은 1960년대에 자리를 굳히고 70년대를 거쳐 80년대 성행한 양상이다. 물론 30년간을 그 활동시기로 잡는 것은 주어진 환경과 만들어진 환경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미술양상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대니엘 뷰렌(Daniel Buren)의 「이중 색체의 이원구성(On two levels with Two Colours)」은 매우 단순한 구성의 작품으로서 화랑의 벽에 색칠한 판자를 두르고 있다. 폴 태크(Paul Thek)의「방주와 피라미드(Ark and Pyramid)」는 비밀스런 주술의식처럼 작가 자신의 죽음에 대한 애착을 보여주며 초현실주의와 허무주의 그리고 상징주의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작품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그러나 뷰렌과 폴테크의 작품에서는 장소의 절대성은 의미가 없다. 전시장소가 바뀌더라도 내용이 변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소는 상관없더라도 관중이 의미의 일부분이 되는 작품이 있다. 데니스 마시(Denis Masi)와 레오폴드 말러(Leopoldo Maler)는 오브제와 함께 박제된 개와 쥐들을 외과수술기구와 함께 놓아두고 관중이 신체적인 위험을 느낄만한 지점까지 다가가면 개가 낑낑거리는 소리와 짖는 소리가 들리도록 공간을 구성한다. 레오폴드 말러의 또 다른 작품인「전의식(Pre-sense)」은 은색 폴리비닐 클로라이드(pvc)로 만들어진 인형에서 바람을 빼고 환자용 이동침대에 눕힌다. 그리고 머리부분의 텔레비전 모니터에는 누구든 그 앞의 의자에 앉으면 말러의 얼굴이 나타나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마시와 말러의 작품들에는 장소 안에서 관중과 작품의 상관관계가 의미를 증폭시키도록 되어 있다. 이 작품들 역시 장소의 절대성은 크게 의미가 없지만 전시장이라는 폐쇄된 공간이 작품의 효과를 높일 수는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장소성을 이동시킴으로써 작품의 내용과 의미를 바꾸어나가는 작업의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죠나단 보로프스키(Jonathan Borofsky)는 뉴욕의 낙서나 폐기물에서 영감을 얻어 몽환적 분위기와 확대된 스케일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쥬디 파프(Judy Pfaff)는 바다 밑 풍경을 오브제와 환경으로 바꾸어 나간다. 여기에서는 장소의 이동에 따른 상황의 변화가 주제가 된다. 즉 데페이스망(Depaysement)이라고 할 까. 데페이스망은 미술에서 오브제를 상식적 위치에서 떼어내어 관중이 예술품을 기대하리라고 생각되는 장소로 옮겨놓는 작업을 말하는데, 보로프스키와 파프의 작품은 장소의 이동이라는 점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그렇지만 어떤 장소를 설정하고서 이동을 생각하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장소란 부차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치미술이 절대장소를 문제로 삼지 않는 것은 전시장이라는 상대장소에서 전시되기 때문이지만은, 이와 나란히 환경을 대상으로 삼은 대지 미술과 기념비적 미술, 그리고 의사(疑似) 고고학과 민족학적인 미술이 비교적 장소성을 주안에 두고서 작업을 전개시켜 나간다. 그러나 대지미술과 기념비적 미술의 형태가 절대장소를 대상으로 한다면 의사 고고학과 민족학적 미술은 절대장소를 염두에 두고서 제작, 전시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작품자체의 분위기가 작품의 장소를 합리화 해주는 구실을 한다. 이것을 익명성의 장소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
먼저 의사 고고학적 주제의 작품으로 앤과 패트릭 포이에르(Ann and Patrick Poirier)의 「오스티아 앤티카(Ostia Antica)」는 작가들의 상상력에 의해 재구성된 밀집사원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 작품에서는 장소 자체가 분위기와 함께 이동한다. 작품이 분위기를 이끌고 이동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찰스 시몬스(Charles Simonds)의 「원형구조 속의 사람들」은 폐허와 건설의 잔재를 축소된 사람의 형태와 함께 노출시킨다. 자연히 보는 사람의 시선은 그 작품이 원래 위치했으리라고 생각되는 장소에로 이끌리게 된다.
민족학적 작품의 예로서는 데보라 버터필드(Devorah Butterfield)의 「무제」와 앤 멘디에타(Anna Mendidta)의 「실베타 시리즈(Silveta Series)」를 들 수 있다. 이 두 작품은 크레타 섬의 유적이나 원시부족의 조형물을 연상케 한다. 버터필드와 멘디에타의 작품은 그러므로 장소성이 아니라 특정한 지역의 특정한 시간대를 분위기로서 이끌고 다닌다고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로버트 스택호스(Robert Stackhose)의 작품은 바이킹의 '롱 쉽'의 뼈대를 천장에 달아매는 일방 바닥에 설치하고 있으며 노르딕, 켈트족, 미국 인디안 신화 등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한다. 이러한 경향의 작품은 장소를 대상으로 한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익명성의 장소에 머물고 있다. 즉 작품이 분위기를 이끌고 다니는 만큼 그것이 어떤 장소에 놓여지더라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 상대장소에 대한 서구의 양상은 한국의 설치미술에서도 공통적으로 보이고 있는 부분인데 대부분의 설치작가들이 실내공간을 선호하거나 실내에서 전시될 수 있는 작품을 야외로 옮겨놓는 경향이 현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구의 작가들이 설치된 작품의 주변에 관중이 만드는 분위기를 후광처럼 드리우기 위해 고심하는 한편 한국의 설치미술은 논두렁에 서있는 허수아비처럼 굳이 관객을 유인하여 흥을 쥐어짜지는 않는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한국의 설치작가들이 작품자체와 구조적 완결을 중시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바로 이점이 인스텔레이션과 한국 설치미술의 첫 번째 차이점이다.
그리고 민족학적, 의사 고고학적 작품의 예에서는 분명히 두 번째 차이점이라 말할 수 있는 점이 드러나고 있다. 바로 아키타입적인 것이지만 밀집사원이나 아시리아의 건축, 미케네 문명, 바이킹, 미국 인디안 등의 소재는 하나의 소재일 수는 있지만 그것들이 이 작가들의 피속에 흐르고 있는 전통의 맥박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면 아마 아니라고 대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문제는 나중에 자생적 미술을 이야기하면서 다시 끄집어내기로 하고 다시 장소여행을 떠나도록 하자. 대지미술은 보다 절대장소에 근접하는 미술의 양상이다. 대지미술은 1960년대 말 대규모의 환경미술이 미니멀리즘과 결합되어 나타난 양상으로 설명된다. 물론 개념미술도 한몫을 거들고 있다. 종이 위에 그냥 에스키스로 남아 있을 때는 개념 이상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이것이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엄청난 규모이다. 말하자면 자연과 생태계를 파괴하거나, 할 수도 있는 거대한 구조물이라고 할까 ? 로버트 스미드슨(Robert Smithson)의 「나선 형 둑(Spiral Jetty)」은 약 4평방 킬로미터의 크기이고 마이클 하이저(Michael Heizer)의 「부의 부」(Double Negative)는 2,400톤의 화산암과 사암으로 구축되었다. 크리스토의 「골짜기의 커튼」은 가장 높은 곳의 높이가 약 110미터이며 약 18,400 제곱미터의 나일론 천이 소요되었다. 대지미술의 규모는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경비가 소요되지만 「야외설치미술제」나「야외 철조각전」과 같은 거대한 프로젝트는 향후 한국에서 이러한 조형의 가능성을 전혀 배제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지미술이 대상으로 하는 장소는 결과적으로 보아 절대장소이다. 말하자면 많은 후보지역 중에서 최종적으로 그 장소가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것은 절대장소임에 틀림없다. 너무나 멀리 떨어진 곳에 있기 때문에 사진으로밖에 볼 수 없는 장소이면서 생태계의 파괴를 우려한 주민들의 반대에 의해 곧 철거되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들은 절대장소를 대상으로 하면서 반대급부적인 결과로써 중요한 것을 잃게 된다. 즉 상대적으로 관객의 참여라는, 미니멀에서 개념미술로 다시 설치와 환경미술에 이르는 미술양상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논의의 끝에 서구미술에서 장소가 중시되는 설치, 환경, 대지미술 등의 양상을 정리해보자. 설치미술은 상대적인 장소와 장소의 변환이 강조되어 있고 의사 고고학적 작품과 민족학적 작품은 익명성의 장소가 주제가 되어 있으며 관중의 참여가 절대조건이지만 대지미술은 고립된 절대장소를 대상으로 한다는 사실이 발견된다. 그리고 장소여행의 부산물로서 이들 작가들이 지향하는 바 아키타입은 자신들의 혈통이라기보다는 문명권의 영향에서 작가들의 상상력이 덧붙여진 가공의 산물일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서구 미술의 동향을 보면서 이번에는 한국의 미술양상 중 먼저 장흥 토탈 미술관에서 있었던 「한국설치미술제」에서 도출된 개념을 살펴보자. 그것은
설치미술이란 화면에 부착되거나 화면에서 떨어져 나오거나 대상의 주장력이 극대화된 공간 혹은 환경에서 최종적으로 관객이 참여함으로써 마무리되는 분위기를 자연발생적으로 펼쳐 보이는 형태의 미술
이라는 것이다. 이어 「동방으로부터의 제안」도쿄전의 세미나에서 다시 <5천년 농업국가의 아키타입과 신화를 배경으로 성숙되어지는 원형(Archetype)지향적인 미술>이라는 개념이 더해졌다. 그리하여 한국의 설치미술은 <신화와 아키타입에서 바탕하는 민족적 체취의 자기 주장력이 공간과 환경에서 극대화하는 형태의 미술>로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최근 10년 동안의 활동을 정리하고 새로운 도약을 위해 세미니와 작가토론회를 가진 「겨울 대성리전」의 양상을 살펴보고 그 현재를 진단하며 앞날을 추측해보자. 그리고 그 앞날은 비단 「대성리전」만의 것이 아닌 한국미술의 장래이기를 기대해보자.
「겨울 대성리전」은 1981년 31인의 작가에 의해 창립, 겨울이라는 시간대와 대성리라는 장소를 내세우면서 '바깥미술'이라는 내용을 천명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먼저 이 바깥미술의 선언문을 보기로 하자. 무엇보다도 자생적이며 체험적이며 자발적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바깥미술이란 우리 고유의 정신적 토양과 기반속에서 자연을 재조명하여 자신의 삶을 서술하는 자생의 미술이다.
바깥미술이란 관념적 자연보다는 체험적 자연 속에서 시각의 확산, 형식과 내용의 함축을 위한 체험의 미술이다.
바깥미술이란 '안'의 반대개념이 아니고 '안'을 수렴하면서 보다 창의적인 표현의 기회와 새로운 동지를 찾고 내적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열린 미술이다.
여기서 자생적이라 함은 외래문화의 맹목적 수용에, 체험적이라 함은 관념적 유희에, 자발적이라 함은 답습과 반복에 반하는 개념이라는 뜻과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선언문을 곰곰이 따져 보자. 어쩌면 자생적, 체험적, 자발적으로 만들어지는 작품들이란 손이 미치는 생활주변에서 얻어진 몇 개의 물건들이나 재료들을 신이 나서 조물락 조물락거려 만들어 친구들에게 뽐내는 놀이개가 연상될 수도 있지 않은가 ? 그러고 보면 「대성리」 10년의 결산으로 보여주는 작품은 규모가 작고 자재가 영세하며 장소성과는 무관한 2차원적인 작품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리라는 생각이다. 물론 그것이 「대성리전」의 지향하는 바나 성격일 수도 있겠지만 향후 「대성리전」의 향방에 하나의 지침이 될 수 있으며 나아가 한국미술의 장래일 수도 있을 몇 가지 관점의 변환이 필요한 것으로 진단된다.
먼저 자연에 대한 관념의 변환이다. 자연파괴의 거대함보다 자연 속에서 자연의 일부분이기를 원하는 한국인의 공통된 심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자신의 산물을 자연으로 생각지 않는 듯하다. 이 문제는 아마도 인간과 인간이 만든 인문환경까지를 자연으로 볼 수 있다면 규모의 문제에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절대시간의 고정과 상대시간의 증폭이다. 즉흥적인 아이디어라 할지라도 성숙될 수 있은 증폭된 시간이 필요하며 작품이 놓여지는 절대시간대에 관중을 분위기로써 이끌어 들일 수 있는 구상이 되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아이디어와 자재의 위상을 정립해야 할 것이다. 자재를 보고서 아이디어가 떠오를 수도 있겠지만 실제 설치된 작품에서 보이는 것은 아이디어에 따라 준비된 자재라는 인상을 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지적이다.
「대성리전」을 위시한 한국의 야외작업의 영세한 자재와 규모는 누구나가 지적하고 있지만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작가들이, 대안을 제시하더라도, 그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을 지도 모른다. 왜 작가들은 난지도 쓰레기장을 뒤져 필요한 자재를 대형트럭으로 실어오거나 대기업에서 매립장에 파묻는 폐기물을 인수하거나, 혹은 기업의 문을 두드리지 않는 것일까 ? 대기업마다 문화행사 예산이 책정되어 있다는 사실이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서일까 ?
네 번째로 공동작품의 가능성이다. 개인작가들의 왜소한 작품일지라도 공동의 공간에 설치가 된다면 거대한 규모가 될 수 있다. 물론 개인작가들은 자신의 공간에서 자신의 작품을 동시에 설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 놀이작업을 염두에 둔다면 아마도 관객이나 지역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기대되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역시 초점이 되는 것은 절대장소와 절대시간의 문제이다. 예를 들어 앨런 손피스트(Alan Sonfist)의 작품 「시간의 풍경화(Time Landscape)」는 기념비적 미술의 예로써, 뉴욕에 있는 라 구아르디아(La guardia) 지역의 식민지시절 이전의 역사적 현실을 생물학자, 화학자, 지질학자 등의 자문과 당시 인간들의 행위 및 문헌을 통해 역사적 자연으로서 재현한 것이다. 이러한 예는 한국의 야외, 환경 및 설치작업의 형식과 내용에 하나의 암시적인 요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자연과 인문환경은 바로 역사와 신화 속의 기념비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겨울 대성리전」의 '바깥미술'과 많은 설치, 환경작업은 몇몇 결정적인 지적에도 불구하고 끈끈한 우리의 것과 그 냄새를 풍기고 있다. 특히 그 양상들 중에서 돋보이는 것은 무속적인 소재의 작품과 열림굿, 애장제 등의 행위이다. 이것은 한국의 설치, 행위, 야외, 환경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미술양상의 진하고 끈끈한 생명력이다. 우리의 신명과 짓거리를 모아 관중까지 분위기로써 흡수할 수 있는 축제나 비의(秘儀)의 분위기를 적분한다면-가능하다면 대기업의 적극적인 후원을 업더라도-그것은 충분히 세계인에게 우선 신기한 것으로, 이어 신비한 것에서 신비 자체로 비쳐질 수 있을 것으로 믿어진다.
신비라는 것은 미지의 것에 대한 세계인의 공통언어가 아니겠는가 ? 세계에 우리민족의 아키타입과 신화에 바탕 한 신비의 냄새를 담은 작품을 내어 보이는 것-그것은 민족미술의 세계화라는 대전제를 만족시킬 수 있는 첫걸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