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량 가야금의 실험과 월북 국악인의 재평가
송혜진 / 음악평론가
여러 가지 '개조 가야금'이 한자리에서 만난 KBS 국악관현악단의 정기연주회
지난 6월 28일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서 열린 KBS 국악관현악단의 정기연주회는 가야금의 본디 모습과 최근 여러 작곡가에 의해 개조된 모습이 한자리에 만난 화제의 공연이었다.
가야금은 신라 이래로 이렇다 할 변화 없이 오동나무 공명통 위에 명주실로 만든 열두 줄을 건 채 한국의 소리를 담아 왔다. 다만 19세기에 들어 선율의 진행이 빠르고 리듬이 다채로운 산조가 탄생하자 기존 가야금의 모습은 이 음악을 연주하기에 알맞은 새 모습(공명통의 크기가 줄어들어 줄과 줄 사이의 폭이 좁아졌다)으로 변모해서 현재까지 '열두 줄 가야금'의 모습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문화공간과 청중들의 음악을 듣는 귀, 작곡가들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음악적 열망은 가야금의 모습에 여러 가지 불만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음량이 적다', '음역이 좁아서 표현력이 한정되어 있다', 또 '화성적인 표현기법을 위해서는 가야금의 새로운 변화가 요구된다' 등이 대략적인 내용이었다. 동시에 조금 더 적극적인 음악인들은 가야금 현의 재질을 바꾸어 음색의 변화를 시도하거나 줄의 수를 늘려 가야금의 악기 됨됨이를 바꾸는 일을 시도했는데 그 결과가 곧 '스물 한 줄 가야금', '18현금', '17현금', '15현금' 등이다. 이 작업의 일단은 창극과 무용반주를 맡아왔던 민속음악인에 의해 시작되었으나 악기 개조의 동기와 작품활동 등이 그리 뚜렷하게 부각되지 않아 옳게 평가된 적이 없었고 대대적인 화제 속에 탄생된 것은 1986년의 스물 한 줄 가야금이다.
스물 한 줄 가야금은 서울대 교수이며 국악 작곡계의 선두주자로 활동해 오던 이성천이 가야금이 지닌 전통 정서를 깨뜨리지 않는 범위에서 가야금의 저음역과 고음역을 확대시키고 화성적 효과를 낼 수 있게 고안하였던 것이다. 이 작업은 작곡가의 창작의지와 스물 한 줄 가야금의 생명력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끼친 KBS FM의 공동작업으로 당시 음악계의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이후 여러 가지로 시도된 가야금 개조 작업의 원조가 되었다. 그러나 악기 제작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점(현의 장력과 공명의 관계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등)과 연주기법의 개발이 악기개조 및 창작의지와 균형을 이루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었고 이 같은 문제점을 보완해야 한다는 의견이 속출했었다. 이후 이해식, 박일훈, 황병주 등의 음악인들이 가야금의 새로운 탄생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가야금 삼중주단이 탄생되어 기존의 가야금 줄 수는 그대로 두고 전체 음역을 높은 것, 중간치, 낮은 것으로 구분하여 소위 '삼중주 가야금'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 같은 가야금의 '모습 바꾸기'는 앞으로 문제점이 도출될 때마다 뜨거운 관심 속에 거론될 것이며 무엇인가 산뜻한 결말이 올 때까지 계속되리라는 전망이다.
이와 같은 가야금의 '모습 바꾸기'는 현재 국악계가 당면한 악기개량, 혹은 악기개조의 상황을 단면적으로 내보이고 있다. 따라서 바뀐 악기의 효용성 문제와 바뀐 악기를 다룰 변화된 연주기법의 개발문제, 또 새로운 악기에 얹혀질 창작음악의 내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현재 국악계가 가장 민감하게 촉각을 세우고 있는 분야이다. 이번 KBS 국악관현악단의 연주가 국악계는 물론 방송(문화가 산책에서 다루어짐)에서 큰 화재거리로 다룬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바깥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연주회의 내실은 그리 돋보이지 못하였다. 이날 연주회에는 12줄 가야금을 사용하는 황병기 작곡의 「석류집」, 백대웅 작곡의 「국악관현악을 위한 두 개의 악장 '길군악', '쾌지나 칭칭 나네'」, 이강덕 작곡의 「가야금 협주곡 제7번」을 비롯하여 이성천 작곡의 스물 한 줄 가야금을 위한 「바다」, 박일훈의 작곡의 18현금을 위한「금빙」, 성금련 작곡의 15현금을 위한 「홍」 등이 무대에 올랐다. 이 자리에는KBS 국악관현악단의 중견 가야금 연주자 황병주, 민의식, 최지애, 박영미와 광주에서 활동 중인 선영숙씨가 독주 및 협연을 맡아 제각기 기량을 내보였는데 이 중에서 KBS 단원들의 연주는 오랜 관현악단의 연주습관 때문인지 독주자, 협연자로서의 면모를 충분히 내보이지 못한 채 마치 시험대위에서의 연주자들처럼 끝까지 긴장을 풀지 못했다. 민의식은 연주 템포를 너무 빠르게 잡아 시종 여유 없이 연주를 마쳤으며 최지애의 연주에서는 전체적인 곡의 구조파악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그에 비해 이강덕 작곡의 「가야금 협주곡 7번」으로 서울 무대에 처음 선 선영숙은 익숙한 연주로 산조음악 어법과 관현악 협연 감각을 균형감 있게 내보여 이날 가장 돋보이는 연주자로 부각되었다.
한편 이 연주의 기획면에서 몇 가지 아쉬웠던 점이 있다. 기왕 최근에 개조된 가야금의 여러 종류를 내보이기도 한 것이라면 지금까지 시도된 개조 가야금을 망라하고 악기의 제작연대와 악기의 특성, 작곡가의 의도가 좀더 선명하게 부각될 수 있도록 기획했어야 하며 곡목과 연주자의 선정면에서도 세심한 배려를 했어야 한다고 본다.
결국 이번 KBS 국악관현악단의 정기공연은 악기 개량문제와 창작활동의 향방을 점검하고 이 작업을 보다 긍정적인 시험과정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으며 KBS 창작 국악계의 선두주자답게 이의 실용화 문제를 구체화시켰다는 점에서도 주목되었다고 하겠다.
최초로 월북 국악인의 음악활동을 다룬 불교방송국의 6·25 특집
지난 6월 24일부터 26일까지 불교방송국이 마련한 특집방송 「북으로 간 명인들」(오후 3:00-4:00, 프로듀서 김학주)은 세간의 특별한 이목을 집중시키지는 못했으나 분단 이후 처음으로 월북 국악인의 음악활동을 조명했다는 점에서 매우 각별한 의미를 띤 것이었다. 이는 문학계와 양악계의 일각에서 이미 4∼5년 전에 떠들썩하게 다룬 적이 있어서 이제는 '시사성이 사리진' 주제가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악계에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이렇다할 관심을 표한 적이 드물고 이들의 음악활동 업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에 대한 천착도 없는 상황이어서 이번 불교방송국이 마련한 특집은 관심 있는 이들에게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방송은 제1편 「서편제 판소리 명창, 박동실」, 제2편 「가야금의 산조인 두 명인, 안기옥과 최옥산」, 제3편 「가야금 산조와 병창의 명인, 정남희」로 이루어졌다. 프로그램은 매일 같은 시간대의 국악방송 「옛 가락 우리노래」의 진행자 김병조가 맡았고 매일 월북 명인들과 특별한 연고가 있는 대담자들이 함께 자리했다. 첫날은 박동실 명창의 수제자 김소희 명창이, 둘째 날은 지난해 연변을 방문하여 안기옥 명인의 제자 김진(연변 예술대 교수)과 합동연주를 가졌던 가야금 연주자 양승희, 셋째 날은 가야금 병창의 명인 박귀희가 각각 생동감 있는 기억과 나름대로의 평가를 곁들여 새롭게 공개되는 많은 음악사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제작팀은 명인들과 관련 있는 주변인물(박후성, 한승호, 정광수, 박종선 등)들을 직접 인터뷰하여 매우 귀중한 정보들을 캐내는 한편 이 방면에 관심을 가진 전문가 황병기(이화여대 교수), 이보형(문화재 전문위원), 최종민(정신문화연구원 교수), 백대웅(중앙대 교수)씨 등의 견해를 첨부하여 공정성을 기한 프로그램으로 만들었다. 즉 월북명인들을 '무조건 추켜세우는 식'이 아니라 이들이 어떤 음악활동을 펼쳤으며 왜 월북했고 이들이 월북한 이후의 음악활동이 장차 통일 이후의 음악문화를 거론할 때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한 객관성을 확보했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제작팀은 이들의 옛날 성음을 담은 SP 음악 자료를 활용함으로써 희귀 음반 소개라는 부가가치를 높이기도 했다.
물론 이 프로그램은 제한된 시간과 방송이라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국악 전문 프로그램으로서 주목되기에 충분했다. 덧붙이자면 이번 특집방송에서 다루어진 월북명인들은 월북하기 전 음악계에서 내노라 하던 명인들로 공연사적인 측면에서나 전승사적인 측면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었다. 그리고 이들이 월북한 이후에는 인민 배우, 공훈 배우 등의 직책을 가지고 전통 기반이 약한 북한 음악계에 전통음악어법의 기본을 마련해 주고 직접 작곡가로 활동하면서 북한 창작음악계의 향방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 같은 남북한에서의 음악활동과 그 성과에도 불구하고 남한측에서는 월북음악인이라는 이유에서, 북한측에서는 1970년대 이후 북한의 문화정책이 바뀌어 남도음악어법이 더 이상 수요되지 않게 되면서 도태되어 버려 현재로서는 긍정적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은 실정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통일 이후 우리문화의 동질성을 거론하는 시점에서 반드시 재고하고 재평가해야 하는 작업이라 여겨지며 이 같은 작업을 방송매체에서 선도적으로 거론했다는 점은 꼭 기억해야할 이리이라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