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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대륙의 '신조(新朝)' 미술운동




김하림 / 조선대 교수, 중문학

창조적 수용, 혹은 무비판적 복제?

최근 중국대륙의 미술계는 '80년대 후반부터 커다란 충격과 함께 급격히 대두한 '신조'미술운동에 대한 논쟁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초기에는 '신조'미술에 대한 두 입장, 즉 중국적 시각에서 서구 모더니즘의 창조적 수용이라는 찬양과 무비판적 복제나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의 대립적인 견해 사이의 논쟁이었다. 그러나 점차 논쟁이 미술계의 원로와 2,30대 신인들이라는 두 축으로 형성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1949년 이후의 미술계의 전통에 대한 평가문제, 서구 모더니즘 미술의 수용문제, 그리고 미술가들의 창작 사상에 관한 문제 등으로까지 쟁점들이 확산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논쟁의 근저에는 사상 문화예술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는 중국 당국의 의도가 내포되어 있음도 명확하다.

특히 동구권의 몰락과 소연방의 해체를 목격하면서 중국이 '평화로운 변화 (平和演變 : 사회주의 체제를 자본주의, 제국주의 세력들이 무력이 아닌 평화로운 방식으로 몰락시키려 한다는 정책을 일컬음)'에 대한 대비와 방어책으로 문화예술계에 '한 손으로는 정돈을 틀어쥐고, 한손으로는 번영을 틀어쥐자(一手操整頓, 一手操繁榮)'라는 구호를 제시하고 있는 면에서도 이러한 '틀어쥐기'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바로 드러난다.

이러한 정치적, 사상적 측면을 간과할 수는 없지만 '신조'미술 논쟁은 오늘의 대륙 미술계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고, 그 이유와 연원은 어디에 있는가 등에 대한 여러 측면을 노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적지않은 흥미를 유발하고 있다.

대륙 미술계의 두 흐름, 전통미술과 학원 미술

전통미술은 구전통 미술과 신전통 미술의 두 유파로 나뉘어지는데, 구전통은 문인화를 비롯한 고대 중국의 전통회화를 지칭하고, 신전통은 '혁명적 현실주의'미술을 지칭한다. 대륙에서는 '50년대부터(거슬러 올라가면 '좌익미술가연맹'등과 같이 3,40년대 중국 혁명운동에 종사한 미술인들로부터 시작되지만)'70년대 말까지 이 두 종류의 신구 전통미술은 공존과 배척을 병행하면서 발전해왔다. 물론 문화 대 혁명시기처럼 구전통회화가 억압받는 경우가 더 많았지만.

그러나 '80년대 초 이래로 '신문인화' 혹은 '혁신문인화' 등과 같은 유파들이 대두하면서 전통 문인화가 부흥하였고, 이들은 구전통 문인화의 굴레를 초극하였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반면에 신전통 미술은 '80년대 초부터 점차 쇠미해지기 시작하였고, 혁명적 내용을 제거하고 오직 '현실주의' 창작수법만 연용되어 학원미술의 지류를 형성하거나 상품화의 주요 내원이 되었다.

중국의 학원미술(근대적 의미의 미술교육이 중국에서 시작된 것은 1902년 남경 사범학당에 도화수공과(圖畵手工科)를 설치한데서 비롯된다)은 서구 19세기 고전주의적 범주의 아카데미즘과 같은 개념이 아니며, 또한 고전 사실주의만을 지칭하거나 현재와 같은 교육체계나 이와 유사한 교육관념만을 지칭하는 것도 아니다. 학원미술은 풍격(風格)주의를 숭상하는 일종의 순수예술유파를 지칭하는 것으로, 주요화가들은 대부분이 미술대학의 교원이거나 화원(畵院)의 화가들이며 중년층이 중심이 되어 있다.

학원미술은 외적인 형식상에서 본다면 서구의 고전주의, 사실주의, 인상파, 혹은 표현주의, 심지어 비교적 추상적인 형식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사회성이나 문화사조를 회피하고, 기교와 형식을 추구하는 귀족적인 풍취가 있는 격조를 강조하고 있다. '80년대 이후 학원미술은 형식미, 추상미, 자연미를 강조하는 유미주의적 경향을 명확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신조(新潮)미술의 탄생과 전개양상

신조미술은, 물론 그 구성원 사이에서 서구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의 정도가 같지는 않으나, 모더니즘을 핵심으로 삼고 있다. 중국에 있어서 모더니즘은 '30년대에 맹아가 싹텄지만 전통미술에 무력하게 고사되고 말았다. '79년에 '성성화회(星星畵會)'와 극소수의 화가들이 탐색의 자세를 보여주었으나, 이도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하였다.

반면에 문화대혁명 자체와 그 기간에 자행된 비인간적인 모든 행위를 폭로하고 비판하는 것을 주조로 삼은 '상흔(傷痕: 원래는 '78년에 발표된 단편소설의 제목이나 이후 문화대혁명을 비판하는 한사주의 고유명사가 되었음)회화'와 '향토(鄕土)사실회화'가 지니고 있던 사회와 현실에 대한 강렬한 관심과 특정한 입장을 표명하는 창작사상이 신조미술의 정신적 모태가 되었다. 특히 '85년을 전후하여 '북경청년화회', '북방예술', '강소초현실주의 단체' 등과 같은 청년미술인들의 단체가 등장하여, 사회성과 문화의 기능을 강조하면서 서구 모더니즘 유파의 다양한 형식들이 중국화단에 분출하였다. 이들은 '상흔회화'나 '향토 사실회화'가 현실에 대한 비판과 사회와 인생에 대한 관심을 강하게 표출하면서, 내면적으로는 계급성 보다는 인성(人性)을 중시하고 이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해석을 강조해 왔던 점을 높이 평가하고 이를 계승하고 있다. 나아가 신조미술은 보다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인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인성을 문화적, 종교적, 생명적, 사회적인 다양한 각도에서 해석하고자 하는 경향을 두드러지게 표방하고 있다.

이성(理性)회화 유파: 이들은 작품을 그들의 문화의식, 정신적 내포를 담아내는 도구로 간주하고 자신들의 사상을 작품에 강하게 투영하였다. 이런 연유로 이들을 이성표현주의 유파라 부르고 있다.

'북방예술군체(群體)'의 왕광의(王廣義), 서군(舒群), 유언위(劉彦爲), 주로 강소성 출신들인 정방(丁方), 양지린(楊志麟), 심근(沈勤) 등이 결성한 '홍색려(紅色旅)', 상해출신의 이산(李山), 장건군(張建軍) 등이 주축이 된 이 유파는 특히 종교정신을 강하게 표출시키고 있다. 이들은 예술을 인류의 숭고함을 확대, 고양하고, 영원한 정신을 향상시키는 경로이자 수단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예술작품은 마땅히 '신성한 귀의 원칙', '사도 정신', '희생정신'을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중국의 전통문화 중에는 엄격한 의미에서 진정한 의의를 지닌 종교가 없었기 때문에, 그 타락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종교의식을 창도해야 한다는 반성에 기초하고 있다. 물론 이들이 주장하는 영원한 원칙이 불교나 기독교, 마호메트교적인 신이라든가 신의 계율이라고 말하기도 어렵고, 어떤 철학유파의 원리라고 해석하기도 어렵다.

이 유파는 감성의 도식(경험적)을 이용하여 이의 한 정신(초험적)을 표현하는 것을 시도하거나, 혹은 영원한 정신으로 자신의 감지를 끌어내어 시각으로 포착된 현상계를 종합하고 잡다한 것을 조직하여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영원한 정신이 현상세계 속에서 대상화 되도록 시도한다. 따라서 이들의 작품은 체제가 종교적 의미를 함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화폭의 분위기가 대단히 장엄, 냉담하며 심지어는 비장하기도 하다.

이들의 작품에는 억압의 고통, 왜곡된 침잠, 발악하기 직전의 침묵 등이 함축되어 있고, 이러한 것들이 오랜 시간 동안 진행되어 왔음을 표현함과 동시에 신속한 시간 안에 이러한 것들이 터져나올 것이라는 점을 마찬가지로 함축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이 부르짖는 종교정신이라는 것은 세속을 초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로부터의 해탈을 추구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화폭에 그려진 침묵은 참회나 자책이 아니라, 절규와 비판인 것이다.

'이성회화' 의 또 한 측면은 동서문화의 비교와 인식에 치중하고 작품에 이를 표현하고 있다. 이들은 우주에 대한 해석과 인류의 발생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작품에 담고 있다. 예를 들면 장건군의「인류와 그들의 종」은 인류가 끊임없이 미망을 초월하려는 인식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이들이 그린 일련의 산수화에서는 동방의 유무상생(有無相生)의 철학관과 우주의 원시상태가 서로 대응하고 있는데, 화폭에는 구륵(勾勒)법을 사용하지 않고 수묵 단괴(團塊)로 우주 질서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위와 같은 이성회화가‘형이상학’적인 의미가 농후하다면, 인생의 허무함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데 치중하는 일파도 있다.「최종적 추구=허망」(강중송), 「사람은 물고기의 진화-사람은 물고기 먹기를 좋아한다」(양지린)과 같은 작품이다. 이들은 일종의 강렬한 숙명의식을 표출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현실을 정시하고 인생의 실재를 추구하는 기초 위에서 기존 세대의 맹목적인 낙관정신을 말살해버려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들은 현실이 타파된 후에야 다시 현실을 세울 수 있고, 존재를 승인한 후에야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는 인식을 주축으로 하고 있다.

대다수의 이성회화가 자신들의 사상을 표현해내는데 치중하고 있는 반면, 일부는 예술가는 어떤 문제에 대한 사상을 표현해내는 것이 아니라 예술 자체를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장배력(張培力), 송릉(宋陵) 등의 '신공간'일파가 그들로, 작품에는 강렬한 반주관 반낭만의 '객관주의'경향이 나타나 있다. 여기서의 '객관'이란 인식론적 의미에 있어서 관조 태도를 지칭하는데, 정감이나 생활 속의 사건, 시각형식 등의 선입관 위주의 경험 성분을 배제해야만이 비로소 예술의 순수성과 독립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들의 작품은 생기가 없는 동작이나 형상, 응고되거나 정지된 어느 때나 관조할 수 있는 형상을 그리고 있다.

생명지류(生命之流) 유파 : '이성회화' 유파와 비슷한 시기인 '85,6년에 서북, 서남, 호북, 호남 등지에서 비이성을 강조하는 미술단체가 출현했다. 그들의 작품은 생명의 체험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생명지류'라 불리워진다. 이들은 인간의 심층구조에 진입하여 생명의 실재를 체험코자 한다. 그러므로 인성의 문제를 탐구한다는 측면에서는 이성회화 유파와 유사하지만, 이들은 체험을 강조하고 있다.

모욱휘(毛旭暉), 장효강(張曉剛) 등이 위주인 '서남(西南) 예술군체'는 생명은 운동순환하는 힘이며 내심의 심층에 어둡고 혼돈된 '내상(內象)'세계는 어떤 원동력에 의해 지탱되는바, 이 힘은 순환한다는 주장을 표방했다. 프로이드의 학설에 상당히 접근해 있는 이들의 작품은 원시적인 조야한 형상, 꿈의 세계나 신비한 환상이 가득차 있다.

이들과는 다르게 '인간의 사회적 요소와 생물적 요소의 협조'인 생명을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한 일파가 있다. 그러나 이들은 '협조'란 인간이 사회에 대해서 순화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반항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화폭에는 대항, 악동, 불안 등이 기조가 되어있다.

또 다른 일파는 개체의 체험에서 출발하여 생명이 의탁하거나 귀속할 곳을 부단히 찾아가는 것이 생명의 본질이라고 간주하였다. 그리하여 '본토의식' '자연의식'을 강조한 서남, 서북, 호북 등지의 화가들이 주축이 된 이들은, 그 지역의 독특한 경관과 허구적 상징으로 표현된 생명의 형상을 하나로 합일시켰다. 어떤 의미에서는 중국 전통의 '천인합일(天人合一)' 사상에 닿아 있다고도 평가된다.

개량주의 유파 : 신조예술가들의 일부중 자신의 예술관을 보다 엄밀하게 발전시켜 가면서 자신의 관념에 부합하는 독특한 언어를 탐구하고 독창성을 실현한 그룹이 '88년 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들 중 서빙(徐氷)과 영승중(呂勝中)이 대표화가라 평가받고 있다. 서빙은 특히「석세감(析世監)」이란 작품을 통해 그 성가를 높였다. 이 작품은 서빙이 2년에 걸쳐 작업한 것으로 자신이 창조한 새로운 '한자' 약 2천자를 동판활자로 고서(古書)처럼 인쇄한 후 백여 미터에 달하는 두루마리 형식으로 천정에 걸어놓았다. 이 점 때문에 사람들은 이 작품을 「천서(天書)」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중국 전통의 관념성을 도입하여 새로운 실험정신을 구체화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특히 이들이 개량주의 유파라고 불리는 이유는 '신조'미술과 학원미술을 접목시키려는 시도가 '일보 후퇴'한 개량적 형식을 지니고 있으나, 한편에서는 '전위'의 효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학원미술의 언어와 수양에다 신조미술의 예술관념을 결합코자 노력하였다. 물론 개량주의 유파가 신조미술의 혁명적 실험정신이 쇠퇴했다는 비판도 없지 않았으나, 주제의 함축미와 풍부한 철리(哲理)를 강화했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비판의 쟁점

'90, '91년에 걸쳐 신조미술에 대한 비판이 미술계에서 급증하였다. 비판을 제기한 층이 대부분 미술계의 원로들이거나 지도급 인사라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비판의 쟁점은 첫째로 신조미술가들이‘중국 당대문화와 사회현실이 바로 신조미술을 탄생시킨 근거이며, 이는 피할 수 없는 역사적 현상이다’,‘사회주의 문화 자체의 발전을 위한 일종의 수요로, 우리들은 서구 자본주의 문화를 흡수, 소화해야 한다'는 점에 대한 것이다. 비판론자들은 우선 신조미술파들이 서구 자본주의 상승기의 문화와 제국주의시기의 부패타락한 문화를 구분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흡수, 소화해야 한다는 것은 오류라고 지적한다. 즉 서구의 엄격한 사실주의 유파가 장기간 발전했을 때는 서구 자본주의가 상승, 안정, 번영했을 때이며, 현대주의파가 부단히 출현한 시기는 서구 자본주의가 점차 노화하고 불안정한 불경기로 침입한 시기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비정상적인 예술사조는 거부해야 마땅하다는 의견이다.

둘째로는 신조미술이 일종의 민족허무주의와 사회허무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형성되어 있다는 점을 비판한다. 위기감, 실망, 고민, 고독, 미망 등을 제거하거나 개혁할 정신적 실재를 지니지도 못하고 그저 작품에 소극, 퇴폐, 자극, 마취, 허황 등만을 반영할 뿐인 이 신조미술은 '유해무익'하고, 더욱이 예술작품이란 '인민을 위하고 사회주의를 위해야' 한다는 기본 과정에서 크게 벗어나서 청년들에게 해독을 끼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특히「1986년 최후 일차 화전」에 출품된 60센티에 달하는 남자성기와 30센티에 달하는 여자성기를 부조한「남성생식 1호」와「여성생식 1호」를 실례로 지적하면서, 이것은 관객을 우롱하는 기괴하며 파렴치한 야만인이나 할 행위이지, 어떻게 여기에서 인성과 생명을 느낄 수 있는가를 비판하고 있다.

셋째로 신조미술이 중국에서 탄생하고 유행하게 된 데에는 문화대혁명 시기의 극좌적 사조에 대한 반발, 학원의 엄격한 사실주의 화풍에 대한 반발, 서구 모더니즘이 중국의 화가들에게 끊임없이 출현하게 된 세 가지 이유 때문인데, 특히 이 셋 중 외적 요인이라 할 수 있는 서구 모더니즘의 무분별한 모방이나 복제가 신조 미술을 유행시킨 원인이라 지적한다. 덧붙여 여기에는 브르조아 자유주의 사조가 범람하여 신조미술을 부추겼다고 간주하고 있다.

특히 신세대들이 학원미술의 엄격한 사실주의에 대해 반발하는 것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바, 여기에는 우선 신세대들이 힘이 드는 수업이나 자기단련을 회피하고, 즉흥적인 재치만으로 화폭을 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원로나 지도그룹들은 중국의 학원미술은 '20년대 프랑스 유학파의 전통과 '50년대 소련의 사실주의 사조, 그리고 3,40년대 중국 혁명과정에서 발생한 '혁명적 사실주의'가 결합한 중국 고유한 형식과 내용을 지닌 미술임에도 불구하고 이들 신세대들이 경시하고 무시하는데 크게 반발하고 있다. 이들은 중국 특색이 있는 기법으로 만사(慢寫), 속사(速寫), 묵사(默寫), 모사(募寫)를 들면서 이런 훈련을 거치지 않고 어떻게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겠는가를 한탄했다.

넷째로는 신조미술파들이 '50년부터 '66년 기간의 중국미술계도 부정하고 있는 점에 대한 비판이다. 흔히 건국 후 17년 기간이라 일컬어지는 이 기간을 신조미술파들은 좌경에 치우친 '기계적 반영론'에 입각해 작품이 간단, 편면(片面), 조야했다고 평가하는데 반하여, 비판론자들은 국부적으로는 그런 작품들이 생산된 면도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현실생활의 원(源)과 전통의 류(流)가 유기적으로 결합한 정확한 방향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섯째는 서빙의 작품「석세감」에 대한 평가문제이다. 이 작품에 대해「천서」는 당대 사상의식이 혼란에 빠져 있음을 진실되게 반영한 것으로, 이런 표현은 예술의 높은 단계에 대한 탐색이다. '그는 독특한 배치방식과 교묘한 예술언어로써 망망한 세계와 유구한 인간에 대한 심각한 총결을 행하였다', '진지하고 엄숙한 태도와 지혜가 풍부한 창조정신으로…작품에서 표출하는 철학사상은 이 시대 청년들의 정신상의 미망과 당혹을 반영하고 있으며, 그 예술언어의 순수함과 정교함은 사람을 감복시킨다'등의 평가가 주어졌다. 이에 대해 이 작품은 '어떤 철리나 의식이 있는 것이 아닌, 하나의 시도에 불과하며 요언을 진리하고, 예술이 아닌 것을 예술이라고 강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신기하고 기이한 것만을 추구하여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을 예술로 인식하고 있다'와 같은 비난이 주어졌다.

반비판과 옹호론

이런 비판에 대해 신조미술을 옹호하는 측은 이들의 특색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압축하고 있다.

첫째로 반전통의 특색이다. 이들은 전통미술에 대한 거듭되는 반성과 격력한 비판태도가 일체의 전통을 부정하거나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예술이란 규칙이나 정해진 법규나 표준, 대성공, 천하제일, 영원이 없는 것이고, 오직 변화한다는 규율만 존재하며’, 계급성이나 공익성의 강조는 자아와 개체에 대한 기만이라는 입장에서 예술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철학적 의미의 강조이다. 신조미술에는 철리성과 경험을 초월한 철학이념이나 깨달음이 있다는 점으로, 심지어 아무런 메시지도 전달코자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 일파도‘비철학적 철학 암시’를 전달코자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세 번째 특색으로는 불화합의 미를 들고 있다. 신조미술은‘즐거움’이나‘오락’을 부여해 주는 것이 아니라, 화폭에서 모든 균형, 대칭, 질감, 필묵, 구성을 부정하는데 의미가 있다고 옹호한다. 이런 비화합을 추구하는 이유는 바로 내재된 불화합의 의화된 현상이자 이 시대 청년들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 비극관, 동서 두 종류 문화의 격렬한 충돌 앞에서 몰락해 가는 의식의 표출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종(縱)적 계승과 횡(橫)적 이식의 접점은?

’78년 개혁개방저책을 표방한 이후, 중국은 자본주의적 경영방식이나 생산체계를 도입했고, 이와 더불어 구미의 여러문화들도 대대적으로 수입되었다. 구미문화의 충격을 어떻게 흡수할 것인가가 오늘의 중국이 갖는 고민 중의 하나임은 분명하며 신조미술 논쟁도 이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물론 앞에서 지적한 바 있지만, 이 논쟁의 내면에는 '89년의 천안문사태를 나름대로 극복한 중국이 '90년 일년 동안 체제정비에 온갖 노력을 쏟아왔고, '체제안정과 개혁개방의 추진'이라는 두 수레바퀴의 균형도 조금씩 잡혀가고 있었으나, '91년 소련의 해체라는 충격과 자본주의 세력들의 중국에 대한 '평화로운 변화'기도를 정치적 사상적 통제와 지도를 통해 방어하고자 애쓰고 있다는 점이 이 논쟁에는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좀더 큰 의미에서 본다면 신조 미술 논쟁은 결국 전통문화의 창조적 게승(종적 계승)과 외래문화의 비판적 수용(횡적 이식)이라는 근원적 문제를 둘러싼 것이다.

수천년의 역사를 지닌 '중화문화'를 지닌 중국인들은 외래문화를 수용하는 방식으로 '중체서용(中體西用)', '동도서기(同道西器)'를 기조로 삼아왔다. 멀리는 불교의 중국적 수용형태에서 가까이는 중국식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라는 구호에 이르기까지 그 내면에는 중국이 중심이라는 중화의식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중화의식 자체가 파탄이나 위기에 처했을 때 이를 어떻게 극복하고 새로운 정신을 창조해낼 것인가, 혹은 외래문화를 어떻게 전통적 민족문화와 접목시킬 것인가의 고민을 오늘의 중국미술계가 신조미술 논쟁을 통해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두 축의 균형을 어떻게 수립할 것인가는 좀더 시간이 요구되는 문제임에도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