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과 전시-어떻게 볼 것인가?
「유럽추상미술의 거장전」을 중심으로
유재길 / 미술평론가·홍익대교수
본고는「문화예술」독자를 위한 전시리뷰로 매달 이루어지는 미술 전시회 소식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일반적으로 전시리뷰는 작품해석과 작가소개, 작품에 관한 비평에 관한 것이나 필자는 본 리뷰란을 통해 무엇보다 현대미술에 관심을 갖는 일반 관객을 염두에 두고 오늘날 현대미술의 난해함을 부분적으로 풀어 보고자 한다. 즉 전문 미술인들을 위한 작품분석 및 비평을 억제하고 가장 대표적인 전시의 작가와 작품을 중심으로 하여 미술을 애호하는 일반인들을 위해 어떻게 감상해야 하는가 하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
1992년 새해를 맞으며 미술계의 흐름이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 더하면서도 커다란 기대를 갖지 않게 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미술은 그 시대를 가장 잘 나타내는 시각의 대변자이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혼란스러운 우리사회의 분위기, 조급하고 불안한 개인의 의식구조 등을 바탕으로 미술의 신선한 탄생이나 획기적인 변화가 기대될 수 없다. 그러나 한편 마냥 비관자적인 입장에 빠질 수만은 없다. 아주 예외적인, 그야말로 예외적인 숨어있는 작가와 작품이 등장하여 우리의 시각과 정신계를 풍부하게 해주기도 하는 신선함을 주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본고의 제목을「현대미술과 전시-어떻게 볼 것인가?」라고 붙인 이유는 서두에 밝힌 바와 같이 일반관객에게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미술’에 관한 사건을 보다 쉽게 이해시키고자 하는 입장에서 붙인 것이다. 그런데 먼저 현실적으로 부딪치는 문제는 일반관객이 전혀 미술전시 작품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단 많이 보는 것, 이점이 제일 중요하며 점차 이론적 접근이 필요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느낌이나 이해가 될 수는 없다. 의미분석이나 작품의 구성요소, 색채 등을 살펴보고, 예술성과 미술사적인 입장 및 작가의 문제제기를 알아보는 것이 현대미술을 이해하는 첩경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서울에서의 미술전시회 수는 엄청나다. 91년 12월 서울에서 있었던 미술 전시 수가 181개(월간 미술 12월 전시안내 참고)나 된다. 그 전달인 11월은 더 많은 수인 200여 개에 이르고 있다. 연중무휴로 있는 서울의 미술전시 수가 엄청남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수의 전시 목적은 무엇인가? 의례적이며 허영에 들뜬 우리의 흉한 미술계의 단면이 아닌가 한다. 무분별한 전시의 홍수는 혼란만 가져다주며 관객과의 진정한 교감이 이루어지는 기회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러문제가 어떤 획기적인 제안이나 빠른 시간내에 해결되는 것은 아니나 전시다운 전시를 위한 미술인들의 반성을 필요로 한다.
'91년 12월 중 주목받았던 전시로 원로 평론가인 석남 이경성전을 비롯하여 김영주개인전, 한영섭 오사카 트리엔날레 수상 기념전, 평론가 추천 기획의 윤동천 개인전, '92년 독일 카셀 도큐멘타전 출품을 위한 육근병 개인전, 오랜 침묵 후의 김인경 조각전,「모더니즘의 종말- 그 극복을 위한 모색」전으로 대담한 변신과 실험작들을 보여준 임봉규 개인전, 재불 화가인 조돈영 개인전 등과 해외 기획전으로「유럽 추상미술의 거장전」이 있었다. 한편 진로 문화재단 후원의 「진로 도예지명 공모전」이 특색있게 진행되어 현대도예의 활성화를 갖게 되는 계기로 주목된다.
그 가운데 필자에게 있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전시로 갤러리 아트 빔의 개관 기념전인「유럽 추상미술의 거장전」이다. 1950년대와 60년대의 대표적인 프랑스 앵포르멜 작가들을 중심으로 현대 추상미술의 진수를 느끼게 해준다. 10여 년 전만 하더라고 서울에서 이같은 오리지날 유화를 직접 볼 수 있다면 많은 관객들이 입장료까지 내면서 줄을 섰을텐데 지금은 너무나 다른 상황이다. 기업이 후원하는 좋은 전시에 관객이 없어 매스컴의 역할과 미술문화 교육정책의 부재라는 아쉬움마저 느껴진다.
「유럽 추상미술의 거장전」에 출품된 작품은 1950년대 이후 제작된 것들이다. 앵포르멜(非定形) 미술은 60년대 이후 한국 추상작가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다. 앵포르멜(非定形)은 ‘형태가 없다’는 말에서 ‘비정형’, 또는 ‘반(反)형상’이라는 의미로 기하학적 추상이 차가운 느낌을 주는 것에 반해 이들은 뜨거운 추상이라고도 말한다. 이같은 추상작품은 이미 과거(1950년대)의 유물이 되어가고 있으나 아직도 많은 작가들이 비정형의 작업을 하고 있다. 물론 외형적으로 같다고 해도 오늘날의 추상작품은 각자 추구하는 미의 개념이나 의미가 각양각색이다.
앵포르멜이라고 하는 비정형의 추상작품들은 시각적 미의 세계란 깊고 넓다는 생각과 무언가 분명하지 않으나 추상적인 색과 형에서 우리는 친근감과 명상적인 느낌을 받는다. 금번 전시에 출품된 앵포르멜의 선구자인 쟝 포트리에(1898-1964)의 인질 시리즈와 같은 비정형의 「열매(1946-47)」와 「풍경(1961)」작품을 보면 두툼한 질감과 덩어리진 추상적 형상에서 고통스런 인간의 삶을 반영하는 느낌을 받는다. 이는 2차 대전 중 죽은 시체에서 떨어져 나온 살점이나 공포로 일그러진 얼굴들로 직접적인 체험의 결과에서 나온 침울하면서도 열정적인 감정의 표출로 보여진다.
이같은 추상미술은 캔버스에 붙여진 마티에르(두꺼운 질감)를 많이 사용하며, 두꺼운 흔적들은 응어리지고 풍화작용의 결과와 같은 시간성을 느끼게 하여 보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하고 삶의 진실이 무엇인가를 시각화한다. 이제 아름다움은 꽃이나 꾸며진 여인의 얼굴을 사실적으로 그려내어 그 이미지를 상상하게 하는 객관식 문제풀이나 감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주 주관적인 개인의 느낌이나 판단이 중요하게 된다. 지저분한 물감 덩어리와 엉긴 선들은 작가의 행위나 사색의 결과들로 진실함을 나타내어 예술성을 높여준다.
만약 이러한 그림을 여러분의 집에 걸어놓고 자주 보게 된다면 비정형의 추상미술 세계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작가와 다른 해석과 생각도 하게 되나 상상력을 풍부하게 하여주는 추상작품을 자주 대하면서 그 속에 숨겨진 예술적 가치를 발견할 때, 여러분은 상상도 못한 또다른 아름다운 세계를 발견하고 추상미술가에 고마움을 느낄 것이다. 다음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폴리아코프의「구성(Composition)」작품에 관한 소개이다. 소련에서 23세때 파리로 이민온 폴리아코프(1900-1969)는 어려운 생활 끝에 아주 독특한 추상미술을 창조한 화가이다. 금번 전시된「Composition 1(1954)」과 「Composition 2 (1956)」의 작품을 보면 모더니즘 미술에서 자주 이야기하게 되는 순수한 색과 면의 아름다움이란 바로 이것이다 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림은 색으로 뒤덮인 평평한 틀에 지나지 않는다 라는 주장과 함께 현대미술가들은 무엇이 진실된 그림인가를 찾는다. 폴리아코프의 짙은 초록색 바탕에 변형된 마름모나 사각형의 붉은 색면들, 그 위에 작은 흰색면, 이러한 단순하기 그지없는 색면들이 명상적인 공간으로 변하여 관객을 그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짧은 지면에 너무 한 전시만 다룬 느낌이나 본 전시를 위한 벽산그룹의 후원과 만 일년 이상을 준비해온 김은영 큐레이터의 노력에 비해 이 역시 부족한 전시소개가 되었다. 이와 같은 좋은 전시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길 바라면서 현대미술의 가장 중요한 앵포르멜 추상작품에 관해 간략한 설명으로 난해한 오늘날 미술의 이해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