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Pop)-소비의 예술인가 ?
쟝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번역) 현영숙 / 화가
우리가 보아왔듯이, 소비의 논리는 기호들의 조작으로 정의된다. 내부의 상징적인 관계, 즉 창조의 상징적 관계들은 그것으로부터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모두 외적 것이다. 사물은 그것의 기능과 같은 객관적인 궁극성을 잃어버리고 보다 광범한 결합으로 그것이 하나의 관계를 맺고 있는 사물들의 그룹이 된다. 더욱이, 물체는 그것의 예로부터의 의인법적인 지위와 같은 상징적 의미를 잃었고, 암시가 담긴 이야기 안에서 사라지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또한 그들이 전체주의의 문화적 체계의 구조내에서 또 다른 사람과 관련을 맺는 것이며, 그것은 어느 곳으로부터 의미들을 통합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일상의 사물들에 대한 분석을 우리의 논리로 삼아왔다. 그러나 그 사물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술의 오브제를 말한다. 예술과 문학에서 그들의 표현과 사물의 지위의 발전의 역사는 그 자체를 드러내 보여주곤 한다. 예술에 있어 전적으로 상징적이고 장식적인 역할을 전통적으로 담당해온 이후, 사물들은 20세기에 와서 도덕적이거나 정신적인 가치와의 유대를 중단하였으며, 인간의 보호 안에서 대리로 사는 것을 중단하고 그들은 큐비즘과 같은 공간분석에서 자율적인 요소들로서 특별한 중요성으로 채택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그들은 추상주의에 의해 파괴되고 증발되어지고, 초현실주의에서 그들의 풍자적 모방과 부활을 축하하면서, 오늘날 그들은 팝아트와 누벨 피규라송(Nouvelle Figuration)에서 그들의 이미지를 분명히 조화시키고 있다. 여기에 그들의 현대 지위에 관한 의문이 대두되고 있다. 사물이 예술적 형상의 절정으로 급부상하게 됨으로써 우리의 주의를 더욱 끌고 있다.
요컨대 팝아트는 여기서 논의하고자 하는 기호의 논리인가 그들의 소비의 논리의 현대 예술 형태인가 ? 아니면 단지 유행에 영향을 주어 그 자신을 소비하는 사물인가 ? 위의 두 가지는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는 팝이 또한 객체 안에서 그 자체의 논리에 따라 순수하고 단순함을 전적으로 순용할 때, 팝아트는 물질의 세계를 변화시킨다. 광고는 동일한 모호성을 갖고 있다.
이 물음을 다른 방법으로 설명해 보자; 소비의 논리는 예술적 표현의 전통적인 숭고한 지위를 제거하였다. 단적으로 말하면, 본질 또는 의미를 이미지화 하는 것 외에는 사물의 어떠한 권위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는 이제 더 이상 다른 것의 진실이 아니다: 그들은 생략되지 않은 똑같은 논리적 공간에서 동시에 존재하며, 그곳에서 그들은 기호들로써 똑같이 '행동'한다. 그러므로 팝에 이르기까지 그전의 모든 예술은 '깊은' 세계의 비전에 바탕을 두고 있음에 반해서, 팝아트 자체는 기호의 내재 질서를 지니는 동일성-그들의 산업적이고 연속적인 생산물, 그리고 모든 환경의 인공적이고 제조된 동질성-사물들의 새로운 질서가 문화적으로 추상화한 것과 마찬가지로 생략되지 않은 충만함의 동질성을 요구한다.
사물의 제도적 세속화를 성공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은 모든 외면 안에서-이전의 모든 예술에서 권위를 지녔던 '내면의 빛'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새로운 기술적 환경을 성공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가 ? 그것은 신성하지 않은 예술, 즉 순수히 교묘히 조작된 예술인가 ? 그것 자체가 신성하지 않은 예술 즉, 사물의 창조가 아니 제조인가 ?
혹자는 그리고 팝 아티스트 자신들은 사물은 좀 많이 단순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그것과 함께 있으므로 그 일을 한다. 결국 그들은 좋은 시간을 가졌고, 그들은 주위를 둘러보았으며 그리고 그들이 본 것을 그렸다.-그것은 자유스러운 사실주의 등이다. 이것은 거짓이다. 팝은 조화의 끝이며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초혼의 끝이며 목격의 끝이며 창조적 동작의 끝이지 세계의 전복과 예술의 저주의 끝이 아니다. 그것의 목적은 '문명화된' 세계의 내재성에 있는 것이며, 이 세계 안에서 그것을 하나로 통합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 광기에 야망이 있다. 모든 문화의 역사를 폐지하고자 하는 것, 탁월하고자 하는 것. 또한 아마 이데올로기를 아주 단순화 하고자 하는 것도 있다. 이 두 이의를 명확히 해보자. '팝은 미국 예술이다'-별과 줄무늬의 관념을 포함하여 그것의 자료 소재에서, 경험주의적 실용주의, 낙관적인 실행에서, 어떤 후원인의 명백한 맹목적 열광과 그것에 의해 받아들여진 수집가 등. 비록 이 이의(반대)가 특정의 경향일지라도 객관적으로 대답해 보자. 만약 이것이 모두 아메리카니즘이라면, 팝 아티스트들은 오직 그들 자신의 논리에 따라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만약 제조된 사물들이 '아메리칸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그들을 압도하는 이 신화보다 다른 진실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일한 논리적 코스는 이 신화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것이며 그 자체 내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만일 소비사회가 그 자체의 신화 안에서 들어올려지는 것이라면 그것 자체에 비평적 견지가 없다면, 그리고 만일 이것이 바로 그것의 정의라면, 그때는 현대 미술은 그것의 존재와 실행 안에서 타협되지 않은 채 사물의 불투명한 부분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로 이것이 왜 팝 작가들이 사물의 실제 외관에 따라 그림을 그리고 있는가에 대한 이유이다. 그것만이 기성품의 기호들로서의 그들이 신화적으로 기능 하는 일관작업으로부터 새로워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팝 아티스트들이 이들 사물들에 의해 탄생되는 머리 글자, 마크, 슬로건들을 적절하게 그리는 이유이며, 궁극적으로 그들이 그것을 그릴 수 있는 이유이다(로버트 인디아나). 하나의 게임이나 리얼리즘으로서가 아니라, 소비사회의 명백한 사실의 인식: 즉 사물과 제품의 진실이 그들의 '마크'인 것이다. 만약 그것이 '아메리카니즘'이라면 아메리카니즘은 바로 이 시대 문화의 전적인 논리이며, 팝 아티스트들은 그것을 명백하게 표시하는 데에 거의 비난받을 수 없을 것이다.
더 이상 그들의 상업적 성공을 위하여 그리고 그것을 부끄럼 없이 받아들이는데 비난받지 못할 것이다. 더욱 나쁜 것은 신성한 기능과 함께 비난하고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사물의 세계에 대항하지 않는, 그러나 그 체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그 체계를 탐구하는 예술의 논리이다. 그것은 바로 일종의 워선이며 철저한 비논리성의 끝이다. 이전의 미술(19세기말까지의)과는 대조적으로 사인이란 용어로 기호화되고 상업화되었으며 추상표현주의는 이 성공적인 감화와 뻔뻔한 기회주의를 보다 높은 단계로 끌어올렸다. 팝 작가들은 그림 속의 사물과 그려진 사물을 조화시켰다. 조리가 있는가 아니면 역설인가 ? 사물에 대한 편애를 통하여, '표시된' 사물과 물질적 소비의 무한한 형상화를 통하여, 그리고 그것의 상업적 성공을 통하여, 팝아트는 최초로 '기호화'하고 '소비화'함으로써 그 자체의 예술적 사물의 지위를 개척하였다.
이직, 이 논리적 계획, 즉 최후의 결론들이 우리의 전통적인 도덕미에 모순되도록 성원되지 않는 이 논리적 계획은 더 이상 침체되지 않는 이데올로기와 짝을 이루고 있다. 자연의 사상, 지각과 진실성의 사상, 그것은 부르주아의 자발적 행위의 최고의 순간들을 되살려낸다.
이 '철저한 경험주의', '타협하지 않는 실증주의', '반목적론 신봉'(마리오 아마야, 「Pop as Art)」은 때때로 위험한 초기양상을 보이고 있다. 올덴버그는 <나는 짐 다인과 함께 어느 날 도시주변을 드라이브했다. 우연히 우리가 올차드 거리를 통과했을 때 양쪽 길가엔 작은 가게들로 꽉 차 있었다. 우리가 드라이브할 때에, 나는 '그 가게'의 모습을 기억하였다. 나는 내 마음의 눈을 통해 이 주제에 입각한 완벽한 환경을 보았다. 다시 내가 그것을 보았을 때, 나는 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였고 각양각색의 물건이 쌓인 가게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마치 박물관 같았다. 나는 예술의 귀중한 작품인 것처럼 창가와 카운터에 진열된 상품들을 보았다>고 했다. 로젠퀴스트는 <그리고 갑자기, 아이디어들이 창문을 통해 나에게로 넘쳐흐르는 것 같았다. 내가 행했던 모든 것은 날아다니는 그들을 붙잡아서 그림을 그리고 시작했다. 모든 것이 자발적으로 제 위치에 떨어졌다.-아이디어, 구성, 이미지, 색채, 모든 것이 제 스스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영감의 주제 위에서 표현되었으며 팝 아티스트들은 앞선 세대들에 열등하지 않았다. 이 주제는 웨더(Werther) 이래, 진실이 되고자 하는 목적으로 믿음을 주는데 충분한 자연의 사상이다. 그것은 단순히 그것을 일깨우는 그것을 밝히는데 필요하다. 우리들은 음악가이자 라우젠버그와 제스퍼 존스의 이론가인 존 케이지를 읽는다.… 예술이란 확고함이어야만 한다.-질서를 가져오기 위한 시도가 아니다… 그러나 단순히 우리들의 삶을 일깨우는 방법이다. 그것은 매우 탁월하고 때로는 사람의 마음과 욕구를 그 방법으로 얻을 수 있게 하고, 그것으로 하여금 저절로 행동하도록 한다.> 드러난 질서에 대한 이 묵인은-기본적 본성을 통해 빛나는 이미지와 제조된 사물의 세계-신비적 현실주의자의 믿음의 전문성을 이끌어 낸다.: "국기는 단지 국기였다. 숫자는 단순히 하나의 숫자였다"(제스퍼 존스). 또는 존 케이지는 다시 <우리는 소리가 그 자체가 되게 하기 위한 수단을 발견해야만 한다>-그것은 사물의 본질, 결코 일상생활의 그것이 아닌 절대적 리얼리티의 수준을 가정하며, 그것이 아주 솔직히 초현실주의를 구성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웨슬맨은 평범한 부엌의 '초현실주의'를 말한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는 완전히 혼란 속에 있고, 우리는 주변세계의 본능적 충동으로 자아 및 초자아를 벗어 던지는 막연한 선(禪)과 불자(佛子)들과 짝을 이루는 가시적 사물들의 병치(소비사회의 인상주의와 같은 것)로부터 생겨나는 행동주의 이전에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여기에 또한 아메리카니즘의 진기한 혼합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불일치와 심각한 애매함이 존재한다. 주변세계를 표현하지 않음으로써, 즉 주로 조작적인 기호의 인공적 분야와 전체 문화적 인공물-그들이 센세이션이나 비전이 아닌 명백함의 다른 인식과 전술적 게임의-이 그것을 드러난 본질, 본성으로 묘사함으로써 팝은 이중의 함축을 가졌다. 첫째는 통합된 사회(현대사회=자연=이상적 사회-그러나 이 공모는 그 논리의 한 부분임을 우리는 안다)이며 또 한편으로는 예술의 전반적인 신성한 과정을 복귀시키는 것인데 그것은 그것의 기본적 객관성을 파괴한다.
팝은 평범한 예술이 되길 원한다.(이것이 바로 팝을 대중미술 그 자체로 부르는 이유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범주가 아닌 한 평범하다는 것은 숭고함의 카테고리의 현대적 해석인가 ? 사물은 단지 그것이 필요한 순간에 사용될 때 평범한 것이다.(웨슬맨의 트랜지스터 '그것은 걷는다'). 사물은 그것이 독특한 순간에 평범해지기를 중단한다. 우리가 보아온 대로, 현대사물의 '진실'은 더 이상 무엇인가를 위해 쓰여지지 않는다. 또 더 이상 도구로서 조작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호로서 조작되어 간다. 그리고 가장 좋은 예로서, 팝의 성공은 우리들에게 그러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앤디 워홀 그는 가장 철저하게 접근했던 작가로서, 이 그림의 실행에 있어 이론적 반박을 가장 잘 집약하였으며, 후자의 어려움은 그 사물의 참모습을 직시하는 데 있다. 그는 말하기를 <이 의자나 포스터와 같이 캔버스는 전적으로 평범한 사물이다(언제나 그것들은 미국 실용주의-통합의 공갈과 이용의 테러리즘-와 희생제물의 신비적 메아리와 같은 것을 드러냄으로써 예술을 받아들이고 또 재흡수할 것이다)> 앤디 워홀은 덧붙였다. <리얼리티는 매개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그것을 주변으로부터 격리시켜 캔버스에 옮겨져야 한다.> 지금 그것은 이점에 있어서 전반적 문제이다. 이 의자(또는 햄버거, 차 부속품 또는 벽걸이)의 평범함은 바로 그것의 주변상황에 있으며, 주로 전적으로 유사하거나 약간 차이나는 의자의 일련의 배경에 있다. 평범함은 반복과는 다른 것이다. 캔버스에서 의자를 격리시킴으로써 나는 그것의 평범함을 해방시키고, 그리고 동시에 나는 일상적인 사물로서 그것의 완전한 특성을 해방시킨다(워홀에 따르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의자를 닮고 있어야 한다). 그러한 궁지(어려움)는 잘 알려져 있다.: 예술은 더 이상 일상 생활에 흡수될 수 없다. (캔바스=의자) 그것이 그렇게 일상을 움켜질 수 있는 것처럼(캔버스에서 격리된 의자=진짜의자). 내재성과 초월성은 동등하게 불가능하다. 그것은 동일한 꿈의 두 가지 측면이다.
간단히 말해서, 일상의 본질, 평범의 본질은 없으며, 그러므로 일상의 예술도 없다. 이것은 하나의 신비적인 아포이라(aporia)이다. 만약 워홀과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믿는다면 그것은 그들이 예술과 예술적 행위-예술가들 사이에서 거의 행해지지 않는 행위-의 지위에 관하여 그들 스스로 속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행위 그리고 생산적 동작의 수준에 있어 신비적 노스텔지어에 관하여 <나는 기계이기를 원한다>고 워홀은 말했는데, 그는 스텐실링, 스크린-프린팅 등의 효과를 이용하여 그림을 그렸다. 이제 기계와 같은 것으로서 취해지는 예술은 허식의 가장 나쁜 종류이며 일련의 자동화주의에 자기 자신을 바치는 창조자의 지위를 기꺼이 또는 마지못해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커다란 겉치레이다. 그러나 워홀이나 팝 아티스트들의 잘못된 신념을 비난하기는 어렵다. 그들의 엄격한 논리는, 그들이 할 수 없는 것에 관하여 일종의 예술의 사회적, 문화적 지위와 상충하고 있다. 이것이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전달하는 무력감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실행을 비성례화 하고자 하면, 사회는 그들을 더욱 성례화한다. 그것의 주제들과 그것의 실행에서 예술을 세속화하고자 하는 시도는 예술의 신성함의 고양과 유례없는 표현을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추가하였다. 아주 간략하게 하면 팝 작가들은 그림이 하나의 신성한 슈퍼-사인(독특한 사물, 사인, 귀족적 마술적 교섭의 사물)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잊어버렸고, 작가들의 내용이나 의도가 충분치 않다는 것을 잊고 있다. 그것은 결정적인 문화적 생산의 구조이다. 끝으로 다른 제조자와 같이, 오직 합리화만이 그림시장이 그것을 세속화하고, 그림을 일상의 사물로 되돌려 놓는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생각할 수 있는 일도, 가능하지도 심지어는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어떤 사건 속에서 그것은 애매한 논쟁거리의 상황인 것이다. 한때, 당신은 그림을 그만두거나 예술적 창조의 전통적 신화 속에서 후퇴를 계속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침체를 통하여 전통적 그림의 가치들은 회복될 것이다. 올덴버그의 '표현주의자', 워슬맨의 야수파와 마티스주의 화가, 리첸스타인의 '아르누보' 그리고 일본의 서도 등등. 이들 전설적 반향으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 '그것은 여전히 똑같은 그림이다'라고 말하는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 팝의 논리는 그 사물의 미적 계산이나 형이상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
팝은 하나의 게임 또는 정신적 개념과는 다른 조작으로서 정의되어야 한다. 공간 분석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전체 문화의 지적이고 기술적인 장치에 근거해온 세기를 통하여 전개될 지각의 양상에 따라서 사물을 분석하려고 시도해온 정신적 입체파의 한 종류이다. 객관적인 리얼리티, 이미지 반영, 소묘에 의한 형상화, 기술적 형상, 추상적인 도식화, 추리적인 표현 등. 한편으로는, 음성학적 알파벳의 사용과 산업적 기술의 사용은 분할, 배가, 추상화, 반복 등의 기능을 부과해 왔다. 이 다양한 형태 중에서 우리는 꾸며진 미사여구와 인식의 무수한 형상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대중예술 안에서 활용된다. 그것은 이들의 서로 다른 수준과 형태 사이의 차이 위에서 일하며, 이들의 서로 다른 인식 위에서 일한다. 그리하여 린칭의 스크린 프린트는 하나의 초혼이 아니다. 그것은 이 린칭이 매스커뮤니케이션의 장점에 의해 새로운 항목으로, 저널의 기호로 변형되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한다. 반복되는 똑같은 사진은 유일한 사진을 전제조건으로 한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그것이 반영된 실제를 전제로 한다. 게다가 이 실재는 그것을 파괴함이 없이 그 작업 안에서 형상회 될 수 있다-그것은 오직 하나 이상의 조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팝 아트에 있어서 리얼리티의 질서가 없는 것과 같이, 의미의 정도에 곧 실제공간이 없다-유일한 공간은 캔버스의 공간, 다른 요소들의 병렬상태의 공간 그리고 그들과의 관계이다. 또한 진짜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유일한 시간은 독서의 시간이다. 사물과 그 이미지의 서로 다룬 인식, 그러한 이미지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것 등이다. 시간은 정신적 수정을 위해, 이미지에의 적응을 위해, 실제 사물과 관련된 인공물을 위해 필요하다(그것은 기억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적, 논리적 차이의 인식의 문제이다) 또한 독서는 명료한 발음과 일관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생략 없는 보도, 즉 연속적인 질서의 문장이다.
팝은 냉정한 예술이다. 그것은 미적 도취도, 감정적이거나 상징적인 참여 어느 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추상적인 연루 또는 수단이 되는 호기심을 필요로 한다. 발견의 순수한 매력이나 어린애와 같은 호기심을 보유하면서 팝은 양심적인 이미지의 만화책으로서 또는 소비의 시간들의 책으로서 보여질 수 있으나, 무엇보다도 놀이에 번역 의지적인 반영을 가져온다.
결론적으로, 팝아트는 대중예술이 아니다. 대중문화를 위하여 문화적 에토스(만약 그것이 참으로 존재한다면)는 분명한 리얼리즘에, 반복이나 회절이 아닌 서술에, 비유나 장식적인 것에(이들 두 카테고리가 본질적인 '무엇'에 되돌려진 이래로 이것은 대중예술이 아니다) 그리고 인생의 불확실의 교훈에 연결된 감정적인 참여에 정확하게 기초를 두고 있다. 팝아트가 상징적인 예술로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직 초보의 단계이다. 채색된 상(像), 소비사회의 순수한 역사 등등. 팝 아티스트들이 이것을 주장하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의 솔직함은 훌륭하다. 그들의 특질로 간주된 그들의 유머에 관해서, 여기서 다시 우리는 불안정하다. 그것은 보는 사람들의 반응을 기록한다는 관점에서 유익하곤 했다.
작품들은 도덕적이거나 외설적인 웃음을 불러일으킨다.(이들 캔버스들은 전통적인 시각 안에서 외설스럽다). 비웃음의 미소가 그려진 사물을 비판하는 것인지 그림 자체를 비난하는 것인지를 아는 것은 어렵다. 미소는 기꺼이 공범자가 된다. <그것은 심각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충격 받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아마도…>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이는지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비참함에 엉켜있다. 팝은 동시에 유모가 없거나 유머로 가득 찼다. 모든 논리에서 팝은 공격적인 유머와 같은 파괴 분자와는 관계가 없다. 그들의 기능 안에서 짧게 순회하는 오브제들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관계들을 분석하기 위하여 그들을 병렬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 이 움직임은 폭력주의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문화적 고립으로부터 얻은 효과를 전하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뭔가 다른 것에 대한 질문이다. 이제까지 서술한 그 체계를 간직하여 잊지 말자, '어떤 미소'란 소비의 필수적인 기호들의 하나이다. 그것은 더 이상 유머와 비평적인 거리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러나 단지 초월적인 비평적 가치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윙크 안에서 오늘을 물질화 하도록 상기시킨다. 이 거짓된 거리는 고다르풍의 참신한 수법과 함께, 스파이 필름 안에서, 문화적 암시로서 그것을 계속적으로 사용하는 현대관광 안에서 등등 어느 곳에서도 있다. 궁극적으로 이 '냉정한' 미소 안에서 당신은 더 이상 유머스러운 미소와 상업적 공모의 미소를 분간할 수 없다. 이것이 또한 팝아트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결국, 그 미소는 그것의 전반적인 모호성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비평적 거리의 웃음이 아니라 공모의 웃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