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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80년대 문단동향




장선영 / 외대 스페인어과 교수

현재 스페인 문단 현황은 가히 춘추전국시대에 비유할 수 있겠다. 그만큼 계통이나 질서가 잡히지 않고 있다. 즉 원로작가, 중견작가, 소장층으로 위계가 명확히 구분되어 있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작가들이 작품 하나 발표하고 나서는 대가연 하고 행세하면서 독자적으로 행동하고 다니니까 말이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자타가 공인하던 원로작가들도 이제는 너무 고령화되어 문단의 질서를 잡을 힘이 없다. 더욱이 그들의 대부분이 프랑코 정권에 자의든 타의든 간에 동조했던 경력이 있는지라 후배작가들에게 큰소리 지를 형편도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 자신도 독자적으로 행동하고 있다. 그 좋은 예가 까밀로 호세 셀라다. 1989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 최고원로작가는 그 찬란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 계보가 없다. 그리고 셀라에 버금가는 미겔 델리베스는 그의 고향 바야돌릿에서 은거생활을 하면서 간간히 집필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뿐인가, 전후문학의 기수로서 국내외적으로 그 이름을 폭발시켰던 까르멘 라훠렛(1924∼)도 언제인가 모르게 독자의 기억으로부터 사라져 버렸다. 이렇듯이 전후세대에 속했던 작가들은 타계했거나 또는 고령화되어 문단에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여기에 한가지 문제가 있다. 그 뒤를 이은 작가들은 셀라나 미겔 델리베스 같은 명성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들도 작가적 역량을 십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독자들에게 어필하는 감도가 전후작가들을 따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시대적인 영향의 탓도 있다 하겠다. TV나 기타 대중매체물의 효과적인 감응을 받은 독자들이 웬만한 작품 앞에서는 전처럼 쉽게 감격을 하지 않을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것도 엄연한 사실이니 이 사실성을 존중해 주어야 하겠다.

이런 차원에서 서반아 문단의 현황을 관찰할 때 그 분석적 방향의 설정은 명백해진다. 즉 현재 스페인 문단에는 주도적 인물이 없다는 결과를, 아니 사실을 우리는 미리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현재 많은 유능한 작가들이 미래의 주도적 위치를 향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특출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작가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80년대 문단을 화려하게 장식한 작가로는 후안 뻬드로 아빠리시오가 있다. 그는 70년대 후반기에「원숭이의 기원」이라는 장편소설로 문단의 주목을 끌었다. 그의 독특한 필치와 시대를 예리하게 분석할 줄 아는 작가적 능력이 그를 일약 주목받는 작가로 만들었다. 그 뒤를 이어 발표한「시저」(1981)와「프랑스인의 해」(1986)는 문단에서의 그의 위치를 굳건히 해주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그가 역량있는 작가로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1988년도「쁠라네따」문학상을 수상하고 나서였다. (이 「쁠라네따」문학상은 스페인에서「나달」문학상과 어깨를 겨루는 권위있는 상이다.) 그 수상작은 「밤모임의 초상들」이었다. 내용인즉 스페인 어느 지방도시의 시행정에 얽힌 부조리를 집중적으로 파헤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사장은 부하직원들이 뇌물과 태만에 빠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영원한 명성을 얻기 위함인지 엉뚱한 사업을 곧잘 벌리곤 한다. 이런 내용을 소재로 하여 작자는 현실과 환상을 적절히 혼합하면서 독자를 그 어떤 흥미로운 결론에 도달시킨다. 대체적으로 환상적인 소설은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이 그 주특기지만 이 작품에서는 재미가 그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고 단순한 재미가 아니라 사색을 수반하는 재미라 하겠다. 이 작품은 수상작으로 발표되자 마자 일약 베스트셀러군에 끼었다. 그런데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가 인기있는 문학상의 수상작이어서가 아니라 그 작품이 독자에게 부여하는 최대의 서비스-즉 재미-가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 비평가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아무튼 후안 뻬드로 아빠리시오는 지난 80년대 문학을 석권한 작가들 중의 하나라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후안 뻬드로 아빠리시오가 소장층 작가들을 대표하는 인물(확실치는 않으나 그의 나이는 현재 45 세쯤이다)이라면 다음에 소개하는 마누엘 바스께스 몬딸반은 중견층 작가들의 대표적 인물이라 하겠다. 1939년생인 그는 원로작가들과 중견작가들의 매개체 역할을 착실히 하고 있는 바로 그런 작가이다. 그는 처음에 시인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1967년이었다. 그러나 그는 문학성의 영역을 넓히는데 있어서 시의 한계를 느꼈다. 그리하여 소설분야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1969년에 발표한「다르데를 회상하면서」는 일종의 실험소설로서 당시 전통적인 사실주의적 소설에 익숙해 있었던 스페인인들에게 거부반응을 불러일으켰다.(19세기말 자연주의가 스페인에서는 별로 빛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그리하여 그는 스페인문학의 전통적 특기인 ‘재치’를 그의 문학세계 속에 삽입하기로 결심했다. 그 결실이 바로「내가 케네디를 죽였다」(1970)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이름은 뻬뻬 까르바요인데. 그는 현대판 루팡이라 하겠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전 인류가 궁금해하는 문제를 속시원히 풀어주는데, 독자들의 반응이 대단하였다. 그리하여 저자는 제2탄을 터뜨리는데 조금도 주저치 않았다. 바로「문신」이었는데 이 작품도 큰 인기를 끌었다. 그 뒤 계속해서 제3탄, 제4탄,… 결국 1987년까지 무려 11탄까지에 이르렀다. 이 일련의 작품들은 영어, 독어, 프랑스어 등 여러나라말로 번역되어 큰 호응을 얻었다. 그는 유명한 국제문학상도 여러 개 받음으로써 유럽문단에서는 꽤나 알려져 있다. 명실공히 국제작가답게 그의 문학세계는 퍽이나 광할한 지역을 석권하고 있다. 여기에 소개하는 그의 대표작「갈린데스」가 바로 그 좋은 본보기라 하겠다. 이 작품은 일종의 정치소설로서 갈린데스는 바스크 망명정부의 일원이다. 그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독재자였던 뚜루히요에 의해 납치되어 고문 끝에 죽고 만다. 그리하여 미국첩보부에서는 갈린데스의 행방을 수색하러 나서는데 그 과정 동안에 그에 대한 과거지사가 낱낱이 드러난다. 그리하여 공간적으로는 바스크(스페인의 서북부지방)에서부터 카리브해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시간적으로는 50년대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처 독자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현란하게 조명되고 있다. 가히 현대 스페인 소설의 세계화를 유감없이 발휘한 작품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알아두어야 될 것은 마누엘 바스께스 몬딸반의 작품세계가 단순히 탐정적 요소를 지닌 흥미 위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작품의 저변에는 언제나 은은한 휴머니즘이 깔려 있다. 바로 이 점이 독자를 오랫동안 감동의 여운 속에 남기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확실히 몬딸반은 지역성에 안주하고 있던 스페인문학을 그 영역 밖으로 끌어내는데 성공한 작가라 하겠다. 물론 80년대를 통해서 말이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80년대 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탐정소설이 크게 독서시장을 석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전에도 탐정류나 첩보물의 소설은 꾸준히 인기를 누린 것은 사실이나. 그러나 이 시기를 통해서 그 어떤 의미성을 지닌 -여기서 말하는 의미성이라는 것은 시대적 정신을 창조하고 반영할 수 있는-탐정소설이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탐정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인간적인 그런 작품들이 이 시기를 통해서 마구 쏟아진 것이다. 그 대표적 작품이 후안 마드리드의「친구의 키스」다. 이 작품은 1980년에 출판되었는데, 출판되자마자 베스트셀러 대열에 올라 연속적으로 최고 인기를 누리는 통에 다른 작가들로 하여금 탐정물에 관심을 돌리게 하는 기폭제가 되게 하였다. 그리하여 오늘날 후안 마드리드를 가리켜 ‘스페인 탐정소설의 대부’라고 부르는데 이의를 제기할 자는 아무도 없다. 그만큼 그는 완벽한 기법으로 탐정소설을 오밀조밀하게 꾸미고 있다. 「친구의 키스」는 스페인 내란을 통해 파시스트의 횡포에 맞싸우는 민중의 결집력을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이 작품에도「갈린데스」처럼 두터운 인간미가 짙게 흐르고 있다. 그러므로 독자를 무한히 감동시키고 있다. 이 사실을 두고 라화엘 꼰떼같은 비평가는 ‘고전주의 수법을 답습’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그의 말대로 라면 삐오 바로하(20세기초의 유명한 소설가)의 냉철한 편견이 그 작품 속에서 엿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이 냉철함은 휴머니즘과는 상극이 되지 않는가? 그러나 좀더 냉철한 이성을 지니고 이 작품의 내면을 살펴본다면 그‘상극’이라는 표현에 독자는 강한 거부감을 느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감정적 호소력을 가지고 휴머니즘을 유발시킨다면 그것은 남에게 동정을 구걸하는 비굴한 행위에 불과할 것이다. 진정한 휴머니즘은 냉철한 이성에 바탕을 두고 분출되어야만 그 본질이 조금도 혼탁되지 않을 것이다. 동정성 휴머니즘은 일시적이며 가변성의 위험을 언제나 안고 있다. 후안 마드리드의「친구의 키스」는 바로 이 냉철한 이성적 휴머니즘에 바탕을 두고 꾸며진 탐정소설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을 읽고 독자는 두고두고 그 찡한 휴머니즘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어느 평론가나 이 작품은 짙은 고전성이 깃들여져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다. 이「친구의 키스」도 80년대를 통해, 특히 후반기에 스페인의 서적시장을 석권한 책들 중의 하나였음은 새삼 말할 필요조차 없겠다.

스페인도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그동안 소설의 수난기를 겪었다. 즉 영화나 TV의 극성으로 인해 소설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한심할 정도로 감소되었다. 그리하여 순수소설이나 그밖의 실험소설 등은 그 명맥을 유지하기에 급급했다. 그러므로 대중과 소설의 끈을 연결시키는데 절대적 공헌을 한 장르는 아무래도 탐정류나 첩보물이라 하겠다. 마치 이런 현상은 스페인 문학의 쇠퇴기라고 할 수 있는 18세기에도 있었다. 즉 스페인 연극이 프랑스의 고전극(딱딱하고 재미없기로 정평이 난)의 지배를 받고 있을 무렵 대중은 그런 연극에 아예 등을 돌리고 있었다. 어찌나 그 외면이 극심했던지 아예 연극의 존재성마저 부인할 정도였다. 이때 연극과 대중의 영원한 단절을 막아준 것이 흔히「사이네떼」라고 불리우는 일종의 경가극이었다. 사실 이「사이네떼」의 출현이 없었던들 오늘의 빛나는 스페인 연극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스페인문학사에서는 이 「사이네떼」의 출현과 그 존재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80년대를 통해 소설과 대중이 끈끈한 정을 유지했다면 그건 다름 아닌 탐정물이나 첩보물의 공로라고 보아야겠다. 그런데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그 탐정물이나 첩보물이 짙은 문학성으로 승화되어 있었다. 이 사실이 바로 스페인문학의 전통적인 저력의 필연적인 결과라 하겠다. 그런데 90년대에 들어와서 이런 만족스런 결과에 바탕을 두고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작가가 있다. 바로 안또니오 멘챠까다. 이 작가는 80년대 초반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는데 그의 정력적인 작품활동으로 어느덧 스페인 문단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의 작품적 특징은 과거의 불합리한 행위들(역사적이든 또는 무의미한 것이든 간에)을 현실적인 시각면에서 관찰하고 분석하고 그리고 규명하는데 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결론이나 결과는 냉소라는 하나의 귀결점에 도달한다. 안또니오 멘챠까의 이런 성향은 다분히 현실을 사시적으로 보려는, 이른바 지식인들의 특성이라고 간단히 규정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없지 않아 있다. 그 이유는 안또니오 멘챠까가 시도하려는 주안점이 과거와 현재의 양 시대를 통해 어떤 진실성의 구심점을 얻을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냉소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동원되는 하나의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뜻에서「냉소적인 망령들」은 그 제목 자체부터 그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1991년 발표된 이 작품은 그의 일곱 번째 작품으로서 스페인 내에서는 상당한 반응을 불러일으킨, 이른바 문제작이라 하겠다. 그 내용은 아주 간단하다. 시칠리아의 지하묘에 안치되었던 미이라들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땅 위로 올라와 세상 구경을 하는데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미이라들은 땅 속에서 답답하게 지내다가 햇빛을 보게되니 우선은 속이 확 트이는 것처럼 시원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땅 속에서 있을 때보다 더 속이 답답해 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오늘을 사는 인간들의 행위나 마음 씀씀이가 도대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이 죽었던 시절, 즉 18세기 사람들의 그 순수했던 마음을 그리워하면서 다시 지하굴 속으로 들어간다. 이 냉혹한 현실에 대해 마음껏 냉소를 퍼부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간과해서는 아니될 것은 과연 18세기의 사람들이 문자 그대로 순수했느냐는데 있다. 당시의 상황을 살펴본다면 합리주의가 시대적 사상으로 부각되면서 이성이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경우에 어긋남이 없이 이치에 맞게 시행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 당시에도 비이성적인 행위는 얼마든지 있었고 또한 많은 사람들이 순순한 마음을 가지기는커녕 오히려 사악하기조차 했다. 그런데 그 미이라들은 자기들이 살았던 시대를 순수시대라 부르면서 오늘의 현실을 비웃다니, 이런 비이성적인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바로 작가의 의도는 냉소 뒤에 도사리고 있는 또 다른 냉소를 찾아내려는데 있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을 읽는 독자는 고도의 두뇌회전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미이라들이 오늘의 현실을 냉소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다가는 그 뒤에 숨겨져 있는 진정한 의미의 냉소를 놓치기 쉽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호세 안또니오 우갈데 같은 평론가는 멘챠까를 가리켜“실로 악마적인 미소를 입가에 띄운 채 독자를 두뇌적으로 우롱하는 지능적인 작가”라고 평했다. 그만큼 그의 작품들은 평면적으로 읽으면 재미는 있을지 몰라도 저자의 심오한 철학적 냉소에는 결코 접근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의 문학세계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두뇌회전 운동이 필요하다 하겠다.

지금까지 우리는 스페인문단의 현황을 살펴보았다. 물론 이 현황은 90년대, 바로 현시점이 아니라 80년대 후반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 이유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이 아직 90년대 문학은 구체적으로 정돈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당분간 80년대를 석권하던 작가들이 90년대에도 여전히 활약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으로 보아 90년대 문학을 논하기 위해서는 당분간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건 그렇고, 앞서 소개한 작가들은 각자 그 나름대로 90년대에 들어와서도 꾸준히 그들의 문학세계의 영역을 충실히 넓혀가고 있다. 이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는 표현은 어떻게 보면 무책임하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스페인의 현실성을 감안해 본다면 매우 의미심장한 표현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오늘의 스페인은, 아니 스페인 국민은 정치적으로 너무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다. 실로 20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자유가 이제는 극히 당연하다는 듯이 마냥 스페인 사회 전역에 범람하고 있다. 그렇다. 프랑코 독재정권하에서는 작가들이 그들의 무능력을 변명할 구실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즉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제한이 너무나 가혹하고 엄격해서 작가로의 재질을 십분 발휘할 수 없다고 말이다. 그러면 대체적으로 그런 변명이 일반에 의해 동정적으로 받아 들여졌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변명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이미 외국의 이른바 선진문학과 번번히 접촉을 가진 일반대중은 자국 작가들에게 보다 더 시대적 현실 감각에 맞는 작품을 발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작가들에게는 여간 부담스러운게 아니다. (모르긴 하지만 우리나라 작가들도 마찬가지의 부담을 느끼고 있을 것 같다.) 따라서 오늘의 스페인 작가들은 문학세계의 영역을 넓히는 것은 물론 꾸준히 기량을 닦고 연마하는데 최대의 노력을 경주하지 않으면 안 될 상태에 놓여 있다. 이것은 솔직히 말해서 풍요로운 자유로 인해 발생하는 일종의 구속상태이다. 이 역설적인 현실 속에서 스페인 작가들은, 적어도 의식을 의식하는 작가들은 어떻게 그들의 문학성을 구축하고 또 어떤 방향으로 문학세계를 형성할 것인가? 이것은 실로 90년대 작가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라 하겠다.

(필자는 이 '해결해야 할 문제'에 대해 현재 스페인 문단에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지성작가 후안 마르세(1930∼)에게 서면을 통해 문의코저 한다. 그는 현재 바르셀로나에 거주하고 있는 바, 1월 중순경 김광희양(외대 대학원생)이 그녀의 석사논문을 위해 그를 방문키로 되어 있다. 그 기회를 이용하고자 한다. 그의 답신을 받는 즉시 다시 독자 여러분을 만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