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리뷰 / 전통

지방화 시대와 지역전통문화




주강현 / 민속학자·서울여대 강사

시계바늘을 조금 돌려서 전통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과연 당시의 문화는 거개가 지역문화였음을 실감할 수 있다. 교통이 불편했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전통문화의 실체는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권에 토대를 두었다. 남사당패나 사당패, 솟대쟁이패 등 유랑예인집단이 각지를 떠돌며 연행을 팔았고, 관에서 주도하는 상부문화구조들이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이 향유한 문화는 지역적 현실과 처지에 부합되게끔 변화 발전을 거듭해 온 것이다. 그러나 일제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지역전통문화라는 개념은 약화·소멸을 면치 못하게 된다. 바로 지역문화의 주체인 지역민들의 문화생산력이 극도로 약화된 탓이다.

사회의 제 영역이 중앙으로 집중되는 한, 문화라고 예외일 수 없을 것이다. 특이나 대중매체의 압도적인 영향아래 일괄 "공급되는 문화"를 받아들이고 흉내내는 현상은 비단 우리나라의 경우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별다르게 뾰족한 대안 없이 지역문화의 활성화만을 부르짖는다고 일거에 해결될 사안도 아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지방자치제가 잘 정착된 나라일수록 문화의 지역적 주체성이 강하게 살아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어차피 지역적 차이를 뛰어넘어 전국적으로 통용되는 문화개념이 일반화되는 추세속에서 지역 자생의 문화를 찾는 노력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가장 지역적인 문화야말로 가장 세계 적인 문화이다'라는 주장이 가능하듯이 '가장 지역적인 문화야말로 한 나라의 문화를 대표할 수 있는 문화이다'는 주장도 가능할 것이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전통문화들의 거개가 지역적 삶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이다. 가령, 김치는 한국인이 발명한 매우 뛰어난 발효식품으로 전국 어디서고 김치를 먹는다. 그렇다고 해서 전국 어디서고 김치 맛이 획일적으로 같다면 매우 무미건조한 식생활이 되었을 것이다. 바로 각각의 지역적 현실 속에서 젓갈을 주재료로 한 김치도 나오고, 백김치도 나와서 다양성속의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김치는 똑같은 김치도 맛은 모두 다른 김치로 되어 있으며, 그러면서도 여전히 한국의 김치라는 점에서는 전국의 김치문화가 한가지로 통일되는 것이다.

새삼스레 지방화 시대의 도래와 이에 따른 지역전통문화라는 과제를 거론하고 있으나, 그 전에도 이러한 문제제기는 수없이 있어 왔다. 문제는 각 지역에서의 지역문화정책에 관여할 수 있는 문화주체들이 약했다는 점이다. 가령, 오늘날 전국적으로 행해지는 이른바 향토문화제의 현상을 찾아가 보면 어디서나 으레히 끼어 드는 레퍼토리를 늘어 놓기식의 구색 맞추기 문화제가 대종을 이룬다. 민속놀이 경연대회라는 장치를 통하여 발굴된 지역전통문화가 다수 있지만, 바로 그 지역 생활에서 어떤 영향을 행사하는 경우란 좀처럼 보기 힘들다. 물론 지역에 따라서는 전래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전통문화들이 중심을 이루면서 다양한 문화요소들이 이입되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곳도 있으나 기실 손가락에 꼽을 정도이다.

따라서 지방자치제의 도래와 더불어 전통문화 분야예서 당장 시급히 해야할 일은 '지역 고유의 성격'을 지닌 문화를 옳게 세워나가는 일이다. 이 점은 '지역의 유구한 전통에서 비롯된 민족 문화적 형식'을 초월해서 '지역적 삶의 현실을 그리는 내용'을 결합한다는 대원칙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가령 제주도 전래의 생활과 풍습에 기초를 둔 문화를 세워나가면서 이를 전승시키려는 노력과 더불어, 이에 기초하여 제주도의 현실에 맞는 새로운 창작을 생산해내려는 노력이 동시에 요구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전통문화를 옳게 세우는 노력은 여전히 긴급을 요하는 과제인지도 모른다. 이는 우리가 지난 시간동안 나름대로 노력을 하여 다시 복권시킨 많은 전통문화들 조차 소멸·변질을 거듭하고 있다는 저간의 판단에서 비롯된다. 급격한 산업화의 진전과 더불어 전래의 전통문화들 역시 급격한 변화의 물줄기 위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30년만에 살아난 '풀뿌리 민주주의'니 하는 말들이 많이 오가는 처지에 '풀뿌리 민족문화유산'을 지켜내려는 노력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우선적으로 지역단위에서 지역의 전통문화유산들을 정리하고 지표를 만드는 노력이 사전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다행히 중앙의 문화기관들이나 지역소재의 대학연구기관, 각 군 단위 문화체계가 잘 결합하여 다양한 민족문화유산 지표조사 보고가 다수 나오고 있는 좋은 사례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 지역지표조사들이 충분한 양은 못된다. 현재 이 시점에서도 많은 지역의 민족문화유산들이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소멸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러한 결과들도 그대로 활자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역 전통문화의 중심축을 세우고 노력으로 연계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그러한 결실은 지역에서 일상적으로 살아오면서 현실의 자기문제로 인식하는 사람들의 열성적인 노력이 담보되어 지역사회로 환원되어야 할 것이다.

가령 서해안 일대에서 대대적인 간척사업이 진행되면서 지역 전통 문화의 소멸이라는 결과도 낳고 있다. 좁은 국토에서 땅을 넓히기 위한 노력은 현실적으로 중요한 과제임에는 틀림 없으나 바다가 뭍으로 되는 현실속에서 그나마 좋은 어업민속들을 지녀왔던 마을들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 칠산어장의 위도띄뱃놀이 현장을 방문해보면 고기가 잘 안 잡혀서 큰배들이 떠나버린 관계로 전승놀이가 근근히 명맥만을 유지하게 끔 되어버린 현실을 마주칠 수 있다. 그러한 면에서는 그간 향토축제라는 이름으로 각도에서 한 개 지역씩 표본으로 설정하여 보존육성을 하여왔던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이제는 지방자치화에 따른 새로운 주체들이 해야될 의무가 생긴 것이다. 바로 자기 지역의 삶과 현실을 가장 잘 아는 이들이 주인이 되어 각 지역마다의 유구한 역사적 전통을 지니는 전통문화를 발굴하고 보존 계승시키려는 노력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그러한 면에서 '지방화시대'는 전통문화에서도 지역적으로 풀어야 할 과제가 많음을 보여준다.

서울 같은 대도시라고 예외는 아니다. 과연 서울 천도 600주년을 앞두고, 어디에 내세울 만한 서울지역 특유의 문화유산이 곳곳에 다수 남아 있는가를 살펴보자. 향토축제로 지정된 남이장군대제 등이 전해지고는 있지만, 충분하다는 답변은 나오질 않는다. 이점은 대도시에도 여전히 전통축제가 전승되는 일본의 경우와 대비된다. 일본인들이야 남의 나라를 침략하여 타민족의 문화를 파괴하는 데는 일익을 담당했지만 자기들 문화유산만은 잘 간직하려는 전통적인 관점이 강한 민족이다. 따라서 우리 같이 많은 전란과 외세의 침입으로 어려운 처지를 겪은 나라에 있어서는 그들보다도 몇 배 어려운 고통을 거쳐야만 겨우 온당하게 우리의 전통문화를 옳게 세울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본다. 현재 각 지역에 마을단위로 남아있는 마을의 전통문화들 중에는 여전히 많은 잠재적 요소들이 존재하고 있다. 가령 현재도 전국 어디서고 마을굿은 다수 실재하고 있고, 마을공동체 문화의 중심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장승, 솟대, 당산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복합문화제와 마을풍물패의 존재는 현재 전국에 걸쳐 가장 많이 살아있는 전통문화유산일 것이다. 지방자치제가 지역전통문화에 주는 의미도 지역의 산적된 수많은 문제들 중에서 작은 문제이긴 하지만, 바로 이러한 '주목받지 못한' 지역문화 자산도 잘 이해하여 문화적 자생력을 세우는데 일조 해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지방자치의 승패는 비단 정치와 경제에서의 영역만이 아니라 문화에 있어서도 지역문화를 옳게 세우려는 노력에 주어진다. 현실적으로 다양한 지역문화 중에서 전통문화만이 지역문화의 모든 중심이라고 주장할 필요는 없겠지만, 전혀 자기 지역의 특색 있는 전통문화가 맥을 못 춘 채, 전국의 획일적인 문화를 가져다가 동어 반복하는 지역문화는 무언가 '뿌리 없는 문화'라고 단언을 내릴 수 있는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