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미술의 지역주의
이재언 / 미술평론가
탈냉전의 무드가 한층 더 고조되어 감을 느낄 수 있다. 엊그제까지만 하여도 적대국가로 여기던 소련과 수교를 하였으며, 소련 내의 문화 예술적 상황과 특징을 좀더 소상히 알 수 있는 계기들이 확산되고 있으니 말이다. 바로 이러한 탈냉전의 상황은 백악관과 크레믈린 당사자간의 화해 제스츄어에만 있는 것도 아니며, 크레믈린과 청와대간의 수교협정서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의 실상이 정치·외교와 같은 외형적이고 의전적인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국가간의 신뢰기반이 될 만한 문화예술 분야의 다양하고 자발적인 교류에까지 확산되었을 때, 우리는 진정한 탈냉전의 수혜자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탈냉전이라는 상황은 한 나라 국민들의 삶의 총체적인 모습일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결이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전까지만 하여도 소련의 미술은 거의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알려져 있었던 것은 기껏 20세기초의 타틀린이나 말레비치 등으로 대표되는 아방가르드 미술과 레닌·스탈린 치하에서부터 시작되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Socialist Realism)정도였다. 그리하여 소련의 정치상황 그대로 미술도 그 자체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기여하는 수단으로 밖에는 존재할 수 없었다. 서구에서의 현대미술을 형식주의 내지는 '예술을 위한 예술'의 이념을 준수하는 부르주아 미술로서 퇴폐에 다름 아닌 것으로 비난하던 소련이었기에, 그들의 미술은 오직 혁명의 도구로서만 강요되는 것이 소련의 미술상황이라고 피상적으로 전해져 왔다. 그러나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절정에 이르고 있을 때에는 개인의 화실에서 개성적인 추구가 행해졌거나, 그 표현방식이 한층 은유적이고 내재적인 방법들에 의해 개인의 자유로운 창작이 소위 그들이 말하는 '비공식 미술'로서 건재했던 것이다. 더욱이 80년대 들어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정책에 의해 그 동안 비공식 미술로만 맴돌던 것이 해외 경매시장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서, 소련의 미술은 생각보다 자유롭고 다양한 조형적 표현의 전통을 유지해 왔던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우리 나라에서도 소련의 미술을 소개하는 기회는 몇 번 있었다. 그런데 그 동안의 전람회에서 선보인 작품들은 대체로 서구에서 현대미술의 기준에 의해 선별한 소수 엘리트 작가들의 것들에 국한되어 소련 전역에서 펼쳐지고 있는 미술의 활동 현황과 민족간의 미의식 및 구체적인 방법적 전통에 대한 고찰의 기회가 비교적 적었었다. 그런데 이번에 예술의 전당 미술관에서 개최된 「소비에트 연방 회화전」은 소련 작가들의 전반적인 동시대적 미의식을 고찰하는 데 있어 많은 의의를 가질 수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번 전람회 출품작가들은 대다수 모스크바를 거점으로 한 작가들이 아니라 각 공화국을 대표할 만한(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작가들이다. 러시아 공화국이나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민스크, 코카서스 등의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로 대체로 서구현대미술의 조류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들의 삶과 전통에 입각하여 미의식을 진지하게 투영시킨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소련적 미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전람회의 출품작들에게 나타나는 '소련적'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특징을 두고 말하는 것인가 ?
첫째는 표현에 있어 사실적 형상을 바탕으로 한 리얼리즘의 전통이 곧 소련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주의적 전통은 역사적으로 비잔틴 미술의 성상(Icon)에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19세기 러시아 대자연과 영웅들의 일대기를 주제로 한 이식 레비단이나 빅토르 미스네쵸프 등의 웅대한 리얼리즘, 그리고 금세기 전반부를 장식한 억압적인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등이 그것이다. 비잔틴적 아이콘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작가군으로는 예프게니예비치, 니콜라에이치, 이오시포비치, 코노발로프, 그리고리, 페트로비치 등으로, 이들은 대체로 미의식의 원천을 러시아 정교에서 인입시키고 있는 작가들이다. 한편 레비탄이나 바네스초프와 같이 민족적 정서를 물씬 자아내는 리얼리즘 작가군으로는 알렉셰에비치, 알렉산드로비치, 바실리예비치, 이바노비치 등으로, 이들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그물망에서 빠지는 비교적 코로 풍의 전원적 사실주의 작가들이다. 물론 금세기 초 종래의 아카데미적 전통을 거부하고자 하는 아방가르드 미술운동이 활발했던 점도 있으나, 그것은 러시아 전통의 중요 부분이 곧 리얼리즘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두 번째의 특징은 제정 러시아에서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으로 이어지는 동안에도, 그 정치체계가 대단히 억압적이고 기계적으로만 예술창작에 영향을 미쳤던 것에 대한 우회적 문학성의 발달이라는 점이다. 대체로 현실의 모순을 폭로하는 데 있어 직접적이기보다는 간접적으로, 구체적이기보다는 상징적으로 전개되는 짙은 문학성을 바탕에 두고 있다. 그리하여 회화적 수사법이 상당히 용의주도한 복선에 의해 전개되고 있음을 공통적으로 느낄 수가 있다.
물론 출품작들 대다수가 비서구적인 것들로만 모여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소위 포스트모던 미술의 한 경향이라고 말할 수 있는 주체의 분열적 상황을 혼합모조(pastiche)라는 절충적 방식에 의해 표현하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물론 이 점은 지나치게 소련의 미술이 개방화 추세에 방임되어 있음을 우려 깊게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작가들은 수적으로 소수에 불과하며, 어떤 면에서는 바로 그러한 개방과 수구의 공존이 자국내 다원주의의 조화적인 국면을 강화하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 바로 이러한 점들이 오늘의 소련미술의 특징을 다양성의 통일로서 보게끔 하는 것이다. 소련미술의 다양함이란 각 공화국과 민족의 구성이 다양하다는 것이며, 또한 언어의 다양함, 역사의 다양한 교차, 표현양식의 다양함 등을 동시대 속에서 공유하고 있는 다원주의적 상황이다. 바로 이러한 지역주의와 다원주의가 종래의 극단적인 이데올로기적 종속성과 경직성을 최대로 극복하게 하는 원천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중요한 점은 우선 이데올로기의 볼모가 된 종래의 모습에서 벗어나 민족주의 혹은 지역주의, 그리고 다원주의로 재편하고자 하는 소련미술의 동향을 일부 느낄 수 있다.(이점은 소련만의 실정이 아니라 세계 각국이 모색하고 있는 현상이지만) 많은 민족과 공화국들로 구성된 소련의 경우 어쩌면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소련적이며 또한 가장 소련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고 깊이 확산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미술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 세계의 조류와 추세에만 익숙한 우리들의 눈에는 소련의 소련적인 것이 낙후된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세계 조류에만 편승한다 해서 곧 국제적인 인정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제 시대착오적인 생각일 것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일 수 있음을 우리는 88 올림픽의 많은 문화행사들에서도 절실하게 느끼지 않았던가. 결코 폐쇄적일 수 없는 한국, 한국적인 것의 모색이야말로 이 시대 미술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