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동의보감’표절시비
강철주 / 출판평론가, 출판저널 편집부장
지난해 최대의 베스트셀러였던 시나리오작가 이은성 씨의 유작 장편〈소설 동의보감〉을 둘러싼 표절시비가 임신년 벽두 출판계의 화제가 되고 있다. 표절이 아니라 아예 내용 전체를 베껴서 내는 중복출판·모방출판이 여전히 성행하는 상황에서, 사실 이번의〈소설 동의보감〉표절시비는 그다지 새로운 것이 못된다. 늘 그렇듯, 때가 되면 곪아터지는 출판계의 해묵은 고질병에 불과할 뿐이다. 출판계에선 오히려〈소설 동의보감〉같은 성공작의‘유사품’이 이제껏 나오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여길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것이 썩 달갑지만은 않은 주목을 끄는 것은, 조정래 씨의〈태백산맥〉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지난해의 이른바 인세 공방에서 보듯, 시비의 대상이 된 책이 우리 출판계상 손에 꼽을 만큼 대형 베스트셀러라는 점에 상당부분 기인하고 있는 탓이다.
출판이 사회적 관심의 전면에 부상할 경우, 그것은 언제나 문제적 현상으로 거론될 때였다는 씁쓸한 자괴감을 이번의〈소설 동의보감〉표절시비에서도 되씹게 된다는 것이다.
사건의 발달은 지난달 13일〈소설 동의보감〉의 저작권자인 고 이은성 씨의 유족측이 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에〈허준과 동의보감〉(꽃동산 간),〈소설 어린이 동의보감〉(산울림 간)에 대한 도서의 제작 및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면서 부터였다. 이 소장에서 유족측은 아동용으로 꾸며진 문제의 책 두권(저자가 같은 사람이다)이 모두 '등장인물·지명 등은 바꿔가면서 〈소설 동의보감〉을 그대로 베끼거나 축약한 것'이라는 주장하고 있는데, 이같은 유족측의 주장은 해당출판사들의 궁색한 변명의 반박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사실인 것으로 확인된다.
창작의 뒤를 따르는 표절 양식에 내맡겨진 표절출판
무엇보다도 이 두책은 〈소설 동의보감〉의 작가 이은성 씨가 역사적으로 실제 했던 인물이지만 그 전기적 사실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주인공 허준의 생애에 대해 작가 나름으로 '창작'한 부분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예컨대, 서출인 허준의 아내를 사화(士禍)에 연루된 양반출신으로 설정한 점이라든가, 스승 유의태가 위암에 걸린 후 자살하면서 제 몸을 제자에게 해부용으로 내주는 상황 설정 등이 좋은 보기가 될 만하다.
그밖에도, 가령 허준이 수련시절에 고쳐준 창녕 성 대감댁 부인이 진주 조대감댁 아들(소설 어린이 동의보감), 함안 김 대감댁 마님(허준과 동의보감)으로 지명과 이름만 바뀌어져 있을 뿐 줄거리와 구성이 판에 박은 듯 반복되고 있다는 지적이고 보면, 이 두책의 표절 여부는 자명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따라 이은성 씨의 유족측은 이번의 가처분신청과 함께 따로이 민사소송도 병행할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종로서적, 을지서적, 동화서적 등 서울시내 대형서점들이 문제가 된 이 두권의 책을 매장에 전시·판매하지 않기로 한 점이다.
〈소설 동의보감〉에서 보는 것 같은 표절시비나 모방출판의 문제는 번역도서의 경우 특히 심각하다. 이제는 정도가 좀 덜해지긴 했지만, 해마다 노벨문학상이 발표될 때면 벌어지는 이전투구의 판본경쟁이 사실은 표절과 모방의 싸움임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가장 최근에는〈소설 동의보감〉과 더불어 지난해 최대의 베스트셀러였던 라즈니쉬의〈배꼽〉, 영화로 더 유명한〈죽은 시인의 사회〉등이 중복출판 시비에 휘말린 바 있다. 번역서는 아니지만 윤재근씨의 〈장자-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도〈학의 다리를 자르지 마라〉라는 표절본이 나와 있는데, 이는 일일이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다반사이다.
여기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표절과 모방출판을 상습적으로 자행하는 일련의 전문적인 복제출판사 군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서울시내 지하철역 구내의 한공간을 빌려 가끔씩 열리는 이른바 '재고 도서 할인판매전'같은 데를 둘러보면 그런 사실은 금방 확인된다. 재고도서 할인판매 자체가 갖는 문제는 따로 논의될 성질이기에 할애하거니와, 여기서 전시 판매되는 도서의 태반이 출판의 정상적인 경로를 밟지 않은 복제도서들이고, 그 출판처가 몇몇 사에 집중돼 있다. 말하자면 재고도서여서 할인판매한다기보다는, 애초부터 복제출판된 비정상적인 출판물이기 때문에 겉으로 매겨진 정가에 비해 훨씬 헐값으로 판매된다는 것이다.
그런점에서〈소설 동의보감〉의 경우에서 보는 것 같은 표절시비나 모방출판의 문제를 근절할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안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이 터진 다음의 '수습'이 논의됐을뿐, 근본적인 대책 마련에는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게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우리 출판의 구조 속에는 앞선 기획에 뒷북을 치며 따라가면서 그 과실을 거저 줏으려는 상습적인 복제출판사군이 엄연히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식에 내맡겨진 표절출판
말하자면 현재로선, 표절이나 복제출판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출판인의 양식이라는,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자정(自淨) 장치에만 내맡겨져 있는 형편이다. 출판계 내부의 자정장치에서 선본(先本)과 악본(惡本)이 걸러지지 않을 경우 기대할 수 있는 다음 단계의 정화장치는 서점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서점이 이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지방의 군소서점들의 경우, 현실적으로 더많은 마진율을 보장하는 비정상적인 출판물들을 애초의 선본보다 선호하는 경향이 짙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최근 서울시내 몇몇 대형서점이 취한바 있는 표절 및 복제출판물 전시판매 거부조치는, 그래서 더욱 돋보인다(가장 바람직하기로는, 좋은 책과 그렇지 못한 책의 구별이 공공도서관의 수서(收書) 활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겠으나 우리의 사정이 아직 그 단계까지는 못 미치고 있다).
마지막으로 들 수 있는 것은, 독자들의 선택에서 그 같은 표절출판이나 복제물이 배제당하게 하는 것이다. 책의 출판이나 판매를 전적으로 시장기능에 맡기자는 것인데, 여기에는 독자들의 안목에 대한 신뢰가 필수적인 전제가 된다. 그러나 이 역시 아직까지는 그다지 미더운 수준이 못 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솔직한 평가이다. 나오지 않아야 될 책,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의 결정을 전적으로 독자의 판단에 맡기기에는 여러모로 불안한 구석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최근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집계·발표한 1991년 출판통계가 시사하는 바는 크다. 문화부 납본도서를 대상으로 집계한 이 통계에 따르면 지난 한해동안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신간(초판)은 22,770종 134,616,495부로, 종수에서 8.9%, 부수에서 3.9%의 전년비 성장률을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다시 환산하면 말그대로의 '새 책'만 하루평균 62종 368,812부가 발행된 꼴이다.
발행부수에서 총 발행량의 65%(86,652,528부)를 차지하는 학습참고서류를 제외하더라도 이는 엄청난 물량이 아닐 수 없다. 세계 10위권의 출판대국이라는 말이 단순한 자화자찬에 머물지 않음을 보여주는 물량이다. 그러나, 그 외형적 물량의 크기에 걸맞는 내실을 과연 우리 출판이 갖추고 있는가 하는 의문에 이르면 회의적이지 않을 수 없다. 폭주하는 물량에 비해 정작 읽을만한 좋은 책의 수는 빈약하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이다. 한마디로 너무 많은 책이 쏟아져 나왔다는 것인데, 나오지 않아도 될 책들이 무분별하게 쏟아짐으로서 국가적 차원의 자원낭비까지 초래했다는 지적이 있을 정도이다.
〈소설 동의보감〉표절 시비를 통해 문제가 된 책들이 바로 나오지 말아야 될 책의 전형적인 보기들이다. 그것들은 우리 출판의 물량을 부풀리는 데만 기여할 뿐이다. 우리나라가 세계 10위권의 출판대국이라지만 독서열도 과연 세계 10위권일 수 있겠느냐는 데 생각이 미친다면 더욱 그렇다.
읽지 않아도 될 책의 무분별한 출판은 꼭 읽어야 될 책의 선택에 커다란 장애가 된다는 점에서, 상업주의적 통속화의 내리막길을 물량 위주로만 치닫는 현재의 우리 출판풍토는 반드시 재고돼야 한다. 올해의 경우 몇 번의 선거 때문에 책의 수요감소가 필연적으로 예상되는 만큼 출판사들이 책을 내는 일에 보다 조심스러워질 것이 분명하지만, 따지고 가리고 재는 신중성과 진지함이 더욱 필요할 것이다.
책을 덜 내는 것도 어쩌면 우리 출판의 내실을 다지는 한 방편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