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리뷰 / 문학

소설 읽기의 괴로움




이남호 / 문학평론가·고려대 교수

세상일이란 언제나 불만이 많고, 신나는 일은 조금뿐이기 마련이다. 돌이켜보면 옛날에는 신나는 일이 많았던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긴 시간 속에서 간헐적으로 있어왔다는 것을 우리가 짧은 인식의 시공 속에서 한꺼번에 떠올리기 때문일 것이다. 훌륭한 문학 작품에 대한 기대 역시 그러하다. 근래 좋은 작품들을 보기 어렵다는 불만은, 한편으로 생각하면 훌륭한 작품들이 집중적으로 양산(量産)되던 시기가 매우 드물었다는 사려 깊은 지적 앞에서 한낱 투정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김소월(金素月)과 한용운(韓龍雲) 그리고 김동인(金東仁)과 강상섭(康想涉)이 매번 쏟아져 나오는 것은 분명 아니다. 우리가 그러한 시인, 작가를 기억하는 것은, 그들의 어쩌다 나오는 시인, 작가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나, 마치 '세상 말세야'또는 '요즘 애들은 정말 버릇이 없어' 등과 같이 어느 시대에나 있어온 상투적 불만이라 하더라도, 최근의 우리 문학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특히 최근 젊은 소설가들의 작품을 염두에 두고, 근래 우리 문학의 저조함을 간단히 지적하고자 한다.

91년 가을호 계간지들, 그리고 10월호 월간 문예지들에 실려있는 작품들을 일별 하면서 다시 한번 '소설 읽기의 괴로움'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끝까지 읽어내기가 힘들 만치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는 것 같았다. 왜 이런 작품을 쓰는지, 그리고 애 이런 작품을 발표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독자들의 외면을 받을 것은 뻔한 이치고, 나아가 쓰잘데없이 세상만 비좁게 만드는 생산들이 아니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특별한 예외가 있긴 하겠지만, 독자가 없는 글은 존재할 가치가 없다. 아무도 읽으려하지 않는 소설은, 극단적으로 말해서 무용지물이다.

왜 최근 소설들은 재미가 없고, 읽기가 괴로운가 ? 대략 두 가지 측면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작가들이 현재 우리 삶의 지형과 정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구태의연한 발상법과 감각으로 작품을 제작하기 때문일 것이다. 독자들의 취향에 영합해서는 안 되지만, 시대의 권위에 서서 변화의 바람을 먼저 감지하는 작가라면 저절로 독자들의 관심을 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점과 관련하여 유의해야만 하는 함정이 있다.

일부 평론가와 작가들은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포스트모더니즘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이번 달에 발표된 젊은 작가의 작품들 중에서도 그런 노력들이 엿보인다. 이러한 실험과 노력 자체가 나쁠 것은 없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하니까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을 써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잘못된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지향해야 할 가치'가 아니다. 그것은 전혀 새롭게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이해의 방법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창작의 경우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구태여 의식할 필요가 없다. 민감한 작가의 감수성으로 현재의 삶을 훌륭하게 드러낸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괴물은 바로 그 작품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 현재의 삶에 대한 구체적 인식은 제쳐두고, 포스트모더니즘 이론만을 동경하다 보면 정말 우스운 꼴이 될 것이다. 작가의 텍스트는 구체적인 현실뿐이다. 이 점을 무시하고 포스트 모던한 포즈를 취하는 작가와 작품은 실속 없는 외제선호주의의 모습만 보여줄 뿐이다. 독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우선 뜻밖에 의외의 세계가 삶의 실감으로 느껴지고 새로운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작품, 뒤에 알고 보니까 그것이 포스트 모던한 작품으로 거론되는 그러한 작품이어야 할 것이다.

최근 소설들이 재미없는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지적하기 난처한 것이다. 그러나 난처함을 무릅쓰고 지적한다면 그것은 작가들의 수준미달이다. 아무리 문학의 전통적인 규범이 무너졌다 하더라도, 그래서 새롭고 실험적인 태도로 작품을 쓴다 하더라도, 작가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요건은 있는 것이다. 정확하고 명료한 문자, 세계에 대한 관찰력, 묘사력,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솜씨 등등은 어떤 작품을 쓰는 작가라도 기본적으로 지녀야 할 요건들이다. 그러나 이런 기본 요건이 의심스러운 작품들이 적지 않다, 적어도 문예지에 발표될 만한 작품이라면 습작수준이나 개인적인 넋두리의 수준은 벗어나야 한다, '글을 잘 쓸 줄 모르는 작가'는 그 자체로 모순이다. 80년 후반부터 우리 문단은 유례없는 양적 풍요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발표 지면이 많아졌으며, 창작집 내기가 수월해졌고, 또 등단하기도 쉬워졌다. 즉 제도적, 구조적 수요는 엄청나게 늘었다. 그러나 일정 수준 이상의 공급은 증가한 것 같지 않다. 그러다 보니 미처 성숙되지 못한 작품들이 양산되고 있는 것이 아니가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사정은 독자들의 실망이 사기을 부족함이 없다. 재미있는 볼거리, 놀거리가 지천인 요즘 세상에서 누가 재미도 없고 소설답지도 않은 소설을 읽으려 하겠는가 ?

'소설 읽기의 괴로움'은 물론 작가들의 책임이다. 흔히 시대 자체가 '소설의 위기'라고 말을 하지만, 그래도 일차적인 책임은 작가가 져야 한다. 작가들은 변화된 시대, 변화된 문학 환경에 새롭게 적응할 수 있는 작품들을 생산하여 독자들을 확보해야 한다. 문학이 시대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시대를 이끌어가야 하기도 한다면, 그것은 독자들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통해서이다. 심지어 잘못된 취향을 지닌 독자들을 계도시키기 위해서도 독자들과의 적극적인 소통은 필수적이다. 독자들의 속된 취향에 영합하거나, 상업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자신의 문학적 순수성을 지키겠다는 작가의 소신은 훌륭한 것이다. 그러나 그 소신이 작가 자신의 무능을 합리화시키는 것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리석은 것이다. 어설픈 순수와 고고(孤高)는 차라리 대중적 인기보다 무의미하다. 비대중적 순수는 속된 독서 대중을 넘어서는 것이지 독서 대중을 외면하고 자신의 무능을 합리화시키는 일이 아니다. 작가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독자를 만들어나가야 할 의무가 있다. 독자가 없다는 것 자체가 순수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정말 시대를 앞서 가고 수준이 높은 작품이어서 독서 대중이 미처 따라오지 못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작가들은 그런 경우라도 한 사람의 독자라도 더 확보하고자 고심해야 할 것이다. 자기 혼자만 심각한, 무의미한 엄숙주의는 극복되어야 한다. 소설은 처음부터 시시하고 보잘 것 없는 '작은 이야기'이다. 이 근본 성격을 잘 알고, 유연하고 부드러운 태도로 창작에 임할 때 작은 이야기는 의외로 큰 의미를 지닐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의 작가들이 엉뚱한 순수주의와 엄숙주의 그리고 초속주의에 빠져있게 된 사정에는 또한 평론가들의 책임도 있다고 보인다. 가령 문예지나 신문의 소설월평 그리고 소설에 관한 최근의 평론들을 보면, 평론가들이 무의미한 엄숙주의나 근거 없는 순수주의를 조장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것들은 소설이 주는 일차적인 감동을 무시한 채 생소한 논리로 생소한 의미를 찾는데 급급하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정말 읽을만한 작품을 선별하여 그 감동의 내적 의미를 밝혀주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인 발언이나 현학적인 관념을 끌어낼 수 있는 작품이라면 그 작품의 됨됨이나 재미에 상관없이 주목한다.

많은 평론들이 작가와 독자를 연결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이간시키고 있는 듯한 상황은 매우 안타깝다. 작가와 평론가 모두 '소설 읽기의 괴로움'이 지극히 비정상적이고 부정적인 것임을 심각하게 자각해야만, 우리 소설계의 활로를 열어 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