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적 교육기관으로서의 미술관
서성록 / 미술평론가, 안동대학 교수
경제적 안정을 누리는 사람들이 점차 증가함으로써 그들이 문화에 관심을 돌리게 될 것이라는 예측은 지극히 당연한 논리의 수순이다. 문화, 그 중에서도 우리가 쉽게 미적 향유를 누릴 수 있는 곳이 미술관이 아닌가 싶다. 서구에 비해 우리 미술관의 연륜이 짧고 아직 행정조직이나 인력구성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해 큰 기대를 걸 수 없는 것이 현실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지만, 최근 미술관법이 개정되어 통과되고 또한 이 법안 자체가 미술관 건립이나 운영에 관한 세제혜택을 보장하고 있어 앞으로 많은 미술관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다는 것은 알려진 바와 같다. 미술문화 발전을 위해서, 크게는 국민 문화향수권의 신장을 위해서 이번 입법은 우리 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을 약속하는 ‘청신호’와 같은 조치로 생각된다. 이로 인해 미술관을 찾는 관람객도 이전보다 훨씬 늘어날 것이며, 이들의 취향 또한 다양할 것이기 때문에 이에 발맞추어 미술관의 유형, 성격이 좀더 분화될 것을 쉽게 가정해 볼 수 있다.
미적 향수는 인간의 욕구 중 하나
생활의 윤택화와 문화향수층의 저변확대의 관계가 반드시 정비례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그것이 일정관계를 갖고 있다고 보는 이상, 미술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설사 경제적 관련성이 아니더라도 미적 향수에의 갈구가 누구나 지니고 있는 모든 인간의 욕구 중 하나라는 점을 쉽사리 간과하려 해서도 안될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듯 이미 서구에서는 미술관 폭증과 더불어 많은 관람객이 미술관에 몰려들고 있다는 자료가 나와 있다. 70년대에 발표된 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전역에 산재해 있는 1천 8백여 개의 미술관에 연간 방문객은 약 3억 명에 이르고(NEA보고서, 1974년), 한편 독립국가연합의 전신인 구소련 미술관의 경우, 연간 1억 4천 명이 미술관을 방문한 것으로 집계되었다(구소련 문화성자료, 1980년). 우리보다 많은 인구의 나라이지만, 우리처럼 명절이면 고향을 다녀오듯 미술관을 연중행사로 찾는 것이 아니라 미술관 방문이 일상생활 깊숙이 침투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통계라 하겠다.
이처럼 미술관이 문화생활의 중심센터로서의 기능을 전담하게 되자 각 나라의 정부마다 정책방향을 설정하고 일관성 있는 지침을 확립하기 위해 나름대로 미술관에 대한 보고서를 내놓고 있다. 이 중 몇 가지만 들어보면, 영국의 로쓰(1963년), 라이트(1973년), 말콤(1978년)와 윌리암(1981년)보고서, 미국의 벨몬트보고서(미국 미술관협회, 1969년), 캐나다의 메시(1951년)보고서, 호주의 피거트(1975년)보고서, 끝으로 네덜란드 정부가 발간한 ‘새로운 미술관 정책 보고서’(1977년)등이 널리 알려져 있는 보고서이다.
문화의 변두리에 미술관이 존재한다
이에 비해, 우리의 경우 미술관을 찾는 관람객 수나 기호도 조사, 운영실태와 정책지침과 같은 것을 알리는 자료집이 여지껏 제출된 적이 없다. 어디엘 가면 무슨 미술관이 있다는 정도의 안내집만 발간된 정도이다. 뒤집어 말하면 아직 미술관의 중요성이 뚜렷이 인식되지 못한 실정이거나 문화생활의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현재 국내 미술관은 사설미술관, 국립미술관, 시립미술관, 그리고 공공 미술관을 합쳐봐도 두 손으로 꼽을 정도로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열악성을 면치 못하는 실정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미술관이란 이름만 ‘미술관’이지 실제로는 ‘화랑’ 수준이거나 그 수준에도 못 미칠 정도로 자격을 갖추지 못한 경우는 제외한 것이다. 그리고 이때 ‘자격’이란 국제미술관 위원회(International Council of Museums)가 규정한 다음과 같은 규약을 염두에 두고서이다. 이 규약에 따르면 미술관은 ‘사회와 사회발전에 봉사하기 위한 비상업적 기구이며 상설기관인 동시에 대중을 위해 개관된 공간을 뜻하는데 연구나 교육 그리고 향유를 목적으로 하여 인간의 문화유산과 그와 관련된 환경물들을 소장하며 보존하고 연구하며 소통시키고 끝으로 전시하는 곳’(1974년)을 가리킨다.
이러한 규약을 국내 미술관에 적용시켜보면, 간판만 미술관이지 실제로는 대관을 하거나 작품판매를 하는 등 ‘상업적 기구’는 제외될 수밖에 없으며, 또 상업적 기관은 아니더라도 ‘연구와 교육, 그리고 향유’와 같은 미술관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기관도 함량미달로 제외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런 적용 자체가 물과 불을 구별하듯 고정 불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필요조건을 갖추지는 못하였더라도 공익성을 강조하거나 부득이 자금난 때문에 대관에 의존하면서 부지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특수한 사정을 감안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설사 그렇다 해서 ‘미술관’의 본연의 기능을 축소한다거나 목적 추구의 당위성을 저버릴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고에서는 미술관의 공적 기능이 효과적으로 수행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문화교육기관으로서의 미술관의 특성은 과연 무엇인지, 또 미술관 개념이 어떻게 달라져왔는지, 현재의 미술관 기능은 어떤 부분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지를 두루 살펴보기로 한다.
오랜 전통에서 비롯된 대중적으로서의 미술관
위에서 말한 것처럼 미술관을 ‘사회와 사회발전에 봉사하기 위한 비상업적 기구이며 상설기관인 동시에 대중을 위해 개관된 공간’이라고 규정지었을 때 그것은 비교적 근래에 채택된 정의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아주 오래된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스 용어로 오늘날의‘museum’에 해당하는‘mouseion’은 명상의 전당, 철학적 기관 또는 뮤즈(muse)의 사원이란 뜻을 지녔다. 로마시대에 와서 ‘museum’이란 용어는 철학적 논의를 벌이는 장소라는 한정적 의미로 축소되기는 했지만, 본래부터 ‘연구’와 ‘교육’ 기능이 중요시되어 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다 이 용어가 르네상스의 소장품을 보관하는 장소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기 시작하고, 따라서 그것이 온갖 문화재의 저장소 내지 백과사전적 지식의 전달장소와 같은 개념으로 의식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에 이르러서이며, 한편 18세기 이후부터 차츰 일반적으로 통용되기 시작한 미술관 개념은 역사 물품이나 자연 물품들을 저장하거나 전시하기 위한 창고라는 뜻을 지니게 되었다.
이렇듯 뮤즈와 명상의 전당과 같은 의미와 곁들어, 일반적인 문화유산을 집적하기보다는 오직 ‘고급’예술만은 수집하고 보존하며 전시하는 경향에 한층 짙어지게 되자 이에 대한 반발로 미술관에 대한 대중적 인식과 또 미술관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역할에 대해 눈을 돌리는 경향이 대두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방향전환이 현대의 미술관의 성격을 정해주게 된 인자이자 고전적인 미술관의 전통을 더 이상 지속시키기 어렵게 만든 이유가 되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보다 일반적인 수준에서 보자면, 이것은 인간의 기본욕구인 소유욕과 호기심과 같은 속성을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넓히려는 요구, 말하자면 문화수혜의 폭을 증대시키는 노력과 결합됨으로써 유발된 결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화수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미국미술관 협회(American Association of Museum)가 규정한 미술관에 대한 다음과 같은 규약이다. 이에 따르면 미술관은 ‘조직을 갖추고 영구적으로 비상업적인 기구, 특히 미적인 취지이든 교육적 취지이든 전문적인 직원을 두고 이들로 하여금 소장품을 관리시키며 유용하게 사용하며 정규적인 일정에 맞추어 대중에게 그것들을 전시시킬 수 있는 곳을 뜻한다.’ 이를 필자 나름대로 정리한다면, 주체가 미술관이라면 대상은 대중, 곧 관람자가 되는 셈이며, 그것을 현실화시키는 매개의 몫을 미술관 직원으로 맡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미술관은 대중을 위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대중의 미적교육에 봉사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기관이라는 사실을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대중을 위한 미술관이란 개념이 확립된 것은 현대에 들어와서의 일이지만, 그것의 시원을 살펴보려면 좀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맨 먼저 미술관이 특별히 대중봉사의 공간으로 자리매김을 시작한 것은, 프랑스의 경우 성 빈센트 수도원으로 그곳의 주교가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회화, 고서, 그리고 메달 등을 수도원에 1694년 유증하면서부터로 알려지고 있다. 영국의 경우, 최초의 대중미술관은 1683년에 개관한 옥스퍼드 소재의 에시몬레언 미술관으로 이 미술관은 1759년 브리티쉬 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793년에 출현한 ‘참다운 대중미술관’
그러나 참다운 대중 미술관이 출현하기까지는 좀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이때의 ‘참다운 대중 미술관’은 1793년에 와서야 비로소 맹아하게 된다. 즉 왕족의 값비싼 소장품을 대중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입장을 허락한 루브르 박물관이 그것이다. 일반인들의 접근이 불가능했던 이 소장품들은 근 50년간 대중들의 불만의 씨앗이 되었고, 따라서 대중들은 이것을 볼 수 있도록 청원했으며, 그 결과 루이 15세는 1750년 이 요구를 받아들여 수백 점의 회화를 공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에도 이러한 캠페인 계속되었다. 가령 디드로(Diderot)가 자신의 9권으로 구성된 방대한 저서「백과사전(Encyclopaedie)」을 1765년에 출간하였을 때, 저서 속에 학술의 전당으로도 적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루브르를 국립미술관으로 용도를 바꾸기 위해 필요한 상세한 계획을 수록했다는 것이 그 예의 하나일 것이다.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 유럽 각국에서는 다량의 소장품을 대중에게 공개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런 변화는 대중에게 선행을 베풀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다분히 왕족의 취향에 의한 경우가 많았다. 1784년 경 미술전시장으로 개관한 비엔나의 쉴로쓰 벨베더레 미술관은 요셉 2세가 왕족들이 소장하고 있었던 회화의 일부를 대중의 문화향유를 위해 전시하면서 특별히 유파를 분류하여 전시한 것도 바로 그러한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스페인의 경우, 에스코리알궁의 소장품들을 17세기부터 일반에게 공개하였지만, 이것을 좀더 발전시킨 것은 찰스 3세가 집권하면서부터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1774년에 개축한 고에네체 궁에 자신의 예술작품을 비롯하여 자연, 역사와 관련한 소장품들을 한군데 모아 그곳을 순수미술의 전당이나 과학아카데미로도 전용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하여 찰스 3세는 1785년 이 개축건물을 과학박물관으로 사용하도록 지시하였다. 물론 이러한 약속은 약 20년이 경과한 후에 실현하게 되었으며, 스페인 독립전쟁에도 불구하고 처음의 의도대로 1808년에 결실을 보게 되었다. 그러다 왕위를 찬탈한 요셉 보나파르트는 부에나비스타궁에 회화전용 미술관을 건립할 것과 파리의 나폴레옹 미술관에서 50점의 작품을 가져올 것을 공약했지만, 그는 후자의 약속만을 지켰을 뿐이다.
한편 프랑스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네덜란드의 경우, 여기서의 작품소장은 다른 나라와 달리 왕족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라 공동단체, 말하자면 지방자치단체에 의해 결정되고 구입되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 나라의 예술품들은 프랑스군에게 약탈당해 전쟁의 전리품으로 빼앗겼을 것이다. 이런 결과로 인해 국립미술관은 명색이 국립미술관이지 가치가 떨어지는 작품만을 소장하고 있었고, 이 소장품 역시 1800년에 개관한 휴이스 덴 보쉬 미술관으로 이송하게 된다. 소정의 입장료를 지불하면 일반인이 미술관을 입장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위에서 살펴본대로 미술관에 대중의 발길이 옮겨지기 시작한 것은 비단 최근의 일은 아니지만, 오늘날과 같은 의미에서의 대중 미술관의 개념이 확립되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했으며 또 경과해야 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미술관은 어떤 사회적 기능을 하는 곳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바꾸어 말해 왜 미술관이 있어야 하는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미술관은 어떤 경로로든-암시적이든 외형적이든-교육을 실천하는 곳이다. 물론 이때 ‘교육’이란 각 미술관에서 그것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넓은 의미로 사용되어질 수 있다. 그 교육이라는 것을 어떤 의미로 규정짓고 또 어떻게 미술관 운영에 적용하느냐에 따라 미술관 기능과 존재이유가 결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미술관의 공적 기능을 알아보는 의미에서 이러한 교육에 대한 규정이 원론적으로 어떻게 내려지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기로 한다.
벤저민 길만의 교육의 범주 세가지
영국의 미술관학자 벤저민 길만(Benjamin Gilman)은 우리가 말하는 ‘교육’은 최소한 세 가지 뜻으로 범주화될 수 있다고 본다. 일반적 의미, 광의적 의미, 협의적 의미가 그것이다.
‘일반적 의미’란 존 스튜어트 밀이 규정한 바처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고 그런 존재의 개인을 형성시키는 것임과 아울러 인간을 비인간적인 존재로 되는 것을 막자는 것’이다. ‘광의적 의미’란 ‘경험 내지 행위에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직접적인 결과를 위해서가 아니라 간접적으로 그러한 현실속에 살고 있는 인간의 능력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런 맥락에서 ‘미술관은 교육의 전당’이라는 하나의 명제가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끝으로 ‘협의적 의미’란, 가장 포괄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로 제도적 교육, 말하자면 학교나 대학에서 시행되는 것과 같은 공식적 프로그램을 가리킨다. 이런 협의적 의미의 교육은 의도적이며, 인간을 지적인 존재로 만드는데 협력하는 성격을 지닐 뿐만 아니라 교육학자 허친스(R. M. Hutchins)의 말대로 ‘교육체제를 통하여 실제적이며 가시적으로 구현되는 형태’를 의미한다.
대체로 미술관에 관한 교육문제를 논한 학자들은 이러한 세 번째 의미로 교육을 생각해왔으며, 따라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의미를 배제시켜왔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자면, 미술관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배워야 한다는 의무를 강요할 수는 없기 때문에 미술관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의미에서의 제도적 교육기관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른 말로 설명하면, 미술관은 예술작품을 전시하기 때문에 반드시 전통적인 교육방법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특별한 교육적 경험을 제공할 기회를 항상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미술관은 ‘완전하고도 항구적인 학습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얘기이다. 따라서 미술관의 주요 교육기능은 전문학습이나 직업훈련을 시키는 기관과는 현저히 구별되게, 자유스런 분위기속에서 교육행위를 이끌어 냄으로써 일반적인 교육 메카니즘을 통해서는 도저히 달성할 수 없는 고유한 특성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전시와는 별도로 진행되는 특별강좌의 프로그램을 제외한 것이다.
하지만 ‘가르칠’책임을 안고 있으면서도 그 주체인 미술관이 어떻게 자신의 교육적 역할을 수행할 것인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지침이 발표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의)많은 사람들이 미술관에 몰려드는 이유 중 하나는 소위 ‘교육적 혁명(revolution in education)’에 기인한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서구에서 지난 20년간 이상이나 쏟은 교육적 프로세스에 관한 관심이 결과적으로-교육행위에 있어 핵심을 차지하는-교육되어야 할 것(지식)과 교육자, 그리고 피교육자와 같은 문제를 주요 사안으로 인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물론 교육체제는 오랫동안 지식과 교육자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요사이 볼 수 있는 것은 루소, 페스탈로찌, 프뢰벨 그리고 그밖의 학자들의 영향과 결합되면서 ‘지식 위주로부터 학습자 위주에로의 변화’가 뒤따르게 되었다는 점이다. 즉 학습자와 그들의 개성을 교육을 구성하게 만드는 핵심 사항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로 인해 미술관 종사자(소통촉진자)와 관람객 사이의 관계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미술관연구에서 ‘교육’이라는 말의 의미를 ‘해석’이라고 풀이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해석’이라는 용어를 맨 먼저 사용한 학자는 미국인 프리만 틸덴(Freeman Tilden)으로 그는 ‘해석’을 ‘원작을 처음으로 경험시킴으로써, 또한 단지 실질적인 정보를 소통시키기보다는 가시적인 매체에 의거하여 그것의 의미와 관계를 도출시켜 내는 교육행위’로 규정지은 바 있다. 이같은 규정 또는 목적은 후에 술츠(Schulz)에 의해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해석을 통하여 이해에 이르고, 이해를 통하여 감상에 이르며, 끝으로 감상을 통하여 보존에 이른다.’ 말하자면 미술관의 존재이유를 가설적으로 ‘해석’에서 찾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틸덴이 장담한 해석의 6가지 원칙
틸덴은 ‘이러한 활동영역은 어떤 나라 혹은 어떤 시대의 것과도 견줄 수 없다’고 장담하면서‘해석’의 6가지 원칙을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이를 소개하면,
첫째, 어떤 해석이든 전시되었던 것과 관련이 없거나 관람객의 경험내지 개성을 유발할 수 없는 것이라면 무익하다.
둘째, 이처럼 정보는 해석이 아니다. 해석이란 정보를 근거로 하는 표현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이 전적으로 사실 자체와 구별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어쨌든 모든 해석은 정보를 포함한다.
셋째, 해석은 온갖 예술들, 즉 그 자료가 과학적인 것이든 역사적인 것이든 건축적인 것이든 이 모든 것을 연결짓는 또 하나의 예술이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예술이든 일정한 방법으로 교육이 가능한 것이다.
넷째, 해석의 주된 목적은 명령(instruction)이 아니라 유인(provocation)이다.
다섯째, 해석은 부분을 드러내기보다는 전체를 드러내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 또한 그것은 어떤 특정 부류의 사람보다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설명해야 한다.
여섯째, 해석은 어린아이에게 설명되었던 것을 어른에게 적용시켜서는 안되며 기본적으로 다른 접근방식을 경유해야 한다. 이를 효과적으로 달성하려면 별도의 프로그램을 마련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교육기능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미술관은 어떠한 사업을 통하여 자신의 목적에 도달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게 된다. 이 점은 미국 미술관 협회의 회장을 역임한바 있는 조셉 노블(Joseph Noble)이 자신의 ‘미술관 선언문’(1970년)이라는 글 속에서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노블에 의하면, 모든 미술관은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책임을 수행해야만 한다고 본다. 즉 수집하고 보존하며 연구하며 해석하고 전시하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러한 책임의 상호관련성을 이렇게 강조한다. ‘그것들은 미술관의 본질을 규정하다. 그 요소들은 사람의 다섯 손가락처럼 각각 떨어져 있지만 공통의 목적을 위해 서로 결합되어 있다. 만약에 미술관이 이러한 다섯 가지 책임 중 어떤 것을 빠트리거나 소홀히 한다면 미술관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될 것이다.’
아주 일반적인 이러한 미술관기능에 관한 규정은 그간 미술관 운영의 지표로 간주되어 왔으며, 또한 하나의 유력한 평가수단으로 미술관 경영을 체계적으로 계측할 수 있는 원칙을 제공해 주었다.
노블의 원칙을 수정한 새로운 패러다임 등장
하지만 그러한 실용성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새로운 패라다임이 등장하게 되었다.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노블에 제시한 원칙을 수정한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미술관이 적게는 지난날 미술관 운영에서 제기된 문제를 시정하고 넓게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고자 했던 것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안한 사람은 독일의 미술관학자이며 라이덴 소재의 라인바르트 아카데미 교수로 있는 페터 반 멘쉬(Peter van Mensch)로 그는 미술관의 기본적 기능을 세 가지로 요약했다. ‘보존’(‘수집’을 ‘보존’의 단계로 가기 위한 첩경으로 간주한다), ‘연구’(이것은 노블의 원칙과 동일하다), ‘소통’(이 세 번째 기능은 노블의 두 개념, 즉 ‘해석’과 ‘전시’를 결합한 것이다)이 여기에 해당한다.
분명 오늘날의 미술관 개념은 바뀌고 있으며, 그것은 일부 특수층의 전용공간이 아니라 로버트 휴즈(Robet Hughes)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향상’을 위한 교육장으로서의 기능을 한층 강조하는 방향으로 기울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조심스럽게 짚어봐야 할 점이 있다면, 그것은 많은 미술관이 여전히 수집하고 보존하며 전시하는 일에 전념하지만 그들이 현재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관련성에 얼마나 많은 비중을 두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즉 현실과 동떨어질 수 없는 미술관이 사회적 변모에 적극 참가하는 일을 등한시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런 맥락에서 떠오르는 것이 ‘새로운 미술관학을 위한 국제운동(International Movement for New Museology)’ 이라는(캐나다에 본부를 둔) 단체에서 제시한 궤벡선언문(1984년)이다.
새로운 미술관학을 위한 국제운동의 궤백선언문
‘미술관학자들은 미술관이 지녀온 전통적인 역할과 기능, 요컨대 보존과 교육에 머물지 않고 이를 한층 폭넓게 발전시켜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지난 시대의 작품을 보존하고 개성적인 문화적 유산 및 오늘날의 테크놀로지를 관리하면서, 한편으로 새로운 미술관학은 인간발전에 특히 주목하면서 사회적 진보속에 잠재된 힘을 도출시키고 아울러 그것들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계획 속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이 선언을 필자 나름대로 정리하면, 미술관은 좀더 개선되고 건강하며, 궁극적으로는 보다 안전한 세계를 창조하는데 밑거름이 될 수 있도록 대중을 향하여 자신의 책임감을 보다 진지하게 다해가야 할 필요가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너무 일반적인 얘기이기는 하나, 이 점이 미술관을 과거 속에 갇히지 않고 오늘과 내일의 문화를 준비할 수 있게 하는 ‘살아있는 미술관’의 도래를 기대하는 필자의 머릿속에 그려진 내일의 미술관에 관한 설계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