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시장 개방
김경욱 / 영화평론가
해방 이후 본격적으로 국내에 상륙하기 시작한 헐리우드 영화는 국내 외화시장을 68% 점유하면서, 거의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해왔다. 헐리우드 영화에의 종속화 현상이 심화되어 가자, 이를 주시하던 미국영화협회와 미국영화수출협회(MPEAA)는 80년대 초반부터 치밀한 시장조사를 시작하였다. 그 결과 한국의 외화시장은 새로운 황금어장이라는 판단이 내려졌다. 미 MPEAA는 80년대 중반, 한국의 대미흑자가 연각 40억 달러인 점등을 지적하면서 공정한 시장 참여 기회와 외국영화 수입개방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미국정부는 한국영화시장을 통상법 301조에 의한 불공정 무역거래로 제소하고, 한국정부에 5가지 요구사항을 내놓았다. 미국영화의 배급문제로 외국 정부·영화사와의 협상과정에서, 필요할 때는 언제나 자국정부의 권력을 끌어 들여온 MPEAA의 관례대로였다. 1985년 11월 26일에 타결된 협상결과, 스크린 쿼터제 유지와 수입외화를 일정 정도 제한할 수 있다는 단서 조항을 제외하고, 외화수입에 관련된 모든 제한조항이 사실상 폐지되었다. 영화 복사의 경우, 10벌로 제한되었던 것을 89년에는 12벌, 90년부터 93년까지 해마다 1벌씩 늘려가다가 94년부터는 제한을 없애기로 했다.
따라서 1986년 12월 31일의 6차 영화법 개정에서 외국인 및 외국법인의 제작 및 수입업 등록 금지조항이 폐지되었고, 한국에서는 외국영화의 직배가 합법화되었다. 게다가 외화수입업 등록 시에 영화 진흥공사에 내던 예탁금 7억 원을 5천만 원으로 하향 조정하되 단, 외국영화사의 국내지사에는 적용하지 않는다는 조항은 오히려 외국법인에게 더 유리한 것이다.
70여 년에 이르는 한국영화의 역사에서 영화정책은 '착오'의 연속이었다. 소재선택·시나리오 창작과정·제작 유통과정에 걸친 모순은 한국영화를 무기력한 패배주의와 얄팍한 상업주의로 몰아갔다. 그 동안 수 차례에 걸친 영화법 개정은 일부 제작자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갈수록 열악한 환경을 조성하는데 기여해왔다. 정부의 지원정책 역시 비효율적이고 극히 제한적이었다. 80년대에도 이러한 상황은 계속되었으며, 오히려 악화되기도 했다.
정부는 뚜렷한 영화진흥책이나 영화직배의 대응책 없이 영화법을 일방적으로 개정하였고, 1988년 9월 24일, UIP는 『위험한 정사』를 첫 번째 직배영화로 개봉하였다. 이에 생존의 위기를 느끼게 된 영화인들은 집단적인 '직배저지 투쟁에' 나섰다. 직배영화가 상영되기 전인 9월 17일부터 영화인들은 각종 성명서 발표, 철야농성, 서울시내 전 개봉관의 휴관, 극장점거농성, 국회 앞 시위 및 정당 농성 등의 방법을 동원하였지만, 실질적인 소득은 얻지 못했다. 게다가 제작자와 극장주의 상반된 입장과 이해관계로 인한 갈등이 표출되었다.
미국영화 직배가 점점 현실화되어가자 영화인들은 직배저지 투쟁의 한계를 인식하면서 그 방향을 영화악법 철폐와 영화진흥법 쟁취투쟁으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한국영화의 개선책으로 기획의 전문성과 과학적인 제작방식, 인적자원에 대한 투자와 기술혁신, 다른 나라에서 시행되고 있는 각종 영화 육성책의 도입 등을 제시하였다.
지난해 12월 1일, 서울 시네마타운에서 UIP의 『사랑과 영혼』이 개봉됨으로써, '직배 투쟁'역시 새로운 양상에 접어들었다.
직배영화사의 극장 잠식은 급속히 늘어나고 있는 추세로, UIP의 경우 첫 직배를 시작할 때 8개 극장밖에 확보하지 못했으나, 지난해 말에는 80여 개로 늘어났다. 이제 서울 시내 변두리 극장에서 상영되는 UIP 직배영화가 중심가 개봉관까지 잠식해 들어옴으로써, 전국적인 직배극장 체인망 구축이 눈앞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1994년 1월 1일, 복사벌수의 제한이 철폐되면 미국의 직배영화 1편이 전국의 극장에서 동시에 개봉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한국영화는 극장 잡기에 있어 오락성이 강한 외화에 밀려날 것이며 개봉관 잡기가 상대적으로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직배극장의 체인화는 배급권을 쥐고 있는 쪽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므로 미국직배영화사는 국내 극장의 스케줄을 마음대로 조정, 영화계 대목인 여름·겨울방학과 명절에는 직배영화만을 상영하도록 할 것이다. 한편, 미국직배영화사는 배급망을 장악한 뒤 해당국가의 영화배급에도 참여하고 있다. 미국직배영화사가 제작부문까지 참여하게 되면, 한국영화의 활성화 계기로 기대되는 독립PD시스템이 정착하기 어렵게 될 것이고, 영세한 영화사는 도태되거나 다른 회사와의 합작, 또는 그 영화사에 흡수될 것이다. 미국직배영화사는 합작영화를 스크린 쿼터용으로 직배극장 체인을 통해 상영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영화 산업은 제작·배급·흥행 등 영화에 관련된 모든 부문이 미국직배영화사의 수중에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UIP의 개봉관 진출과 더불어 지난해 말에는 7편의 직배영화가 한꺼번에 개봉되어 직배영화의 비중은 커져만 가고 있다. 지난해 워너브라더스·오라이언·콜롬비아 트라이스타 등 3개사가 국내 영업을 시작하여 미국영화 직배회사는 UIP·20세기 폭스 등 5개로 늘어났다.
이들 직배사는 모두 39편의 영화를 한국 시장에 내놓았다. 이것은 수입된 미국영화 139편 가운데 무려 34.5%를 차지한 편수였다. 직배영화사의 국내시장 잠식속도도 빠르게 진행되어, 지난해 총영화관객 5천 5백만 명 가운데 10%가 직배영화관객으로 사실상 미국영화 직배는 2년만에 정착단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한편, 한국 영화시장에 진출한 미국직배영화사들은 국내 영화인들의 직배저지투쟁을 의식, 각종의 편법과 전략을 동원하여 직배에 나서고 있어, '위장직배' 시비가 잇따르고 있다.
먼저, 20세기 폭스는 지사를 통해 직배를 하는 UIP와는 달리 '미니멈 개런티'라는 직배 방식을 쓰고 있다. 그것은 UIP와 함께 한국에 상륙한 20세기 폭스사가 국내영화 종사자들과의 마찰을 줄이고 현재의 한국영화 산업구조를 적절히 활용하는 선에서 마련한 일종의 전략으로, 국내 영화사나 상영극장이 20세기 폭스에 최소한의 수입 보장을 해주는 방식이다.
즉, 영화판매 로열티가 10억 원이라면 흥행수입 중 10억 원까지는 판권매입업자가 차지하고 그 이상의 수입이 따르면 양측이 다시 나머지 수입을 나누어 갖는다는 조건이다. 20세기 폭스는, 서울지역은 배급하청업체를 통해 직배를 하고, 지방에서는 단매를 하는 형식을 혼용하고 있다. 워너브라더스는 서울 시내 및 지방시까지는 직배방식을 취하고, 군 이하는 단매방식을 취하고 있다. 오라이언은 영화를 상영 기간에 맞추어 등급별로 명보극장에 배급하고, 콜롬비아 트라이스타는 국내 대행사를 통해 배급을 하고 있다.
지난해 한미 무역협상 때 미국측은 외화 복사벌수 제한 철폐와 수입심의 간소화 등을 요구하였고, 문화부는 이를 대폭 수용하기로 방침을 정하였다. 따라서 올해에는 복사벌수가 13벌에서 14벌로 늘어나고, 외국영화 수입심의도 이전의 2차에서 1차로 간소화된다. 수입업자가 원할 경우 공륜의 본심의만으로 심의를 마칠 수 있도록 바뀌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 직배영화의 '융단폭격' 앞에서 한국영화의 현실적인 대응책은 불행하게도 많지 않다. 하나의 방편으로 한국영화 의무상영 일수를 현재 연각 1백 46일(5분의 2)이상으로 규정한 스크린 쿼터제의 고수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미국 측은 한국영화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인 스크린 쿼터제 마저도 철폐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스크린 쿼터제는 85년 1차 한미 영화협상에서 양측이 합의했고, 일본·프랑스·이탈리아 등에서도 고수하고 있는 제도인데, 미국측이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에서 이 문제를 다시 들고 나온 것이다. 이제도가 철폐되면 극장측은 흥행수입만 노려 일년 내내 외화 상영할 수 있게 된다. 극장주들은 현재 한국영화 의무상영 일수를 연간 1백일 이하로 낮춰줄 것을 계속 요구하고 있다.
게다가 현재까지 한국영화의 보호를 위해 유지되고 있는 외화의 복사벌수 제한규정과 스크린 쿼터제 조차도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전국 극장을 대상으로 한 외화복사벌수 초과와 스크린 쿼터제의 이행여부를 감시하고 감독할 기구가 없는 상태에서 올해 초에 일어난 사건은 그 허점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었다.
지난 1월 8일, 문화부는 당국의 허가 이상으로 수입외화 필름을 복사, 상영토록 한 20세기 폭스 코리아를 영화법 위반으로 서울지검에 고발했다. 영화 『다이하드 Ⅱ』의 복사벌수가 16벌로 제한규정 13벌을 초과한 것이 문제가 되었는데, 정부가 국내에 진출한 외국영화사를 상대로 고발·형사처벌을 요청한 것은 처음이어서 관심을 모았다. 이에 20세기 폭스측은 지방흥행업자의 불법복사 때문이라며 국내업자들을 고발하면서 반격에 나섰다.
여기에 한국 영화시장을 둘러싼 20세기 폭스와 UIP의 이권다툼이 개입된 것으로 알려지자, 오히려 문화부가 거기에 말려든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낳았다. 게다가 국내업자들의 해외저작권 도용을 입증시키는 계기가 되는 방향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어, 처음의 취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외국영화의 수입개방과 직배에 대응하여 뚜렷한 한국영화 지원책을 마련하지 못했던 정부와 영화진흥공사는 지난 해 12월 26일 「종합촬영소 건립계획」을 확정, 91년 3월에 본격적인 공사에 착수해 92년 말에 완공할 계획이라고 발표하였다. 경기도 남양주군에 위치하게 될 종합촬영소가 완공되면, 현재 영화진흥공사 내에 있는 영화관계 자료실과 시사실도 이전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앞으로 영화인들은 자료 하나를 찾기 위해, 영화 한편을 보기 위해 경기도까지 가야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만 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한·일 합작영화가 허용되거나 직배영화가 서울중심가까지 침투한 시기에 일본영화까지 수입되면 한국영화는 더욱 열악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합작 허용보다는 기자재 확보, 영화제작 자본의 능동적 대형화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합작이 이루어질 경우, 예술성 높은 작품만 허용하는 정부의 엄격한 규제가 필요하며, 기획 ·제작 주도권을 확보하여 문화의 종속화를 막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영화의 발전에 진정으로 필요한 정부 정책은 위와 같은 '지원책'보다는, 창작의 자유를 보장하고 영화제작·배급 지원책을 확보해주는 영화진흥법을 마련하는 것이다.
외국영화 직배에 대응하여 한국영화의 수출방안도 모색되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영화의 수출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해마다 수출편수의 편차가 심하고 수출가격도 낮은 편이었다. 현재 100개가 넘는 영화제작 가운데서 수출 업무 관련 부서가 있는 곳은 10개사도 안 되는 실정이다. 최근에는 제22회 인도국제영화 견본시에 출품됐던 한국영화 20편 가운데 7편이 인도로 수출된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러나 수출가격은 작품 1편 당 평균 1만 달러 선으로 낮은 수준이었다. 한국영화의 뚜렷한 발전이 없는 상황에서 수출을 통해 현재의 어려움을 풀어보려는 방안은 다소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 물론 앞으로 꾸준히 모색해야할 과제이긴 하지만, 그러기에는 앞서 해결해야 할 한국영화의 문제가 너무도 많다.
지난해는 직배사들이 국내에서 입지를 확립한 해였으며, 6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장군의 아들』이 탄생한 해였다. 『남부군』과『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3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고, 비제도권 영화인 『파업전야』도 흥행에 성공하였다. 그런가 하면 연초 극장가에는 미국영화가 홍콩영화의 홍수 속에 개봉된 유일한 한국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가 예상외로 흥행에 성공함으로써, 한국영화를 찾는 관객이 늘고 있다는 조심스런 예측이 나오기도 했다.
올해에는 젊은 영화감독들이 막대한 물량을 투입하는 대작영화 제작을 속속 기획하고 있어, 한국영화의 '제2황금기'라는 등의 긍정적인 전망도 대두되었다. 이러한 현상을 직배의 긍정적 측면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 미국 직배영화사의 한국 영화시장의 잠식 내지는 장악을 어느 정도까지 막아내어 한국영화를 살려나갈지는 섣불리 예측하기 어렵다. 앞으로 생겨날 유선방송은 활용하기에 따라 한국영화의 발전에 기여할 가능성이 있다. 물론 유선방송의 한국영화 상영비율이 반드시 일정수준 이상으로 유지되도록 법제화시키는 작업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유선방송에 참여하는 대기업의 자본을 영화계로 유입되도록 하는 것도 긍정적인 방안일 것이다.
한국영화 편수의 급속한 감소와 외국영화의 범람 그리고 앞으로 전개될 문화산업 전반의 재편작업이 결과적으로 한국사회 문화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는 앞으로 연구되어야 할 과제이다. 그러나 문화의 종속화와 탈국적화 현상이 심화될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