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누구를 위해 있는가 ?
안치운 / 연극평론가·중앙대 강사
필자가 최근에 본 연극은 극단 「천지」의 「마지막 참회록」이다. 전직 교사가 쓰고 연출한 작품이다.
내용은 여자 고등학교에서 학생들과 교사들이 겪는 아픔을 보여주는 것이다. 급기야 한 여학생이 자살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 모든 이야기는 한 국어교사의 시선과 그의 고백적 대사로 우리 교육의 모순을 담아내고 있다. 객석에는 많은 여학생들이 있었다. 미루어 짐작하기에는 작품에 등장하는 학교에 다니거나 등장하는 배우들인 현직 교사들이 가르치는 학생들로 보였다. 극장측은 좁은 객석에다 정원이상의 관객을 몰아놓았다. 진행자는 이왕 온 손님들 모두 보아야 한다면 옆 사람과의 사이를 좁혀달라고 무려 5번씩이나 강요했다. 그 결과 공연시간 전에는 조명실에서 무대가 보이지 않아 다시금 관객을 재편성해야 했다. 무릎을 제대로 펼 수가 없고 옆 사람과 어깨가 맞붙어 이리저리 움직일 수도 없이 1시간 30분의 공연식을 견뎌내야 했다. 허리부분에는 뒷사람의 구두가 박혀 있어 관극행위는 글자 그대로 고문이었다. 무대는 교실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칠판과 책상들이 놓여있다. 연극의 진행은 시종일관 관객을 향한 교사의 설명 후 대사와 여학생들의 사진앨범에서 볼 수 있는 슬라이드를 통하여 친절하게 채워져 있다. 또한 등장인물들의 고민을 드러내놓기 위해 사용된 음악은 비감한 분위기를 주는 서양고전음악들이었고 교사들이 학교측에 항의하면서 노래를 하면서 친 악기는 북과 꽹과리, 장구 같은 풍물들이었다.
공연을 전후로 여러 일간지 문화면에서는 이 연극에 대하여 문화부 기자들과 연극평론가들이 쓴 글들이 실려있었다. '우리 교육의 모순을 확인시켜주는 연극', '전·현직 교사들이 그들이 학생들과 만든 작품' 등과 같은 글을 크게 확대시켜 이 작품에 대해 쓰고 있었다. 한결같이 좋은 연극이란 마치 좋은 내용만을 가져야 한다는 착각을 주는 글들이다. 즉 이 작품에 대한 언급은 극의 이야기만을 줄여서 소개하는 것으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널리즘의 글이든 연극비평의 이름으로 쓰여진 글이든 이런 경향은 거의 같다. 연극에 관한 글이면서 연극이 빠져있는 것이다. 필자가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이 작품의 연출가는 신문에 실린 작품평에 대하여 무척 곤혹스러웠다고 한다. 어떤 글도 작품에 대한 언급이 없고 그저 이러저러한 내용을 담고 있다라고 만 되어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작가로서 그리고 연출한 이로서 그는 연극작품에 대하여 누군가가 비평다운 비평을 해주길 원했지만 그런 글은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연극하는 이들은 연극비평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저 관객에게 이런 공연이 있다는 정보의 알림으로서, 이런 작품을 공연했다는 기록으로서만 비평을 기대하는 실정이다. 또한 관객들도 리뷰같은 글을 통하여 볼 작품을 선택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연극 비평이란 이름의 글들이 관객들이나 연극을 실천하는 이들에게 절대적 구속력을 발휘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이유는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연극비평이 전혀 연극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여기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연극의 줄거리만을 내세우는 비평은 일종의 드라마 비평이고 연극비평이라고 할 수 없다. 드라마는 단순히 글로 쓰여진 문학적 형태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연극을 연극답게 해주는 것은 바로 쓰여진 드라마의 안과 밖으로 놓여있는 요소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즉 연극의 언어라고 할 수 있는 극장과 무대공간, 오브제 그리고 관객의 수용문제들 등이다.
관객이 극장에 와서 본 이 작품의 내용은 이미 일간신문이나 방송을 통하여 국민 모두가 알고 있는 상식에 속하는 이야기다. 오늘날 우리의 교육의 문제점을 모르고 있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 그렇다면 극장에 와서까지 이런 이야기를 보도식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관객이 오는 것일까 ?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를 증좌할 것들은 많다.
우선 매년 자살하는 학생들의 수가 100명 대에 오르내리는 것이 우리나라의 교육현실 아닌가 ? 그리고 관객들은 극장에 와서 연극을 보기 전에 이미 그 내용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편이다. 문제는 알고 있는 내용을 굳이 보러 오는 것은 무엇인가에 있다. 그것은 우선 볼거리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연극의 생명은 바로 볼거리에 있다. 그것은 배우들이고 무대에 나오는 숱한 오브제들이고 이런 것들이 서로 상황과 환경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의미와 표현들이다.
필자도 예외 없이 위의 작품을 보면서 가장 힘든 일은 지루함을 참는 것이었다. 앉아있던 1시간 30분의 시간이 몇 시간으로 여겨질 만큼 심했다. 그 이유는 관객을 바보로 대하는 연극의 진행 때문이었다. 무대에 보여지는 모든 오브제는 그냥 장소를 뜻하기 위한 소품으로만 있다. 즉 무대 정면에 한 벽면을 거의 차지한 칠판만 하더라도 극장에서 단 두 번 쓰인다. 한번은 교수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가르치기 위해 시인의 이름 '이상화'를 한문으로 쓰고 지운 때와 또 한번은 방과후 교실에 남아 있던 한 학생이 낙서를 하는 때다. 그리고 주임교사의 책상과 그 위에 놓여있는 빨간색 전화도 단 한번의 사용을 위해 극이 끝날 때까지 관객의 시선에 들어온다. 무대 왼쪽 위와 칠판 옆에 받침대를 세워 그 위에 놓은 두 대의 TV 수상기도 마찬가지다. 또한 다른 벽면에는 앞으로 입시가 몇 일 남았다는 날짜의 표시도, 덕지덕지 붙어있는 각 대학의 경쟁률도 교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모방에 그치고 만다. 모든 오브제는 사실주의 무대에서처럼 실제물건으로 대체되어 있어 그 기능은 모방적이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게 되어있다. 관객의 지루함을 여기에 기인한다.
그렇다고 필자는 모든 무대의 오브제가 반드시 상징적인 것으로 되어있어야 한다는 입장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등장하는 오브제가 각 장면이 변화할 때 그리고 등장인물과 내용의 진행에 따라 변형되어 다양한 의미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관객의 몫이 있게 된다. 연극을 창조한 예술가와 관객이 만나는 가교는 바로 다양한 의미들을 읽고 해석하게 해주는 상상력이다. 연극에서 이런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오브제라고 할 수 있다. 관객은 이런 것을 통하여 작가의 투사된 욕망과 드러냄을 해석할 수 있게 된다.
위 작품은 그 모든 것을 배우의 대사에 담아 관객에게 전달하는 편이다. 그래서 관객은 늘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서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좋은 이야기도 자꾸 들으면 지겨운 것처럼 이 연극도 배우들의 말로 채워져 있어서 관객의 상상력에 말을 걸어놓는 바가 전혀 없다. 그래서 이 연극은 전혀 연극적이지 않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현대연극은 등장하는 모든 오브제와의 유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식이나 액세서리 정도로 여겨졌던 오브제가 이제는 등장하는 인물처럼 되는 것이다.
연극비평의 역할은 브레히트의 말대로 관객에게 관객이 되는 기술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래서 훌륭한 연극과 깊이 있는 연극비평은 서로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 즉 좋은 연극에 좋은 비평이 존재하고 반대로 좋은 비평은 좋은 연극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