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기행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 순례




장정일 / 시인

문화부에서 매달 제정하는 문화인으로 지난 2월에는 송강(松江) 정철(鄭徹)이 선정되었다. 하여 문화부는 송강 정철의 달을 맞이하여 우리나라 가시문화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송강 정철을 기념하는 표석을 세우고 또 그것을 계기로 송강 문학을 애호하는 예술인, 국어학자, 언론인등 문화가족 80여명이 송강의 삶과 문학의 무대가 되는 연고지를 찾는 문화순례를 행하였다.

우리나라 가시문학의 대가로서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 시호를 문청(文淸)이라 했던 그는 1536년 한양에서 출생하여 1593년 강화도에서 세상을 떠났다. 조선 중기, 정확히는 선조 때의 사람인 그는 27세 때, 문과에 장원하여 45세에(1580년) 강원도 관찰사에 부임한 이후로 예조참판, 예조판서, 대사간 등의 벼슬을 거쳐 선조 22년(1589년)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엔 좌의정에까지 이른다. 그러나 그는 정치가로서보다는, 시인으로 더 그 이름이 높이 기억되어 왔다.

보통 그의 생애를 출사하기 이전의 유년 또는 성장, 수확기와 출사 이후의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눈다. 그의 계보에 의하면 원래 그의 일족(본관은 연일(延日))은 고려조부터 명문거족을 이루며 번영을 누려왔다. 그러나 그의 나이 10세 때 뜻하지 않은 사화를 맞아 가운이 기울었다. 하여 그가 문과 별시에 장원하여 출사하기까지 10년간은 청운의 설레는 성정을 재우며 수학에 몰두했으니, 그 때 송순, 김인후, 기대승 등 호남의 거유 아래서 시를 배우고 필봉을 공글렀으며 인격과 학문을 닦았다. 그러니까 그의 성장지 창평(昌平) 지곡리(芝谷里一現 광주시 충효동)의 성산(星山)이야 말로 그의 한 생의 향수와 동경, 분루와 연군의 배경이었고 그의 대표작 대부분이 또한 여기서 창작되었던 것이다.

어떤 지나가는 길손이 성산에 머무르면서 묻기를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말 들으시오.

인간 세상에 좋은 일이 많건마는 어찌하여 당신은

다만 하나의 강산을 갈수록 좋게 생각하여

고용하고 쓸쓸한 산 속에 들어

바깥 세상에 나가시지 아니하는고

(『성산별곡』 중에서)

그러나 어린 시절에 목도한 일가의 몰락과 아버지의 투옥은 민감한 그의 심안을 뒤흔들어 놓았고 이것이 그의 현실 생활에서는 부귀영달을 철저히 부정하게 했으며, 그의 작품 속에 산견되는 귀거래와 불가적 제행무상을 낳았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게 한다.

봉유수관(奉儒守官)은 유가( 儒家)의 본분이다. 즉 인, 의, 예, 지, 네 덕목으로 수기(修己一修身)를 이룬 자는 수기의 궁극적 목표인 이상사회 건설, 일컬어 치국과 평천하에의 사명을 짊어져야 한다. 하므로 전형적인 선비였던 그가 관직으로 나간 것은 별 특이한 일이 못된다. 그렇다면 출사와 함께 평생 동안 그를 동행한 파직, 징배, 복권의 전철 역시 그 당시 선비들이 겪던 일상사일 따름인가 ?

출사 이후의 30대 시절을 그의 전기 시절로 분류하는바, 그의 충정강개한 이름을 떨치고 문명을 드높이던 시절이었다. 또 이래 그는 이황, 심운, 이이 등과 교분 하였다. 그러나 중기로 불리는 40대부터 말기에 이르는 50대 말에 이르기까지는 크고 작은 사화와 중상 모략을 입어 몇 차례나 파직과 복권을 거듭하는데, 송강의 한 연구자는 그것이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그의 강직한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가 날렵한 정치감각을 가진 정치인이기보다는 선천적으로 문인기질을 지닌 문예인이었다고 말한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을 모르고

하늘을 이고도 하늘을 보기 어렵구나

내 마음 오직 백발만이 아나니

나를 따라 또 한 해가 가고 마누나

말년의 쓸쓸하고 허탈한 심경이 잘 표현된 이 시는, 햇빛도 쥐도 통과하지 못하고 높아서 새도 날아 넘지 못했다는 강계에 위리안치되어 있으며 쓴 시이다. 이처럼 위리안치되는 극형과 왜란을 겪었던 생의 가장 처절하던 말년에 그는 본격적으로 창작에 몰두했으니 『사미인곡』과『속사미인곡』이 그때의 작품들이다.

송강이 남긴 대표적인 작품『관동별곡』,『사미인곡』,『속사미인곡』,『송산별곡』,『장진주사』등 가사 5편과 단가 77수는 그이 작품집 「송강가사」에 실려 있다. 「송강가사」는 종래 한자어두의 형태를 탈피하여, 4. 4조의 운율에 의하여 자유자재로 우리말을 구사하였으며 그의 호탕하고도 웅장한 시풍은 가히 우리나라 가사 문학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그가 관동팔경을 보고 지었다는 『관동별곡』은 아름다운 우리나라 국토에 대한 예찬이자, 아름다운 우리말에 대한 경이로운 박문으로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진주관 죽서루, 오십천 내린 물이

태백산 그림자를 동해로 담아가니

차라리 한강으로 향해 남산에 이르고저

관원의 발길을 한도가 있는데

경치는 보고 봐도 싫증나지 아니하니

회포도 많고 많아 나그네 시름 둘데없다.

(『관동별곡』중에서)

2월 27일과 28일, 이틀간의 일정으로 이루어진 송강 문학순례는 충북 진천군 문백면 어은부락에 자리한 송강의 유택과 사당, 유품박물관 답사를 시작으로 관동별곡의 무대가 되는 강릉 경포대와 삼척 죽서루에 세워진 '송강 가사의 터' 제막이었는데, 이 표석은 종전의 일반적인 시비와는 달리 작품이나 작가를 기념하는 것이 아닌, 작품을 구상하고 읊은 터를 기념하는 것으로서, 우리나라에서 처음 세워지는데 그 의의가 있다한다. 문화부는 이러한 문학이나 미술의 산실인 터를 기념하여 표석을 앞으로 계속하여 전국에 확대실시 할 계획이다.

금번 죽서루에 세워진 '송강가사의 터'는 표석을 8각형으로 깍은 것으로 우리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있는 8방향을 상징함과 동시에 송강가사에 나오는 관동팔경과 8자를 상징하기도 하며 우리의 전통사상인 8괘를 상징하며 문학의 영원성과 우주성을 지향하는 것이다. 또 여기엔 각 면마다 『관동별곡』의 죽서루 부분, 가사의 배경, 송강의 필적, 송강의 생애와 작품, 세움 말과 세운 이 등을 기록하여 송강에 관한 작은 박물관이 되도록 하였다.

28일 오전 11시에 이루어진 이 제막식엔 이어령 문화부 장관과 김광용 삼척시장 및 건립후원자인 동양그룹 현재헌 사장 등 관계인사와 현지 문화계 인사들과 현지주민이 참여하여 사물놀이, 시조창 등의 다채로운 민속행사와 함께 축제 분위기속에서 치러졌다. 표석에 새겨진 가사배경에 이렇게 쓰여져 있다. "송강이 45세에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가사문학의 대표작인 관동별곡을 지었다. 관동 제일루라고 호칭되는 죽서루는 태백산에서 발원하여 오십 구비나 흘러 동해로 흐른다는 오십 천 물이 응벽담을 이루는 절벽 위 죽림 속에 세워졌다. 이 누각의 북쪽으로 삼척도호보 객사인 진주관과 응벽현이 있었고 남쪽으로는 연근당 서별당 등의 건물이 있었다. 선인들은 이 곳에서 절경에 취하여 많은 시를 읊었다." 이제「죽서서루」를 감상하는 것으로 송강 문학 순례를 마치자.

강 하늘에 죽서루 친상누각 되어 비추이고

하늘의 신녀 소리들이어 오건마는

사람의 아니 뵈고 산봉우리만 강상에 있어

바다 구름 다 지나가도 달빛만이 곱게 비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