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들, 그대들은 왜 침묵하는가?
안치운 / 연극평론가·중앙대강사
필자는 좋은 연극이란 우선 좋은 배우가 있는 연극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좋은 연극을 만들어야 한다면 그 책임을 제일 먼저 지녀야 할 이는 바로 배우들 자신이다. 그리고 배우는 다른 어떤 이들 보다도 좋은 연극을 만들어야 하는 환경을 스스로 지켜나가야 한다. 필자는 지난 한 해 '연기자 그룹'의 활동을 주목했다. 이 그룹의 목소리는 늘 배우들의 권익을 위해 투쟁하고 연극행정에의 참여를 당연하게 요구하는 것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한국연극에서 배우들의 몫은 오로지 무대에 올라 연기하는 것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 만큼 그 외의 일에는 소외되었다. 그러나 이 그룹의 실천은 그들의 요구와는 달리 요즘말로 하면 보합세에 불과했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예를 들면, 연극생산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들이 배우들인데, 그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몇몇 연출가와 평론가들에 의해 모든 연극행정이 결정된다는 것은 유감이다라고 말하면서도 이를 위한 후속조치는 하지 않는다. 이를 위해 뭔가를 준비하는 정책적이거나 적극적인 방법의 모색은 늘 없다. 무대 밖에서 배우들의 요구는 그들이 잠시 맡은 극중인물의 대사가 아니다. 오히려 무대 안에서의 예술가로서의 생존을 위한 절실한 버팀이어야 한다.
왜 한국연극의 배우들은 침묵하는가 ? 이런 맥락에서 최근에 일간신문의 기사에 의해 알려진 국립극장 고참배우의 재계약문제는 이 그룹의 지도부, 아니 안일한 모든 한국연극의 배우들에게 좋은 선례가 될 것이다. 이미 잘 알려진 일이므로 자세한 기록은 불필요하겠지만 이일은 한국연극의 모든 배우들에게는 예술가로서의 자존심과 생존을 건 화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간단히 말해 무대 위의 배우들을 최종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이는 누구인가 ? 사지선다형으로 묻자. 첫째가 연극평론가, 둘째가 협회대표, 셋째가 연출가, 그리고 넷째가 관객이라면 독자들은 어디를 찍을 것인가 ? 만약 이 질문을 이렇게 고쳐보자. 배우들은 과연 누구로부터 평가를 받고자 하는가 ? 침묵하는 배우들은 올바른 답을 자신 있게 고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침묵을 말과 행동으로 바꿀 수 있는 배우들은 관객을 선택할 것이다. 필자도 마찬가지이다. 수입된 1990년 판 한 홍콩영화의 선전문처럼 연극배우가 된다는 것은 무대 위에 몇 번 섰다고 온몸에 힘주고 걷고 말하며 폼잡는 것이 아니다.
『한국연극 』91년 1월호가 집계 발표한 지난 90년 한국연극의 공연작품을 들여다보면 독자들은 외국희곡 즉 번역극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혹시나 그것이 언어가 다른 나라의 연극공연인지 아니면 우리나라의 연극은 거의 모두 외국의 것을 공연해야만 하는 것인가 하고 착각을 할 정도다. 물론 이 바닥에 오래있다 보면 이런 현상이 반드시 어제오늘의 일이 아님을 고개를 끄덕이며 알 수 있다.
아이들이 입에 물고 빠는 사탕알까지 수입을 해서 판매하는 우리나라 대기업들의 졸렬한 짓을 비판할 수 있다면 우리 연극계의 외국희곡 수입전문 현상도 마찬가지의 일이다. 이는 지나치게 수입에 의존해 겉만 뻔지르르한 외형의 도색으로 자족한 나머지 자체 기술개발을 도외시하는 우리나라 기업의 생산구조와 비슷하다. 그래서 수입을 전제로 기술이전을 요구하지만 받을 수 있는 것은 이미 종을 친 한물 간 것들이다. 이런 결과는 한국연극에도 한 치의 예외가 없다. 구체적으로 보면 지난해 공연된 작품들 가운데 외국희곡이 차지하는 비율은 거의 80%가 넘는다. 그리고 이 외국산 희곡들을 산지별로 구분하면 거의 미국으로 기울어있다. 그리고 그 희곡들의 연대도 마찬가지로 18세기에서 20세기초의 것들이 대부분이다. 필자는 특히 이런 현상의 피해를 제일 먼저 받을 수밖에 없는 이들이 바로 연극의 간판인 배우들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연극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전위의 배우들이 그 영향을 제일 먼저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배우들의 피해현상은 무엇인가 ? 환자가 지나치게 약을 선호하면 결국 그 약에 중독 되어 약만이 자기자신을 고칠 수 있다는 맹신을 지니는 것처럼 외국연극을 상용하는 우리 연극배우들은 그 물량의 압도적 의존에 의하여 자기자신의 어리석음을 이해할 수 없다. 그 어리석음은, 연극배우란 무엇인가 ? 배우는 무엇을 하는 존재인가 ? 하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의 몰이해다. 따라서 이런 현상은 전통적 한국연극으로부터 물려받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 그리고 공동체적 놀이에 관한 개념이 서양연극의 물량공급에 의해 왜곡되어 왔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연극배우로서의 역할과 자기스스로를 구분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하고 있음을 뜻한다. 늘 외국연극의 작품과 내용 그리고 그 등장인물과 성격의 표현에 길들여져 있어 연극이,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모든 이들의 정서처럼, 이 땅의 육체적, 사회적, 정신적 힘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다. 오히려 연극적 세련이라는 허울좋은 가면아래 죽어있거나 길들여진 창의성을 가지고 은폐시키거나 적당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우리 연극이 그 동안 외국연극의 영향과 지배를 많이 받아왔다는 것은 당연하게도 우리 연극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는 말과 같다. 특히 그 중에서도 배우들의 문제는 심각하다. 지금까지 대다수의 연극배우들이 스스로가 빠른 속도로 다른 문화권의 연극 속에 등장하는 인물로 변신할 때, 그 무대와 극장환경을 자기의 활동범위라고 생각하였겠지만, 그러나 배우로서 스스로 자기 예술의 가치를 주장하는 힘은 상실하고 있었다. 자신감이 없이는 자기의 존재 속에 다른 역할을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자신과 역할, 자신과 관객과의 의식적 소통은 불가능해진다. 왜냐하면 그 혼자로서는 스스로 몸과 표현을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 땅의 많은 연극배우들에게는 일차적으로 연극이 배우예술이라는 자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 한국연극은 연극이란 곧 배우들의 자유와 표현이란 생각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연극의 관객들은 연극 예술의 고객으로서 더 좋은 서비스를 희망하고 있다. 이는 서양연극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난 제품이 아니라 그 제품 자체의 새로운 변혁을 말한다. 그 변혁의 주인공은 바로 배우들이다. 그래서 배우라는 직업은 위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