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문화 공간

스트라스부르 국립극장




이재형 / 번역 문학가


우리가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을 통해 희미하게나마 기억하고 있는 알자스 로렌 지방, 스트라스부르는 그 알자스 로렌 지방의 주도(州都)이다. 파리에서 기차를 타고 4시간쯤 달리면 도착하는 스트라스부르는 인구 40여만의 중소도시로서 라인강변에 자리잡고 있어서 석탄과 철강산업이 특히 발달해 있다.

라인강은(스트라스부르에서 라인강을 건너면 독일 영토이다) 스트라스부르 시내를 휘감아 돌며 운하를 만들었고, 도시는 이 운하를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미 14∼5세기부터 형성된 도시의 흔적은 아직도 '작은 프랑스(La Petite France)'라는 이름으로 잘 보존되어 있어 많은 관광객을 끌고 있다. 이 '작은 프랑스' 주변에는 시장이 하나 둘씩 들어서기 시작했고, 시장이 서는 날이면 많은 인파 앞에서 갖가지 형태의 많은 해프닝 중에서 시민들의 가장 큰 관심과 호응을 받았던 것은 귀족을 풍자하는 형태의 소극(笑劇)이었다. 소극의 공연은 순회극단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공연은 억눌리고 핍박받던 민중들의 야유와 욕설과 환호 속에서 열을 띠곤 했다.

그 이후로 도시 자체가 커지고 행정 조직이 정비됨에 따라 그같이 무질서하게 야외에서 공연되던 연극들은 시립극장(le Théâtre municipal)의 통제를 받게 된다. 흔히 '오페라좌'로 불렸던 이 시립극장은 연극뿐만 아니라 오페라, 오페레타, 음악회 등등의 온갖 공연을 도맡았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장르를 한꺼번에 포용함으로써 조직이 비대해지고 운영도 방만해질 뿐만 아니라 연극이라는 장르의 독립성을 지키려는 연극인들의 요구가 점증함에 따라 1946년 12월에 「프랑스 동부지역 연극센터」가 만들어지면서 연극은 시립극장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된다.

결성 초기에는 알자스 로렌 지방의 주요 도시들(스트라스부르, 콜라르, 뮐루즈, 메츠, 아그노)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형태였던 이 「프랑스 동부지역 연극 센터」는 1968년 당시 문화부 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의 결정에 따라 「스트라스부르 국립극장(Théâtre National de Strasbourg)」으로 명칭과 운영 방식을 바꾸면서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이 같은 결정에 따라 「스트라스부르 국립극장」은 공공기관의 지위를 획득하면서 도시통합체의 성격을 버리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자율성을 얻게 된 것이다.

그 같은 획기적인 전환 이후로 「스트라스부르 국립극장」은 스트라스부르 뿐만 아니라 알자스 로렌 지방 일대의 연극 활동을 주도하고 있다.

스트라스부르 시내의 중심가라고 할 수 있는 알드레 말로가(佳) 1번지에 자리잡고 있는 「스트라스부르 국립극장」은 2층 석조 건물로 되어 있다. 레퓌블리크 광장에 면해 있는 건물 정면으로는 음악학교가 1층과 2층을 차지하고 있으며, 지하에는 대극장(la grand Salle)이 자리잡고 있다. 모두 730개의 좌석을 가지고 있는 이 대극장에서는 고전극을 위시한 큰 규모의 작품들이 주로 공연된다. 건물 좌측의 1층에는 예약 사무실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지하에는 위베르 지수(Hubert Gignoux) 소극장이 있다. 이 소극장에서는 팬터마임이나 모노드라마 등 소규모의 작품이 주로 공연되는데, 연극의 규모나 무대의 크기에 따라 100∼120석의 좌석이 설치된다. 건물 좌편에는 연극학교와 극장 사무실이 1, 2층을 차지하고 있다.

「스트라스부르 국립극장」의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이 국립이라는 점이다. 프랑스에는 모두 5개의 국립극장이 있는데, 그 중에서 4개는 파리에 집중되어 있고, 「스트라스부르 국립극장」은 지방에서는 유일한 국립극장이다. 그러나 주목해야 될 점은 여기서 말하는 '국립'이라는 개념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것과는 영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다. 즉「스트라스부르 국립극장」은 예산 편성과 집행에 있어서만 문화부의 감독을 받을 뿐 극장 운영이나 레퍼토리 선정, 극의 내용에 있어서는 국가의 영향을 조금도 받지 않는다. 극장에 소속되어 있는 직원들도 물론 공무원의 신분은 아니다.

「스트라스부르 국립극장」의 지난 1990년도 예산은 3천 6백만 프랑(한화로 치면 약 40억 원)으로서 그 중에서 80% 정도인 2천 8백 프랑(한화 약 30역원 정도)은 문화부에서 보조금 형태로 지불되었다. 거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의 많은 보조금을 지불하면서도 국가는 「스트라스부르 국립극장」에 대해 거의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는다. 예산 보조를 이유로 문화부가 검열을 한다거나 인사(人事)문제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해 극장 책임자인 망셀씨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딱 한 번 문화부에서 간섭 비슷한걸 한 적이 있는데 그런 몰리에르의 작품 「인간 혐오자」의 공연 횟수를 조정해 달라는 정도였다"라고 말하며 '국립극단'으로서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누누이 강조했다.

「스트라스부르 국립극장」은 1974년까지만 해도 꼬르네이유, 라신느, 몰리에르의 작품을 중심으로 하는 고전극의 상연에 치중한 편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전통은 1975년에 장-피에르 벵상(Jean-Pierre Vincent)이 극장 책임자로 일하면서부터 바뀌게 된다. 그는 고전작품들이 과거의 그늘에서 벗어나 현재의 시각에서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한편으로 현대 작품들을 무대에 올리기 시작했다. 미셀 푸세(Michel Foucher)의 「테이블」이나 「재판소」같은 작품들은 그 같은 방향전환의 산물이다.

장-피에르 벵상은 또한 공연 장소를 야외로 옮겼다. 브레히트의 「바알」은 스트라스부르 시내의 한 관장에서, 「렌쯔」는 대성당 앞의 빈터에서 상연되었다. 또한 그는 다른 지역이나 국가의 극단들을 초청하는 횟수를 늘림으로서 이곳 관객들에게 다양한 연극을 관람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 사람이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스트라스부르 국립극장」의 발전에 기여한 것은 장-피에르 벵상의 후임인 자크 라쌀(Jacques Lassalle)이다. 1983년에 부임해서 7년 동안 일하다가 지난해 「코미디-프랑스제」로 떠난 그는 관객들을 극장으로 끌어들이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다. 그는 스케일이 큰 작품들을 대담하게 무대에 올리게 함으로써 선전 효과를 노렸고, 이 같은 예측은 적중해서 관객 수가 대폭 증가했고 대부분의 작품은 장기 공연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스트라스부르 국립극장」은 매년 9월에 첫 공연을 시작해서 다음 해 5월에 마지막 공연을 끝내고 있다. 9개월 동안의 공연 기간 중에는 매월 2편∼4편씩 20∼25편 정도의 작품을 공연한다. 공연작품과 일정은 9월의 첫 공연 이전에 이미 확정된다. 한 작품은 보통 15∼20회씩 공연되며, 「스트라스부르 국립극장」에서의 공연이 끝나면 지방 도시를 순회하거나 외국의 초청을 받게 된다.

1990년 9월∼1991년 5월 동안에 공연되었거나 공연 예정인 작품은 다음과 같다.

·1990년 9월-「조조」(뮤지컬), 「시장패거리들」(현대극)

·1990년 10월-「멜리트」(꼬르네이유), 「마드모와젤 마리」(번역극)

·1990년 11월-「망명자들의 대화」(브레히트), 「우리가 죽은 자들 사이에서 깨어나면」(입 센), 「안녕, 대양이여 !」(번역극)

·1990년 12월-「베를린」(통독을 다룬 현대극), 「한 젊은 의사의 이야기」(소련 현대극)

·1991년 1월-「스나가렐」(몰리에르), 「레옹 라 프랑스」(현대극)

·1991년 2월-「세기말」(오스타 와일드), 「거짓이야기」(마리보)

·1991년 3월-「이피제니」(라신느), 「아나벨리와 지나」(현대극)

·1991년 4월-「그리발디 광장 1번지」(현대극), 「한 극단주의 기묘한 아픔」(호프만), 「애무」(현대극)

·1991년 5월-「농부의 죽음」(독일 번역극), 「프랑시스」(현대극)

「스트라스부르 국립극장」은 전속 극단을 보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공연은 「국립청년극단」,「유럽극단」,「깡 극단」,「바스티유 극단」,「에티엔느 포므레 극단」,「앙제르 신극단」,「코미디-프랑세즈」,「르노-바로 극단」,「캉파플 극단」,「리용 극단」등 국립극단과 시립극단의 참여 하에 이루어지고 있다. 이들 극단들은 공연 1개월 전부터 스트라스부르에 묵으면서 주로 오후 시간에 리허설을 함으로써 공연에 완벽을 기하고 있다.

망셀씨에 따르면 「스트라스부르 국립극장」의 관객 숫자와 입장 수입은 매년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데, 그는 그 같은 증가의 원인을 홍보 강화와 예약 제도 확대, 작품성의 제고 등에서 찾고 있다.

예약제는 여러 가지 종류로 운영되고 있다. 우선 개인은 여섯 작품을 450프랑에 예약할 수 있는데, 그 경우 210프랑이 할인된다(정규 요금은 한편 당 110프랑이다). 단체의 경우에는 (10인 이상) 여섯 작품을 360프랑에 볼 수가 있다. 또한 학생의 경우에는(대학생을 포함한다) 세 작품들을 150프랑에 관람할 수가 있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예약제가 있다.

요금 체계는 물론 좌석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난다. 1층과 2층의 맨 앞좌석은 1인당 110프랑이며, 2층 정면 좌석은 70프랑, 2층 측면 좌석은 55프랑이다(대극장의 경우). 야외공연의 경우 관람료는 110프랑, 위베르 지구 소극장은 일률적으로 90프랑씩이다

관객의 분포는 한국의 경우와는 달리 매우 다양한 것이 특징이랄 수 있다. 물론 학생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나, 그밖에도 교사, 교수, 공무원, 의사 등 비교적 중산층에 속하는 계층들이 폭넓게 관객 층을 형성하고 있다. 망셀씨는 관객층이 넓고 다양하며 안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스트라스부르 국립극장」이 발전할 수 있는 한 요인으로 꼽고 있다.

관객의 증가는 공연장의 확장을 함께 요구하고 있다. 2개의 극장으로서는 관객의 요구에 부응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교외의 신흥주택지인 오트피에르에(Hautepierre)는 이미 「마이옹(Mailon)」 극장이 1978년에 신축되었으며, 현재의 대극장을 개조, 좌석을 늘리려는 계획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마이옹」 극장은 여러 장르의 연극을 공연할 수 있는 대극장, 권투경기를 치를 수 있는 링, 무도장, 도서관, 휴게실 등을 갖추고 있어서 극장이라기보다는 휴식센터에 가깝다. 「마이옹 」 극장의 이 같은 물리적 조건에 맞추어 극장 책임자인 베르나르 제니씨는 연극, 음악회, 쇼, 무용, 영화, 전시회, 토론회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관객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스트라스부르 국립극장」은 「스트라스부르 연극학교(l'École supérieure dramatique de Strasbourg)」를 통해서 배우와 스텝들을 양성하고 있다. 연극 행정, 배우, 무대장치의 3개반으로 나뉘어져 있는 이 학교는 3년 과정이며, 학생 수는 한 학년이 45∼50명이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스트라스부르 연극학교」의 경우도 학생들이 배우반에 몰려 있어서(평균25명) 학교 관계자들을 고민스럽게 하고 있다.

「스트라스부르 국립극장」이 안고 있는 당면과제는 물론 앞서 말했듯이 공연공간의 확보이지만, 좀 더 큰 차원에서는 탈(脫)파리(Paris)라고 극장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았다. 한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프랑스도 문화 활동이 파리에 집중되어 있어서 지방으로 문화 활동이 확산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수치상으로만 봐도 문화부가 파리 지역에 배정하는 예산 총액은 파리를 제외한 모든 지역의 6배가 넘는다. 이런 이유로 해서 지방 극단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파리 소재의 유명 극단들을 초빙해야 되는 실정에 있고, 「스트라스부르 국립극장」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스트라스부르 국립극장」의 또 다른 어려움은 인원 부족이다. 현재 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는 인원은 80여명 정도이며, 더 필요한 80여명은 단기 계약에 의한 임시직을 고용하고 있다. 거의 절반 정도의 인원을 임시적으로 대체하고 있기 때문에 극장의 운영에 안정을 기하기가 어렵다는 게 극장 실무자들의 한결같이 대답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스트라스부르 국립극장」의 앞날은 밝아 보인다. 지난 4월초에 프랑스 문화부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2천 8백만 명에 달하는 10∼14세의 프랑스 어린이들 중 75%가 올 들어 한번 이상 연극을 봤다는(그중 14%의 어린이들은 10번 이상 갔다고 응답했다) 결과가 나온 것이다. 또한 그 중에서 39%의 어린이는 수중에 50프랑(한화 약 7천 원)이 있다면 연극을 보겠다고 대답했다. 프랑스 연극은 미래의 관객을 이처럼 충실히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