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리뷰 / 문학

종말론적 상상력




남진우 / 문학평론가

8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 수입 개봉된 외국영화 중 특히 미국영화를 생각해보면 미래사회를 그린 공상과학(SF)물이 상당히 많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E.T』나 『크로스 인카운터』,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 시리즈 등이 일차적으로 머리에 떠오를 것이고,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거기 덧붙여 『매드맥스 썬더돔』,『뱀파이어』,『터미네이터』,『에어리언』,『런닝맨』,『로보캅』,『백 투더 퓨처』,『토탈 리콜』 등의 영화를 기억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들 SF물은 서부극, 뮤지컬, 액션물, 공포물에 이어 혹은 이들과 함께 상업영화의 본산지인 할리우드가 발굴 발전시켜 톡톡히 재미를 본 영화장르로써 미래사회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을 적절히 자극하는 한편 현 사회의 어둡고 밝은 면을 과장되게 투사해서 보여주는 거울 역할을 떠맡고 있다.

이 영화들은 광활한 우주공간에서 인간과 정체불명의 위협적인 외계 생명체 사이에 벌어지는 싸움을 그리기도 하고, 테크놀로지가 극도로 발달한 결과 야기되는 재앙을 그리기도 하고, 문명이 완전히 파괴된 후 다시 도래한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야만적인 폭력사회를 그리기도 한다. 컴퓨터·타임머신·사이보그·우주선·홀로그래피 등 첨단 과학문명의 발명품들이 배경을 이루고 있지만 거기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물질문명의 발달에 비례해서 보다 고차원적으로 진화한 인간의 영혼이나 정신의 교류가 아니라 가장 저열한 욕망과 힘의 논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겨울 정도로 온통 미국식 낙관주의와 보수적 센티멘탈리즘으로 포장되어 있는 『E.T』류의 청소년용 영화를 제외할 경우 뛰어난 SF영화들-우리나라의 경우 극장에서 정식 개봉되진 않았지만 비디오나 TV 외화시간에 소개된 데이빗 크로넨버그의『비디오드롬』이나 테리 길리엄의 『브라질』, 리들리 스캇의 『블레이드 런너』를 손꼽고 싶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특징 중의 하나는 미래를 극히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 영화에서 미래사회는 악몽속의 풍경(landscape of nightmare)과 흡사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초현대식 빌딩으로 가득한 미래의 도시는 어느 순간 쓰레기와 고철더미로 뒤덮인 폐허로 돌변하며 인류에게 무한한 행복을 약속해 주는 황금열쇠로 여겨졌던 과학문명은 일순간에 전세계를 파멸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을 수도 있는 악마의 미소를 띠고 있음이 드러난다. 인간성의 타락, 법과 질서의 붕괴, 핵전쟁의 위협, 환경오염, 인구의 과잉, 폭력에 기초한 권위주의적 정부의 전횡 등 우리 주변에 상존 하고 있는 부정적 요소들이 극대화되어 지구 최후의 날의 광경을 관객 앞에 펼쳐 보여주곤 하는 것이다.

금세기의 여러 학자들이 누차 지적했듯이 현대자본주의의 물상화된 세계는 점차 그 속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을 초월할 수 있는 유토피아적 의식을 상실한 채 거대조직 속의 한 나사에 불고한 순응적 존재로 전락하게 만들어버린다.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의지가 박제화되고 보다 아름답고 바람직한 내일을 꿈꿀 수 있는 상상력이 마비된 사회-그러한 세계는 참으로 공포스러운 것임에 틀림없다. 이처럼 80년대에 미국에서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SF물, 이른바 뉴 할리우드영화에 나타난 디스토피아적 세계상은 우리로 하여금 단순한 흥미를 넘어선 진지한 성찰을 유도하는 점이 없지 않다. 이들 영화에 나타난 암울한 비전과 이미지가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것은 비록 많은 왜곡과 과장이 섞여 있긴 하지만 이미 후기자본주의사회의 문턱에 발을 들여놓은 우리의 의식 한편에 도사리고 있는 위기의식 혹은 존재의 불안감을 날카롭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는 미국과는 전혀 다른 역사적 경로를 밟아왔으며 상이한 경제적 토대를 가진 나라이기 때문에 쉽사리 이 둘을 동일화하는 것은 오류이거나 문화사대주의의 일종이라는 것은 오류이거나 문화사대주의의 일종이라는 반론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영화에 나타난 부정적 미래사회상이 우리에겐 낯선 먼 나라 먼 훗날의 이야기만은 아니며 어느덧 우리 자신의 문제로 박두해오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가장 선진적인 도시감각을 자랑하는 젊은 작가 장정일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자유주의/사회주의나 보수/진보라는 이분법적 준거점과는 다른 차원에서 우리가 몸담고 살고 있는 세계를 보고 읽으려는 관점이 우리 사회에 실재하고 있음을 확인케 해준다.

기존의 상상력과는 틀리는 한시대의 시기구분으로서의 '세기말적 상상력'이 있으리라고 여겨졌다. 나는 이 작품집에서 우리 시대의 세기말 징후를 포착해 보이려고 했다.

-『아담이 눈뜰 때』 서문

위인용에서 장정일이 말한 세기말은 단순히 현시점이 20세기의 마지막을 몇 년밖에 남겨두고 있지 않다는 연대상의 의미만을 지시하고 있지는 않다. 우리사회, 나아가 이 세계가 질적인 변화의 와중에 있으며 여러 층위에 걸쳐 거대한 지각변동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변화 내지 변동이 긍정적인 방향이 아니라 부정적인 쪽으로 치닫고 있으며 그러한 파국을 막을 수 있는 어떠한 길도 찾을 수 없으리라는 예감, 이러한 것들이 위인용의 배면에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우리의 의식과 정서를 사로잡아왔던 일직선상의 발전 이데올로기가 파탄에 이르렀음을 나타내는 징조인 것이다.

지난 60년대 이후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것은 군·관료·재벌집단이 중심이 되어 적극적으로 설파한 근대화 이데올로기와 그에 대한 대항이념으로 사회일각에서 조심스럽게 제기된 사회주의 이념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 둘은 상호 대립적인 논리와 지향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점에선 정확히 일치했다. 그 일치점이란 이 두 이데올로기가 모두 계단식 진보의 역사관에 얽매여 있다는 점이다. 생산성의 발달에 기초한 문명의 무한한 진보라는 개념은 이데올로기적 차이와 국경을 넘어서 전 세계를 풍미한 20세기의 아니 근대의 최대 최고의 신화였다. 그런데 이제 그 신화가 서서히 빛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밖으로는 60년대 후반 서구 자본주의 진영이 한차례 거세게 몸살을 앓고 난 뒤 80년대 후반 동구 사회주의 진영이 피폐하기 이를 데 없는 몰골을 드러냄으로써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재촉했고, 안으로는 4·19 이후 혁명과 반혁명의 물결이 교차하며 첨예한 대치국면을 지속해오다가 87년 6월 항쟁다음부터는 긴장의 강도가 늦춰진 가운데 몰가치적 이념의 혼란, 진공상태가 두드러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요약하면 현재 세계가 당면한 위기상황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며 우리 사회가 내보이고 있는 부정적 측면들은 과도기적인 일시 현상이 아니라 총체적 재난이 임박해 있음을 알리는 경고의 성격이 짙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장정일의 '세기말적 상상력'이란 어휘를 '종말론적 상상력'으로 교체하기를 제안하고 싶다. 이는 현재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각종 위기들이 세기말이란 단어가 갖고 있는 시대적 한계를 넘어선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어쩌면 '역사'라는 개념자체의 폐기를 불러올지도 모르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에서이다.

그런 점에서 시대의 피뢰침이라 할 수 있는 작가와 시인들이 예민한 촉수를 뻗쳐 포착한 우리사회의 종말론적 징후들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표식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