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리뷰 / 연극

무대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

-연출가 김형에게




안치운 / 연극평론가, 중앙대강사

김형, 올해 들어 처음으로 글을 씁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김형이 연출한 연극공연에 내가 학생들과 함께 관람하고 토론한 때였습니다.

잊혀지지 않는 것은 평소에 제대로 웃지 않고 지내던 김형이 공연 후 무대에 서서 학생들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밝게 웃었던 일입니다. 20년 무대경험에 객석이 이렇게 꽉찬 공연은 처음이라면서 형은 수줍은 듯 말했습니다.

지난해에 이어서 김형은 연출가로서 무대 위에 있을 것이고 난 무대 아래 객석에 앉아 김형의 말과 움직임들을 기록하고 의미를 찾아내는 작업을 계속할 것입니다. 『문화예술』이 내게 원고청탁을 해와 새해 벽두의 지면에 무엇을 쓸 것인가를 한동안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김형을 떠올리고 그 동안 극장 주변에서 만나 우리가 함께 이야기한 한국연극의 전망에 대해 다시금 곱씹어 보기로 했습니다. 우선 91년도 우리 연극계는 처음부터 커다란 행사준비로 요란합니다. 문화부가 올해를『연극·영화의 해』로 지정한 것을 기회로 협회는 3월부터 12월에 걸쳐 무려 일곱 개의 연극축제를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미루어 짐작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저런 협회의 발표가 오히려 요란스러움을 더합니다. 그러나 김형, 우리 연극계의 이런 모습은 그리 정직해 보이지 않습니다. 오랜 기간동안 침체된 우리연극계의 반성도 없이, 연극하는 모든 이들의 정신적, 육체적 변화 없이 올해도 똑같은 희망의 모습과 긍정적인 발전을 기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소프트웨어의 변화 ·발전 없이 하드웨어의 투자만을 기대하고 있는 것 말입니다.

김형, 최근에 두 개의 작품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우리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연극을 만들었습니다'라는 선전의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더 이상 설명 없는 연극'이라고 써서 광고 선전했던 작품이었습니다. 연극을 만드는 이들이 역사적 사명을 지닐지는 몰라도 연극을 보는 관객들은 역사적 사명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주장대로 연극이 역사적 사명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라는 연극예술의 기본적 법칙에 적합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극을 옛날 그곳의 근친상간과 존속살해 이야기로 남아있었습니다. 이 희곡의 족보가 있는 본토에서도 공연하지 않는 작품을 한국에서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역사적 사명입니까 ? 그리고 한국연극의 역사적 사명을 이렇게 다른 나라의 절판된 희곡을 공연하는 것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겁니까 ? 답답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설명 필요 없다는 연극은 오히려 관객들에게 설명을 필요로 하는 연극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이 시대의 연극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는 귀중한 기호였기 때문입니다. 이 연극이 설명하고 있는 것은 우리연극계가 왜 관객이 없고 다른 예술장르에 비하여 뒤떨어진 상태라고 언짢은 소리를 들어야 하는 가를 확인시켜 준 것입니다. 극장의 관객석은 텅 빈 채였고 별 새로운 것도, 이야기의 깊이도 없는 연극이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설명이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친절함은 이런 질문을 우습게 여기거나 그래도 괜찮다는 아주 무책임한 뻔뻔함으로 이해해도 좋을 듯합니다.

김형, 연극을 만드는 이들이 지녀야할 역사적 사명이란 도대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그리고 설명이 필요 없는 연극은 무엇입니까 ? 우리연극이 관객의 입장료로 살아 갈 수 없는 이유는 우선 그 연극이 우리의 삶과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90년대 우리 사회의 변혁과 지향은 연극의 방향과 비교 할 때 터무니없이 다르다는 점을 공연되는 작품들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외국의 연출가나 무대미술가들을 불러들여 비싼 급료를 지급하고 얻는 것은 무엇입니까 ? 18세기, 19세기 서양의 고전작품을 무대에 올려 한국연극의 수준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으려는 태도는 아주 한심한 작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그럴 양이면 아마도 아프리카 연극은 이 세상에서 가장 뒤진 미개한 연극이라고 해야겠고 서양적 연극전통이 없다는 이유로 중동의 이야기꾼 연극은 아예 연극이 될 수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연극형식을 지니고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독자가 소설이나 시 등을 읽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 그리고 관객이 연극을 보기 위해 극장에 오는 그 귀중한 발걸음의 지향은 무엇입니까 ? 연극을 생산하는 김형과 그 연극의 깊이를 재는 우리들은 이런 문제에 대하여 자신 있게 대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김형, 90년대 우리 연극은 글자 그대로 역사적 사명을 띠고 만들어서 그야말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연극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시대 삶의 아픔과 사회제도의 구조적 모순를,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얼마만큼 억압받고 있는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사회, 그 구성원의 모든 문제가 연극적일 수는 없습니다. 이는 모든 인간의 죽음이 다 연극적이지 않은 이치입니다. 즉 여러 문제들 중에서 어떤 것이 연극적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연극하는 우리들의 역사적 사명입니다. 관객을 모으는 일, 이른바 연극의 생명인 대중성을 확보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90년대 우리연극은 사실주의 연극이니, 서사극이니, 포스트모더니즘 연극이니 하는 형식논의 보다는 현재 우리의 삶과 미래의 기대들이 내용화된 연극형식이 되도록 해야할 것입니다.

김형, 90년대의 우리사회를 변혁의 시기, 위기의 시대라고들 합니다. 위기의 시대란 한자의 순서처럼 닫혀진 세계의 위험과 열려진 새로운 기회의 세계가 공존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제 김형에게나 나 나름대로의 부탁을 해야겠습니다. 90년대의 우리 연극은 계속해서 어떻게 연극을 할 것인가를 묻는 문제와 무엇을 연극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가장 긴급하고 절실한 것이 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렇게 해묵은 문제가 우리연극에 필요한 이유는 한마디로 아직까지 이런 문제조차 해결해 보고자하는 시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 연극계의 작품들은 그야말로 들쭉날쭉이고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예술로 전락한 비애를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김형이나 나나 모두 연극을 해서 먹고삽니다. 올해에는 우리들이 그래도 밥도 굶지 않고 떳떳한 예술가 소리 한번 들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