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연극의 선택
김의경 / 극작가
1991년 「연극의 해」도 4분의 3이 지나갔다. 보는 눈에 따라 평가가 다르겠지만 우리는 전례 없이 많은 일들을 했다. 알찬 것도 있었고 요란한 일도 있었다. 값진 열매도 있었으며 고개를 갸웃거릴 만할 과실도 없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쉬웠던 것은 거의 대부분의 공연이 훌륭하였으면서도 '이 한 작품 !'하고 만인이 우러러 꼽을 만한 무대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제 곧 91년의 결산의 시각 온다. 그리고는 '올해도 역시'하면서 연극계의 불모성을 탓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연극인의 게으름이나 무능력을 두둔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공간의 히트작'이란 그리 흔치 않은 법이다.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앤드에서도, 유명한 프로듀서 작가 작곡가들도, 올리는 작품마다 히트하는 법이란 없다. 한국의 연극 인구가 2천여 명이라면 뉴욕 런던은 50배 이상의 연극 인구일 것이고 따라서 무대에 나타나는 결과도, 반드시 인구비례를 내세울 수야 없겠으나, 우리의 명작에의 기대감을 충족시키기에는 무리라고 해야겠다.
우리 연극계가 안고 있는 문제는 물론 셀 수 없이 많다. 평가자에 따라 선택의 여지도 없다. 나는 이 자리에서 우리 극단들의 성격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자 한다.
우리의 극단들은 90%가 아마추어이지만 동시에 99%가 상업극단이다. 자기의 재산을 내어 놓거나 공공차원의 지원으로 연극이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어야(물론 최소한의 유지비를 버는 것이지만) 극단이 존립할 수 잇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연극 '예술'을 논의하고 그 실험성을 운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옛날부터 주장되어온 것이지만 우리 극계는 아마추어와 프로페셔널의 '구분'이라기보다는 '자기본색(自己本色)의 확립'이 시급하다. 물론 이에 따르는 지원방법도 알맞게 개정되어야 하겠다.
아마추어 연극은 경제여건을 제외하고는 현재의 극장 인력, 관객 등이 부담할만하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몇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우선(아마추어) 극단은 극장을 가질 것(50석 짜리 공간이라도 좋다), 최소 5년 이상의 경력 배우를 10명 이상 보유할 것, 연 1억 원 정도의 경비는 자체 부담, 입장료, 기부금, 지원금 등으로 충당할 수 있을 것 등이다.(새로 시작하는 연극학도들은 먼저 이 극단에 들어와 수련을 쌓으면서 멤버십을 확보할 것이며, 무조건 극단을 만들어 흥행부터 하려는 무모한 행위를 삼가는 것이 좋다.)
극단의 리더들은 예술적으로 도덕적으로 과학적으로 자신을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마추어 연극이라 해서 그 연극이 예술작품이 아니어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예술정신이 함박 깃든, 실험정신이 충만한, 힘의 에네르기가 흘러 넘치는 젊은 연극이 이 사회에 필요하다.
이들의 연극은 오늘날의 이 사회를 분석하고 비판하고 질타하며 혹은 옹호를 할 수 있는 정열과 양심과 건강을 필요로 한다. 정부와 사회는 이들의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해주어야 한다. 아마추어 연극은 영업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대신 사회의 보호를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프로페셔널 연극은 전문연극인, 직업연극인의 창조한다. 이들은 10년, 20년 연극에 전념하면서 모진 시련을 겪은 사람들이다. 이들이 흘린 땀은 한국 연극의 오늘까지의 존립을 위해 뿌려졌다. 이들에게는 새로운 일거리가 필요하고 보다 안정된 일자리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이들에게는 예술 혼이 깃든 장인 기질로서 한국 연극의 새 지평을 열어야 할 의무가 있다.
프로극단, 즉 전문극단은 최소 10년 이상 경력 연극인을 30명 이상 확보해야 한다. 연 6∼8편의 연극을 가지고 400일 이상 공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며 배우 개인적으로는 연 200회 이상 무대에 서야 할 것이다. 전문극단의 주재자는 사무실과 연습실을 겸비한 공간을 제공할 수 있고 연 6억 원 이상의 경비를 조달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는 지출과 수입의 밸런스를 유지할 책임을 가진다. 그가 정상적 운영을 위해, 즉 돈을 벌기 위해 애쓴다고 해서 비난할 사람은 없다. 작품의 예술성에 비해 돈이 많이 벌렸어도 비난하지 않는다. 돈은 못 벌었으나 번번이 훌륭한 작품을 올린다면 그에 대한 동정과 존경은 사뭇 클 것이다. 그러나 돈도 벌고 예술적 성과마저 높다면 머지않아 은퇴해야 할 것이다.
이상의 '전문극단설(說)'은 듣는 이에 따라 황당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라는 반응이 아니라면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이 튀어나올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한마디로 끝내기에는 어딘가 꺼림칙한 것도 사실일 것이다.
전문극단의 조직이 이상과 같은 조건이라면 우선 쉽게는 착수될 수 없다. 그러나 제2, 제3의 전문연극인을 위한 방안은 없을 것인가 ? 전문극단과 전문연극은 구분할 필요는 있으며 우리들이 끊임없이 논의해온 프로듀서 시스템의 도입은 가능할는지 모른다. 법제상의 지원이 불가결한 문제이지만 우리는 구미의 프로듀서 시스템의 원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A씨는 상업적 가치가 훌륭한 극본을 준비한다. 가장 적합한 연출자와 주역배우를 섭외하고 디자이너를 결정한다. 이 작품의 제작비(막을 열기까지의 경비)가 산출되면 이를 공표하고 이 흥행에 참여할 자본주를 찾는다. 자본주들은 1백만 원부터(규정에 따라) 1천만 원을 투자하고 소요 제작비가 전부 입금되면 이 공연을 위한 시한회사가 설립, 등기된다. 제작자는 제작업무를 이때부터 개시해서 예정에 따라 진행한다.
개막이 되면 진행 경비(대관료, 급료, 인건비, 선전비 등)를 제외한 금액을 약속에 따라 자본주들에게 반급(返給)하기 시작하며, 제작비 전부가 회수되고도 공연이 지속되면 이익금의 50%는 계속 투자자들에게 이익 배당으로서 지급된다. 나머지 50%는 제작자와 그 시한회사가 몫이 된다.
모든 공연이 이익을 낼 수는 없는 법이다. 따라서 수입 지출의 차액이 제로일 때 투자자들은 원금만을 회수하는데 그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흥행이 망했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 이들의 투자액을 공익투자로 인정하고 면세해 주는 방식으로 법제조치가 선행되어야 한다.
너무 간단히 기술했으나, 이러한 방식은 개인 아닌 여러 투자자에 의해 제작비 조달을 용이하게 유도하는 장점이 있고 이것이 결손의 결과를 가져올 경우 개인별 피해액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다는 더 큰 장점이 있다. 그 공연이 큰 성공을 했을 경우 그 막대한 이익금은 역시 여러 사람에게 분배되어 수익의 편중도 막는다는 경제원리이다.
한국의 현실을 곰곰이 분석하면 이제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의 무대작품을 완성할 수 있는 제 여건이 무르익고 있다고 믿어진다. 개인간의 호·불호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있기 마련이지만, 한국에 훌륭한 연극 작품이 탄생될 수 있도록, 객관적인 문화활동의 참여가 이루어질 수 있는 숙련된 시대로 우리가 진입하고 있지 않나 느껴지는 것이다.
우리 연극인들은 지금까지 연극을 위해 할 짓 못할 짓 다해왔다. 과거로부터 지금까지의 이 부조리한 형태를 문화적으로 개선할 수 없을 것인가 ? 마지못해 던져주는 한푼이 아니라 시민 전체의 뜻이 담긴 '창조역의 참여'라는 세련미를 우리가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연극은 아마추어 연극을 그대로 살리고 다시 프로페셔널 연극을 그 위에 일으키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부담할 수 없는 사람은 물러 가라가 아니라, 스스로 알맞은 위치를 찾아 한국 연극의 정로(正路)를 여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한 때다.
1991년 「연극의 해」를 거의 보내며 이 해에는 연극과 연극인의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룩했다고 누구나가 기억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한국 연극의 선택-그것은 현재의 수준을 한 차원 완전히 뛰어넘는 투자와 노력을 의미한다. 현재의 미덥지 않은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지평위에서 전혀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