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기획 / 무용

남자무용수의 역할과 현황




김경애 / 무용평론가

문학계나 미술계에는 '여류문인', '여류화가'라는 말이 있는 반면 무용계에는 '남성무용가'라는 말이 보편화되어 있다. 예술에서 굳이 '여류'나 '남성'이라는 둔사를 붙여서 호칭하는데에 그 당사자들은 상당한 거부감을 보이고 있는 것이 오늘의 사정이지만 언제부턴가 이 말들은 우리 예술계에 고착되어 떨어질 수 없게끔 되었다.

예술계에서 '여류'라는 용어가 쓰이는 것은 당연히 이 사회가 남성사회임을 뜻한다. 숫자적으로도 압도적인 남성들 틈에서 몇 안돼는 여성들의 참여, 그리고 작품성에 있어서도 이른바 여성적인 나약함이나 섬세함 같은 특징을 간접적으로 이 '여류'라는 용어는 나타내고 있다. 한편 무용계에서 '남성무용가'란 용어는 그 반대로 무용계가 여성의 사회임을 뜻한다. 극소수의 남성이 여성의 세계에 이단자처럼 들어와 조그마한 특유의 사회를 형성하고 있음을 암시해 주는 극히 원시적인 말이다. 단 이 말은 숫자적인데서 기인할 뿐이지 아직은 '여류'라는 용어처럼 남성 특유의 작품세계나 춤사위를 지칭하는 것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그것은 우리나라 여성 무용가들의 춤세계가 확립되지 못했다거나, 아직은 남성 무용가들이 여성들의 파트너 역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음을 뜻한다.

'한국의 남성무용가'라는 주제로 원고청탁을 받은 나는, 그러나 한국에서 남성무용가라는 용어가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는 것에 썩 동의하고 있는 입장은 아니다. 오히려 예술에서 행위자의 성을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해서 본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 점에 대해 회의적인 편이다. 우리나라에 '남성무용가'라는 이 용어가 사라졌을 때가 춤이 사회적으로 제자리를 잡고 대중화되는 바로 그때가 된다는 생각도 할 수 있다.

남성무용가라는 용어 속에는 다분히 춤이란 예쁜 여성들만이 하는 것인데 특이한 체질이나 별종의 남성들이 참가한 다는 경멸적인 뉘앙스가 없지 않다. 그것은 여류문인, 여류화가라는 용어가 남성들의 세계에 여성이 뛰어든다는 여성해방적인 경외심을 담고 있는 것과 비유할 수가 있겠는데, 그 이유는 춤이 사회적으로 아직은 높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아무튼 남성무용가란 용어는 무용세계를 특수세계로 고립해서 위축시키는데 일조를 하는 것에 틀림없다. 하루빨리 이 벽이 무너지고 남성들도 자유롭게 무용을 할 수 있어서 춤세계가 여성천하라는 인식을 탈바꿈할 필요가 있다.

춤예술의 본질은 양성의 조화에서 출발한다. 주지하다시피 인간의 생성을 기원하는 제전의식에서 춤이 발상되어 오늘의 현대예술로 발전하기까지 육체를 표현하는 가장 인간적인 예술분야라고 할 수 있다. 인간계를 남자와 여자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듯이 춤에 양성이 동원되지 않는 것은 비정상의 유희라 할 수 있다. 가장 먼저 완성된 극장춤 양식은 발레에서 남성과 여성의 2인무가 기본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초기 극장춤의 양식에서 남성의 역할은 그야말로 남성적인 건강하고 우아한 체격으로 여성을 감싸주고 버텨주는 것이었다. 남성의 춤묘기를 보여주기보다는 여성무용수를 버티고 서있는 그 자체로 남성다움을 만끽하게 했던 것이다.

발레사에서 남성춤의 묘기를 보여주고 남성무용수의 진미를 창조하는데 크게 기여한 사람은 니진스키였다. 그는 흔히 표현하는 우람하고 강한 남성무용의 상은 아니었지만 여성무용가들의 섬세한 표현과는 다른 따라잡을 수 없는 신기의 도약을 창출해서, 장식용의 남성무용가 역할을 한층 끌어올렸다.

금세기에 들어서 남성무용이라는 용어가 뜻하는 강한 춤을 구현한 데는 볼쇼이 발레단이 꼽힌다. 강하고 힘찬 남성무용수를 숫자적으로도 많이 키워낸 볼쇼이의 유리 그리고로비치는 러시아 혁명 이후의 국가정책에 걸맞는 춤무대로 세계에서 주목을 받았다.

유리 그리고로비치, 발란신, 누레예프, 프레드릭 아쉬톤, 피터 마틴스, 제롬 로빈스, 바리시니코프 등 세계 무용을 움직이는 인물 거개가 남성이라는 점은 무용이 일반적으로 여성들이 이끌어가고 있다는 관념에 아이러니컬한 시점이다. 이 점은 우리나라 무용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총인원의 90% 이상이 여성 무용가들로 짜여져 있지만, 한성준 이후 신무용의 선구자로 꼽히는 조택원, 함규봉, 한동인 이후 현재 국립무용단장 송범, 국립발레단장 임성남 등 리더들은 남성인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특히 춤이 여성세계로 인식되게 된 배경에는 이화여대의 역할이 컸다. 대학무용교육의 효시로 꼽히는 이화여대 무용과는 홍정희, 육완순, 김매자 세 교수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무용계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이들이 무용계에 미친 공로는 더 이상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알려져 있고, 또 부인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직업무용단이나 연구소무용 등 직업적 춤행위가 이화여대 중심의 대학무용으로 옮겨온 데 대한 역기능 또한 만만치 않다. 그 중의 하나가 이화여대라는 여자대학이 춤의 메카처럼 군림했다는 것도 비극 중의 하나로 꼽힌다. 춤은 앞서 언급했듯이 양성의 조화로운 표현에서 출발되야 하는데, 이화여대의 춤이 여성세계로 고립시키는데 크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1975년 이후 이화여대의 동문무용단들이 왕성한 춤운동을 벌이면서, 특히 '컨템포러리 무용단'의 초창기는 여성 일색의 멤버로 구성돼 마치 춤이란 여성들의 행위인 것으로 사회에 인식시킨 오류도 있다. 여자대학 졸업생들의 동문무용단으로서 여건상 남성을 영입하기가 어려운 점도 있었으나 이들의 활동은 고도성장을 위한 춤운동으로 일관해 이 남성무용수 부재의 문제점을 간과해 버린 인상이 짙다. 따라서 춤예술 세계에서도 힘있는 무용무대를 창출하지 못했고, 사회적으로 남자의 세계인 이 사회의 벽을 뚫고 춤이 발전해 나가는 데도 장애요인이 된 셈이다.

'80년대 초반, 현대무용계에 남성무용가 영입의 문제점을 인식해 이 작업을 서두른 선두주자는 김복희, 김화숙 무용단과 이정희 등이었다. 이정희는 남성무용수 모집공고를 내고(당시로는 희귀했다) 작품「살풀이」시리즈에 남성무용수를 대거 기용했다. 강송원 등 유능한 인재들이 그 아래에서 배출되었다.

김복희, 김화숙은 남녀공학인 한양대를 중심으로 남성무용수를 의식적으로 길러 냈다. 당시는 대한민국무용제가 문예진흥원에서 생긴 직후여서 이 젊은 안무가들의 남성무용수 인식과 이들을 무대에 세워줄 수 있는 무대(무용제)가 맞아 떨어져서 그 효과를 거두었던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춤의 고도 발전기였던 '80년대를 지나면서 대학이 30여 개로 늘어났다. 대개의 대학들이 남녀공학이었다는 점이 대학에 의존하고 있는 무용계로서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경희대, 세종대, 한양대, 중앙대 등 서울과 지역의 대학들의 역사가 10년 이상이 되면서 적지 않은 인력이 축적되어 이제는 남성무용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정확하진 않지만 각 대학 동문무용단에 약20% 정도의 남자무용수가 확보돼 있다고 들린다. 따라서 무용계를 구성하는 열강도 이 남성무용수의 확보에 따라 바뀌는 지각변동이 생기고 있다.

이화여대의 영향력이 근자에 와서 떨어지고 있는 것은 남성무용수 미확보의 문제가 크다. 숫자적으로 많이 늘어나긴 했으나 남성무용수에 대한 문제점은 만만치가 않다.

우선 대학에서 길러지는 남성무용수들의 대개가 여성교수에 의해 길러지기 때문에 여성적인 춤의 한계를 크게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남성의 남성다움이나 그 특유의 춤사위가 무대에서 활용되지 못하고 왜곡된 남성춤으로 흐르는 경향마저 있다는 것을 우선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숫자적으로 남성이 부족하고 여성무용가들이 극도의 경쟁을 벌이다보니까 별 노력 없이도 쉽게 무대에 서는 풍토를 조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늘어난 공연수에 채울 남성무용수의 부족, 따라서 몸단련이나 작품세계가 설익은 채로 무대에 서는 것이 보편화돼 있다. 그래서 여성무용수들의 단련된 기교를 보는 관객의 환상을 이 남성무용수들이 깨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것은 일본 등지에도 비슷한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조금만 이름이 있어도 높은 개런티를 받고 아무 무용단이나 팔려다니는 입장이 되기 때문에 확고한 작가정신이나 예술성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세칭 출세한 남성무용가 경우도 여성무용가들의 과도한 경쟁력속에서 어부지리로 좋은 위치를 얻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그러나 앞으로는 남성무용가의 숫자도 상당히 늘어나 남성으로 무용을 했다는 그 자체만으로 대우받기는 어려운 시대가 오고 있다. 이제는 숫자적으로는 어느 정도 남성무용가가 확보된 만큼, 그 질이 높아지지 않고는 생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세계에서 남성무용수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남성무용단'이나 '남무단'이라는 활동을 벌이던 단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예술활동 이전의 소박함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 하루빨리 남성·여성을 구분하는 무용계 풍토가 바뀌어져야 하겠다.

이제 남성이 무용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이 일반화되고 있음의 기초에는 선구자적인 남성무용가들이 있었기 때문임은 당연하다. 이들이 참가해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여성무용가들의 치열한 경쟁력이 뒷받침된 활동력만큼이나 무용계 발전에 기여를 했던 시대도 있었다.

보편적으로 무용계의 인맥을〈학맥〉으로 규정짓고 있는데 남성무용가들의 인맥은 그것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적은 숫자의 자신이 살아 나가기 위한 연대감 같은 것이 결측을 맺게 해 종적으로 또는 횡적으로 특별한 연계를 느끼게 한다.

국립무용단, 국립발레단, 서울 시립무용단, 유니버설발레단, 국립국악원무용단 등 직업무용단의 단원들로 막강하게 자리를 굳히고 있고, 이 모여진 힘들이 단장이나 상임안무자를 견제하는 힘으로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건설적인 면에서 무용계의 중추적인 힘을 남성이 버텨준다고 볼 수 있고, 또 남성이 완력 같은 것이 여성 리더들을 위축시키는 폐해로도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남성무용수의 이렇듯 양적·질적 향상과 무용계에서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는 현실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고 일단 정리할 수 있다.

우리 미래의 춤계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여성에 의해서가 아닌 남성에 의해 주도될 것이라는 예상이 성급한 진단일는지는 모르지만, 그럴 가능성을 짙게 느낄 수 있을 만큼 남성무용수들의 파워를 보게 하는 오늘이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기성세대의 남성무용가와 신진세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국립무용단 단장직을 30년간 재직해온 송범은 무용계의 역사가 그 개인의 영욕의 사(史)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무용계에 군림해온 인물이다. 그는 탁월한 지도력과 적응력으로 전후 한국무용계를 이끌었다. 김진걸, 황무봉 등 동년배의 남성무용가들을 리드하면서 한국무용 40년의 역사를 좌지우지했다. 그가 무용계에 끼친 공과는 반드시 연구돼야 할 과제이다.

황무봉은 남성무용가로 자신의 예술적 업적보다 부산지역에서 특이한 제자를 많이 길러낸 것으로 이름이 높다. 김매자, 김현자, 이영희 등 중견무용인의 지도 자격 무용가들을 배출한 공로를 높이 산다. 송범이 국수호, 조홍동, 정재만 등 유수한 남성무용가를 배출한 것과는 달리 그는 여성 제자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임성남은 국립발레단장으로서 송범과 마찬가지로 30년을 집권해온 한국 무용계의 양대 산맥이다. 송범이 명실공히 무용계 전반적인 힘을 누려온 반면 임성남은 발레의 아성을 쌓았다. 그는 '50년대 일본에서 귀국, 당시로서는 신문물에 해당하는 발레를 수입해왔기 때문에 관심을 고조시켜, 송범이 험난하게 무용가로서의 자기 위치를 확립하며 생존한 것과는 달리 비교적 순조롭게 발레의 일인자 자리를 굳혔다.

발레라는 예술의 속성이 타분야와는 달리 극장적 완성도를 위한 재원이 국가의 막대한 지원 없이는 불가능한 점이 있기 때문에 국립발레단 외에 군소발레단이 성장하기 어려운 여건에 있었다. 그는 이런 입지적 여건을 충분히 활용해 자신의 이름을 높혔다. 그러나 임성남은 발레인물을 한군데 모아 제대로 키우지 않았다는 비난의 소리도 듣고 있다. 말하자면 자기의 아성을 제대로 쌓지 못했다는 것, 그래서 현재 한국춤이나 현대무용에 비해 발레가 위축된 결과를 가져왔다는 지적도 나와있다.

송범이라는 큰 인물 속에 묻혀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한 무용가는 최현일 것이다. 최현은 조택원의「신로신불노」「가사초접」을 전수받은 수제자로 이름을 날렸다. 안무가나 지도자로서의 위치보다는 무용수로서의 진가를 발휘했다.

세칭 원로의 세대를 거쳐 중견무용인으로 새로운 지도자로 부각하고 있는 인물은 국수호, 조흥동, 정재만, 지희영, 채상묵, 민준기 등을 꼽을 수 있다. 이중에 국수호는 작품성으로 성가를 높이고 있고 조흥동은 한국무용협회라는 조직의 이사장으로 정재만은 인간문화재 한영숙의 전수자로서 자기 위치를 굳히고 있다.

작년 공연된 국수호의 스트라빈스키 음악에 맞춘 '봄의 제전'은 남성안무자의 무대의 특성 같은 것을 실감케 해 주는 것이었다. 그동안 여성 현대무용 안무자들에게서는 느끼기 어려운 남성적 춤사위와 광활한 스케일의 작품성을 보게 했다. 남성안무자이기 때문에 이러한 특성이 나왔다는 판단은 획일적인 관념에서 비롯되는 한계를 갖고 있지만, 아무튼 국수호는 남성무용가로서의 박력, 율동 등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이 '봄의 제전'은 작품 완성도를 떠나서 이러한 남성무용가의 존재 이유, 앞으로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갖게 했던 것이다.

지희영은 김백봉 씨의 제자로 특유한 춤사위의 소유자이다. 우리 무용계가 대학교수가 아니면 활동기반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고독하게 작업을 하는 연구소 운용의 무용가이다. 따라서 빛을 덜 발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입지에 있다.

이런 연구소 계열의 인물로 채상묵, 민준기 등을 꼽을 수 있다. 채상묵은 불교에 특별히 심취해 '승무'를 모티브로 해 재구성한 작품을 발표해 성과를 올린바 있다. 민준기는 징과 북을 붙여서 만든 '북춤'으로 유명하다. 자기만의 독창적인 악기를 개발했다. 그는 보다 현대적인 창작품을 위해 실험적인 작업을 하다가 최근엔 보다 근원적인 한국춤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들 40대 무용가들을 뒤이어 30대 중에 자기 칼라를 분명히 하는 인물은 한상근이다. 한국무용가로서 한상근은 '적색경보'등 현실적 고발성 높은 실험작품을 발표한 바 있다. 다음 세대의 리더로 꼽히는 인물이다.

현대무용의 역사가 짧기 때문에 40대의 현대무용 전공의 남성은 전무하다. 30대에 들어서면 숫자적으로 한국무용 쪽이 월등하지만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인물은 현대무용 쪽에서 찾을 수 있다.

작품성에 특이한 위상을 구축한 사람은 강송원이다. 강송원은 '86년 데뷔작 '변신'이 수준급의 작품으로 선풍을 일으킨 후에 무너질 수 없는 자리에 올랐다. 미국 아시아문화재단의 초청으로 연수를 가진 후에 그는 '소발자국' 등 좌선의 영혼을 탐구하는 작품을 내놓고 있다. 구도적 삶과 그 예술관을 보여주고 있다.

자신이 무용수로 무대에 서진 않지만 안무자로, 무용계 리더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박일규이다. 그는 현대무용계의 몇 안되는 지도자급 남성무용가라고 할 수 있다. 연배가 비교적 낮지만 그가 부상할 수 있는 것은 남성무용가의 부재라는 그 공백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2년여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ADF-서울 개최 등에 실질적으로 기여하고 있는 그의 공로는 앞으로의 무용계가 지성을 돈독히 하는 데 기여하리라고 본다. 그는 ''92 춤의해' 운영위원회에서 기획실장직을 맡는 등 활동력을 보이고 있다. 남성무용가가 부족해 여성들이 메우기 어려운 사회성 확보에 그의 힘을 기대한다.

최근 무용수로도 각광을 보이고 있는 무용수는 대구 계명대학의 최두혁이다. 무용수로서 천부적 신체조건으로 우선 그는 무대를 압도한다. 동아무용콩쿨 대상, MBC 창작콩쿨 우수상 등 대학 재학 시절부터 우수성을 보이는데 문제는 우리의 여건이 이런 좋은 무용수를 스타로 키우지 못한다는 데 있다. 남성이 없는 여지대학 동문무용단에서 그를 소모품처럼 이용만 한다면 인재는 키워지지 않는다. 좋은 남성무용수의 확보도 중요하지만 자리잡고 이들이 커 나갈 수 있는 배려도 지도층에서 해야한다.

한국현대무용진흥회는 작년부터 '남성무용가상'을 제정해 시행하고 있다. 외국유학 연수가 부상으로 돼있는 이 상은 남성무용수 발굴의 뜻이 담겨있다.

현재 민간무용단으로 남성무용수를 많이 확보하고 있는 단체는 최청자 툇마루무용단, 김복희, 김화숙무용단, 조승미 발레단, 박명숙 서울 현대무용단을 꼽을 수 있다. 최청자 툇마루무용단은 남성무용수로 극도의 훈련에 의한 날카로운 춤사위로 압권을 이룬다.

이 신진 남성무용수의 세력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수를 확보하고 있다. 이들이 리더가 돼 있을 앞으로의 무용계는 어떻든 희망적이다. 젊은 남성무용수들이 남성무용가들의 전망에 대해 '매우 밝다'라고 답한 적이 있다. 앞으로 보다 좋은 남성인력들이 무용계에 영입되자면 무엇보다 춤의 '직업화'문제가 가장 시급한 문제일 것이다. 그래서 '춤의 해'를 맞는 금년의 과제도 직업 무용단의 수를 늘리는 것을 제일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