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문화 공간

베를린의 극단 「샤우뷔네」




이상면 / 「객석」 베를린 특파원

「샤우뷔네」의 위상

통합된 베를린 연극 공연장을 살펴볼 때, 과거 서베를린 지역에서는 무엇보다도 「샤우뷔네 암 레니너 플라츠(Schaubuhne am Lahniner Platz)」, 쉴러 극장, 그리고 가극 전용의 「도이치 오페라」, 뮤지컬 위주의 「테아터 데스 베스텐스」가 대표적인 극장이라 할 수 있다. 동베를린 지역에서는 전통 있는 도이치 극장과, 브레히트가 설립한 「베를리너 앙상블」, 그리고 국립가극장을 들 수 있다. 베를린의 이 모든 극장들은 각기 나름대로 전통과 특성을 보유하고 있는데, 대략 60년대 이후 가장 괄목할 만한 업적을 보여준 극단은 단연코 서베를린의 「샤우뷔네」라고 말 할 수 있다. 「샤우뷔네」는 그들의 독특한 연극 예술과 작업 방식으로 인해 서베를린뿐만 아니라 서독 전지역에서도 손꼽히는 극장이며, 전세계에도 알려진 유명한 연극공연단체이다.

베를린의 여타 극장들과 비교해 볼 때, 국립극장인 쉴러 극장과 도이치 극장은 순수문학작품을 위주로 서양의 정통 연극을 하는 단체이고, 「베를리너 앙상블」은 브레히트의 작품을 위주로 공연하는 단체인데 비해, 「샤우뷔네」는 사설극단으로서 문학작품, 즉 드라마를 근거로 공연을 하면서도 매우 실험적이고 현대적인 연극 형식을 추구해 왔고 미래지향적인 연극을 제시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샤우뷔네」는 70년대 이후 독일 뿐 아니라 세계의 연극인 및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샤우뷔네」를 소개하기 이전에 우리는 먼저 독일 문화에 있어서의 연극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 잠시 알아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독일의 유명 극단인 「샤우뷔네」가 펼친 연극 활동의 의미와 영향, 그리고 사회 속에서 그들 연극의 역할에 대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독일어권(동서독, 오스트리아, 스위스)의 문화예술 가운데서 연극은 무엇보다도 민중 교육을 위한 수단이었다. 20세기에 들어서 라디오, 텔레비전, 영화, 비디오와 같은 대중 전달 매체가 발달하기 이전에, 극장은 일반 민중들이 모이는 장소였으며, 각 공국의 통치자들은 민중의 언어 교육과 정서 함양, 그리고 정신적 교육을 위해 연극이 접합한 수단임을 알고 극장을 후원했고 공연작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것은 오늘날의 의미로 보면 일종의 예술 후원이고 검열이란 제도이다.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문화적으로 열등했던 독일 제국의 군주들은 뒤늦게 발달한 산업의 도움으로 극장을 짓고 후원을 해서 연극 문화 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그후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비국가적 조직에 의한 사설극장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연극에도 교육적 기능 외에 오락과 사회 비판의 기능이 중요하게 인식된다. 경제적으로 성장한 시민계급을 위한 연극이 성립된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현대 독일 연극은 시민계층, 그 중에서도 특히 교육받은 시민계층의 여가 시간 활용과 문화적 교육을 위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도 각 도시마다 국립·시립극장 제도가 잘 정비되어 있고 그들에 의한 재정적 보조도 많은 것은 이러한 독일 연극의 전통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베를린의 극장 「샤우뷔네」도 역시 식자층 관객인 시민계층과 대학생들을 상대로 그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샤우뷔네」가 사설극장이면서도 국가의 재정적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점도 독일적 특색이다.

「샤우뷔네」의 설립과 발전 과정

「샤우뷔네」는 페터 슈타인이라는 연출가에 의해 주도되어 성장해 왔으며, '슈타인 그룹'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샤우뷔네」와 슈타인은 밀착되어 있다. 슈타인은 뮌헨에서부터 연극 활동을 시작했는데, 자신의 작업에서 만난 연기자, 스텝들과 지속적으로 연극 작업을 해 나감으로써 고유한 연극 집단을 구성했다. 슈타인의 연극 집단은 60년대 후반부터 출발하여 베를린에 정착하여 연극 활동을 전개했으며, 예술적인 성과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연극 작업 방식 및 단체의 조직과 운영의 측면에서도 여러 민주적인 개혁을 실행함으로써 독일의 다른 극단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슈타인의 뮌헨에서 1967년 에드워드 본드의 「구제되다」를 연출함으로써 데뷔를 했으며, 이어서 1968년에는 브레히트의 「도시의 정글 속에서」를 연출했다. 같은 해에 미국의 베트남 전쟁을 비판하는 페터바이스의 「베트남 담론(談論)」을 연출하여 보수적인 뮌헨 연극계의 큰 파문을 던졌고, 슈타인은 결국 뮌헨에서 연극 활동의 길이 막히게 되었다. 슈타인은 당시 유럽에서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때에 젊은 세대로서 보수적인 기성세대에 도전하고 비판을 하는 쪽에 속했던 것이다.

브레멘으로 간 슈타인은 1968년 쉴러의 「간계와 사랑」을 연출하고 나서 그 이듬해 괴테의「타소(Tasso)」를 연출하여 연극계로부터 대단한 주목을 끌었다. 그는 사회에서 작가의 역할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타소」를 연출했는데, 이는 괴테의 이 작품에서 새로운 측면을 부각시켰을 뿐만 아니라, 작가 괴테에 대해서도 '비정치적인 작가'라는 한계로부터 분명히 벗어날 수 있는 해석을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슈타인은 이 「타소」 작업 때 연기자들과 함께 토론하면서 연극 속에서 표현해야 할 테마를 발전시키는 일종의 공동 작업 체제를 시도했다. 또한 그는 이 작업을 하면서 훗날 「샤우뷔네」를 이끌어 갈 핵심적 멤버(연기자)들을 만나게 된다. 즉, 슈타인은 브레멘에서의 「타소」 연극을 통해 「샤우뷔네」를 이끌어 갈 사람들을 얻고 또한 같이 일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터득하게 되었다. 이 「타소」 작품은 후에 베를린에서도 여러 번 공연되어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샤우뷔네」가 베를린으로 오기 전, 그들은 취리히 시립극장에서 그곳 단원들과 같이 공연을 시도했다. 그러나 보수적인 취리히 극단 단원들과 슈타인 그룹의 집단 창조적인 작업 방식은 서로 갈등을 많이 일으키고 말았다. 슈타인과 그의 그룹은 프랑크푸르트에서 작업 장소를 물색하던 중, 1970년 서베를린으로부터 좋은 제안이 왔다. 좌파적인 사회민주당이 집권하던 당시의 서베를린 시의회는 슈타인 그룹에게 호의를 보이며 충분한 재정적 후원을 약속했으며, 좌파 성향의 작품들을 공연하던 극장인 「샤우뷔네 암 할레셴 우퍼」의 사용 문제도 순조롭게 해결되었다. 그래서 슈타인과 그의 동료 연출가 클라우드 파이만, 그리고 드라마쿠르그 디터 슈트룸이 이전의 극장들과 함께 극장감독위원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정권을 잡게 된 보수적 정당 기독교 민주당은 이 새로운 극장의 정치 비판적 노선을 못마땅하게 여겨 재정적 지원을 삭감, 「샤우뷔네」는 곤경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샤우뷔네」에 대한 사회의 주목이 그들에 대한 압박보다 더 컸던 까닭에 이 위기를 잘 넘길 수 있었다. 사실상 70년대 초반 이후 「샤우뷔네」는 이미 서베를린의 새롭고 주요한 문화적 동력으로 인정받고 문화계에서 확고하게 자신의 자리를 굳혔던 것이다.

그후「샤우뷔네」는 참신하고 혁신적인 두 젊은 연출가 페터 슈타인과 클라우스 미하엘 그뤼버와 함께 능력 있는 극단원들이 공동 작업을 통해 관객과 비평가의 주목을 많이 받았던 공연들을 보여주었다. 이 가운데 70년대에 유명했던 공연으로는 막심 고리키 원작, 브레히트 각색의 「어머니」(1970), 입센의 「페르귄트」ⅠⅡ(1971), 비뷔네프스키의 「낙관적 비극」(1972), 막심 고리키의 「여름 손님」(1974), 셰익스피어의「기억」ⅠⅡ(1976)와 「당신 뜻대로」(1977), 보토 슈트라우스의 「재회(再會)의 삼부작(三部作)」(1978)과 「크고, 작은」(1978), 그리고 객원 연출을 했던 미구인 로버트 윌슨의 「죽음, 파괴, 그리고 디트로이트」Ⅰ(1979) 등을 들 수 있다.

「샤우뷔네」가 종합예술 장르인 연극으로써 드라마, 무대 디자인, 의상, 연기 등의 분야에서 70년대 독일 문화계에 제시한 충격과 성과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러한 업적은 서베를린 시의회 문화성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고, 시의회는 「샤우뷔네」 단독 소유의 극장 건물을 세우는데 도움을 준다. 현재 「샤우뷔네」는 이 극장 건물에 들어 있는데, 이 건물은 1981년 건축가 멘델스존이 「샤우뷔네」의 독특한 연극을 위해 설계한 것으로 상당히 많은 경비를 들여서 건축되었다. 이 극장은 세 개의 공연장과 함께 여러 부대 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매우 현대적인 기술과 디자인이 동원되어 만들어졌다. 종전 후 경제 재건에 성공한 서독이 축적된 부를 문화적 시설에 투자하려는 듯, 정부의 막대한 후원 아래 건축가, 연극인들이 야심적으로 구상하여 지은 극장이다.

사실상, 분단된 도시였던 베를린에서 주요 연극 극장들이 동베를린으로 들어가고 브레히트가 동베를린으로 귀환해서 50년대에 「베를리너 앙상블」을 세계적인 극장으로 키워 놓고 있었던 것에 비해, 서베를린의 연극은 상대적으로 열세에 있었다. 그러던 중 60년대 이후에 「베를리너 앙상블」은 약화되고, 70년대 초반 이후에는 「샤우뷔네」가 좋은 공연을 보임으로써 동·서 베를린의 연극의 대결은 그 양상이 바뀌게 된 셈이었다. 분단된 시대에, 그것도 이데올로기 문제를 회피할 수 없는 장르인 연극에서 양 세계의 대결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으며 무시될 수도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80년대 이후 「샤우뷔네」는 더욱 더 실험적이고 종종 전위적인 연극과 고전의 새로운 연출로써 자신의 명성을 널리 퍼뜨릴 수 있었고, 서베를린를 연극 도시로 불리게 하는데 그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80년대에 크게 주목을 끌었던 공연들로는 에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1984, 공연 시간 9시간), 유진 오닐의 「털난 원숭이」(1986), 올림픽 극장에서의 희랍극 시도(1986), 보토 슈트라우스 시리즈 「공원」(1987)·「관광 안내원」(1988), 「시간과 방」(1990), 체홉 시리즈「세 자매」(1988)·「벚꽃 동산」(1989), 그리고 객원 연출자 안제이 와이더(폴란드)의 「죄와 벌」(1987, 도스토예프스키 원작)과 로버트 윌슨의 「죽음, 파괴, 그리고 디트로이트」Ⅱ(1989) 등이 있다.

슈타인은 1986년 샤우뷔네의 예술 감독직을 내놓게 되면서 그는 「샤우뷔네」에만 매어 있지 않고 이탈리아와 파리, 영국 등지에서 자유롭게 활동하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이 극단은 자연스럽게 다른 여러 연출자들과 작업할 기회가 많아졌고, 슈타인 체제에서 벗어나 또 다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것은 슈타인과 극단과의 관계가 악화됐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다른 나라의 연극인들과 함께 폭넓게 활동하고 자신의 연극 세계를 끊임없이 실험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슈타인은 가끔씩 베를린에서 와서 「샤우뷔네」의 연출을 맡기도 했으나, 사실상 이미 80년대 중반 이후에는 그뤼버와 룩 본디가 더 많이 연출을 하였다.

「샤우뷔네」는 정기적인 공연 이외에 이따금씩 해외 공연을 갖기도 했는데, 1988년 영국과 독일간의 「문화 교류 증진의 해」에 런던 등지에서 공연을 했으며, 페레스트로이카와 독일 통일을 맞아 1990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체홉의 「세 자매」(슈타인 연출)를 공연하기도 했다. 여기서, 「샤우뷔네」가 형식적으로는 사설극단이라해도 극장 건물을 나라에서 지어 주었고 극장 운영비의 3/4 가량을 베를린 시정부로부터 받아쓰고 있는 실정을 생각해 볼 대, 「샤우뷔네」가 국가의 문화 사절단 같은 임무를 띠고 외국 공연을 가야 하는 측면을 엿볼 수 있다.

극장의 구조

「샤우뷔네」극장은 크고 작은 3개의 공연장과 더불어 1층에 행정 사무실, 지하에는 무대장치 변화실, 의상실, 소방 시설, 전력측정실, 외투 보관 캐비닛, 화장실이 있으며, 2층은 컴퓨터로 작동되는 조명실, 음향실과 회의실, 연출자 무대 미술가 드라마쿠르그의 방들로 구성되어 있다. 연습실은 극장 건물 옆의 다른 건물 안에 있는데, 그 안에 공연장 A와 유사한 무대를 만들어 놓아서 항상 실제 공연을 염두 해 두면서 연습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세 무대 공간은 모두 크기가 다르고 무대와 객석이 모두 변형 가능하다. 이 세 공연장에서 동시에 공연이 되는 적은 없으며, 대부분 두 공연장에서 공연이 되고 있다. 공연장A는 가장 큰공간으로서 기본적으로 프로시니엄 무대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무대의 길이와 높이가 각각 20m이상이 되고, 객석은 2층으로 약 400∼500여 석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공연에 따라 무대가 넓게 사용되어야 할 경우에는 객석이 대폭 줄어들 수도 있고, 공연장의 좌우벽과 뒷벽도 열리게 되어 있어 무대 공간으로 사용될 수 있다. 심지어 천장도 무대 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공연장B와 C는 A보다는 약간 작은 공간인데, 그 크기가 중요한 차이는 아니고, 무대와 객석의 형태가 다른 것이 본질적인 차이점이다. 이 공연장B와 C는 서양의 전통적인 프로시니엄 무대를 부정하면서 필요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변화된다. 즉 소극장이 아니면서도(객석300∼400석) 공연에 따라 객석이 무대 양편에 자리잡거나, 鑁자 모양으로 될 수도 있고, 무대가 마름모꼴로 객석 가운데로 삐죽 나올 수도 있다. ( ) 이렇게 작품에 따라 독특한 공간을 설정함으로써 「샤우뷔네」는 원하는 무대효과를 노릴 수 있었으며, 그리하여 첨단적인 연극의 효시를 보여주었고, 무대와 객석 사이의 소통에도 새로운 단계를 정립시켰다. 오늘날 서양 연극이 무대와 객석 사이의 새로운 상호관계를 어떻게 맺을 것인가로 고민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샤우뷔네」의 이러한 노력들이 바로 서양 현대 연극의 실험장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연장A의 무대 밑에는 현대적인 무대 기술을 이용한 무대장치 변환용 기계 설비들이 있는데, 거대한 기어 장치와 도르래로 이루어진 이 설비들은 마치 공장의 그것을 연상케 한다. 이 기계들은 짧은 시간 내에 대형 무대장치들을 무대 위 아래로 교체시킬 수 있도록 도와준다. 또한 지하에는 소방 시설이 있는데, 화재 예방을 위해서 극장 내의 무대와 객석, 사무실에 설치된 온도계가 특정 온도 이상 올라갈 경우에는 자동적으로 전 극장 내에 있는 경보 장치가 울리게 되어 있고, 또 연기가 나면 어느 공간의 천장에 설치된 관에서 물이 나오도록 되어 있다.

극단의 조직과 운영

「샤우뷔네」극단의 설립에 있어서 기초가 되었던 「타소」 공연 작업에서 보여진 바와 같이 「샤우뷔네」의 작업 방식은 연출가 위주의 독재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 창조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내적으로도 민주주의적으로 움직이는 조직 형태이다. 연극 단체에서 이러한 조직 형태가 출현하게 된 것은 의심할 바 없이 60년대 말, 유럽에서 일어난 학생운동에 의한 사회개혁운동의 이념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슈타인은 이러한 운동과 같이 호흡하는 젊은 세대로서 여러 가지 개혁을 연극 집단 내에서 스스로 실천해 왔다. 그는 뮌헨 시절부터 사회 비판적인 연극을 주도했으며 극단 조직에 있어서도 민주적인 운영을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은 당시 서독의 보수적인 연극인과 문화 관료주의와 많이 부딪혀야 했으나, 젊은 연극의 기수로서 젊은 세대의 많은 지지를 받았다.

슈타인은 연극 작업에 있어서 민주적 진행을 위해서 연출가, 무대 미술가, 드라마투르그, 연기자들이 서로 아이디어를 내놓고 토의하면서 함께 연극을 만들어 가는 집단 창조 체제를 시도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드라마쿠르그라는 직책의 역할인데, 이는 드라마 작품에 대한 이론적 지식을 갖추고 분석을 할 수 있으며 실제 공연에서의 결과와 효과를 연결시켜 볼 줄도 아는 사람이 맡는 자리이다. 이 자리는 서양의 다른 나라 연극에서보다 특히 작품의 이론적 분석과 이해를 중시하는 독일 연극에서 중요하게 여겨져 왔는데, 「샤우뷔네」는 이를 더욱 강조한 것이다. 「샤우뷔네」의 70년대 작업들에서 극작가 보토슈트라우스가 드라마쿠르그를 맡아서 슈타인과 좋은 콤비를 이루어 공연을 해 왔던 것이 좋은 실례이다. 보토 슈트라우스는 이 작업에서 실제적인 많은 연극 경험을 쌓아 자신의 극작에 도움을 받기도 한다. 「샤우뷔네」의 수석 드라마투르그는 디터슈투룸이었으며, 그는 연기자들과 무대 기술자, 스텝들에게 작품 분석을 해주고 팜플렛과 공연용 대본 작성을 주도하는 등 작품 선정과 분석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극단의 운영에 있어서도 민주적인 방식이 도입되었다. 공동 작업을 위한 회의가 구성되었으며, '공동 결정(Mitbestimmung)' 제도가 실행되었다. 본래 이 공동 결정 제도는 노동조합운동에서 얻어진 것으로 회사 내에서 경영자와 노동자간의 협의 제도에 속하는 것인데, 「샤우뷔네」는 극단 운영을 위해 이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이 공동 결정 제도는 연극 작업의 참여자들이 작업 진행에 있어서 주요 결정 사항에 대해 자신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도록 한 것인데, 그럼으로써 참여 의식을 높이고 모두가 작업에 관심과 책임을 갖도록 하기 위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샤우뷔네」도 이 제도를 도입하여 정착시키기까지에는 몇 년이 걸렸으나, 그 이후에는 서독의 다른 극단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극단 운영의 민주화에 기여했다. 하지만 실상 이러한 운영체제는 「샤우뷔네」와 같은 사설극단에서 가능한 것이지, 전적으로 국가나 시정부에서 주는 돈으로 운영해야 하는 국립이나 시립극단의 경우에는 실현이 어려운 제도이다.

공동 결정 제도와 더불어 '전체 회의'라는 것이 또한 민주적인 운영 방식을 위한 제도였다. 이 회의에서는 연출가와 모든 연기자, 스텝, 기술진, 행정 직원이 참가해서 극단의 재정에 관한 운영과 공연 계획에 대해 토의를 한다. 그래서 극단의 재정과 발전 방향, 공연될 작품 등이 공개적으로 논의되고 발표된다. 그리고 이 회의에서 극단 지도부가 투표로서 선출되며, 지도부의 결정 사항에 대해 다수의 결의로써 거부할 수 잇는 비토(vito)권까지 있다. 이 회의에는 극단에 소속된 예술가, 행정 직원, 기술직 요원들이 모두 똑같이 한 표를 소유하며, 모든 회의는 기록이 되고 심포지엄이나 세미나처럼 발표와 토론을 통해 진행된다. 또한 전체 회의에서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연기자와 기술자 대표 각각 2명, 스태프와 행정 사무직 대표 각각 1명으로 구성되는 상임위원회를 조직한다. 이들은 각 분과 회의에서 선출된 일종의 대의원들로, 상임위원회에서 참여해서 자신의 속한 분과의 의견을 대변하고 결정 사항을 자기 분과의 단원들에게 신속히 전달할 의무가 있다.

이렇게 극단의 모든 단원들은 연습 작업뿐만 아니라 극단의 살림살이와 미래 계획에 직접·간접으로 관여함으로써 참여 의식을 높이고 한층 더 소속감을 느낄 수 있다. 다시 말해, 고도로 발달된 산업사회에서 노동이 분화됨으로써 발생하는 소외 현상을 극복하고 단원들 상호간에 연대감을 느끼게 하며 자신과 단체에 대한 거리감을 좁힐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모든 제도와 운영 방식들은 이성적인 의사소통과 상호 존중에 근거를 둔 성숙한 민주적 의식을 전제로 함은 당연하다.

주요 공연들

패터 슈타인과 클라우스 미하엘 그뤼버가 주로 연출을 담당했고 칼 에른스트헹만이 무대장치를 맡아 왔던 「샤우뷔네」의 연극들은 무엇보다도 새로운 공간 미학의 창출이 그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초창기의 공연 「어머니」,「페르귄트」Ⅰ,Ⅱ,「낙관적 비극」,「프리드리히 폰 홈부르크 왕자」 등과 보토 슈트라우스와 셰익스피어 시리즈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슈타인과 그뤼버는 과거의 사실주의적 장치를 포기하고 상징적이고도 유동적이고 압축된 의미를 표현하는 무대 디자인과 조명으로써 독특한 공간 감각을 부여하는 무대를 만들어 냈다. 이는 열려진 무대 공간과 현대적 무대 기술과 디자인의 혼합으로 보아질 수 있다.

막심 고리키의 「여름 손님」에서 야외 들판에서 공연을 시도함으로써 공연 공간을 실내에서 실외로 넓혔으며, 셰익스피어의 「당신 뜻대로」 공연 때는 영화 스튜디오를 빌려서 그 스튜디오의 특이한 실내 구조를 이용하기도 했고, 희랍극 시리즈를 위해서는 장치가 거의 없는 '공허한 무대 공간'을 사용했다. 또한 그뤼버가 연출한 「히페리온」(1977)에서는 올림픽 경기장에서 연극을 시도했고, 이 실험은 80년대 희랍극 프로젝트에서도 계속된다. 그런가 하면 공장 지대나 창고, 기업체(필립스)의 연수장, 길거리 등에서도 「샤우뷔네」의 연극은 시도되어 폭넓은 공간 활용을 보여주었다. 희랍극 시리즈 가운데서 슈타인이 연출한 「오레스테이아」는 장장 9시간에 걸쳐 공연된 대작품이고, 로마에서는 고대 희랍식의 극장에서 공연되기도 했다.

이와는 달리 한트케의 「보덴 호수 위로의 기행(騎行)」과 「비이성적인 자들은 사멸한다」, 보토 슈트라우스와 체홉 작품 시리즈, 유진 오닐의 「털난 원숭이」 등과 로버트 윌슨의 「죽음, 파괴, 그리고 디트로이트」Ⅰ,Ⅱ에서는 매우 첨단적인 무대장치 테크닉과 효과가 동원되어 미래의 연극을 엿볼 수 있게 했다. 특히 미국의 유명한 연출가 로버트 윌슨이 객원 연출을 맡았던 「죽음, 파괴, 그리고 디트로이트」에서는 무대 공간과 객석의 구별이 없어지고, 극장 내의 모든 벽과 천장, 바닥마저 연극을 위한 무대가 되는, 특이한 무대장치와 효과로써 전위적인 연극을 경험케 했다.

「샤우뷔네」는 이와 같은 다양한 실험적 무대와 고전극 시리즈, 현대극 공연의 시도 이외에도 「고전 강독의 밤」도 마련하고 있는데, 이 행사에서는 「샤우뷔네」의 배우들이 직접 나와서 무대장치가 어느 정도 되어 있는 공간에서 작품 낭독을 한다.

전망과 비판

지난 20여 년간의 작업을 통하여 「샤우뷔네」는 독일의 현대 연극에 예술적으로나, 극단 조직 운영의 측면에서도 많은 혁신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들의 공연 작품들 또한 60년대 말과 70년대 초, 정치 비판적 시대 상황에서 젊은 세대와 호흡을 같이 하는 사회 참여적인 연극을 공연했었다. 이들 공연 가운데는 서독 사회를 비판하는 것, 제1세계의 제3세계 지배와 착취를 비판하는 것, 여성 해방을 위한 것, 서구 자본주의 비판을 위한 것 등이 있었다. 그러나 서독, 혹은 서구 사회에서 70년대 중반 이후 비정치적인 분위기가 우세하게 흐르게 되면서, 「샤우뷔네」의 연극 역시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서 개인적, 사적인 문제로 옮아가게 되었다.

그러한 것의 대표적인 것이 보토 슈투라우스의 작품 시리즈로서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비정치적이고 개인주의화된 서독 시민계층(부르주아)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었는데, 슈타인은 70년대 후반 이후 슈트라우스의 작품 시리즈를 마련했었다. 80년대 슈타인의 체홉 시리즈도 역시 당대의 서독 시민사회 즉 풍요로운, 그라나 정신적 가치가 표류하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서독인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로버트 윌슨의 「디트로이트」시리즈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즘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연극이었다.

이러한 흐름에서 60년대 말, 70년대 초반에 젊은 세대로서 민주적 의식과 함께 사회 비판적인 연극으로 출발했던 슈타인이 변모되어 온 양상이 보인다. 슈타인 역시 80년대 후반에는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정치에 무관심해진 부르주아 계층의 일원이 되었으므로, 그의 연극은 자신의 속한 사회를 묘사해 온 셈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정치 비판,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현재 서독 사회에서 연극은 비판 없이 미학적 실험만 추구할 것인지, 형식적 기교주의가 되어 갈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예술적 개혁과 목표 설정과 더불어 또 다른 연극 혁신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지 하는 문제가 지금 바로 「샤우뷔네」가 당면한 문제이며 90년대의 과제일 것이다. 또한 그것은 오늘날 독일 연극의 문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