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비첸자의 '올림픽 극장'
박광혜 / 무대미술가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인 고풍스러운 도시 베로나에서 베니스를 향해 가다 보면 중간에 비첸자(Vicenza)라는 도시가 나타난다. 르네상스 건축의 마지막 거장 팔라디오(1508∼1580)가 심혈을 기울여 설계한 장대한 건축물들이 가득 들어서 있기 때문에 '팔라디오의 도시'라고 불려지기도 하는 고장이다. 팔라디오는 로마 시대의 건축물을 많이 연구하여 '팔라디오 양식'을 이룩한 건축의 거장이다.
르네상스식 건물이 즐비한 시내 중심의 시뇨리 광장에서 팔라디오 거리를 따라 서북쪽으로 500m쯤 가면 고색 창연한 육중한 문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곳이 팔라디오의 마지막 작품이자 그리스·로마 고전 작품의 공연 무대로도 유명한 올림픽 극장(Olympic Theater)이다. 외벽의 담쟁이와 이끼, 고대의 대리석 흉상과 조각들이 이 건물의 오랜 역사를 말해 준다. 무대사적으로 보자면 이 극장은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와 현대를 이어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자들이 그리스·로마 시대의 고전적인 작품들을 연구하여 재현해 내려고 고심할 때 부딪친 가장 곤란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고대의 비극적, 희극적 또는 목가적 정경을 재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고전 작품들을 상연할 필요성이 점증하고 있었으나, 제대로 보존되어 있는 그리스·로마 극장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이 부문에 대한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러나 정작 당대의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사실성과는 거리가 먼, 고전적 극장의 장엄한 분위기만을 모방한 극장만이 많이 지어졌다. 이 문제는 천재적인 건축가의 등장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었고, 그것을 바로 팔라디오가 훌륭하게 수행해 냈던 것이다.
팔라디오는 고대의 극장을 다방면으로 연구하여 외형적 형태는 물론 고전적인 정신적 분위기까지 재현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 모든 것이 잘 융합되어 만들어진 것이 올림픽 극장이다. 팔라디오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건물 내부의 건축적인 리듬과 고상한 디자인 그리고 센스 있는 장식이 결합된, 가히 르네상스 건축의 극치를 보여주는 독창적인 건축양식을 창안하였다. 올림픽 극장은 팔라디오의 그러한 모든 재능이 완숙한 경지에 이르렀을 때 설계된 것이다. 그러나 팔라디오는 극장이 완성되기 전에 죽었고, 그의 수제자인 빈첸조 스카모치(1552∼1616)가 5년에 걸쳐 완성시켰다.
목재와 회반죽으로 칠한 벽면의 이상적인 조화, 무대 뒷면의 광장 및 완벽한 원근법에 의해 표현된 시가 정경은 현존하는 무대로는 유일한 것이 된다. 이 극장의 설립은 고대 그리스·로마의 무대가 르네상스 당시의 고전적 극장과 조화를 이루어 현대의 무대미술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를 조성하였다.
팔라디오의 본명은 안드레아 디 피에르토인데 당시의 이 도시 출신 문학가인 쟌 죠르지오 트리씨노(1478∼1550)가 안드레아를 '팔라디오'라고 부른 후부터 줄곧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팔라디오는 1508년 아름다운 건축물이 즐비한 근처의 파두아(Padua)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수 차례 로마를 여행하여 고대 로마 시대의 유적들을 연구하였고, 특히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의 유명한 건축가 비트루비우스(Vitruvius)의 저작을 세심히 일고 연구하였다. 15세기말부터 16세기초 사이에 번역 발간된 비트루비우스의 「건축십서(Ten Books)」는 당시의 고전주의자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었고 고전 작품들의 연구에 박차를 가하게 만들었다.
팔라디오에게 있어 비트루비우스의 저작은 단지 폭넓은 건축학적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것 뿐만이 아니라 신선한 영감으로 새로운 건축물을 설계하는 데에도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괴테도 인정하였듯이 팔라디오는 <그리스 신전을 당시 귀족들의 대저택으로 바꾸어 놓는데 성공>하였으며, 그리스·로마의 극장을 완벽하게 재현시킬 수가 있었다. 특히 반원형의 관중석은 고대의 극장을 응용한 것으로, BC 3∼5세기경인 그리스 식민 시대에 만들어진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사 및 타오르미나 극장 유적을 보면 그것을 실감할 수 있다.
팔라디오는 로마 시대의 극장 유적 중 특히 로마의 마르첼루스(Marcellus) 극장과 굽비오(Gubbio), 베로나, 비첸자의 극장 유적들을 답사하고 세밀히 연구하였다. 그는 단순히 로마 시대의 극장을 모방하는데 그치지 않고 로마 시대 건축가의 정신을 되새겨 그 분위기를 재현시키려 노력하였고, 1570년 저술한 그의 「건축론(Treatise on Architecture)」4권은 팔라디오의 명성을 온 유럽에 떨치게 하였다.
그는 비첸자들의 예술인, 사업가, 정치인, 상인 등이 중심이 되어 1555년에 설립된 「올림픽 아카데미」에도 창립 회원으로 참가하여 각종 예술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이 아카데미의 숙원 사업이던 올림픽 극장의 설계를 담당하게 된다. 이 아카데미는 지금도 계속 활동하고 있다. 올림픽 극장은 1580년 2월에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외벽 공사가 시작될 무렵인 8월 19일 그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 실라 팔라디오가 공사 감독에 임명되고 스카모치가 총책임을 맡아 5년 후인 1585년 3월 3일 역사적인 개관식을 갖게 되었으며, 그리스 비극작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 첫 작품으로 공연되었다.
무심코 극장 내부로 들어가 장중한 무대 뒤편의 배경을 보는 사람은 그것이 로마 시대의 것과 같다고 착각하게 된다. 무대 배경을 설계할 때 팔라디오는 분명 로마의 개선문 아치를 상기하였을 것이다. 그는 특히 로마시의 중심부에 있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개선문」-(A.D 203년 세베루스 황제(193∼211)의 즉위 10주년과 동방에서의 전승을 기념하기 위해 아들 카라칼라와 제타가 만들었다. 높이 21m, 넓이 23m, 후세 개선문의 원형으로 알려져 있다.)-을 세밀히 관찰하고 연구한 적이 있었다. 로마의 개선문이 승리자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듯이 올림픽 극장의 배경 아치도 올림픽 아카데미의 수호자이자 올림픽 경기의 창시자인 허큘리스와 아카데미 회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1층의 분리된 독립 기둥들, 2층의 반기둥들, 그리고 3층의 희미한 명암 화법의 작품들은 분명히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개선문을 연상시킨다. 각층이 계단식 벽으로 되어 있는데 이 기법은 18세기에나 다른 건축물에 나타난 것으로 팔라디오가 시대를 앞선 독창성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예가 된다. 무대 배경 전면에 걸쳐 있는 다양한 건축적 요소 사이의 대비도 또한 더 할 나위 없이 완벽하기 때문에 무대가 텅 비어 있을 때에도 심각한 비극의 클라이맥스가 보여주는 것과 같은 감동을 받게 된다. 아고스티노 루비니의 조각 작품들도 무대 배경을 압도하고 있고, 승리자 허큘리스에게 바쳐진 부조 작품들도 살아 있는 것 같은 생동감을 준다.
올림픽 극장의 명성은 주로, 다섯 개의 무대 입구 안쪽으로 보이는 완벽한 형태의 작은 도시에 기인한다. 어떤 방문객이라도 장려한 저택들과 신전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지붕과 현관들과 아치들의 놀랄 만한 조화에 매혹되고 만다. 이 모든 것은 끝이 없을 것 같은 소실점으로 집중되고 있다. 완벽한 원근법을 이용, 최소한의 공간으로 이렇듯 놀랄 만한 효과를 연출해 낸데 팔라디오의 진면목이 있는 것이다. 이 이상적인 도시의 거리 전경은 배경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결코 무대의 활동 공간으로는 사용되지 않았다. 이 도시의 소재는 고대 그리스의 '테베'-(Thebes : 그리스 동쪽 중앙 지역에 있던 도시국가로 아테네, 스파르타와 오랫동안 경쟁하였으나, B.C. 4세기 중엽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립 왕에게 멸망당했다.)-라기 보다는 16세기 건축가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르네상스 시대의 '비첸자'이다. 그러므로 어느 곳을 보아도 초라한 집은 볼 수 없고 고상하고 웅장한 건물들만 보일 뿐이다.
극장이 완공되기 전, 처음에는 개관 기념 공연작으로 목가극이 선정되었다. 그러나 1583년 올림픽 아타데미 회장으로 레오나르도 발마라나가 선출되고 나서 목가극 대신 올림픽 극장에 훨씬 더 잘 어울릴 수 있는 비극 소포클레스의「오이디푸스 왕」이 다시 선정되었다.
무대감독으로 안젤로 인제네리가 지명되었고, 1585년 3월 3일 이탈리아 무대 역사상 길이 기억될 「오이디푸스왕」이 공연되었다. 무대감독 인제네리 외에도 무대 디자이너에 스카모치, 의상 디자이너에 화가 마간자, 그리고 합창 작곡자로 가브리엘리가 각각 협력하였다. 이 「오이디푸스 왕」 공연은 그 내용보다는 현란한 의상과 특수 효과음 그리고 100명이 넘는 엑스트라의 출연으로 과시된 배역의 다양함 등으로 관중을 사로잡았다. 즉 관중에게 시청각적 즐거움을 목표로 한 결과 큰 성공을 거둔 것이었다. 공연이 끝나자 이 소식은 전 이탈리아 지역에 알려졌고, 비첸자 시민들은 비첸자가 '이탈리아 지역의 수도'라고 자부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 왕」 공연 후 올림픽 극장은 3세기 동안 침묵을 지키게 된다.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었던 탓도 있으리라. 그리하여 「오이디푸스 왕」은 그 이전 2세기 동안 계속된 무대 실험의 클라이맥스이자 종말을 고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래지 않아 이탈리아 무대예술에는 성악, 낭송이 혼합된 희곡의 멜로드라마와 더불어 새로운 스타일로 나타난다. 올림픽 극장은 그 이후 무대예술 역사상 예외적인 독특한 극장으로 인정받아 괴테, 나폴레옹 등이 방문하는 명소가 되었다.
19세기에 들어서 일세를 풍미하던 낭만주의의 영향으로 고대에 대한 향수심이 새로 일어나면서 올림픽 극장은 다시 관심을 끌게 된다. 물론 롯시니, 벨리니, 도니젯티, 그리고 베르디 등의 오페라가 일으킨 열광적인 흥분이 관심을 유발시키는데 일조를 한 것도 사실이다. 1862년 당대 제일의 지휘자 안젤로 마리아니와, 베르디의 오페라 「운명의 힘(La Forza del Destino)」을 공연해 세계적으로 알려진 가극단이 올림픽 극장 무대에서 공연을 가졌다. 또 1879년 9월에는 바그너가 '지휘자의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 : 1807∼1882, 1871년 이탈리아 통일 왕국을 수립하는데 가장 큰공을 세운 이탈리아의 애국적 영웅)'라고 부른 루이지 만치넬리가 베르디의 「진혼곡 미사」를 공연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올림픽 극장에서 공연을 하려면 주연의 역할이 뛰어나야 할뿐만 아니라 주제와 무대 장식도 걸출해야 한다. 1847년 9월 공연된 구수타보 모데나 주연, 죠반니 파치니 작곡의 「오이디푸스 왕」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1857년에는 비토리오 알피에리의 오페라 「오레스테(Oreste)」에서 토마소 살비니가 열연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다음 세대의 스타는 구스타보 살비니였는데, 그는 1901년 「오이디푸스 왕」, 1904년 「오레스테」, 1908년 유리피데스의 「히폴리투스(Hippolytus)」 등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 인기가 절정에 달하였다.
1914년 대대적으로 극장을 보수한 후에는 유리피데스의 「알체스티스(Alcestis)」가 개관 기념 작품으로 공연되었고 1차 세계대전 후에는 지로라모로베타의 「로맨티시즘」, 글룩의 「타우리안의 이피제네이아(Iphigeneia among the Taurians)」, 구노의 오라토리오 「속죄」 등이 공연되었다.
이제 올림픽 극장은 드라마나 뮤지컬, 비극이나 희극, 오페라나 콘서트를 가리지 않고 공연할 수 있는 만능 무대가 되었다. 1934년에는 고전 작품들을 선택하여 공연을 지도할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 9월 비첸자는 대규모 공습을 당해 많은 문화적 유산이 파괴된다. 올림픽 극장에서 옮길 수 있는 것은 무엇이건 안전지대로 옮겨졌다. 1948년 9월 2일, 모든 소장품들이 원상 복귀되어 전후 첫 공연 작품으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 공연되었다. 이 공연도 또한 1585년 개관 기념 작품처럼 이탈리아 전국에 알려지는 등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주연은 렌조 리치였고, 그밖에 안드레이나 파냐니, 루제로루제니, 카를로 닌키 등이 출연하였다. 합창곡도 당대 이탈리아 제일의 거장들이었던 알베르토 보누치, 죠르지오 데롤로 등에 의해 작고되었다.
1949년에는 3편의 진기한 작품들이 공연된다. 첫 번째는 유리피데스의 「메데아(Medea)」로 사라 페라티라는 매우 활동적인 배우가 출연하였고, 두 번째는 안니발 카로의 「스트라치오니(Straccioni)」였는데 이 작품을 계기로 '팔라디오의 무대'에 16세기의 희극이 상연되기 시작하였다. 세 번째는 몬테베르디의 「포페아의 대관식(The Crowning of Poppea)」으로 오래 기억될 만한 공연이었다. 17세기의 멜로드라마 공연은 당시 이탈리아 비평가들의 폭넓은 찬사를 받았는데, 이들은 몬테베르디의 오페라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탈리아 오페라 선구자들의 작품이 '이상적이고 화려한 팔라디오의 무대'에서 공연되는 것을 보기 원했다.
1949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많은 성공작들이 나왔는데, 1950년에 공연된 「소포니스바(Sofonisba)」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작품이라고 비평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칭송을 하였다. 연출은 죠르지오 스트렐러였고 주연은 엘레나 자레스키였다. 같은 해에 공연된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구이도 살비니가 연출한 작품으로, 매우 다감한 젊은 여배우 엣다 알베르티니가 출연하여 주목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1951년에는 유명한 시인 발바토레 콰시모도가 각색한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가 죠르지오 스트렐러에 의해 공연되었고, 릴라브리뇨네는 좋은 연기로 대호평을 받았다.
1952년 올림픽 극장은 다시 절정에 올랐다. 이 해에 고찌의 「투란도트」와 코르네이유의 「르 시드」가 프랑스의 장 빌라르 연출로 프랑스 국립극장 단원들에 의해 공연되었는데, 당시 영화와 연극배우로 전성기에 있던 제라르 필립이 돈 로드리고역을 훌륭하게 해내었다. 청중들의 열화와 같은 환호는 기억될 만한 것이었다. 1953년 4월에는 비토리오 가스만이 셰익스피어의 햄릿으로 등장하였다. 「햄릿」의 성공적인 공연으로 올림픽 극장은 다시 한번 어떠한 작품도 공연할 수 있는 이상적인 무대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1959년 푸르첼의 「디도와 아에네아스」 공연 이후 수년 동안은 뛰어난 작품이 없었다. 1967년에야 골드니의 「커피숍」이 공연되어 비첸자 시민들의 관심을 끌었고, 1968년에는 쟌 프랑코데 보시오의 「루잔테의 생존연설(Ruzante's Survival Speech)」이 대단한 방향을 일으켰다. 1970년대에 들어서 올림픽 극장 위원회는 몇 개의 엘리자베스 시대 희곡들을 공연하기도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로베르토 구이챠르디니가 연출을 맡은 존 포드 작 「그녀가 매춘부라는 사실이 유감이다」라는 작품이 특히 주목을 끌었다.
최근 들어 올림픽 극장의 고전 작품은 많은 관객, 특히 젊은이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중요한 작품들을 보면 알바로의 「메테다의 가니긴 밤」, 셰익스피어의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와「쥴리어스 시저」, 그리고 몰리에르의 「타르투페(Tartuffe)」 등인데,. 그 중에서도 「타르투페」는 젊은이들 사이에 굉장한 인기를 끌었다.
올림픽 극장 위원회의 고전 작품 상연 외에 4인 협회가 매년 주관하는 「콘서트 시즌」으로 올림픽 극장의 활동은 더욱 풍성해졌다. 팔라디오 무대에서 공연을 한 세계적인 연주가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클라라 하스킬, 아이작 스턴, 프리드리히 굴다, 살바토레 아카르도, 아더 루빈슈타인, 빌헬름 켐프, 네이산 밀슈타인 등.
이와 같이 4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올림픽 극장은, 르네상스 시대의 문화적 유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문화도시 비첸자에 위치하면서, 독특한 스타일의 팔라디오 설계로 주목을 계속 받아 왔다. 오늘날에는 설립 당시의 주공연물이었던 그리스·로마의 고전 작품들은 물론 멜로드라마, 오페라, 콘서트, 발레 등 어떤 장르의 예술 작품도 공연할 수 있는 이상적인 무대로 그 명성을 더해 가고 있다. 그리고 그 세계적인 무대예술의 명소라는 화려한 명성은 특히, 숱한 재정난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한,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비첸자 시민들의 꾸준한 성원으로 인해 가능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