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흐름

한국 문화예술의 位相과 그에 대한 소망

文化的 昇華를 위하여




박이문 / 포항공대교수

나는 한국의 오늘날 문화예술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할 자격이 없다. 퍽 오랫동안 외국에 살다가 고국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현재 한국 문화를 알고 있다면 그것은 극히 단편적이고 간접적이며 즉흥적이다. 그동안 이따금 들렀다 돌아가면서 더러 문학작품을 접했고 신문이나 TV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어떤 움직임을 흐릿하게 느끼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의 인상이 신선할 수도 있다.

가장 뚜렷한 일반적 인상은 문학예술활동 그리고 더 넓은 의미에서 문화적 활동이 꾸준히 활발했었고 지난 10여년 전부터는 거의 폭발적으로 과열해졌다는 사실이다. 경제적, 정치적 측면에서와 아울러 문화적 측면에서도 이른바 어느 선진국가에도 볼 수 없는 한국민의 넘쳐흐르는 에너지를 피부로 느낀다.

이 민족적 저력은 모든 측면에서 한국사회를 우리 역사에서 오래도록 그와 유사한 예를 볼 수 없는 엄청난 변화를 초래했고 ‘발전’을 이룩해 놓았다. 이러한 추세는 이른바 ‘민주화’와 더불어 가속적으로 두드러져가고 있다.

문화예술의 분야도 예외는 아니다. 홍수같이 쏟아져 나오는 詩集, 小說作品, 특히 지난 몇 년 동안의 수많은 音樂, 美術 彫刻作品전람회, 舞踊發表, 다양한 演劇公演, 그리고 각 校內, 각 地方 그리고 서울에서의 文化的 祝祭 등이 한국 文化藝術의 全盛期를 마련하고 있는 것 같다.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오늘 한국의 문화예술은 오래간만에 또한번 깊은 잠에서 깨어나 다시 꽃을 피우고 있음에 틀림없다.

문화예술의 이런 현상은 언뜻 보아 두 가지 상반된 측면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첫째 기존의 정치, 사회 질서에 대한 과감하고 솔직한 비판이며 도전이다. 民衆文學, 分斷文學, 參與藝術, 사실주의문학 등이 지난 40년간 부단히 언급되고 논쟁의 중추적 흐름을 이루었다는 사실이 文學藝術의 사회적 의식과 비판적이고 도전적 성격을 실증한다.

문학예술이 삶에 대한 반성이며 삶의 가치 추구이며 삶이라는 피부적 체험의 표현인 이상, 인간의 삶이 사회를 떠나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이상, 그리고 분단된 한국에서 정치적, 경제적 현실이 극한상황이었다 할만큼 억압적이고 빈곤했고, 부패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이상, 위와 같은 문학예술의 경향은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이 문화예술현상의 또 하나의 성격은 나쁜 뜻에서 복구적이요 좋은 뜻에서 ‘자기 재발견의 의지’라는 개념으로 풀이된다. 우리들이 전혀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오랫동안 잊어야만 했던 한국의 전통적 문화예술의 재발굴과 그런 것에 대한 흥분된 애착심을 표현코자 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古典文學에 관한 새로운 연구가 활발했고, 民俗學이 우리의 관심을 크게 끌었고, 「판소리」, 「마당극」,「사물놀이」등의 재발굴과 대중화로서 이제는 이른바 서양적 예술양식 이상으로 우리들의 예술양식으로 다시 자리를 확고히 굳히게 됐다. 이제는 국가의 장려와 후원으로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수많은 축제, 이른바 문화제에서는 거의 천편일률적으로 청사초롱의 장식과 버꾸춤놀이를 볼 수 있고, 징, 꽹과리, 북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축제에는 거의 빠짐 없이 돼지머리를 차려놓은 巫俗的 예식행사를 본다.

몇백년 동안의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빈곤 속에서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의 정신적 유산을 옳게 전수받고 표현하고 발전시킬 겨를이 없이 살아왔다. 조선말엽 한국을 둘러싼 열강들의 고래싸움 속에서 새우와 같았던 우리는 우리 고유문화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생존에만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日帝에 의한 國家의 약탈과 우리 고유문화를 말살하려는 악독한 식민지 정책에 의해 우리의 문화는 문자 그대로 소멸될 상황에 있었다. 解放 후에도 극화된 정치적 갈등과 이어 6·25 전쟁으로 文化財는 물론 국토가 황폐화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죽지 않고 살아남았고 우리의 처절한 결의와 노력으로 불과 30년 동안 오늘날 산업국가로 부상하게 됐고 우리의 잃어버린 긍지는 잿더미에서 소생하여 봉오리를 다시 맺기 시작하게 된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누구냐?’를 묻게 됨은 당연하고 우리의 개성있는「주체성을 찾아야만 했다. 싫든 좋든 우리가 우리의 고유한 과거를 돌아보고 그 속에서 우리의 우리로서의 모습을 찾을 수밖에 없다. 오늘의 우리는 과거의 소산이며, 우리의 전통이야말로 우리가 뿌리를 박고 있는 토양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도덕적 의미를 지니는 사회, 정치의 기존질서에 대한 비판성, 도전성과 회고적이기도 한 오랜 전통, 특히 민중적 전통에의 향수와 재발견과 개발의 의지는 언뜻 보아 서로 상충되어 보이지만 그것들은 다같이 한민족 공동체로서의 짓밟히고 상실되었던 自我에의 의식과 자신의 주체성을 확인코자 하는 억제할 수 없는 당연한 갈망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한 마디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시들어 없어지지 않으려는 한민족의 정신적 에너지를 입증한다. 거기서 우리는 우리자신이 스스로 환희를 느낄 만큼의 싱싱한 생명력을 발견한다.

어떻게, 그리고 누가 보아도 자랑해야만 하는 우리 민족의 위와 같은 뿌리깊은 정신을 표상하는 오늘날 우리 문화예술의 위상에는 아무리 자부심을 갖고 자축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훌륭하고 따라서 보다 더 자랑스러울 수 있는 문화예술의 창조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잠시 오늘날 우리가 지키고 만들어가려 하는 문화예술에 대해 잠시나마 반성해 봄이 필요할 것 같다.

첫째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문화예술이 어쩐지 거칠다는 것이다. 다분히 구호적이며, 이념적이고, 선동적이며, 획일적이고, 전투적인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너무 많이, 그리고 너무 자주 구호소리가 들려 왔었다. 너무 획일적으로 교조적인 주장이 많았다. 꽹과리, 징, 북소리가 너무 크고 너무 소란스럽게 너무 자주 들려 왔었다.

예술이라는 작업 혹은 작품은 그것이, 정치, 경제, 도덕적 목적과 뗄 수 없고 그러한 것의 달성을 위해 마땅히 이바지되어야 하겠지만 그것은 곧 정치, 경제, 도덕적 활동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아무리 원시적이고 거친 가치를 위한 것이라 해도 예술작품은 우선 예술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 자체는 거칠어서는 안된다. 예술은 그 성격상 그 뜻이 어떻게 해석되든 그 자체로서 ‘완성’, ‘완벽’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무리 민중을 위한 민중적 예술작품일지라도 작품 자체로서는 언제까지나 우아해야 한다.

둘째 오늘의 문화예술의 톤이 어쩐지 떠들썩하다는 느낌을 준다. 민중적이라는 것이 반드시 떠들썩한 것은 아니다. 뛰어난 예술은 반드시 예술가의 강렬한 체험에 바탕을 두며, 독자나 청중의 강렬한 감동에 호소한다. 그러나 물리학적으로 강한 음성만이 강렬한 체험이나 감동을 표해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체험과 감동은 이성과 의지에 의해 통제되었을 때야 비로소 체험되고 표현될 수 있다. 우리의 예술적 표현은 보다 더 조용히 압축된 길을 발명해야 할 것 같다.

셋째 위의 두 가지 성격은 피상적인 성격으로 연계될 수 있다. 조잡하고 떠들썩하다는 것은 외향적, 피부적인 뜻을 지닐 수 있다. 그러다 보면 그만큼 내면성이 결핍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예술작품은 필연적으로 구체적 매체를 통해서 밖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나타남은 반드시 내면적 내용을 갖는다. 예술작품은 내면세계에서 출발하며 내면세계에 도달한다. 눈으로 볼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비외면적, 즉 정신적 내용을 가져야 한다. 한 예술작품의 가치는 그러한 내용의 깊이에 따라 크게 결정된다.

넷째 우리가 창조하는 예술작품의 내용, 내면성이 무엇인가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예술은 그냥 지각이나 감각 대상이 아니라 정신의 형태이다. 정신이 심각하면 할수록 떠들썩하기를 덜해간다.

지금 우리 문화예술은 자칫하면 復古的이며 폐쇄적인 경향을 띨 수 있다. 모든 의식, 가치, 생각은 반드시 어떤 전통 속에서만 가능하다. 하나의 전통은 그것이 다른 전통과 구별됨으로써 비로소 전통의 의미를 갖는다. 우리의 예술, 우리의 가치도 우리의 전통을 벗어날 수 없고, 다른 예술, 다른 가치와 구별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전통은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개개인의 지속적인 가치의 창조와 선택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전통은 언제나 새로운 가치와 새로운 선택에도 열려있으며, 부단히 재창조됨으로써만 참다운 의미를 갖는다. 우리의 과거가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며, 그것이 과거에 좋았던 것이라 해도 오늘날도 똑같이 그럴 수는 없다. 그것은 부단히 재평가되어야 하며 재창조되고 육성되어야 한다. 다른 경험을 함으로, 다른 상황에 삶으로써 그리고 우리와는 다른 전통과 접함으로써 우리의 전통은 지금과 미래에 걸쳐 지속적으로 재평가되어야 한다. 과거의 전통을 새삼 발견했다고 해서 그것만을 그냥 그대로 고수하여 반복한다면 참다운 전통은 있을 수 없다.

문화는 한 사회공동체가 놓여있는 여건의 수동적 반영인 동시에 그것에 대한 적극적 작용이기도 하다. 한 사회의 문화는 그 사회에서 창조되는 예술작품에서 가장 예민하게 표현된다. 오늘날 우리는 이른바 소용돌이 같이 변하는 기술문명을 삶의 여건으로 갖게 됐다. 컴퓨터로 상징되는 정보사회에서 우리는 거의 단편적이며 순간적인 상품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우리의 문화, 우리의 예술은 이러한 삶의 상황을 필연적으로 반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문화, 그리고 문화의 정수적 표현으로 볼 수 있는 예술은 단순히 주어진 삶의 여건을 기계적으로 반영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문화예술은 그것을 창조하는 공동체의 주관적 가치관과 결단에 의해 자율적으로 변형되게 마련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현명한 판단과 선택으로 보다 바람직한 문화예술을 창조할 수 있고 따라서 보다 보람있는 사회와 삶을 마련할 수 있다. 우리가 바라는 내일의 문화예술의 위상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그것이 고발적 아니면 흥행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이제는 관조적이며 탐구적 그리고 명상적이기도 한 것이 되기를 바란다. 수선스럽고 외양적인 것에 머물지 말고 침전되고 내향적 예술작품이길 희망한다. 강렬하면서도 격이 높은, 품위를 갖추고 생동하면서도 엄격한 형태의 미를 함께 한 예술작품의 창작이 아쉽다. 예술활동은 그냥 행사가 아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언제까지나 創作的 작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