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의 들숨과 가짜의 날숨
-미술작품의 감정
오광수 / 미술평론가
지난 4월경에 발생한 천경자 씨의 「미인도」사건은 어느 사회적 사건에 못지 않게 충격적이었다. 미술계는 물론이고 일반인들의 흥미와 관심은 거의 한달 이상 지속된 「미인도」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이 사건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흥미와 관심을 자아내게 되었던 것은, 다른 여느 사건과는 달리 좀처럼 볼 수 없는 문화적 사건이라는 점과 아울러,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미스터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별 인식이 없던 사람을 만나도 단지 내가 미술계의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어떻게 된 것이냐고 자못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내온다. 작가는 아니라 하고 다른 사람들은 옳다고 하니, 이거야말로 시빗거리가 아닐 수 없으며 관전의 묘미는 배가될 수밖에 없다. 결국 이 사건은 소장측인 국립현대미술관이 최종적으로 진품임을 확인하는 기자회견을 열었고, 위작이라고 문제를 제기한 당사자인 작가는 잠시 미국으로 휴양 차 떠나버리면서 유보된 상태로 끝나버렸다. 작가가 위작이라고 계속 주장하는 한, 언제 다시 제기될지 알 수 없는 상태다.
과거에도 위작에 관한 사건이 심심지 않게 있었지만 이번의 경우처럼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은 없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작가 중의 한사람과 공신력이 있는 국립현대미술관과의 공방전이었다는 점에서 뉴스로서의 가치가 그만큼 증폭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쨌거나 이를 계기로 미술품의 가짜에 대한 관심이 쏠리게 되었고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지며 어떻게 판별되는가.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문제들은 무엇인가 하는 점들이 동시에 논란거리가 되었다. 어쩌면 「미인도」사건은 최근 들어 점증하는 미술품 위작문제의 위험수위를 경고한 시의적인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위작과 감정에 따른 전반적인 문제들을 재검토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점증하는 위작의 조직적 발호에 비하여 이에 대처할만한 강력한 감정기구가 없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우려로 지적된 바 있다. 현재 우리 나라에 현대미술을 공식적으로 감정하는 기구는 화랑협회 내에 있는 감정위원회가 유일하다. 「미인도」 역시 미술관 내의 자체감정과 아울러 화랑협회 감정위의 감정을 거쳤다. 그런데 화랑협회의 감정위가 얼마나 신뢰할 만한 감정기구인가 하는 것이 거론되었는데, 현재의 기구가 공신력을 갖는 법인체라든지, 감정의 라이센스를 소지한 전문가라든지 하는, 객관적인 권위가 인지되지 않는다는 것이 주로 문제가 되었다. 국가가 인정하는 정식 감정기구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 절실하게 요청된 사항이면서도, 막상 그와 같은 기구를 어떻게 조직할 것이냐 하는 현실적인 문제에 이르면, 현재의 화랑협회 내의 감정위보다 얼마만큼이나 더 나은 것이 출현하겠느냐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현재 화랑협회 내의 감정위 구성은 어떻게 되어있는가를 살펴보자. 동양화와 서양화를 구분해서 각각 7명씩의 위원이 있는데, 그중 반은 화랑을 직접 경영하는 화상들이고 나머지 반은 화가나 평론가로 구성되어 있는 실정이다. 물론 이 구성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고 해마다 위원의 교체와 보강, 재임명 등으로 그 이미지를 새롭게 하고 있다. 구성원들은 이 방면에 오랜 경험을 소지한 사람들이긴 하지만 특별한 라이센스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아직도 이러한 라이센스를 발급하는 제도가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어떤 안목을 갖고 있는가, 얼마만한 경험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실제적인 것보다는, 객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자격증 같은 것을 더 믿으려 한다. 「미인도」사건이 일어났을 때, 화랑협회의 감정위를 불신하는 듯한 태도들에서도 이 같은 자격증 문제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미술작품의 감정이란, 제작연도, 방법, 재질, 내용 등을 판별해 내는 것을 포함하는데, 일반적으로 작품의 진위를 판별해 내는 것을 감정으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진위와는 상관없이 작품의 연대를 측정하는 일이나, 어떤 재질에 의한 어떤 방법의 작품인가를 판독해내는 일도 감정에 속한다. 미술사가나 연구가들의 의해 지금까지 진품으로 인정되어 왔던 작품이 다른 화가의 작품으로 판명되거나 지금까지 미술사에서 거의 인정을 받지 못하던 화가가 새롭게 발굴되어 크게 조명을 받기도 한다. 대개 이 방면의 사가나 연구가들은 양식적인 특징과 그 시대의 보편적인 미학의 흐름, 그리고 영향의 계보 등 주로 미술사적인 행간을 통해 작품들의 위치를 바로잡고 진위를 가려내기도 한다. 현대에 와서 작품의 복원기술이 발달되어 손상된 작품을 복원시키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여러 가지 비밀을 밝혀 내기도 한다. X선과 적외선의 투사에 의한 본격적인 실험과 재질의 화학적인 분석을 통한 정밀한 실험들이 진행되면서, 진위의 판별은 과학적인 수단에 의해 더욱더 정확해 지게 되었다. 그러나 위작가들은 이와 같은 점을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고 있어 과학적 방법에 의한 분석이라는 것에 맹목적으로 의지할 것도 못된다는 이야기들도 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유명한 위작사건인 네덜란드의 반 메헤렌의 경우를 보면, 그가 위작해낸 벨메르는 실제로 벨메르가 생존했던 시기인 17세기의 안료를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표면의 처리는 합성수지를 사용하여 적당히 그을리게 하여 고풍스런 느낌을 줄 수 있도록 하였으며, 롤러를 사용하여 표면의 일정한 균열을 주었고 갈색 와니스를 사용하여 감쪽같이 17세기 물건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이러한 경우라면 과학적인 방법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게 된다. 반 메헤렌에 의한 벨메르의 위작 「에마오의 그리스도」,「최후의 만찬」,「그리스도와 간부」,「야곱을 축복하는 이삭」 등 일련의 종교적 주제의 작품들이 나타났을 때, 많은 미술사가들은 이구동성으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는 「에마오의 그리스도에 보이는 카르바지오의 영향」이란 논문도 씌어져, 벨메르가 이탈리아에 갔던 것은 아니었나 하는 억측을 낳기도 했다.
위작을 권위 있는 미술관이 사들였을 때, 소동은 더욱 커지게 마련이다. 1960년대에 일본 동경의 국립 서양미술관이 세기적인 위작가인 에밀 드호리의 드랭과 뒤피의 위작을 사들여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호리가 만들어낸 위작이 수천 점이라고 하니 또 어떤 미술관이 가짜를 소장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가짜를 진짜로 둔갑시키는 일은 주로 중개상인들의 몫으로 이들은 가히 지능범이라고 할 수 있는 교묘한 방법을 동원한다. 작품을 오션(경매)이나 공공전시에 출품하여 이력을 조작하거나 그럴듯한 사연들을 첨가하여 감쪽같이 사람을 속인다. 우리의 경우에도 이와 같은 지능적 수법이 동원되고 있다. 전시회에 출품하거나 미술잡지 같은 곳에 광고를 하여 기정사실화 한다. 미술전집이나 잡지 등에 게재되면 그것만으로도 일반인들은 쉽게 진품으로 간주해 버리는 심리를 교묘히 이용하는 것이다.
위작이란 예술작품이 갖는 일회성, 독자성이 타인에 의해 대신되는 행위로서 여기에는 매각을 목적으로 한 범죄성이 강한 것과, 단순히 제자나 모방자들에 의해 모작되는 두 가지 유형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는 위작자의 모습이 감추인 상태이나 후자의 경우는 모습을 드러내 놓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루블 같은 미술관에 가면 옛 거장들의 작품을 그대로 모사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일종의 모작실습으로 기량에 대한 수련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는 예로부터 동양이나 서양에서 있었던 일들이다. 누구의 작품을 누가 모사 했다고 밝히는 것이 상식이다. 원작이 없어지고 모작만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어, 때로 모작은 원형의 지속적 보존이란 차원에서 정당정을 인정받기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위작시비는 원작자가 갖고 있는 일회성과 독자성을 가로채는, 파렴치한 사기행위나 다름없는 것이다.
위작은 한 작품을 그대로 복제하는 경우와, 대상자의 작품이나 화집을 놓고 위작자가 적절히 재구성하는 경우가 있다. 전자의 경우는 똑같은 작품이 두 개나 나돌기 때문에 쉽게 진위가 판명될 수도 있으나, 후자의 경우는 대상자의 여러 작품가운데서 적절히 조합했기 때문에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어 판별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된다. 과거에는 그대로 같은 작품을 복제한 위작들이 많았던 반면, 근래에는 특정한 작가의 여러 작품 가운데서 적절한 부분들을 따와 재조립하거나, 나아가 비슷하게 유형화시키는 수준에까지 이르고 있어 그만큼 위작의 수준이 향상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나타나고 있는 위작은 대부분 작품의 가격이 높은 작가가, 그리고 생존작가보다는 작고 작가가 더 많은 대상이 되고 있다. 서양화가로는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오지호, 최영림, 남관, 도상봉 등이, 동양화가로는 이상범, 변관식, 김기창, 박생광 등이 주로 위작의 대상이 되곤 한다.
대체로 70년대에는 동양화 쪽에 가짜가 성행했다면 80년대 이후에는 단연 서양화 쪽에 가짜소동이 빈번한 편이다. 그만큼 시대적인 기호가 서양화 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수요층도 서양화가 단연 우세하기 때문이다. 서양화 쪽이 그것도 유명한 작고작가의 작품이 위작의 대상이 되는 것은 수요의 과다로 인한 수요·공급의 균형이 깨어져 있어 작품가격이 날로 상승일로에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위작이 주로 소품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최근의 위작 가운데는 대작들도 심심지 않게 나타나고 있어 문제가 훨씬 심각해지고 있다. 70년대의 위작들은 웬만한 안목만 있으며 쉽게 판별이 가능했으나 최근의 그것은 상당한 수준의 감식가도 속아넘어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가짜에 대비한 수단이 강구되어야 한다'는 우려의 소리가 높은 것은 이러한 현실을 의식한 데서 나온 것이다.
작품을 감정하는데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사항들의 점검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소재의 범주, 구도의 특징, 색채의 기호, 터치(또는 운필), 사인(또는 낙관), 지질(캔버스 또는 종이) 등이 진의를 판별하는 기준에 적용되고 잇는 것이다.
소재(또는 주제)는 각 화가들 나름의 소재적 범주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기준이 될 수 있다. 예컨대, 모딜리아니는 평생 인물만을 그렸다-초기작품으로 풍경화가 하나 있다-는 점에서, 모딜리아니가 그렸다고 주장되는 정물화나 풍경화가 나왔을 때는 의심의 여지가 다분하단 것이다. 구도의 특징은 화면에 대한 구체적인 설정으로 화가마다 그 특징이 나타난다. 전체적인 포치(布置)에서 각 대상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구성적인 묘미에 이르기까지 화각의 기호가 반영된다. 색채의 기호는, 화가마다 많이 사용하는 색채, 특히 좋아하는 색채가 있으며 색채배합에서도 독특함을 지니고 있다. 대담한 원색의 대비를 즐기는 화가가 있는가 하면, 간색을 많이 사용하는 화가가 있어 그들의 나타나는 색채의 체계는 그들의 독자적 미의식을 가장 구체적으로 반영해 주고 있다.
터치는 붓의 작동을 뜻하는데, 동양화에서는 운필이라고 한다. 화가마다 붓의 사용법이 다르다. 속도감이 잇는 터치가 있는가 하면 짓뭉개는 것 같은 터치도 있다. 경쾌한 느낌의 터치가 있는가하면 육중한 느낌의 터치도 있다. 터치는 화가가 화면을 앞에 하면서, 물질과 정신의 만남과 같은 충동으로서 일종의 호흡이라고도 할 수 있다. 대단히 까다롭기는 하나 감식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부분이 터치라고 할 수 있다. 청전의 운필은 시냇물이 흐르듯 경쾌한 리듬을 동반하는가 하면, 소정의 운필은 바탕의 종이가 뚫어질 정도로 텁텁한 무게를 싣고 있다.
때때로 원작에 다른 사람이 가필을 하는 경우, 원작의 호흡과 달라 판별이 가능하게 된다. 어떤 형태로거나 원작이 파손 또는 퇴락 되었을 때 가필을 하는 예가 있는데 작품의 복원이란 선의의 목적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에도 때때로 원작을 훼손하게 되는 경우를 보면, 터치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 수 있게 된다. 솔거가 황룡사 담벽에 노송을 그렸더니 날짐승들이 실물인 양 착각하고 날아왔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원작이 퇴락 해 가자 절의 중이 가필을 하였더니 그 후로는 새가 날아들지 않았다는 것은, 원작이 지니고 있는 독자성을 가필이 훼손시킨 좋은 예로서 회자되고 있다. 이와는 다른 가필의 경우로 도덕적, 종교적 이유로 인해 내용물에 다른 것을 첨가하는 가필이 있다. 시스틴 성당의 제단화인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최후의 심판」이 그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체로 등장하는데, 미켈란젤로가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에도 그 점이 말썽이 되었었다. 교황청의 재정담당 장관이 교황청내의 교회 목욕탕이나 여관에 어울릴 외잡한 나체상은 곤란하다는 간섭을 하였다. 이에 격분한 미켈란젤로가 장관의 얼굴을 지옥의 왕 미노스의 얼굴로 묘사해 버렸고, 교황은, 지옥에 떨어진 사람은 자신이 구할 수 없노라고 하며 웃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나체는 미켈란젤로 사후에 여러 사람에 의해 그려진 천으로 가려졌다. 이외에도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원작의 나체에 옷을 입히는 가필의 예가 적지 않다. 가필은 위작이라고 할 수 없으나 그것이 심할 경우 원작의 독자성이 상실되었을 때 위작 이상의 심각한 문제를 야기 시킨다. 원래의 목적은 복구인데 결과적으로 원작의 심한 파괴, 훼손으로 위작으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감식가들은 사인이나 낙관을 작품판별의 주요 기준으로 삼는 것이 보통이다. 사인이 없는 작품은 일단 위작으로 보려는 예가 많은데, 경우에 따라 사인을 하지 않은 작품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사인이나 낙관이 없다고 해서 위작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위험하다. 거의 대부분의 위작은 사인이나 낙관이 그럴듯하게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가짜를 만드는데 굳이 의심의 여지를 남길 이유가 없다. 어떤 화가는 어떤 캔버스를 주로 사용하고 어떤 화가는 어떤 화선지를 주로 선택하고 있다는 것이 진위를 가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때가 있다.
위작을 만드는 사람도 물론 이상과 같은 점에 착안할 것이다. 그러나 원작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반면, 위작은 인위적으로 조작하기 때문에 결국 가짜임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당대에는 발견되지 않는다 해도 언젠가는 연구가들에 의해 밝혀지게 될 것이다. 진실에 대한 믿음, 이것이 바로 진실이 설 수 있는 바탕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