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리뷰 / 무용

서양고전의 한국화, 소설의 무용화 작업




이종호 / 무용평론가

고전이 지니는 무시하지 못할 매력의 하나는 그것이 진부하리 만치 영원한 인간의 주제를 다루면서도 언제나 신선하게 재조명되고 재창조될 수 있는 해석상의 다양함과 함께 구조적인 깊이와 폭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름높은 문학작품이 후대의 작가들에 의해 각색·번안되거나 아예 연극·무용·영화 등 다른 장르로 변신함으로서 새로운 의미와 맛을 제공하는 것도 고전에서나 볼 수 있는 경우이다. 그러고 보면 영어의 'classic', 혹은 그에 상응하는 서양어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 고전(古典)이라는 한자어는 옛것이면서도 늘 전거(典據)와 전범(典範)이 된다는 의미에서 매우 탁월한 식견이 스며있는 역어(譯語)가 아닐 수 없다.

새삼 고전이란 어떤 것인가를 상기하게 되는 것은 최근 우리 무용계에 있었던 대담하고 야심적인 시도, 즉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을 한국 춤으로 무대화하겠다는 중진급 안무가 국수호의 계획이 알려짐으로써 무용계 내외에 일어났던 기대와 자극이 정작 공연(5월 7일·국립극장 대극장)이 야기한 갖가지 혼란스러움으로 인해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소재를 무대화하는 데에도 늘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우리 무용계의 역량에 비추어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한국무용화 한다는 것은 분명 화제의 대상을 넘어 의미 있는 시도였다. 더구나 초연 당시 '이단'과 '난삽'이라는 꼬리표가 한동안 불어 다녔던 이질적인 리듬구조를 지닌 『봄의 제전』을 우리 춤 속에 용해한다는 것은 보통의 재능과 용기를 가지고는 수행하기 어려운 작업이었다. 원시적인 생명력과 제의성이 넘치는 이 음악은 니진스키가 처음 안무한 이래 모리스 베자르와 피나 바우쉬 같은 대가들이, 그것도 원숙기에 이르러 안무를 시도한, 이를테면 20세기의 고전이다.

국수호에 의한 『봄의 제전』의 한국무용화는 여러 측면에서 우리에게 창작방법론에 관한 성찰의 계기를 제공해 준다. 그 첫 번째는 이미 널리 알려진 외국 대가의 안무를 상당부분 유사하게 따라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것이다. 흔히 발레공연에서 보게 되는 '쁘띠빠 안무, 김○○ 재안무', 혹은 '발란신 안무, 박××재구성'과 같은 경우는 워낙 알려진 고전물을 답습·재현하는 사례가 대부분이고 실제로 재안무라고 할만한 창조적 요소는 발견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는 고전 레퍼토리를 배우거나 소개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그 같은 용어의 사용을 묵인하고 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 『봄의 제전』은 안무자 자신이 한국무용화 작업임을 표방했을 뿐 아니라 실제로 포옹장면을 비롯한 몇몇 부분에서는 한국춤 동작이 삽입되기도 하는 등 분명히 한국무용을 하고 있다.

물론 모든 창작을 한국무용, 현대무용, 발레로 구분해야 직성이 풀리는 제한적 사고방식은 사라져야 마땅하고 이 문제에 관한 무용가들 자신의 발상도 매우 유연해진 지금 새삼스레 이 작품이 어떤 무용에 속하느냐를 따지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작업의 초점이 고전화 된 서양의 무용을 한국적 호흡과 리듬을 바탕으로 한 우리의 춤으로 치환 혹은 재창조하는데 있다면 기존의 서양안무를 쫓아간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욕심을 내자면, 처음부터 한국 무용적 호흡으로 스트라빈스키를 해석한 뒤 그 바탕에서 한국적 춤사위로 접근해 가는 것이 순서였을 터이다. 스트라빈스키의 작품이 한국적 리듬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기는 하지만 음악에 대한 심층적 접근이 한국적 맥박과의 합일점을 발견하게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리듬이나 춤사위 말고도 서양고전의 한국화라는 명제와 관련해 생각하게 되는 또 한가지는 소재의 한국화 문제이다. 우리나라의 설화나 전설가운데에도 『봄의 제전』처럼 공동체를 위해 희생되는 개인의 운명이나, 수호신과 '어리석고 미약한 인간'과의 관계를 다룬 것들이 있다. 소재나 배경을 아예 한국화 한 뒤 무대방법론을 다져 갔더라면 다른 성과가 나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역과 나라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인류학적 관점에서 볼 때 동일구조를 지닌 설화를 찾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나 더 욕심을 부리자면 '오늘 우리의 삶'에 까지 의미망를 확대적용 할 수 있는 작가적 안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전을 '오늘의 의미'로 재조명한 작품들은 얼마든지 있다.

『봄의 제전』을 포함한 「제7회 한국무용제전」(5월 3일부터 9일까지 국립극장)은 이 행사가 출범한 이후 가장 범작(凡作)들을 양산한 부실한 잔치로 기록되어야 할 것 같다. 우선은 국립극장 대극장 무대의 공간조건을 제대로 고려한 작품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는 점에서부터 우리 안무가들의 공간개념에 대한 희박성이 드러났다. 그들이 평소 애용하던 문예회관 무대보다 훨씬 높은 천장에 대해서도 『흰 새의 검은 노래』(임학선) 정도가 단을 높여 대응하는 순발력을 보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미 수년 전부터 조짐을 보여 온 창작방향의 혼미가 누구나 느낄 수 있을 만큼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주최측의 준비부족이나 참가자 개개인의 능력부족으로 돌리기보다는 한국무용 창작 전반의 침체가 한자리에서 입증되었다는 편이 정확한 진단일 것 같다. 전통의 현대화나 서양문물의 한국화 같은 명제를 의식하면서 작품을 만들던 무용가들이 이제는 이념적으로나 방법론적으로나 불투명한 벽에 부딪혀 종잡지 목하고 서성거리는 모습의 연속이었다. 이들보다는 오히려 찬조격인 중국의 조선족 무용가 신문용의 춤이 절도와 기량으로 신선감을 주었다. 미국에서 활동하다 15년만에 귀국했다는 이혜경의 작품은 미국인 무용수들의 열연과 안무자 자신의 감정 격한 춤이 다소 인상적이었으나 안무 자체로서는 낯익은 메뉴의 편안함 정도였다.

출발 초기에 참가자 개개인의 예술적 변신의 시도와 진지한 무대매너로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던 현대춤협회 주최의 「춤작가 12인전」(4월 25일부터 27일까지 문예회관 대극장)도 지난해에 이어 여전히 침체국면을 벗어나지 못했다. 임관규의 『열(熱)』이 앞부분의 장식적 요소만 과감히 배제한다면 절제된 힘과 예민한 형상화 능력을 바탕으로 좀더 안정된 분위기로 개작(改作)이 가능할 것 같고, 전미숙의 『웨딩 탱고』가 재치와 아이디어로 일단 관객의 시선을 분산시키지 않는데 성공했으며, 문영철의 춤이 여전히 기품은 없으나 아직도 대단한 힘과 웬만한 여성무용수를 능가하는 유연함으로 『백조』의 별미(別味)를 선사한 것을 제외한다면 그나마 춤 '작가'라는 명칭부터 무색해진다.

지난달의 무대에서 발견된 작지만 확실한 즐거움으로는 김은희와 김삼진을 들 수 있다. 『정령의 오후』의 김은희는 한국무용제전의 전야제격인 「신인 안무가 발표」(5월 3일)에서 중세유럽의 숲 속을 연상시키는 음악과 무대를 배경으로 '자연이 놀이터이며 잠자리인' 요정들의 그림을 예상외의 다양한 몸짓들로 색채감 있게 그려냈다.

소설의 무용화를 줄기차게 실험해오고 있는 김삼진은 4월 30일 호암아트홀에서 백금남의『십우도』를 김대환의 현장음악과 함께 춤의 에센스로 뽑아내느라 기진 했다. 무대 위에서 쏟아지는 분말을 5분 가까이나 맞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까지 소설 메시지의 가시적 전달이나 묘사에 대한 집착에서 비로소 벗어나 춤화(化)하는 내공을 터득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로는 무용수들에게 무의미할 정도로 이 동작 저 동작을 반복시킴으로써 다소간의 정리가 필요하다는 아쉬움을 남기기는 했지만 문학을 춤의 실로 짜내는 비상한 재능의 큰 부분을 김삼진은 분명 이 작품에서 획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