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르포

소련 알마아타 교민을 위한 국악 강습을 마치고




한명희 / 서울시립대 국악과 교수

전통예술의 해외교류란 비단 저간에 대두된 현상이 아니고 금세기 후반에 걸쳐서 꾸준히 이어져왔던 문화행사이기도 했다. 특히 국악의 경우는 국내에서의 냉대와는 달리 해외 공연을 통해서 뜨거운 열기를 모아온 것이 통례였으며 이 같은 해외의 각별한 관심을 계기로 오히려 국내의 국악에 대한 이미지가 개선되었음은 물론 국악의 사회적 위상이 보다 높게 자리 매김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처럼 그 동안 있어왔던 전통예술의 해외 공연은 그 의의나 성과에 있어서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우리는 이 같은 해외문화교류 패턴을 점검하고 반성해보지 않을 수 없는 계제에 도달했음도 또한 사실이라고 하겠다. 기실 지금까지의 해외공연 실상을 보면 대개의 경우, 정부 차원의 특정 이벤트를 계기로 해서 호들갑스럽게 해외 나들이를 하고 오는 것이 관행이기도 했다. 물론 그같은 유형의 문화소개 활동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같은 수십 년 동안의 정석만으로는 성깔도 차지 않으려니와 국제적인 조류에 비춰볼 때 어림없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문화교류의 방법과 내용을 교정해야 한다. 언필칭 우리는 '한국 문화의 국제화'나 혹은 '세계 속의 한국 문화'를 주창하기도 한다. 바로 이 같은 시대적 진운에 걸맞게끔 문화교류의 과감한 변신을 꾀해야 한다. 과거의 관행을 철저히 반성하며 새로운 교류의 지평을 열어야 한다. 그것은 곧 우리네 예술을 주마간산격으로 소개하고 돌아오는 맛뵈기식 행사에서 탈피하여 우리의 문화를 현지에 이식하고 씨뿌리는 작업으로 그 차원과 심도를 달리하는 것이다. 사실 국력의 신장이나 한국 문화에 대한 국제인의 관심도로 보아 이제 우리의 문화교류 정책도 보다 적극적이고 주체적이며 장기적인 구도로 환골탈태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곧 '세계 속의 한국 문화'를 달성하는 지름길이자 국제적 예술조류의 속성과 좌표를 가장 정확하게 간취한 현명한 판단임을 틀림없겠기 때문이다. 바로 이 같은 맥락에서 출발한 것이 이번 「한국 소리 얼 연구회」의 소련 알마아타 국악강습활동이었다.

한편 말처럼 쉽지않은 국악 해외강습을 최초로 기획하면서 그 대상을 재소련교민쪽으로 결정했던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다분히 개인적인 감상도 없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난 10월의 일이었다. 소련작곡가동맹의 초청으로 소련 땅을 처음 밟았을 때였다. 레닌그라드 콘서바토리를 방문하고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오는 야간열차에서였다. 2인용 침대칸에는 연로한 재소 교포 작곡가와 필자만의 격의 없는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시국 얘기며 세상 얘기를 허두로 두 사람의 담론은 밤이 깊어 가는 줄을 몰랐다. 그의 이야기가 점차 신변잡기적인 내용으로 변해가자 그분의 표정에는 마치 비 내리는 모스크바 공항의 새벽 공기 같은 촉촉한 애상이 감돌기 시작했고, 실내에는 갑자기 만추의 초원을 스쳐 가는 북구(北歐)의 우수가 틈입하기 시작했다.

맨입에 필름 뚜껑으로 보드카 한 병을 다 비울 때쯤 해서 그의 끝없는 이야기는 6·25 전에 떠난 남한의 '고향'과 '어머니'와, '불효'와 '세월'과 '향수' 같은 진한 어휘들에 맴돌고 있었고, 끝내 노안에는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여하튼 조국이 그립다"는 그의 단호한 인생론적 결론을 들으면서 나는 호사수구(狐死首丘)의 인지상정과 함께 저처럼 반세기 이상을 철저하게 모국과 차폐되었던 외로운 동포들에게 조국이, 아니 동시대를 호흡해 가는 우리들 개개인 모두가 최소한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같은 배경에서 우리는 모였고 우리는 그곳에 간 것이다. 「한국 소리 얼 연구회」의 이름으로 알마아타에 가서 고락을 함께 한 단원으로는 가야금에 송인길(宋仁吉), 판소리에 안숙선(安淑善), 단소에 윤명원(尹明遠), 민요에 김광숙(金光淑), 사물놀이에 김현숙(金鉉淑), 그리고 한글교습에 성기철(成耆徹) 교수 등이었다.

7명의 단원이 2주여의 강습을 한 곳은 국립 알마아타 콘서바토리에서였다. 학생 8백여 명에 교강사 2백 50여 명의 알마아타 음악원으로서는 기실 개교 이래의 이변의 아닐 수 없었다. 7·8월의 나른한 오수에 잠겨있던 캠퍼스는 갑자기 한국의 소리들로 폭우를 만나야 했기 때문이다.

한 방에서는 열두 줄 가야금 소리가 청청히 울려나는가 하면 다음 방에서는 "사랑 사랑 내 사랑이여 어허 둥둥 내 사랑이지…"하며 판소리 가락이 세어나고, 다시 다음 교실의 창 너머로는 청아한 단소의 선율이 녹음 속을 건 듯 불어 가는 미풍에 실려나고 있었다. 뿐만 아니다. 민요교실의 수강생들은 아예 싱글싱글 노래보다 손짓 몸짓을 앞세우려 한다. "한두 뿌리만 캐어도 대바구니로…"하는 노래목에 이르면 이미 그들의 양어깨는 멋스러운 세마치 장단의 율동에 덩실덩실 내맡겨지고 있었다. 사물반의 음향은 그야말로 지축을 울리는 듯 본관 전체를 진동하고 있었다. 구슬땀을 흘려가며 사력을 다해 두들겨대는 꽹과리나 징 소리며 북소리를 통해서 저들은 분명 몰아의 엑스타시에 들며 홀연히 잊혔던 뿌리, 잊혔던 본향을 선연하게 회상하고 확인해 내는 듯 싶은 그 같은 엄숙한 통과 의례적인 분위기의 모습들이기도 했다.

그렇다 분명 저들에겐 한 대 본향을 등지고 뿌리를 잊은 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세월이 있었다. 그래서 언어도 잊고 노래도 유보한지 오래였다. 그러다가 이처럼 어느 날 갑자기 잊었던 어투, 잊혀진 노래들과 해후하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골수에 스민 고국에의 향수와 인생유전의 한스러움이 함께 용출되는 순간들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은 강습의 진도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일행과 만나고 함께 있으면 그것으로 즐겁고 족했던 것이다. 몇몇 할아버지들이 악곡에 맞추지도 못하면서 단소대는 꼬박 챙겨든 채 덤벙덤벙 앞장서며 마음 들떠하던 모습들은 지금도 묘한 여운으로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89년도의 통계에 의하면 재소 한국교민의 수는 44만에 이르고 있다. 이중에서 우즈벡 공화국에 19만 여 명, 카자흐 공화국에 10만여 명이 살고 있으며, 이들 공화국 도시인 타슈켄트에는 4만여 명, 알마아타에는 1만 6천여 명이 각기 살고 있다. 중앙아시아의 두 공화국에 거주하는 교민의 수효가 전체 재소한인 인구의 4분의 3에 육박하는 셈이다. 소련 내에는 1백여 개가 넘는 소수민족이 살고 있듯이 이들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벡 공화국 내에도 수십 여의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는데 재소 고려인, 즉 한국교포들도 물론 그 중의 하나이다.

중앙아시아에 정착한 한국교민들은 한마디로 천산산맥(天山山脈)에 피어난 거룩한 민들레꽃들이라고 할 수 있다. 만년설을 녹이는 포근한 미풍을 타고 온 것이 아니라, 통한의 1937년 한 많은 시베리아 철도에 강제로 실린 채 유사 휘날리고 갈대 우거진 황량한 벌판에 군데군데 무자비하게 내동댕이쳐졌지만, 끝내 그들은 천산의 자락에다가 민족혼을 심고 동이(東夷)의 혈맥을 이어가며 한 떨기 강인하고도 아름다운 꽃송이를 피워냈던 것이다. 그야말로 백의의 후예들이 새하얀 꽃씨되어 멀리 '원동(遠東)'에서 날아와 척박한 중앙 아시아 땅에 뿌리내린 전설 같은 민들레꽃들이 아닐 수 없다.

원동에서의 자립도 어려웠지만 중앙 아시아에서의 개척 생활은 더울 험난했다. 만난(萬難)는 이겨내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때의 근면이 몸에 배고 손에 익었다. 따라서 요즘 재소 한인들의 생활은 대부분이 그 사회에서는 유족한 편이다. 만나는 교포마다 일 안하고 놀기 좋아하는 여타의 민족들을 비아냥거림하고 그들의 가난을 당연시했다. 올림픽을 치러낸 조국이 자랑스러워 이제는 가슴 좀 펴고 다닌다는 저들의 말처럼, 우리 역시 멀리 이국에서 다른 민족보다 잘 살고있는 교민을 만날 때 여간 즐겁고 든든하지가 않았다.

이 같은 오늘의 상황에서 재소교포 사회가 가장 갈구하는 것은 바로 고국의 따듯한 격려와 함께 한국의 문화예술을 통한 민족적 자긍심과 동질성을 확대해 가는 일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 일행은 그토록 친절히 맞아주고 음악회 때마다 그처럼 환호하며 강습 때마다 그렇게 진지하고 열성이던 저들의 태도는 곧 이를 십분 증명하고도 남는 일이라고 하겠다.

한국 문화에 대한 교민들의 갈증만큼이나 강습진 일동의 활동도 열심이었다. 입술이 트고 목이 쉬고 어깨에 통증이 와도 교민과 어우러지는 시간만큼은 이상하게도 없는 힘이 절로들 났다. 그래서 2주일에 걸친 강습은 물론 교민을 위한 공개 음악회도 함께 개최하곤 했다.

정확한 일정을 이야기하면 「소리 얼 연구회」의 강습단의 서울을 출발한 것은 7월 27일이었으며 현지에서의 강습은 29일 월요일부터 8월 8일 목요일까지 매일 오후 6시부터 7시 반까지 진행되었다. 강습시간은 저녁으로 잡은 것은 직장인들을 위한 배려 때문이었으며 국악 강습시간을 1시간 30분으로 압축한 것은 음악강습에 이어 한글강습이 곧바로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수강 계층의 연령은 중학생에서부터 7순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으며, 음대 학생은 물론 가정주부, 전문 가무단원에서부터 러시아 여성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남녀와 노소가 함께 참여했다. 아리랑 가무단원으로 한국 공연에도 참여한 바 있는 테너 송 게오르기를 비롯해서 조선인극장의 음악지휘자 한 블라디미르, 콘서바토리의 부학장인 교포 피아니스트 신 교수, 김일성 대학 부총장을 지낸 노철학자 박일 교수도 열성적으로 참여한 이번 강습회의 수강생들이었다.

이번 국악 섬머 스쿨을 위해서 우리 일행은 가야금 10대와 장고 12대, 북 9개, 징 2개, 꽹과리 10개, 단소 80개를 준비했으나 역시 배우려는 강습생에 비해서 악기는 많이 모자랐다. 강습이 끝난 후에 대부분의 악기는 내년의 행사를 위해서 알마아타 콘서바토리에 보관시켰으며 일부 악기는 알마아타 컨서바토리와 조선인 극장, 그리고 타슈겐트 컨서바토리와 그곳 가무단 등에 기증하기도 했다.

국악 강습과는 별도로 한글 교습반을 운영하기도 했는데 이는 토론토 대학에 파견되어 한글을 가르친 경험이 있는 서울시립대학의 성기철 교수가 담당했다. 각종 국악 악기의 강습이 끝나는 시간인 7시 반이면 모든 수강생들이 한사람도 빠지지 않고 모두들 한글반으로 모여들었다. 서울대학 부설 재외교민교육원에서 미리 러시아어로 된 한글 교재 2백부를 기증 받아서 가지고 갔는데 이것도 태부족이었다. 그만큼 그곳 교포사회에서는 한글 교육열은 예상외로 대단하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처럼 뜨거운 재소 교민들의 한국어 습득에 대한 관심은 물론 조국에 대한 정서적인 향수도 향수이겠지만 그보다 더욱 절실하고도 실용적인 현실문제가 배면에 작용하고 있는 것도 확실해 보였다. 여하튼 국악과 한글교습을 마친 강습일정의 마지막날에는 전체 수강생들에 대한 수료식을 갖기도 했다. 러시아어와 한글의 양국어로 미리 인쇄해 간 수료증을 일일이 수료할 때는 뿌듯한 보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종이 한 장에 불과한 수료증이지만 이것을 받아든 수강생들은 또한 그렇게 소중한 듯 즐거워할 수가 없었다. 가야금 11명, 단소 10명 등 국악강습을 소정대로 이수하여 수료증을 받는 사람은 모두 54명이었다.

수료증을 수료하던 날 밤에는 수강생들만 출연하는 국악 발표회가 역시 알마아타 음악원 강당에서 학부형 등 가족과 관계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진행되었다. 수료생들은 발표 무대가 가득하도록 둘러앉아 가야금 합주로 아리랑을 연주하는가 하면, 단소제주로 세령산을 불었고, 흥겨운 사물로 농악장단을 연주해내기도 했다. 특히 재간있는 한 여성은 춘향가의 사랑가 대목을 발림까지 섞어가며 천연덕스럽게 불러제껴서 청중은 물론 강사진까지 놀라게 했다. 이처럼 이국의 하는 천산(天山)의 자락에 단군의 가락이 메아리 치고 접목되는 순간들을 지켜보며 우리 강사진 일동은 뭉클한 감격과 함께 오히려 숙연해지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이처럼 진지하게 조국의 문화에 대해 목말라하는 교민들에게 미진한 활동이긴 하지만 그래도 청량한 한 모금의 표주박 물은 떠드린 셈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자못 대견스럽기도 하고 삼복에 고생한 그간의 피로가 상쇄되는 듯도 했다.

강습단 일행은 강습일과 외에도 몇 회의 음악회를 별도로 마련했다. 알마아타 콘서바토리에서의 음악회와 타슈겐트 출판 빌딩 강당에서의 음악회, 그리고 우즈베크 공화국 한인 집단농장에서의 음악회 등이 그것이었다. 음악회장의 분위기는 짐작 그대로 음악만을 주고받는 우리에의 통사적인 음악회장 같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음악을 매개로 해서 혈육의 정을 확인하고 서로가 하나임을 되새기는 그런 만남의 장이요 환희의 장이며 감격의 장이었다.

소련에서의 일정이 거의 끝나 가는 타슈켄트에서의 어느 날 밤이었다. 5일간의 타슈켄트 일정이었지만 알마아타에서의 장기간 강습을 마친 후라 단원들은 거의가 지쳐있었다. 그런 속에서도 우리는 타슈켄트 콘사바토리에서의 공개 레슨과 2회의 공식 음악회를 치러냈다.

그날 밤 우리는 한인 집단농장인 꼴호즈에서 위문 음악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지금까지 한국 예술단의 발길이 미치지 못했던 꼴호즈를 찾아가기 위해서 일부러 먼 거리의 외진 곳을 찾아갔다. 음악회는 늦은 9시부터 시작되었다. 교포들이 농장에서 돌아와 저녁식사 하는 시간까지 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야간 음악회의 분위기는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다. 마치 지난달 시골벽촌에 농악패라도 들릴라치면 온 동리가 왁자지껄 수선스럽던 그같은 정황이었다고나 할까. 희미한 야외공회당의 불빛에 반짝이는 꼬마들의 눈빛은 그렇게 신기한 듯 초롱거렸고, 시종 이빨 없는 잇몸까지 드러내며 파안대소하고 있는 노인들의 표정은 그처럼 친근해 보일 수가 없었다. 음악회가 끝나자 이내 춤판이 이어진 것은 오히려 당연한 수순(手順)이기도 했다.

꼴호즈의 교포댁에서 저녁을 먹고 우리가 묵고 있던 타슈켄트의 공산당 당 간부별장으로 돌아오기 위해 귀로에 오른 것은 이미 자정이 되어서였다. 마이크로버스에 몸을 기댄 채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어느 백발노인의 감격 어린 언사를 곰곰이 되뇌며 남모르는 보람으로 피로를 상쇄하고 있는 사이 갑자기 차내에서는 누구의 제의도 없이 제창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옹헤야」에서 「쾌지나칭칭」,「진도아리랑」을 거쳐서 「보리밭」,「비목」,「고향의 봄」,「우리의 소원」 등이 이어지는가 하면 우리를 수행하던 교포 여인들은 우즈베크 민요를 불러 화답하기도 했다. 정말 믿어지지 않는 사실은 그토록 지쳐있던 일행들이 두 시간 거리를 돌아오면서 잠시도 노래가 끊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보람이 피로를 잊은 채 노래를 낳은 것이다.

노래 한 곡에 정 하나, 노래 한 곡에 흥 하나, 노래 한 곡에 혈육의 인연 하나 마침 서천에 걸려있는 초생달이 불현듯 망연한 노스텔지어를 일깨우는 사이, 우리 일행은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어둠에 잠긴 광활한 중앙 아시아의 목화밭에다 소중한 추억, 삶의 한 단상들을 한 포기 한 포기씩 정성껏 심고 이었다. 물론 이번 행사를 도와주신 문예진흥원, 문화부, 조선일보, 한국 IBM, 대한항공의 여러분들에게 대한 진심 어린 감사의 정도 함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