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의 줄다리기
황루시 / 민속학자, 관동대 교수
싸움의 세계에서는 으레 이긴자와 진자가 있기 마련이다. 확실한 승부가 있다는 바로 그 점이 싸움의 매력이다. 구경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이 싸움구경이라고 한다. 그러나 구경을 해도 그냥 쳐다보고만 앉아 있다면 여간 맹숭맹숭한 일이 아니다. 어느 쪽이든 편을 들어 목이 터져라 손바닥이 불나게 응원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상대방을 야유하며 원초적 감정도 모두 발산시키며 하는 구경이라야 제 맛이 나는 것이다.
하지만 역시 구경은 구경일 따름이다. 진짜 싸움이 진미를 체득하려면 직접 싸움판에 뛰어드는 것이 백 번 낫다. 오직 이기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승부이외에는 아무 것도 남겨두지 않은 가장 순수한 상태로 들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싸움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민속놀이 가운데는 집단적인 싸움놀이가 많다. 고싸움, 돌싸움, 횃불싸움, 가마싸움 등은 아예 싸움으로 이름 지워진 것이지만 기세배 줄다리기, 쇠머리대기 등도 편을 나누어 싸우는 놀이인 것이다. 그중 한강 이남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행해지는 것은 줄다리기이다. 대개 정월 대보름에 하지만 지역에 따라서는 5월 5일 단오절이나 7월 보름 백중, 또는 추석에 놀기도 한다. 줄다리기는 집단적으로 행해지는 모든 싸움놀이 중 가장 규모가 커서 몇천 몇만 이상을 헤아리는 많은 인원이 참여한 가운데 사흘정도 걸리는 경우가 있다. 축제의 모습이 살아있는 영산 지방의 줄다리기를 중심으로 놀이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은 인구 만여 명이 사는 면소재지에 불과하지만 중요무형문화재를 두 개나 전승하고 있는 기개 높은 고장이다. 줄다리기(무형문화재 26호)와 쇠머리대기(무형문화재 25호)가 이미 30년 전 건강한 서민들의 삶이 반영된 민속놀이로서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국가의 지원아래 원형이 보존되어 오는 것이다.
영산 사람들은 줄다리기를 줄땡기기라고 부른다. 농사 잘되게 해달라는 기원을 담고 해마다 정월대보름에 놀던 줄땡기기를 3월 1일로 바꾼 것은 오늘을 사는 후손들에게 역사의 교훈을 일깨워 주려 함이다. 삼일절은 기미년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라는 수치스러운 역사를 씻기 위해 온 겨레가 항쟁을 시작한 날이다. 영산에서는 마을의 선구자 구중회씨 등 23명이 청년결사대를 조직해서 결의문을 낭독하고 대한 독립만세를 불러 이른바 영산 삼일운동을 일으켰다. 이 운동은 학생과 장꾼, 민중들에까지 퍼져 총알을 맞고 옥고를 치르는 등 많은 희생자가 났지만 인근 함안 등지까지 파급되었고 영남지방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만세운동이라는 점에서 주민들의 자랑이 되어오는 것이다.
영산은 마산에서 30분, 대구에서 한시간, 부산에서 한시간 반쯤의 거리에 있다. 대대로 벼와 보리를 심어 왔으나 요즈음은 양파와 땅콩이 주산물이다. 영산은 서리, 성내, 교리, 동리 네 개의 자연마을로 나뉜다. 이중 교리와 성내가 동편으로, 동리와 서리가 서편이 되어 동서 양군으로 나뉘어 싸움을 벌이는데 동군이 숫줄이고 서군이 암줄이다. 편 나눔은 줄을 땡기는 당시의 거주지로 정해지지만 일단 편이 갈라지면 부자지간 형제지간이라 해도 추호의 양보가 없이 놀이에 임한다고 한다.
원래 영산의 줄땡기기는 머슴들이 주관한 놀이였다. 황시라고 부르는 머슴들의 우두머리가 부농들의 협조를 얻어 짚을 모으고 풍물과 여러 깃발을 마련하는 한편 자작농 중에서 각각 양군의 지휘자인 대장, 중장, 소장 3명씩의 장수들을 뽑아 놀이를 벌였던 것이다. 줄다리기가 벼농사의 산물인 만큼 힘써 농사짓는 사람들이 놀이의 중심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짚은 각 마을에 할당하고 줄을 꼬아 오게 한다. 하지만 주관처는 60년대 발족한 「3.1 문화합상회」로 바뀌었고 문화재관리국이 후원하고 있다. 또한 놀이장소였던 드넓은 보리밭이 사라져 영산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놀이를 하는데 그 때문에 줄의 규모가 크게 줄어든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영산 줄땡기기는 3월 1일부터 사흘동안 벌어진다. 첫날은 초등학생들의 골목줄다리기와 서낭대 싸움, 쇠머리대기 시합이 벌어지고 둘째 날은 줄을 만들고 마지막날 줄을 당긴다. 이 기간동안 영산 마을은 축제의 공간으로 바뀐다.
하늘에서 오색 깃발과 풍선이 펄럭이고 새 옷 갈아입고 한 손에 푸른 잎이 달린 대가지를 하나씩 든 사람들이 풍물가락에 맞추어 춤추듯 오가는 가운데, 전국에서 몰려든 장사치들이 좁은 골목을 더욱 비좁게 만들면서 목청껏 떠드는 난장판이 벌어지는 것이다.
영산 줄땡기기는 소규모로 동네 아이들이 골목에서 하는 골목줄다리기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정월 초순께부터 아이들이 집단이나 새끼나부랑이를 모아 두발 남짓한 줄을 만들어 장난 삼아 당기는 것이다. 이러한 장난이 날이 갈수록 커져 줄도 굵어지고 당기는 인원도 수백 명으로 늘어나다가 마침내 대보름이 가까워지면 어른들이 가세하여 큰 줄이 되는 것이다. 아이들은 줄을 메고 놀다가 대장이 줄목위에 올라가 상대방을 쓰러트리는 이 싸움도 하면서 초승달이 둥근 보름달로 차 오를 때까지 매일 밤놀이를 벌였다고 한다.
운동장에서 초등학생들이 하는 골목줄다리기가 끝나면 서낭대 싸움이 벌어진다. 서낭대는 약 10미터 가량의 대나무에 흰 베로 옷을 입히고 색색의 기를 매단 것인데 맨 꼭지에는 꿩깃을 한 묶음 꽂았다. 마을을 지키는 신체임이 분명하고 옛날에는 무당이 서낭을 모셔 신을 올렸다고 하는데 지금은 서낭대 싸움만 전승되고 있다.
서낭대 싸움은 힘 좋은 장정 다섯 명이 붙어 상대편 서낭대를 넘어뜨리거나 부러뜨릴 때까지 격렬하게 행하는 젊은이들의 놀이다. 주위에는 영기를 흔들면서 응원하는 사람들이 멈출 줄 모르는 풍물의 장단이 얽혀 싸움은 볼 수가 없는데 갑자기 '서군 이겼다' 함성이 들린다. 그러나 곧 이어 '동군 이겼다' 더 큰 목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서로 이겼다고 주장하는 가운데 싸움이 끝난다.
소나무와 새끼를 이용하여 추상적으로 싸움 소의 형태를 만들고 그 머리 위에서 양군의 장수들이 싸움을 벌이는 쇠머리 타기는 전투적 기상이 늠름한 놀이이다. 마을 앞뒤에 있는 영축산과 함박산이 신의 모습을 하고 있어 이를 누르기 위해 벌여왔다는 쇠머리 타기는 흉년이 들어 짚을 구하기 어려운 해에 줄땡기기 대신으로 행했다고 한다.
영산의 줄땡기기는 어마어마한 규모로 유명하다. 지금은 크게 축소되었다는 데도 암줄 숫줄의 길이가 각각 40미터가 넘는다. 마을마다 엮어온 30가닥의 줄을 한길에 펼쳐놓고 일 미터쯤 간격을 두고 엮은 후 멍석을 말 듯 동그랗게 만다. 단단하게 말아지면 반으로 곱쳐서 줄목을 내고 둘을 맞붙여서 목줄을 만드는데 암줄목은 아주 크게 숫줄의 목이 들어갈 수 있도록 잡는다.
줄땡기기가 벌어지는 운동장으로 줄을 운반한 뒤 암줄 목 속으로 숫줄목을 넣고 나무목으로 비녀 지르듯 질러 고정시킨다. 마치 성적 결합을 상징하는 듯한 이 모습은 풍요를 기원하는 소박한 정성의 반영일 것이다. 이어서 줄땡기기가 시작된다. 몸줄은 너무 커서 당길 수 없으므로 사람들은 50㎝간격으로 양옆에 매어놓은 젖줄에 매달린다. 젖줄 하나에 서너 사람씩 붙게되므로 줄 하나에 적어도 천여 명이 한데 엉겨 당기는 셈이다.
'위이야차, 위이야차' 장군들의 힘찬 구령에 맞추어 양군은 줄을 땡긴다. 넓은 운동장에 구경꾼은 각지 사람들뿐이다. 남녀 가릴 것 없고 어른 아이 모두 합세하여 줄을 당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이야차 위이야차' 양군은 서로 팽팽하여 줄은 꼼짝도 하지 않는 것 같다.
마침내 총소리와 함께 줄다리기가 끝난다. '와 이겼다. '와 이겼다' 고함소리가 드높다. 서군 동군은 서로 자기네가 이겼다고 우겨대며 환호한다. 그러나 시합이 끝나자마자 톱을 들고 달려든 사람들은 모두 암줄인 서군의 젖줄을 잘라간다. 생산의 주체인 여성의 줄을 잘라 지붕 위에 얹어 놓으면 일년 내내 재수 있고 풍년이 든다는 믿음이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