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전통

민속공예의 진수 - 종이제품

- 민속공예품 형성의 역사적 배경




김삼대자 /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


민속공예를 한마디로 정의함은 매우 어려운 일이나 많은 사람들 즉 일반대중이 생활에 두루 사용하였던 생활용품을 민속공예품이라 규정함은 큰 무리가 없다고 생각된다.

어느 나라이건 그 나라의 생활공예품들은 그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제도 종교 및 외국의 영향 등 인문적인 요소와 자연환경 요소에 의해 형성되며 시대에 따라 변화·발전되며 또 소멸되기도 한다.

우리나라 역대 왕조의 역사를 살펴보면 신분에 따라 가옥, 기물, 의복 등에 관한 규제가 있었으며 또 전문기능을 가진 장인들은 관청에 예속시켜 왕실과 관청의 기물을 제작시켰다. 관청에 예속된 장인들은 공역에 종사하면서 또한 사적 주문에 의한 제품도 생산하였으므로 현존하는 유물 중에는 사용계층 제작자의 신분 등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것들도 많다. 그러므로 서민 양반 할 것 없이 일상생활에 두루 쓰인 생활공예품을 민속공예품의 범주에 담았으며 그 내용들에 관해 간단히 언급하였다.

민속공예품에는 농촌 부녀자들의 전업인 길쌈, 농가의 농기구, 볏집과 풀을 이용한 초고제품, 산촌에서 제작한 목물 등 지역과 신분에 따라 생산되는 물품들이 어느 정도 한정되는 편이다.

그중 종이 공예품은 양반가의 선비로부터 서민층 부녀자에 이르기까지 고른 제작 분포를 보이며 사용계층도 왕실에서 서민층까지 폭넓은 양상을 보인다.

그러므로 다양한 민속공예품중 종이 공예품을 선정하여 자세히 언급하였음을 밝혀 둔다.

■민속공예품 형성에 역사적 배경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에 이미 왕과 귀족 평민과 노비로 상하의 위계 질서가 규정된 신분제 사회였으며 각 계층의 사람들은 신분에 따른 가옥, 의복, 생활용품 등에 대한 규제가 제도화되어 있었다.

이러한 규제는 시대에 따라 엄격히 시행되기도 했으나 고려시대의 경우처럼 비교적 그 규제가 심하지 않아 상업으로 부를 축적한 상인들도 귀족과 같은 의·식·주생활을 영위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모든 기능인들을 관청에 소속시키고 능력에 따라 관직도 주었으며 이에 따른 급료도 지불하였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장인들은 생활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고 수요자의 기호에 맞춰 우수한 공예품의 제작에 전념할 수 있었다. 또한 왕실의 보호를 받았던 불교사원에서도 노비를 거느리고 많은 전답을 소유하여 양민을 공호(貢戶)로 삼아 각종 수공업을 일으켜 사원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생산하였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잉여품은 판매를 하여 수익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고려시대에는 청자를 위시한 나전칠기, 청동은입사제품 등 우수한 공예품이 양산되었고 귀족공예적인 특징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공예품의 수요자는 왕실과 왕실의 보호를 받았던 사원의 승려, 지배계층이었던 귀족, 상업으로 부를 축적한 일부 상인들이었다.

조선시대는 건국 초기부터 유교를 국가의 통치이념과 도덕적 규범으로 삼았다. 따라서 사회의 지배계급인 양반들도 유교의 근검절약 정신을 생활태도로 삼아 새 국가 건설 의욕에 불탔으며 학문과 예술의 각 분야에 걸쳐 건전한 새 탐구 활동의 기틀을 잡았다. 조선시대의 공업은 가내 부업으로서의 수공업이 존재했을 뿐이며 전문적인 기능을 지닌 장인들은 모두 각 관청에 소속시켜 지배계급의 위의를 갖추기 위한 장식품 및 생활용품 관청의 수요품을 만드는데 종사하도록 하여 관청의 필요에 따라 의무적으로 일을 하여야만 하였다.

장인들의 신분은 천민, 관노(官奴), 사노(寺奴), 거란·여진 등에서 귀화한 집단부족으로 구성되었다. 장인들은 비록 관청에 속했을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최하층민이었고 신분의 격상을 가져오는 관직을 갖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보수도 없었다.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주문받은 제품을 생산하였을 경우에는 별도의 공장세(工匠稅)를 납부하였다. 즉 장인들은 노예노동 형태로 고용된 것이다. 그러므로 장인들은 자의적인 창작활동을 못하였으며 주문자의 요구에 따른 기술제공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초기에는 민중사업이 발전될 수 없었고 일반서민은 말할 것 없고 일부 청렴한 양반계층에서도 간단한 물품들은 자가(自家)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관청에 소속된 장인들 중 결원이 생기게 되면 중앙관서 소속의 노비나 지방에서 선발된 노비들로 충당함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과중한 노역과 잡부금을 피하기 위해 변방으로 도망치는 장인도 생기게 되었다. 세종임금 때에는 결원을 일부 양인으로 보충하기에 이르렀고 점차 양인의 수효가 늘게 되었다. 따라서 장인들은 노예노동 형태에서 어느 정도 향상된 지위를 얻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지배계층인 양반들은 유교의 검소한 생활철학에 따라 근검 절약하였으며 생활용품도 사치하고 화려한 것은 피하고 값싼 재료를 사용하여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닌 기물을 애용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생활용품들은 고려시대의 완벽하고 정교한 아름다움을 지닌 공예품에 비해 기교면에서 뒤떨어지나 검소하고 세련된 멋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양반계층의 취향은 서민생활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실제로 청렴결백한 양반과 일반백성들의 생활기물들은 재료나 형태에서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신분에 따른 각종 규제가 있었으며 그 시행은 과거의 어떤 왕조보다 엄격하였다. 규제 내용은 가옥(대지 및 주택의 규모와 높이)·금은주옥·금수능라·채색의복·주칠(朱漆)의 사용 금지 등 사치품에 국한한 것들이었다. 17세기는 임진왜란 병자호란의 두 가지 큰 전란을 극복하면서 현실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자아의식을 바탕으로 정치·경제·군사 등 여러 면에서의 개혁이 추진되었다. 새로운 분위기의 사회건설을 이상으로 한 실학이 일어나고 서민들의 자각이 커져 사회적 생산력의 증대, 금속화폐의 유통보급, 대외무역의 활발한 전개 등 자유상업이 발달하면서 관청·수공업의 해체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고 따라서 민간 수공업의 발전이 증진되었다. 이러한 결과 18세기경에 장인은 물론 가내수공업자들도 개량된 도구와 향상된 기술로 다양한 종류의 생활용품들을 창안하였다. 물론 오랜 세월의 통치 이념이었던 유교적 기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으나 서서히 근대화로 지향하는데 기여하였다.

19세기의 순조·철종대에는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로 왕권은 약화되고 부정과 부패는 만연되어 매관 매직이 공공연히 행해졌다. 양반사회의 기반은 흔들리고 곳곳에서 반항을 시도하는 민란이 발생하여 조선의 전통사회는 그대로 민란이 발생하여 조선의 전통사회는 그대로 유지될 수 없는 역사적 상황에 다다르게 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에 따른 각종 규제는 폐지되어 사회적인 대변화가 이루어졌다. 대중이 즐기던 세시풍속 놀이, 민간공예 전통생활양식 등은 1910년의 한일합방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그 위에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급격히 밀려온 서구 문화의 영향과 산업의 발달로 1960년대부터 농촌의 초가지붕도 주택개량사업의 일환으로 슬레이트로 바뀌었고 전통가옥의 나지막한 방문도 큰 가구의 배치가 용이하도록 높고 크게 변모되었다. 이와 같이 의·식·주 생활양식이 급격히 변화를 이루면서 모든 전통의 맥은 단절되기에 이르렀다. 다시 말하면 수요가 격감됨으로 직업장인들의 솜씨는 거의 단절되었다. 경공장, 외공장에 속하지 않은 분야로서 국내의 수요를 충당하였던 부녀자들의 무명, 삼베, 모시, 명주 등의 길쌈부업도 대량생산되는 공장제 섬유제품에 밀려 단절되기에 이르렀다. 최근 정부에서는 전통예술 94종목에 대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그중 전통기능 보유 분야는 30종목이라 이들 기능보유자에 대해 보조금의, 지급 전수생의 육성, 제작품에 대한 판로 알선 등으로 보호·육성하고 있다. 1980년대 경제적인 안정을 이룩한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고 향수를 느끼게 됨과 때맞춰 시행된 정부의 전통문화 보호 정책에 힘입어 조상들의 숨결이 밴 공예품들은 점차 우리의 의식 저변에 확산되어 가고 있다.

■민속공예의 분야

엄격한 의미에서 왕실과 관청의 수요품을 전담하였던 경공장(京工匠)과 외공장(外工匠)의 제품들을 민속공예의 범주에 넣기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이들 장인들이 주로 공역(公役)으로 제품을 생산하였으나 사역(私役)으로 제품을 생산하기도하여 현존유물로서 명확히 구분 짓는 것도 또한 어려운 실정이다. 경공장은 공조를 위시한 여러 관청의 수요에 따라 배치되었으며 130여 분과에 소속된 장인은 2841∼3655명에 이르렀다. 분과에는 세탁장, 다듬이장도 있으며 종이 등 각종 장식품 제조는 물론 벽돌, 미장일, 울타리제조 등 건축관계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분야의 장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외공장은 27개 분과로 경기, 충청, 경상, 전라, 강원, 황해, 영안, 평안에 총 3500여 명이 소속되었다. 외공장은 지역에 따른 특산품을 주로 제작하여 조정에 공물로 보내었다.

백성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농촌의 수공예는 앞서 말했듯이 부녀자의 부업인 삼베, 모시, 무명, 명주 등의 길쌈이 있으며 왕골, 골풀을 이용한 자리짜기, 볏짚을 이용한 짚신 멍석, 둥구미, 쌀통, 섬, 짚방석, 닭둥우리, 개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용도의 제품을 생산하였다. 들에서 나는 띠풀로는 도롱이를 만들었고, 싸리로는 채독, 닭둥우리, 빗자루, 바구니, 광주리를 만들었다. 이러한 채독에는 종이를 발라 사용하기도 하였다. 농가의 부업인 직조를 짜기 위한 베틀도 대부분 자가제품이며 만들기 힘든 바디만을 구입하여 사용할 만큼 농민들의 솜씨는 탁월하였다.

산촌에서는 모든 일상생활용품을 산중의 산물로 자급자족하였으므로 집도 통나무, 벽에 나무를 쪼개어 댄 너와 또는 굴피지붕을 하였다. 산간에서는 통나무를 깎아 만든 물레방아, 통나무로 깎은 구유, 함지, 안반, 소반, 제기, 반상기, 밥통, 쟁반 등 생활용구와 깊은 겨울을 나기 위한 설피 등이 있다.

금속제품으로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대장간은 모든 마을마다 하나씩은 있어 솥, 칼, 화로, 촛대, 자물통 등과 괭이, 낫, 쟁기 등의 연장을 만들었다. 철제품에는 은을 입사하여 장식하기도 하여 선비 사대부층의 애완물로도 이용되었다.

생활기물의 중요한 재질인 놋쇠도 지역마다 있어, 화로, 부손, 반상기, 재떨이, 촛대, 대야, 요강을 위시하여 꽹과리, 징 등의 악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만들었다. 놋쇠와 더불어 백동제품에는 담배합, 재떨이, 촛대, 장도, 장죽의 대통과 물뿌리, 자물통, 가구장식 등이 있다. 이 백동에는 금이나 오동(烏銅)입사로 장식하는 경우가 많다. 이외에는 쪼이질로 무늬를 장식하기도 한다.

돌을 이용한 생활용품에는 벼루, 필통, 담배합, 문진 등 특수한 돌로 제작한 것도 있으며 곱돌로 만든 곱돌솥, 수도향로, 약탕관, 다듬잇돌, 촛대 등이 있다. 가장 풍부한 화강석으로 만든 절구, 수조·대야·연자매, 현무암으로 만든 맷돌 등은 빼놓을 수 없는 석재품이다.

가장 광범위하게 쓰인 목재품에는 지역적 특징을 나타내는 소반과 궤류(반다지 포함)를 위시한 장·농류, 서안, 연상, 연갑, 문갑, 사방탁자, 책장, 기타 고비 필통, 지통, 목침 및 좌등, 초롱, 등경, 등가촛대 등의 조명용품 등이 있다. 우수한 목공품은 대부분 경공장 외공장들이 제작한 것들이지만 이러한 우수한 생산품은 민간에 많은 영향과 자극을 주었으리라고 짐작된다.

대나무는 호남과 영남지방에서 자라므로 죽제품은 이들 남부지방에서 주로 생산하였다. 필통, 연죽(담뱃대), 채상, 키, 발죽석, 죽침, 소쿠리 등을 위시하여 참빗, 갓양태, 죽장가구, 부채 등이 있으며 피리, 단소, 젓대, 대금 등 관악기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품이 있다. 대쪽에는 낙죽, 염죽으로 장식한 기물도 있으며 피죽(皮竹:대접질)에 물을 들여 엮어 짠 채상은 고급품으로 왕실과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다. 죽제필통, 죽장가구, 고비 등은 선비·사대부 사랑방의 중요한 조도품중 하나였다.

백골에 패각을 입히고 옻칠을 한 나전칠기나 기물에 칠을 입히는 칠제품들은 신분에 따라 사용이 규제된 품목이다. 그러나 산에 자생하는 옻나무에서 채취한 칠로서 민간의 잡다한 수요를 충족하였음은 현존하는 서민용 소반 지승제품 등에 칠을 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된다. 나전칠기 제품에는 장, 농, 문갑, 연상, 반짓그릇, 실패, 함, 상자류 및 소반들이 있다. 화각은 소뿔을 얇게 떠내 그림을 그린 후 백골에 붙여 장식하는 제작공정이 매우 까다로운 공예기법이다. 화각제품에는 장(소형으로 흔히 애기장 또는 버선장 이라고 부름)함, 반짇그릇, 벼갯모, 빗, 실패, 자 등이 있으며 사용계층은 부유한 집안의 여성들이었다.

이밖에 금·은 보석으로 만든 장신구, 이 장신구들과 함께 또는 단독으로 몸치장에 사용되는 다회, 매듭, 술이 있다. 다회, 매듭, 술은 각기 전문장인이 있어 제품생산을 하였으나 서민 반가의 부녀자들의 대부분이 집에서 만들었으며 특히 적삼 단추는 수십개씩 맺어 두고 사용하였다.

옷감에 물을 들이는 염장은 관청에 예속된 한 분야이나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직접 옷감에 물을 들였으며 염료를 채취하여 부업을 삼아 살림에 보태는 부녀자도 있었다.

이밖에 옹기, 모피, 필묵 등 기능을 요하는 물품들은 전문장인의 몫이었다.

■종이 공예품

종이 공예품에는 종이를 이용하여 만든 기물과 종이를 장식하는 두 가지 대별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종이공예품에는 장, 농, 함, 연상, 필통, 등촉구, 방장자리, 방석, 반짇그릇, 빗접, 빗접고비, 소반, 함, 함지, 항아리, 요강, 식지 등의 가정용 비품과 쌈지, 안경집, 표주박, 화살통, 자라병옷, 부채, 우산 등의 휴대용품을 위시하여 지의, 신, 갓모 등의 복식류, 지화, 지등, 연과 같은 연희 의례용품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용품 전반에 걸쳐 고루 제작되었다.

재료는 전통 한지인 닥지로서 새종이를 쓰는 경우도 있으나 휴지(글씨를 연습한 종이) 제지(책을 만들거나 방을 도배할 때 재단하는 남은 자투리종이) 또는 파지(찢어져 못쓰게된 종이 또는 헌책 종이, 새로 도배하기 위해 떼어낸 종이)를 많이 이용하였고 깨끗한 흰종이는 물을 들여 사용하였다. 품을 만드는 방법에는 지도기법(紙塗器法) 지호기법(紙糊器法) 지승기법(紙繩器法)이 있다.

지도기법은 종이를 여러번 겹쳐 발라 후지(厚紙)를 만들고 그 후지를 기물의 형태로 재단하여 이를 붙여서 완성하는 방법과 대 또는 나무로서 골격이나 기형을 만든 다음 그 내외에 종이를 여러겹 바르는 목골지장(木骨紙粧)의 두 가지 기법이 있다. 후지기는 대체로 물건을 담았을 때 하중을 받지 않는 소형 상자(비녀와 같은 장신구용), 반짇고리, 빗접, 안경집, 지갑, 실첩 등에 많이 이용되었다.

목골지장은 장·농·함 등의 대형 수장구에 주로 이용되었다. 서민층에서 만든 목골지장은 값싼 나무로 목골 또는 기물을 만들고 그 내외면을 휴지로 싸바른 다음 두꺼운 종이를 문자나 길상문으로 오려 붙인후 백지로 마감하거나 색지로 무늬를 오려붙여 장식한다. 그밖에 기면을 서화로 장식하는 경우도 있으며 표면에는 기름칠을 하여 내구력이 있도록 하였다.

왕실·양반 계층에서는 결기 좋은 목재로 골격을 하고 이 골격을 노출시켜 알갱이에 당지나 소지를 바른 호사스런 별격 취미의 기물에 이용하였다. 궁중에서는 골격에 주칠을 하기도 하였다. 특히 사랑방용 의거리장 책장에는 이러한 수준 높은 목골지장 제품들을 많이 이용하였으며 각 가정에서는 자연염료로 물들인 청(靑), 홍(紅), 적(赤), 황(黃), 녹(綠), 자(紫), 흑색(黑色)으로서 바탕색에 맞추어 나비, 박쥐, 원앙, 쌍희, 만(卍)자 등의 길상문을 오려 붙였다.

지호기법은 휴지나 파지 등 폐지를 이용하며 주로 서민층에서 그릇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먼지와 때에 절은 더러운 종이를 잿물에 빨아 깨끗이 한 다음 풀과 섞어 찧어서 점토(粘土)처럼 만들어 기물을 성형하였다. 완성되면 표면에 백지를 바르고 그 위에 기름칠을 입혔다. 지호기에는 합, 함지, 독의 형태가 많으며 마른 곡식이나 음식보관, 곡식 말리는데 이용한다.

지승기법은 일정한 크기로 자른 종이 쪽지를 꼬아서 끈을 만들어 기물을 엮는 방법으로 노망태, 멱서리, 둥구미, 항아리, 소반 등 농가·주방용품을 위시하여 연상, 필통, 등경, 자리, 방석, 방장 등 문방·기거용품을 포함하고 있으며 화살통, 표주박, 화약통 등의 휴대용품과 발류와 세수대야, 요강 등 물기가 닿는 기물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들중 연상이나 소반 등과 같이 하중을 받는 기물에는 목심을 하여 힘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지승기법도 휴지나 파지를 버리지 않고 활용하는 절약정신에서 생겨난 공예기법중 하나이다. 이와 같이 만든 지승기에는 칠을 입혀 사용하였다. 칠에는 옻칠이 최상품이나 서민들은 규제로 인하여 공공연하게 또는 풍부하게 쓸 수 없었으므로 표주박, 요강, 대야, 소반 등 물기가 자주 접하게 되는 물건에만 사용하였다. 그밖의 기물들은 옻칠에 대응하는 시칠(枾漆: 덜익은 푸른색의 감을 물과 섞어서 찧어 만든 즙)이나 들기름칠, 돼지피를 발라 방수와 내구력이 생기도록 하였다. 지승기 중에는 표면에 종이를 바르고 옻칠을 하여 옻을 아끼기도 하였다. 또 색지 위에는 석화채(石花菜 : 우뭇가사리)를 끓인 즙을 발라 말린 다음 법연유(法煉油 : 들깨, 밀타승, 활석, 백반을 한데 볶아 만든 기름)를 칠하여 아름다운 색채유지와 내구력이 있게 하였다. 지승제품에는 먹으로 무늬를 장식하기도 하였다.

표면에 먹으로 직접 그리기도 하였으나 꼬아 만드는 작업과정에 손때가 묻어 먹물이 깊이 스며들지 않으므로 바늘에 먹물을 묻혀 원하는 무늬를 찍어 완성하였으며 이러한 그림 기법을 공화(鞏畵)라 하였다.

이와 같이 다양한 종이공예품에 관한 시원을 일괄하여 언급하기는 매우 어렵다. 고려 때 지장(紙帳)이나 등롱(燈籠), 지연(紙鳶) 등을 소지(素紙) 또는 색지로서 만들어 썼으나 휴지나 파지를 이용한 각종 종이공예품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은 1800년대 이후부터였다.

종이는 600년경 중국으로부터 제지술이 도입되면서 보급되지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의 호구(戶口)를 조사한 신라장적기(新羅帳籍記)가 일본 정창원에 보관되어 있으며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7세기말∼8세기초로 추정)은 아직까지 알려진 우리나라에 현존되는 최고(最古)의 종이이다. 고려 성종 2년(983년)에 공해전(公邂田 : 관청의 경비지출에 충당하려고 나누어준 논밭과 임야)을 정하고 저전(楮田 : 닥나무밭)을 두어 양질의 종이를 생산하였다. 그러나 제작공정이 까다롭고 저전은 한정되어 왕실을 위시한 관청·사원 및 귀족들의 문방용, 내수용 서적과 불경의 간행, 중국에 보내는 공물 등을 충족시키는데 사용하였다. 종기가 귀하므로 각도의 안렴사와 별감 등은 공물을 빙자하여 거둔 종이를 권문귀가에 뇌물로 주는 폐단도 있었다. 이러한 실정하에서 일반 백성들은 종이를 여유있게 쓸 수 없었다. 궁중에서는 연회시에 탁자의 표면에 깔았고 민간에서는 겨울철의 방장에 이용하였다. 그밖에 하급관리들의 부채에 쓰이거나 연등의식과 제액(除厄)에 사용하는 지등이나 지연을 만드는 정도였다.

지장은 중국 송대에 우아한 취미생활을 위하여 구비하는 필수품으로서 고려의 지식인들에게 전해졌던 것으로 조선시대까지 영향을 미쳤다. 만드는 법은 소지를 주름잡아 꿰매어 나무막대에 얽어 걸어 놓으며 주름잡은 종이에는 매화나 나비를 그려 장식한 것이다.

조선초기에는 새문화 건설의욕으로 서적의 간행이 활발하였고 국민상하가 학문에 힘을 써 종이의 수요가 증가하게 되었다. 태조임금은 사치를 금하여 고려 이래로 연회의 장식물로 썼던 밀랍, 비단, 세저포 등으로 만든 꽃을 물들인 종이꽃으로 대치하도록 하였으므로 신하들의 과상(果床) 장식에 지화가 쓰이게 되었고 세종 임금때에는 공사간의 불사에도 종이꽃을 쓰도록 하였다.

조선 초에는 북쪽 변경을 지키는 병졸들을 위하여 지갑(紙甲 : 종이갑옷, 종이를 접어서 미늘을 만들고 실로 엮어 이어서 완성시킨 뒤 송지와 전칠을 하여 방수가 되도록 만들었음)을 보급하였다. 이 지갑은 갑옷으로서의 기능과 함께 방한복으로서 필수품이었다. 이 지갑은 점차 간략화 되어 인조 때에는 휴지를 이용하여 만들기도 하였으며 군졸 이외의 일반인도 입었던 지의로 변하였다. 이처럼 조선 초부터 많은 종이의 수요가 있어 세종임금 때에는 조지서를 설치하였으며 민간에게도 닥나무 심기를 장려하였다. 이때에 저지(닥종이) 외에도 닥나무에 소나무, 버드나무, 뽕나무, 옥수수, 이끼, 볏집, 귀리 등을 섞어 만든 각종 잡초지를 개발하기도 하였다. 종이가 양산되면서 고려때 적황색 비단을 발랐던 등비(藤毖 : 등으로 짠 광주리), 죽기(竹器)의 내면에는 비단대신 색지를 바르고 귀족들이 사용하였던 비단부채도 점차 종이부채로 바뀌었다.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극복하면서 영·정조대에 이르러 산업이 발전되고 유통경제가 활기를 띠어 서책과 종이가 산간촌락에까지 공급되었다. 우리나라의 저지는 비단처럼 질기고도 우수하였고 당시의 생활은 매우 검소하였다. 따라서 휴지나 파지는 다시 종이로 재생하거나 초배지로 활용하였으며 가늘게 잘라 꼬아서 끈을 만들어 문고리나 빨래줄 등으로도 사용하였다. 특히 책을 매고 남은 자투리 종이(당시는 인쇄된 책이 귀해 필사본을 각 가정에서 만들었음), 도배하고 남은 자투리 종이는 꼬아 끈을 만들어 두고 책끈이 떨어졌을 때 새로 엮었고 장죽(담뱃대)이 담뱃진으로 막힐 때 뚫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꼬아둔 끈으로 선비 사대부들도 여가에는 방석, 자리 등을 짜 사랑방 누마루에 두고 사용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풍속에 빗질할 때 빠진 머리털은 설날 황혼에 문밖에서 태우면 나쁜 병을 물리친다고 믿어 유지로 된 퇴발낭(退髮囊 : 사방 8∼90㎝의 유지로 머리 빗을 때 무릎에 펴 빠진 머리칼을 받으며 종횡으로 3번 접어 보관함)을 사용하였고 이를 보관하기 위한 종이빗접이나 빗접고비도 제작되었다.

조선시대 중엽에 수입되었던 담배는 1800년대에 이르러 국민상하 모두에게 확대 소비되었고 엽초를 휴대하기 위한 간편한 종이쌈지가 널리 사용되었다.

탐관오리의 매관매직으로 양반사회가 붕괴되는 조선시대 말기에는 서민들의 자아의식이 강하게 대두되어 생활양식의 변화를 추구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양반집 서적이 노비들에 의하여 도난 당하는 일이 생기게 되고 책을 찢어 만든 종이 기물이 대량으로 제작되었다. 이로 인하여 서책으로 한잡(閑雜)스런 일을 하는 사람은 법으로 규제하여야 한다는 뜻있는 선비의 발의가 규제하여야 한다는 뜻있는 선비의 발의가 나오기에 이르렀다. 종이 기물은 가볍고 질기며 깨지지도 않고 휴지나 파지로 누구나가 쉽게 제작할 수 있어 조선시대 서민계층에 널리 유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종이는 제작자의 의도에 따라 각종 용도에 맞는 다양한 형태의 기형을 이룰 수 있는 장점을 지녔다. 이러한 특징을 잘 활용한다면 전통공예 기법의 계승과 함께 현대감각에 맞는 아름답고 개성있는 공예품으로서 개발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공예분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