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과 과학기술
김현도 / 미술평론가
아마도 지난번에 열렸던 「테크놀로지의 예술적 전환-학술 큰모임」(국립현대미술관 소강당, '91. 4. 11)은 국내에서 미술관계자와 작가, 그리고 과학자가 공식적으로 공동주제에 대한 의견개진의 기회를 가진 첫 번째 자리가 아니었나 싶다. 이것은 올해 3월부터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되었던 독일 「테크놀로지의 예술적 전환(UMWANDLUNGEN)」과 함께 기획된 것이기는 했지만, 이날 모임에서는 과학기술과 미술 사이의 함수관계가 역사적인 시각에서 조명된 바 있고(발표-정병관, 송상용, 김재권, 윤창구), 한편 범세계적 현상으로서의 과학기술의 예술적 작용이라는 문제가 국내 작가들(금누리, 이상현)의 발표를 통해 현실적으로 개진되기도 했다. 또, 개인적으로는 과학기술과 미술의 교집합에 대한 국내 과학자들(윤창구, 정용)의 공식적인 소견을 접해볼 수 있었던 최초의 자리이기도 하였다.
첫 모임이었던 만큼, 이 자리에서 과학과 예술간의 동질성과 이질성, 또는 과학기술과 미술의 접목 및 그 진로가 충분히 확인되고 논의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양측의 서로에 대한 견해를 개괄적으로나마 서로 교환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향후 더욱 심화될 의사소통의 단초로서의 의의를 찾을 수 있었던 모임이었다.
사실상, 문제는 과학과 미학간의 이론적인 공동영역을 새삼스레 확인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엄연한 실제 현상으로 자리잡고 있는 과학기술과 미술의 결합 부분인 테크놀로지 아트(Technology Art)에 대해서, 두 결합요소의 모체라 할 수 있는 자연과학과 미학이 과연 어떠한 비전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아보는 데 중점이 두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간략한 의견개진의 기회가 주어졌던 만큼 이날 모임에서는 주로 양자의 결합가능성이 호의적이긴 하나 애매한 채로 제시된 데 그친 것 같다. '과학 즉 예술'이라는 코바르스키의 소견을 지적한 사례(정병관)이라든가, "예술과 기술이 함께 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과학은 예술입니다. 이는 '정치도 예술이다'라는 비유와는 다른 것입니다"(금누리)라고 결의를 밝힌 경우, 또 보다 선명한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테크놀로지 아트의 효용을 강조한 사례(김재권), 그리고 순수과학의 동기가 미를 추구하는 데 있다는 다소 이색적인 주장을 피력한 경우(윤창구)들에서 작가나 과학자, 그리고 미술관계자를 막론하고 과학과 예술, 또는 과학기술과 미술의 결합에 다분히 호의적인 반응들을 보인 바 있었다.
그러나 실상 테크놀로지 아트의 진로에 대해 낙관적인 진단을 내리기에 앞서서 과학기술과 미술 사이의 이질성 및 결합의 문제점에 좀더 심도 있는 의견교환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물론 이점 역시 이날의 모임에서 다소 우회적인 형태로나마 언급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가령, 주로 반미학(Anti-Aesthetic)의 입장에서 테크놀로지가 미술에 도입되었던 뒤샹의 '레디메이드(Ready-made)' 개념이 지적된 경우(정병관), 또는 고대 그레꼬로망의 신화를 통해서 과학기술과 미의식간의 근본적인 이질적 성향을 암시한 사례(윤창구)가 있었다.
잘 알려진 바대로, 레디메이드 개념이 과학기술의 시대에 있어서 미학의 문제의식이 더 이상 개인적인 제작상의 수고의 문제라기보다 단지 선택의 문제가 되었으며 그것을 통해서 미학의 자기비하 및 개념 확장을 동시에 성립시킨 뒤샹적 발상의 전환을 뜻한다. 뒤샹은 이 선택마저도 무관심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은연중 과학기술에 의한 대량복제 생산체계 하에서의 개인적 익명성의 문제를 동시에 환기시킨 바 있다. 물론 이 경우 레디메이드 개념이 결과적으로는 과학기술을 차용한 것이 되지만, 그것이 과학기술과 미술의 결합과 동질성을 의도한 것으로 보는 것은 사태의 본말을 그릇되게 파악하는 것이 된다. 뒤샹의 의도는 새로운 미학적 관점에서 새롭게 출몰한 사물을 감상하는 데 있었을 뿐, 과학기술의 관점에서 미술을 다룬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과학기술의 제품은 레디메이드 개념에 따라 미학적 대상으로 탈바꿈이 이루어짐으로써 비로소 미학적 인식론과 맞물릴 수 있게 된다. 이럴 때, 뒤샹의 『샘』은 뒤샹이 본 샘일 뿐 거꾸로 뒤집힌 남성용 소변기는 아닌 것이다.
과학기술과 미술에 대한 그리스 로마신화는 흥미로운 본질상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로마 신화에 의하면, 비너스(Venus)는 아름다움의 여신이며, 벌칸(Vulcan)은 불과 대장일의 신인 동시에 봄과 기술의 상징이기도 하다. 연금술과 무기제작은 벌칸의 일감이었다. 벌칸은 어찌나 흉칙하게 태어났던지 어머니인 쥬노에게서 조차 버림받아 바다로 내던져진 처지였다. 벌칸은 어느 날 자신이 살던 수중동굴로 떠밀려온 산호조각에 바다정령의 모습을 조각하게 되고 그 산호조각이 거품에 쓸려나가 비너스로 환생하게 된다. 아버지 주피터의 궁전에서 비너스를 발견한 벌칸은 주피터에게 바친 벼락무기의 대가로 비너스를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 이 신화에 따르면, 아름다움의 여신 비너스는 기술의 신 벌칸의 흉칙한 용모에 대한 보상심리로부터 간접적으로 생겨났으며 또한 벌칸이 신중의 신 주피터에게 바친 무기제작의 보상으로 아내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 서구 고대신화에 나타난 기술과 미의식 사이의 상관관계가 오늘날의 상황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흥미 있는 이야기로부터 오늘날 과학기술과 미술의 문제와 관련된 모종의 암시를 얻을 수 있다. 그것은 기술(Technology)과 미술(Art)이 원래 하나라는 것, 그리고 미의식이 그로부터 파생되었다는 원론적인 문제보다는 오늘날 이들의 상관관계를 파악하는 포괄적인 시각의 필요성을 환기시키고 있다. 동시대의 과학기술-핵무기와 우주왕복선, 유전자 조작과 컴퓨터 프로그래밍 등등-과 동시대의 미술-표현적인 성향과 개념적 성향 따위-사이에 어떠한 교집합이 설정될 수 있으며 또 어떤 조합 개연성이 가능하겠는가에 대한 오늘날의 미학적 비전이 제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앞서 언급된 다다(Dada)의 반미학이 그 응답의 흘러간 일부였으며 미래파(Futurism)에 뒤이은 키네틱 아트(Kinetic Art)의 진로 역시 그 반응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문제의 쟁점은 과연 실용과 실리를 바탕으로 한 과학기술의 편의주의가 문화예술의 인식의 확장과 온전히 상통할 수 있는가에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부정적 답변이 전자의 반미학 이었다면 키네틱 아트의 의사 과학적 방법론은 이에 대한 낙관주의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하거나 문제의 결론을 끄집어내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기왕지사 국내의 작가와 과학자, 그리고 미술관계자의 모임이 시작되었으니 만큼 보다 긴밀하고 실속 있는 의견교환이 유도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설령 과학기술이 결코 인류의 행복과 안녕에 장기적인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개인적 신념을 가진다 해도 그것이 곧 테크놀로지 아트의 존립가능성을 말소하는 방향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이상적인 국가에서 시인은 추방되어 마땅하다는 플라톤의 독선과 같은 주장이라 할 수 있다. 모임에 참석한 한 작가(이상현)의 주장처럼, 테크놀로지 아트를 다원적 미술 동향의 한 부분집합으로서 보다 효율적으로 진척시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가령 일본이나 미국, 독일의 경우에서와 같은 과학자와 작가의 공감대, 또는 엔지니어와 작가 사이의 협력체계 등의 모델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모임은 오히려 때늦은 감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상호협동체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라도 과학기술의 진로에 대한 과학자들의 비전과 미술의 장래에 대한 미학의 소명은 서로 침투하며 영향을 주고받을 필요가 있다. 만약 과학기술이 자연과학의 발견을 실리에 응용하는 데에만 급급하거나, 미술이 새로움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나머지 과학기술과 맹목적인 결탁을 일삼는 경우, 테크놀로지 아트는 단지 센세이셔날리즘이나 알맹이 없는 겉멋의 형태로 대중에게 왜곡 전달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