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르포

창작극의 자기갱신을 절감한 제16회 「서울 연극제」

- 8편의 공식 참가 작품을 중심으로




이상우 / 연극평론가

우리 연극계의 최대축제인 제15회 「서울 연극제」가 「연극의 해」를 맞아 한층 폭 넓고 다채로운 행사로 펼쳐졌다. 9월 1일부터 10월 30일까지 비교적 장기간에 걸쳐 기존의 공식초청작과 경연작 10편 외에도 자유참가작 20편과 더불어 「아시아·태평양 연극제」의 해외참가작 7편이 포함되어 서울시 전역에 걸친 공연장에서 총 37편의 작품이 상연되었다. 참가 작품이나 극단의 규모, 행사기간, 공연장 범위, 지원비 등을 따져볼 때, 가히 「서울연극제」사상 최대 규모의 연극잔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정도의 행사 규모라면 과연 「연극의 해」라는 이름에 걸맞은 「서울연극제」가 치러진 듯 하다. 관객의 입장에서 보자면 정부가 지원하는 반액 할인의 '서울티켓'으로 홍수처럼 넘치는 연극사태를 만끽하며 마음껏 공연장을 찾을 수 있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극단측의 입장에서도 지난 봄 「사랑의 연극잔치」에서 이어 또 한번의 대규모 연극잔치가 벌여져 쉴 사이 없는 연극 붐의 조성으로 관객 유치의 호기를 맞을 수 있게 되었다. 그야말로 1991년 한 해는 연극계 관계자나 연극인, 관객 모두에게 '기쁜 우리 연극의 해'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마냥 즐거워할 수만은 없는 석연치 않음이 우리에게 늘 떠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 잔치 끝에 남는 끝 모를 적조함의 정체는 왜 우리 연극계를 늘 허전하게 만드는 것일까 ? 이제 우리는 담담히 잔칫상을 걷어치우며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할 지점에 와 있다. 이번 제15회 「서울 연극제」를 돌아보고 그 고민의 일부를 떠맡게 된 필자의 소감 또한 우리 연극인 모두가 애쓴 연극제였지만 뭔가 깊은 아쉬움을 갖게 되었다는 점은 역시 다를 바가 없다.

유난히도 찬란했던 제15회 「서울연극제」를 마감하는 허전함과 아쉬움의 정체는 무엇보다도 창작극의 수준 미흡에 있다고 본다. 모름지기 한 나라의 연극 수준은 창작극의 수준과 성과에 가늠된다. 우리 삶을, 우리의 상상력을 통해 우리의 언어와 몸짓으로 무대화하는 창작극의 소중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러한 원론적 시선으로 「서울연극제」 공식경연작 8편과 자유참가작 10편의 창작극을 일별 해 보아도 이번 「서울연극제」는 역시 수준 미달의 창작극 행진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는 창작극의 전반적 수준과 성과를 두고 하는 말이지 반드시 모든 작품에 두루 적용하는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는 결코 아니다. 자유참가작 중에서 만도 우리의 일상을 전쟁심리 구조로 파헤친 극단 작은 신화의 「전쟁 음?악!」(공동창작/ 최용훈 연출)과 1912년부터 1945년까지 미발표 우수 창작극을 발굴, 재조명한 극단 연우무대의 「한국현대연극의 재발견」(조일재,·유진오·함세덕·송영 작/ 김석만·오종우·박원근 연출) 등과 같은 의욕적이고도 의미 깊은 창작극들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창작극의 젊은 의식과 용기는 자리를 달리하여 충분히 고무 받고 격려되어질 필요가 있다.

한편 이번 「서울연극제」의 공식초청작품으로는 제9회 「전국연극제」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극단 속초 파람불의 「한씨 연대기」(김석만·오인두 극본/ 홍연 연출)와 소련 알마아타 국립조선극장의 「지옥의 종소리」(연성용 작/이올레그진 블라지미르 연출) 등 3편이 있었다. 이중 특히 인상적인 작품으로 알마아타의 「나무를 흔들지 마라」를 꼽을 수 있다. 이 작품은 6·25 전쟁을 배경으로 극한 상황에 놓인 남북한의 두 병사가 적대감과 갈등을 차츰 씻어버리고 마침내 한 핏줄 한 민족임을 깨닫게 된다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 홍수라는 천재지변 속에서 한 그루의 나무에 함께 몸을 의탁한 남북한의 두 젊은이가 빚어내는 미묘한 갈등과 인간다운 화합의 정서는 이념과 체제를 떠난 민족 화해의 갈망을 감동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서 남북한 연극의 이질성 극복을 위한 새로운 가능성과 단서를 모색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8월 31일부터 10월 10일에 걸쳐 문예회관, 대·소극장에서 펼쳐진 40일간의 대장정「서울연극제」의 공식 참가작 8편을 살펴보자. 공식참가작으로는 실연심사를 거친 극단 춘추의 「막차 탄 동기동창」, 극단 맥토의 「카르멘시타」, 그리고 극단 목화의 「심청이는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 등 3편과 더불어 희곡심사로 참가한 여인극장의 「화분이 있는 집사람들」, 실험극장의「뉴욕에 사는 차이나맨의 하루」, 극단 민예의 「당신들의 방울」, 현대극장의 「길 떠나는 가족」, 극단 성좌의 「사파리의 흉상」 등 5편, 총 8편이 열띤 경연을 벌인 바 있다. 경연작 8편의 주목할 만한 특징을 든다면, 우선 예년에 비해 작품의 내용과 양식면에서 모두 저마다의 개성과 의욕이 넘치는 작품들이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또 이전의 경연작들이 87년 시민혁명 이래로 사회적, 정치적 성향이 농후했던데 비해 올해는 그러한 목소리가 다소 누그러졌으며 그 표현 방식도 달리 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면 이제 이 8편의 경연작들을 각각 섭렵해 보면서 그 면모를 따져보는 일만 남은 것 같다.

「화분이 있는 집사람들」 (문예회관 대극장, 9월 3∼8일)

극단 여인극장의 「화분이 있는 집사람들」(박제홍 작/ 강유정 연출)은 어느 달동네 판잣집에 모여 사는 소시민들의 일상적 삶을 통해 그들의 인간적 소외와 애환을 사실적 터치로 다룬 정통 리얼리즘극이다. 시원스런 대극장 무대 위에 사실적으로 꾸며진 세트와 소도구들은 극중 인물들이 처해 있는 빈한한 가계의 실상을 한 눈에 보여준다. 따라서 관객은 쉽게 극적 가상에 몰입하여 극을 즐길 수 있지만 50년대식 멜로드라마에서 느껴지는 따분함도 함께 하게 된다.

판잣집의 단칸방에 세 들어 사는 세일즈맨 오일도(방영 분)의 가족은 주인집 노부부의 주인 행세에 서글픈 애환을 겪으며 살아간다. 오일도의 아내(김민정 분)는 내 집 마련의 소박한 꿈을 '화분'에 키우며 성실하게 이웃과 더불어 사는 소시민이다. 함께 세 들어 사는 방송극 엑스트라 청년(서상철 분)과 술집에 나가는 처녀(전국향 분)에게는 그녀는 늘 따뜻한 인간관계를 맺는다. 때로는 주인집 노파(박승태 분)의 억척스런 몰인정에 서글픔을 겪거나 갈등을 빚기도 하지만 그래도 알뜰한 희망만은 잃지 않는다. 한편, 남편 오일도는 오랜 세일즈맨의 일상에 지쳐있던 참에 회사의 노사분규에 우연찮게 개입하게 되고 이로 인해 노사관계의 모순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회사 간부인 그의 사촌형과 갈등을 빚게 되고 마침내 못 가진 자의 설움을 절규하며 새 세상을 꿈꾸게 된다.

극은 대체로 전반부의 잔잔함에서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거칠고 생경해진다. 전반부에서는 주로 오일도의 가족과 주인집 노부부가 빚어내는 잔잔한 긴장과 애환이 일상적 터치로 그려져 무리 없는 소시민상의 묘사가 가능했다. 주인집 노인(김길호 분)의 능청스런 바람기나 호기도 매우 자연스러웠고 노파의 속물근성도 그리 편파적으로 그려지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할들이 선악의 도식적 대립구조만을 보여주지 않고 인간의 보편적 정서에까지 이르는 섬세한 묘사에 이른 점은 매우 성공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극은 후반부에 오면서 다소 파탄되는 면을 보여준다. 그것은 오일도의 갑작스런 급진적 변모가 충분한 개연성을 바탕에 깔고 있지 않아 구호적 차원의 '광분 분노' 이상으로 어떤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오랫동안 진보적 민중연극을 해온 작가 박제홍이 이 작품에서 전반부에 감추고 있던 자신의 세계관을 후반부에서 다소 성급하게 몰아치려고 했기 때문에 빚어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작품에서 돋보이는 점으로 김길호의 능청스런 연기의 묘미를 꼽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잔잔한 일상적 애환을 통해 소시민의 정서를 잘 소화해낸 김민정의 연기에도 주목할 가치가 있다.

「막차 탄 동기동창」 (문예회관 소극장, 8월 31일∼9월 12일)

극단 춘추의 「막차 탄 동기동창」(이근삼 작/문고헌 연출)은 서로 살아온 이력이 다른 노후의 두 동창생이 47년만에 만나서 겪게 되는 갈등과 화해의 정서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만년의 쓸쓸함을 외딴 산골집에서 독서로 소일하며 살아가는 김대부(오현경 분)에게 어느 날 초등학교 동창생 오달(허현호 분)이 느닷없이 찾아온다. 47년 동안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이 동창생에게 서먹한 느낌을 갖게 되는 김대부는 점점 자신과의 상이한 이질감을 발견하게 된다. 인텔리 출신의 점잖은 김대부는 오달의 천박한 순수함에 당황하게 되지만 어쩔 수 없이 불편한 동거생활을 시작한다. 뜻하지 않은 처녀 무당의 출현으로 인해 두 사람 사이는 다시 미묘한 갈등이 빚어진다. 그래도 김대부에게는 미국에 사는 그의 유일한 친구가 곧 귀국하리라는 소식이 커다란 안도감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친구가 미국에서 자살했다는 연락에 접하고 김대부는 허탈감에 빠진다. 그에게 이제 남은 친구라고는 지나온 인생역정이 너무도 다른 초등학교 동창 오달 밖에 없는 셈이다.

김대부는 작품에서 시종 자신이 수십 년 동안 이룩한 엘리트적 지위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인물로 그려져 있다. 반면 오달은 초등학교 시절의 천진난만한 순수함으로 김대부를 대하려 한다. 김대부의 오달에 대한 거리감 유지는 자신이 쌓아온 인생의 값어치를 지키려는 일종의 계층보호 본능이다. 이는 밑바닥 인생으로 점철된 오달의 끈질긴 민중적 생명력과 접하면서 내내 팽팽한 긴장감을 갖게 하지만, 마침 내 두 사람은 함께 절감하는 노년의 고독감과 무기력한 절망감에 서로 화해하게 된다. 하나의 고독한 개체로 남은 두 사람이 도달한 인간화해의 경지는 애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정적인 무대 분위기 속에서 미세한 인간의 내면 심리 묘사와 내면 갈등의 잔잔한 터치가 돋보인 작품이다. 이는 물론 오현경, 허현호 두 연기자의 원숙한 기량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지 신진 연기자로서는 제대로 소화해내기 어려운 작품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다소 불필요해 보이는 처녀 무당의 호들갑스러움이나 인물의 내면 풍경을 보다 커다란 연출 시각으로 잡아내지 못한 점은 이 작품을 여전히 아쉬운 소품으로 남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뉴욕에 사는 차이나맨의 하루」 (문예회관 대극장, 9월 10∼15일)

극작가 강월도가 쓰고 윤호진이 연출한 극단 실험극장의 「뉴욕에 사는 차이나맨의 하루」는 현대 산업사회의 메카인 뉴욕 중심가 맨해튼의 어느 복사가게를 무대배경으로 펼쳐지는 작품이다. 고도로 발달한 현대 산업문명의 심장부에서 그것도 전자복사기계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극적 사건이라는 점은 충분한 호기심을 자아낼 만큼 이채롭다. UBM이라는 큼직한 상호가 쓰여진 복사가게는 대극장 무대의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앉아 보는 이로 하여금 과학문명의 위력 앞에 절로 압도하게 만든다. 이것은 고도 산업사회가 우리 현대인에게 엄습하는 실존적 삶의 압력이라는 점을 상기시켜주는 거대한 오브제로 작용한다. 미국에 이민한 한국 교포 챨리(신구분)는 복사가게를 경영하며 첨예한 미국 자본주의의 틈바구니에서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아간다. 그는 열심히 번 돈으로 무위자연의 세계로 돌아갈 것을 설계하기도 하지만 현실의 위태롭고 불안한 일상사에 고민한다. 따라서 그는 훔친 타자기를 싼값에 넘기는 흑인 타이거(장기용 분)의 강력한 유혹이 범죄 행위임을 알면서도 이를 뿌리치지 못할 만큼 미국 사회의 악마성에 길들어진 인물이다.

어느 날 칼럼니스트 렉스(홍계일 분)가 베트남 전쟁에 대한 폭로기사를 쓰기 위해 미 국방성에서 빼돌린 다량의 기밀문서를 복사하기 위해 챨리의 복사가게에 들이닥친다. 그는 챨리가 거절 못할 파격적인 조건으로 복사기를 빌려 스스로 복사작업을 진행한다. 그는 자신의 문명을 날리기 위한 탈법적 행위를 진실을 밝히기 위한 일로 합리화하는 세속적 욕망의 소유자다.

때마침 챨리의 범죄를 눈치채고 복사가게에 들이닥친 형사들 앞에 타이거가 나타나자 이들 사이에는 순식간에 총격전이 벌여져 찰리는 총상을 입고 죽게된다. 이 소동 속에서도 태연히 기밀문서를 복사하는 렉스의 비정함, 이것이 현대 미국, 아니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삶의 비정한 존재 방식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일간지에 이미 폭로되어 버린 기사를 보고 렉스의 비정상적 욕망은 그만 물거품이 되고 만다.

결국 이 작품은 챨리와 렉스라는 동, 서양 두 인물의 욕망의 대비를 통해서 현대 문명사회의 위압적 마성과 인간적 황폐화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첨단의 문명적 공간을 복사점으로 설정하여 세련된 대사와 기법을 드러내는 극작과 연출의 힘은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극의 흐름을 끊어놓는 서사적 장면들의 부자연스러움과 무국적의 작품성은 다소 문제점을 남기는 것으로 지적될 수 있다.

「당신들의 방울」 (문예회관 대극장, 9월 17∼20일)

최인석이 쓰고 강영결이 연출한 극단민예의 「당신들의 방울」은 고전적 소재를 바탕으로 현실을 풍자하는 알레고리적 수법의 희극이다. 다분히 동화적 세계의 무대화를 통해 작가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우화적 무대어법이 재미있고 앙징스럽다. 이 작품은 무대설치에서부터 대극장의 큰 무대를 텅 빈 공간으로 남겨 놓은 채 관가의 동헌, 백성의 집 등을 동화책 같은 걸개그림의 사용으로 한껏 동화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연기자들의 몸짓과 대사의 처리도 역시 이러한 우화적 분위기에 함께 조율되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분위기 속에 작품의 시공간을 역사로부터 자유로운 진공상태에 머물러 있다. 어느 고을에 신임 사또(최재영 분)가 부임해 온다. 그는 주색잡기에 탐닉하며 백성들에게 가렴주구를 일삼는 부패관리다. 그의 호색취미에 사랑하는 여자를 관기로 빼앗기게 된 청년(유영환 분)은 꾀를 내어 사또의 약점을 잡아내고 이를 이용하여 그를 곤경에 빠뜨린다.

대역죄 '상소문'이라는 엄청난 약점을 잡힌 사또는 어쩔 수 없이 고을 백성들에게 선정을 약속하며 그들로부터 추천된 서리들을 등용하여 의회적 민주정치를 펴게된다. 여기서 사또의 약점은 그야말로 '고양이 목의 방울'이 된 셈이고 이를 지혜롭게 이용한 백성들은 사또가 선정을 펴게끔 강요하는 압력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극의 내용은 포악한 권력의 횡포에 민중의 지혜로 맞서 이를 응징하되 결국 혁명적인 귀결이 아닌 계급 화해적이고 개혁적인 모순해결이라는 작가의 시각을 감지하게 해준다. 지배자의 잘못을 계도하여 올바른 선정으로 유도한다는 의회 민주주의적 지향은 우리사회의 변혁 운동론자들에 대해 던지는 작가의 비판적 메시지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대형무대의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못한 점과 작품의 우화적 기능을 현실로까지 밀착, 확장시켜 보여주지 못한 연출의 미흡함과 동화적 상상력의 세계를 더 이상 극복하지 못한 작가의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해설자 윤주일의 기량이 더욱 폭넓게 작용한 점은 작품의 인식적 기능을 위해 바람직하게 보여진다.

「심청이는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 (문예회관 소극장, 9월 14∼26일)

「심청이는… 」(오태석 작/ 연출)는 심청 설화를 현대적으로 패러디화한 독특한 작품으로 잔혹극적이고 부조리극적이며 표현주의적인 다양한 연극기법들로 채워진 흥미로운 무대다. 애초에 극적 가상을 배제하고 소극장 무대를 어수선하게 대형욕조와 포장박스, 인형들로 가득 채운 무대공간은 이미 연출가에 의해 치밀하게 계산된 흐트러짐임을 곧 알게 해준다. 지상에 올라가 왕후가 되는 것을 거절하고 세상 구경하기를 간청하는 심청이(진영아 분)를 데리고 용왕(정진각 분)은 혼탁한 세상 나들이에 나선다. 이들은 농촌에서 소를 키우다 몰락하고 상경한 가판원 윤세명(정원중 분)을 만나게 된다. 용왕은 이 가련한 청년에게 시련을 떠맡기게 된다.

소매치기에게 아킬레스건을 찔려 부상당한 청년은 악당 인수의 제안으로 화염병 제조사업을 하게 되고 이를 막기 위해 심청이 불을 내는 바람에 그만 청년은 끔직한 화상을 입게 된다. 먹고 살길이 막연해진 청년은 백가면을 쓰고 공을 맞는 인간 타겟이 된다. 피를 토하며 공을 맞는 청년의 처절함 몸부림은 현대사회의 비극을 웅변으로 상징한다.

방화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출감한 용왕은 청년을 위해 새우잡이배를 주선한다. 그러나 인신매매단에 끌려갔다 구출되는 사건을 계기로 용왕은 비정한 세상의 생존 방식을 터득해 창녀들을 새우배에 태우고 매춘행위에 나선다. 청년도 이들을 볼모로 해상에 세상을 향해 흥정을 벌이며 이들을 위해 돈을 내는 독지가가 전화해 주길 기다린다. 그러나 아무도 이들을 위해 전화하지 않는다. 온갖 사악함에 물든 세상 사람들의 눈뜸을 위해 심청은 다시 바다 속으로 투신한다. 이 결말은 세상을 향한 한 인간의 대속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세상은 바뀌지 않음을 보여주는 비극적 상징인 셈이다.

이 작품은 이러한 믿음에 대한 배반과 전복을 통해 현재 우리가 처한 삶의 비극성을 역설적으로 아프게 깨닫게 해준다.(세상을 구원해주리라 기대되던 용왕마저도 세상과 더불어 함께 혼탁해지는 것은 일말의 구원에 대한 기대마저도 철저히 배반해 버린다) 세상의 혼돈과 어두움을 어지럽게 배열된 소도구들의 활용을 통해 적절히 보여주고 배우들의 땀내 나는 뜨거운 연기로 무대를 가득 채워 나간 무대로 모처럼 만에 오태석의 역량을 다시금 확인하게 해주는 작품이었다.

「카르멘 시타」 (문예회관 대극장, 9월24-29일)

극단 맥토의 「카르멘 시타」(이찬규 작/ 이종훈 연출)는 비제의 원작 오페라 「카르멘」의 모티브를 원용하여 재창조한 록 뮤지컬로 감각적이고 현란한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무대였다. 열악한 우리 연극 현실에서 엄청난 제작비가 투입되는 뮤지컬의 모험을 다소 덜기 위해 작가는 안전하게 서구 오페라의 모티프에 기댄 것으로 보여진다. 어쨌든 이 작품을 보면서 특정극단 몇 개를 제외하고 우리 연극계가 감당해내는 대형 뮤지컬의 토착화 작업이 매우 곤고한 것임을 느끼게 해준다.

이 작품의 구성은 영락해 가는 현실의 늙은 배우 강민우(임동진 분)가 자신의 재기를 꿈꾸며 뮤지컬 드라마 「카르멘」을 준비하는 예술적 투혼과 극중극으로 전개되는 「카르멘」 연습장면에서 극중 인물로 몰입되어 나타나는 돈 호세의 사랑과 질투라는 두 개의 극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즉, 배우 강민우에게는 현실세계와 극적 가상의 세계가 서로 넘나드는 등가적 관계임을 보여준다. 그는 '배우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별'이라는 환상을 가질 만큼 예술 도착증세가 심각하다. 그것은 자꾸만 퇴락해 가는 자신의 인기에 대한 편집광적 자의식에 근거한다. 재기를 노리며 「카르멘」 공연을 준비하던 중 그는 한 눈에 반해버린 어린 여배우(허윤정 분)에게 카르멘 역을 맡긴다. 그녀와 더욱 깊은 사랑에 빠지면서 그는 자신을 '돈 호세'로 그녀를 '카르멘'으로 점점 동일시하게 된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라이벌인 인기스타 지염민이 극중에서 '카르멘'의 마음을 빼앗자 질투심에 불타 마지막 공연 중 그녀를 살해하고 만다. 「카르멘 시타」는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적 구성에 예술가적 투혼을 덧입힘으로써 뮤지컬 드라마에 취약하기 마련인 예술성의 제고를 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극중극이 주는 서구적 감각적 분위기가 지배적일 뿐 강민우가 고뇌하는 예술적 열정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데는 실패한 것 같다. 대형 뮤지컬 무대에 익숙한 이종훈의 연출은 이 작품을 예술성보다는 대중적 호사취미 쪽에 더 밀착시키고 말았다. 다만 잘 꾸며진 뮤지컬 무대의 현란함과 감각적 연기와 춤을 보는데 만족할 수 있는 점이 그런 대로 이 작품이 지니는 즐거움의 하나로 보여진다.

「사파리의 흉상」 (문예회관 소극장, 9월 28일∼10월 10일)

작가 이재현이 쓰고 길명일이 연출한 극단 성좌의 「사파리의 흉상」은 해외에서 큰돈을 벌어 자신의 고향 마을을 위해 유산을 내놓은 어느 기업인의 이야기를 통해 그 사회적 업적과 인간적 음험함의 양면성을 대비시킨 작품이다. 고향 사파리에 전 재산을 희사하고 죽은 박갑도(김광일 분)의 뜻을 기리기 위해 그의 형 박문도(윤주상 분)는 마을 유지들과 함께 흉상 제막식을 거행하고 이를 취재하기 위해 서울에서 기자(고인배 분)가 찾아온다. 그러던 어느 날 이들 앞에 강진우(김종구 분)가 등장하면서 사건은 급작스럽게 전환된다. 박갑도를 모시고 선원 생활을 했다는 그는 자신이 박의 마약밀매 행위의 억울한 희생자임을 주장한다. 강의 발설을 우려한 박문도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그를 강제로 정신병원으로 보낸다. 또 한번의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된 강진우는 인질극을 벌이며 대항하지만 자신의 진실이 은폐되는 서글픔에 자살을 기도하나 실패하고 만다. 마침내 그는 박문도에 의해 작은 보상금과 더불어 요양원으로 보내지게 된다. 이 사실을 처음부터 알게 된 취재기자는 고민에 빠진다. 한 인간의 진실보다는 박갑도가 이룩한 업적을 통해 혜택을 받는 다수의 사람들을 위해 진실이 감추어져야 한다는 박문도의 논리에 그는 착잡한 심정에 빠져 그 질문을 관객에게 남겨준다. 이 작품이 던져는 질문은 다소 의미 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신선하고 새로운 느낌을 주지는 못하기에 깊은 감동으로 전이되지 못한다. 더욱이 작품의 전반적 구조가 이러한 질문에 모두 걸려있기 때문에 이 부분을 빼고 나면 작품의 구성이 매우 취약해지고 마는 결함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단조로운 무대구조에 별 다른 특징 없는 연출로 작품은 대체로 생기를 잃은 듯 하다. 윤주상의 노련한 연기 수준에 비해 다른 배우들이 보여주는 그것은 현저히 미달되거나 아니면 열의가 없어 보인다.

「길떠나는 가족」 (문예회관 대극장, 10월 1∼6일)

김의경의 희곡을 이윤택이 연출한 현대극장의 「길 떠나는 가족」은 민족의 토착적 정서와 예술의 원초적 자유의지를 불사르며 살다간 화가 이중섭(1916∼1956)의 삶과 예술 세계를 뛰어난 연극성으로 무대화한 작품이다. 더욱 돋보이는 점은 이 작품이 보여주는 한 '예술가의 초상'이 안이한 사실적 재현만에 머물지 않고 다채로운 보여주기와 들려주기의 감각화를 일구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경쾌한 음악을 이용한 빠른 장면전환과 리드미컬한 대사와 신체언어, 상징성 높은 표현주의적 무대어법, 그리고 이중섭의 미술세계를 밑그림처럼 깔고 있는 배경막의 활용 등의 연출적 고안들이 작품의 긴장미를 한층 돋구고 있다.

작품에 나타나는 이중섭의 예술적 생애는 크게 세 시기로 구획된다. 고향이자 어머니의 정서적 등가물로 여겨지는 '소'와 더불어 뛰놀며 그림에 몰두하는 오산학교 시절 이중섭(김갑수 분)은 미술선생(이치우 분)의 격려에 힘입어 동경 유학에 오른다. 신비로운 동경의 문명은 그에게 무한한 창조의욕을 자극한다. 그러나 식민지인 미술학도에게 동경은 또 다른 아픔과 질곡을 남겨주게 된다. '조국 땅을 떠나서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자각으로 그는 사랑하는 일본 여인을 남겨두고 귀국한다. 고향 원산으로 돌아온 그는 곧 뒤따라 온 마사꼬(김숙진 분)와 결혼하고 흙 냄새 물신 나는 그림에 몰두하나, 북한 정권으로부터 이데올로기의 압박에 질식하여 예술의 자유를 찾아 월남하게 된다. 전쟁으로 인해 그의 남한 생활은 극심한 궁핍과 기아로 고통받는다. 더욱이 이를 못 견딘 그의 아내는 자녀를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이중섭은 가난에 지쳐 전시회를 통해 그림을 팔게 되나 이미 그의 정신과 육체는 극도로 피폐화 되어 있었다. 작가 김의경은 이중섭의 삶과 죽음을 '민족화에의 구도적 집념'과 '자유와 평화의 신념'으로 그려내고 있다. 따라서 이중섭이 열정을 보인 한국소의 그림은 자연스럽게 조국의 땅이며 어머니이고 원초적 생명력의 집착으로 환치된다.

그리고 식민지의 질곡과 전쟁의 파괴본능, 궁핍한 가계의 압박 등이 얼마나 열정적인 예술가의 숨통을 짓누르는가 하는 점을 타고난 예술인의 초상을 통해서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현실 반응에는 전혀 무력했던 이중섭의 예술주의가 또 다른 전형의 대비를 통해서 반추되었더라면 오늘의 예술인들에게 한층 더 시사하는 바가 컸으리라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김성원, 이치우, 나문희 등 무게 있는 배우들의 연기가 조역에서 제자리를 지켜주어 김갑수의 열정 있는 연기가 더욱 힘을 발할 수 있다.

창작극의 자기 갱신, 그리고 남는 문제들

이제까지 우리는 「연극의 해」를 맞아 화려하게 차려진 제15회 「서울연극제」의 면모를 공식경연참가작 8편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 창작극들을 통해 필자는 여러 가지로 어려운 우리 연극계가 다채로운 연극적 실험정신과 주제적 다원주의의 경향으로 나아가려는 자기 갱신의 분투를 읽을 수 있었다. 이러한 창작극의 자기 갱신 노력이 더욱 지속적이고 활력 있는 열정으로 힘을 발할 때, 우리 창작극은 그 폭과 깊이를 더하리라. 그러나 이번 「서울연극제」의 창작극에 나타난 자기 갱신의 몸짓은 이제 작은 시작에 불과할 뿐이므로 여전히 아쉬움을 남긴다. 아직도 퇴영적 구태를 벗지 못한 안일한 무대작업이 있었으며 관객의 보편적 감수성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앞서간 실험적 작업도 있었다. 또 무대작업에 대한 기본적인 열정마저도 부족해 보이는 태작들도 여전히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점들은 앞으로 보다 구체적인 상론을 거쳐 분명히 지적되고 반성되어야 한다.

또 한가지, 실연심사를 거친 작품들이 분발했던 작년의 경우와 대조적으로 올해는 희곡심사를 통과한 작품 중에 수작이 나온 점으로 미루어 앞으로 역량 있는 극작가의 창작요구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과 잠재력을 갖춘 신인 극작가 발굴과 이에 대한 집중적 육성 등의 방안들의 마련되어야겠다. 이들에 대한 따뜻한 기대가 우리 창작극의 내일을 보증하는 가장 확실한 대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