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와 세계의 불화가 남긴 아름다운 상흔
-조은과 김혜수의 첫 시집에 대하여
이남호 / 문학평론가·고려대 교수
이번 달에 나온 여러 시집 중에서 조은의 「사랑의 위력으로」와 김혜수의 「404호」에 대하여 간단한 독후 소감을 말하고자 한다. 둘 다 신진 여류 시인의 첫 시집인데, 나는 그 모습을 '자아와 세계의 불화(不和)가 남긴 아름다운 상흔(傷痕)'이라고 말하고 싶다. 두 사람의 시적 상상력은 전혀 다른 질감을 보여준다. 전자의 상상력이 광목과 같은 질감을 지녔다면, 후자의 상상력은 나일론과 같은 질감을 지녔다. 그러나 둘 다 그 언어적 직조의 밀도는 매우 높다.
조은의 시들은 우선 특이한 언어감각을 보여준다. 그의 시들은 좀처럼 결합될 것 같지 않은 어휘들을 결합시켜서 개성적인 언어 공간을 만들어 낸다. 가령 이러하다.
고구마의 전분, 사람의 피, 소의 젖, 그런 것들의 별로 보인 오늘은 나의 하늘이 나를 짓이겼습니다. 하늘의 별, 사람의 눈, 나무의 잎사귀, 뿌리, 가지, 돌멩이 모두 흘러들어 허둥대는 나를 짓이겼습니다.
(「오늘은」에서)
왜 고구마의 전분과 사람의 피와 소의 젖이 한 자리에서 열거될 수 있을까 ? 또는 왜 그런 것들이 별로 보일 수가 있을까 ? 의아하다. 그러나 초현실주의적인 이미지의 나열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일반적 언어공간을 혼란스럽게 만들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이상한 분위기를 조성하여 우리를 긴장하게 만든다. 「쓰레기 하치장2」의 마지막 구절인 <쓰레기더미에서 가려져 따로 놓여 있는/ 안락의자, 팔레트, 밤색 구두 한 켤레> 같은 대목도 그러하다. 왜 갑작스럽게 '팔레트'가 튀어나왔을까 ? 무슨 상징적인 의미가 그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일까 ?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냥 '팔레트'일 따름이다. 그러나 그것은 집요한 힘을 띠고 읽는 이의 뇌리에 끈끈하게 달라붙어 기억되기를 고집한다. 또 있다. 「지금은 비가-」라는 시에는 <벼랑에서 만나자. 부디 그곳에서 웃어주고 악수도 벼랑에서 목숨처럼 해다오. 그러면 나는 노루 피를 짜서 네 입에 부어줄까 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밑도 끝도 없이 '노루 피'라니 ? 화자는 벼랑에 몰린 가여운 노루일까 ? 알 수 없다. 그러면서도 「지금은 비가-」라는 짧은 시는 바로 이 '노루 피'라는 엉뚱한 어휘 때문에 고집스레 기억된다. 그것은 이상한 힘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힘에 이끌려 조은의 시속에 빨려 들어가면, 거기에는 <밤마다 부엌에서 범죄처럼 소리 죽여 밥을 먹고> 있는 화자의 모습이 있다. 이러한 화자의 태도가 또한 읽는 이를 긴장시킨다. 나는 회상한다. 세상의 터무니없는 파도가 집안의 위태로운 일상을 덮쳤을 때, 할아버지 또는 아버지가 울분을 터뜨리면 아무 죄도 없으면서 범죄처럼 소리 죽여 부엌에서 밥을 먹던 할머니 또는 어머니의 삶의 기억한다. 그것은 세상의 파도와 그에 따른 주위 사람들의 울분마저도 자기 몫의 아픔으로 견디어 내야만 하는 모성적 태도이다. 조은은 이러한 모성적 태도로 황폐하고 고통스런 세상을 바라본다. 집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어디 나가지도 못하고 문밖에 쪼그리고 앉아 고통스런 세상의 풍경을 바라본다. 그 풍경은 부드러운 모성의 가슴을 짓이기는 삭막함이고 또한 죽음보다 깊은 어둠이다.
손가락 한 마디도 포개지지 않는
그 피로침에는
별이 찔렸다.
(「십자가」에서)
그가 여는 문에는 바람이 스산하고 소의 잔등이 가린 헛간이 일생처럼 어둡다.
(「그가 여는 문에는」에서)
조은의 시는 대부분이 이 삭막하고 어두운 세상 풍경에 대한 묘사이다. 인용한 구절이나, <그는 섬기던 산이 무너진 곳에 밭을 일구었다>라든가 <우리를 받아 뼈를 앉힐 땅도 주검을 호락호락 받아주지 않는다>라는 구절 등에서 보듯이, 그 풍경의 묘사는 깊고 집요하고 개성적이다. 그러나 그 묘사를 궁극적으로 살아있게 하는 힘은, 화자의 모성적 태도에서 나오는 듯하다. 안 보이는 듯 하면서도 모든 것을 다 보고 있는 시선, 그리고 끊어질 듯 허약하면서도 무엇보다 끈질긴 시선, 또 세상의 모든 죄가 다 자신의 죄가 되는 연민의 시선이 바라보는 풍경이기에 그것은 우리의 마음 깊이 새겨지는 풍경이 된다.
김혜수 시의 언어들은 보다 날렵하고 명료하다. 그 언어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재치가 있고 날렵하다. 그의 시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망망대해와 같은 삶을 '보트 피플'이라는 시사적 용어를 빌어 간단히 표현한다. 그런가 하면 <뿌리 채 뽑혀 황홀하게 떠내려가는 생이 되지 못할 바에야 산성비에 살과 뼈를 적시지 말고 창문과 운동장만큼의 거리에서 비의 화학성분이나 분석해요 선생님 !>이라는 단 한 문장으로, 일상적 삶의 메마름을 표현한다. 이러한 명료한 이미지들로 시인은 세상과 자아의 불협화음을 기록한다. 김혜수 시의 화자는, 세상 속의 일상적 삶이 전혀 자기 것이 아닌, 잘못된 삶이라는 주장을 계속한다. 「삶은 나에게 계속 레디 고우를 선언한다」라는 시에서 화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덤 속에서 살이 흙과 섞이고 있는 데 어긋난 삶은 계속 나에게 레디 고우를 선언한다.
미안하지만 나는 더 이상 앞으로 갈 수 없다.
필름을 뒤로 돌려 무덤 밖으로 걸어나가야 한다. -(중략)
살수 있도록
지금 나에게 NG를
선언해다오
화자는 현재 자신의 삶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있지만, 세상은 그 어긋난 삶을 계속하도록 강요한다. 그의 삶은, 잘못된 연기를 하고 배우와 같다. 새로 연기를 하고 싶지만, 세상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이왕 밀려가는 삶이라면, 가는 데까지 가보자고 생각하기도 한다. 「정류장」이라는 시에서는 <꼭 내려야 할 정류장 지나친 바에/ 아무 곳에나 내리지 말자/ 어디든 가야 하는 것이 생이라면/ 달려가지 두서 없이 생각 속에 앉아/ 두발 꽁꽁 얼어도/ 추울수록 아름다운 성에 꽃이라도/ 한 송이 피울 수 있다면/ 하나씩 둘씩 사람들 내리고/ 텅 빈 버스의 썰렁함이/ 불현듯 환상을 무섭게 깨워도/ 하나님이 툭툭/ 어깨를 칠 때까지>라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주목되는 사실은, 어긋난 삶을 상식적으로 포용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화자는 세상에 밀려 어긋난 삶을 계속 살아가지만, 때때로 위험한 일탈을 꿈꿈으로써 그 세상에 저항한다. 그는 <궤도 밖으로 이탈할 위험이 없는 생은 위험해>라고 말한다. 바로 여기서 김혜수 시는 긴장을 획득하는 것 같다. 그의 시에서 이탈의 흔적은 곳곳에 노출된다. 그러나 그 노출은 은밀하다. 가령 「야행성」 같은 시에서 그 이탈의 흔적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뚜벅뚜벅 태양이 계단 올라오는 소리
현관문에 열쇠를 꽂기 전에
나는 대피해야 한다
나와 뒹굴던 검은 꿈과 함께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순하게 나를 길들이던 밤의
완벽한 알리바이를 위해
화자는 검은 꿈을 감추고 있다. 그 검은 꿈은 <가르멜 수도원> 같은 데서 관능을 꿈꾸는 것일 수도 있고, <부리에 위험한 빛의 파편을 물고 무사하지 않은 밤과 내통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사는 건 변두리에서의 스릴과 서스펜스>이며, <환상과 좌절의 동시상영>과 같은 것이 된다. 환상을 찾아가는 이탈의 스릴과 서스펜스, 그리고 그 꿈과 조절이 맞부딪치면서 만들어내는 긴장감 속에서 김혜수 시는 힘을 얻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