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문예 / 스페인

‘까딸란’ 문학의 중심부 바르셀로나




황병하 / 고려대 강사, 서·중남미문학

올 9월에 막을 올릴 제25회 하계 올림픽 준비에 마지막 박차를 가하고 있는 스페인 제2의 도시 바르셀로나는 부산하고, 흥분에 들떠 있다. 수도인 마드리드에 이어 스페인에서 두 번째로 올림픽을 유치한 이 도시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대체적으로 단지 그곳이 까딸루냐라는 주의 수도이며 프랑스에 인접해있는 항구 도시라는 것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도시 자체만을 가지고 따지지 않고 행정구획상 위성도시를 포함하고 있는 바르셀로나 지방(Provincia)을 가지고 따지자면 바르셀로나는 같은 구획법에 의해 나누어져 있는 마드리드 지방의 인구를 약간 상회하는 스페인 제일의 지방인 것이다. 이렇듯 최고의 인구를 가진 지방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바르셀로나는, 92년 올림픽 준비위원회 회장인 빠르꾸알 마라갈이 말했듯 예술, 스포츠, 상업, 건축 등의 전 분야에 걸쳐 마드리드와 거의 동등한 위치에서 스페인을 대표하고 있는 도시인 것이다.

스페인이라는 한 국가의 전체적 맥락에 따라 이 도시에 입혀져 있는 이러한 피상적인 동질성의 이름은 이 도시를 중심으로 응축되어 있는 까딸루냐라는 주의 역사적 배경과 현재까지 그들이 추적해 왔던 문화적 삶의 양태를 일견해 보면 금세 이 도시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도록 만든다. 스페인의 13개 주 중 줄기차게 분리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는 바스꼬 주, 그리고 포루투칼 위에 위치하고 있는 갈리시아 주와 더불어 까딸루냐는 소위 마드리드를 주축으로 스페인 정치, 사회, 문화의 주류를 이루어 온 까스띠야 문화권과 여러 측면에서 구분된다. 우리가 흔히 스페인어라고 부르는 ‘까스떼냐노’ 라는 언어에 반해 바스꼬가 ‘바스꾸엔세’라는 언어로서, 그리고 갈리시아가 ‘가예교’라는 언어로서 가스띠야 문화권으로부터 자신들을 구분시키고 있듯, 까딸루냐 또한 ‘까딸란’이라는 고유의 언어로서 자신의 이질적이고, 독자적인 성격을 보존,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스페인 내의 이러한 이질적인 언어권의 존재 속에서 까딸란이 특히 세간의 조명을 받게 된 것은 가예고, 바스꾸엔세와 같은 다른 두 언어권에 비해 보다 광범위하고, 체계적으로 까딸란 언어로 쓰여진 문학을 계승 발전시켜왔고, 근자에 들어와서는 까딸란 문학이라고 불리우는 이 문학이 질적, 양적 규모에 있어서 완전히 하나의 독립된 세계를 이룩해 냈다는 데에 있다. 물론 바스꼬나 갈리시아와 마찬가지로 까딸루냐의 공식언어는 가스떼야노라고 불리우는 스페인어이기 때문에 많은 까딸루냐 출신 작가들이 이 공식언어로 작품을 쓰고 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많은 뛰어난 작가들이 까딸란어로 작품을 쓰고 있다는 데서 까딸루냐는 보다 소극적인 자세를 견지해온 두 문화권과 확연히 구별되는 것이다.

상류계급에서 쓰이는 까딸란어의 어원

까딸란어는 어원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소위 라틴 불가르(Latin vulgar)라고 불리우는 로만스어계에 속한다. 소위 로마시를 중심으로 한 상류계급에서 쓰여지고, 학술적 언어인 라틴 문어체에 반해 라틴 구어체라고 불리우는 이 라틴 불가르에는 불어, 이태리어, 스페인어, 포르투칼어, 루마니아어 등이 포함된다. 이 라틴불가르는 로마제국의 치하에 있는 여러 부족 단위 위성국가들이 로마의 속국이라는 정치적 이유 때문에 원래 가지고 있던 자신들의 언어적 배경에 라틴 꿀또(Latin culto)라는 라틴 문어체를 받아들임으로써 형성되게 된 언어였다. 당시 까딸루냐는 현 스페인의 모체인 까스띠야 왕국과 분리된 다른 부족 국가였기 때문에 자신들의 혈통적 근간인 비시 고도족의 토착 언어체계에 라틴 굴또를 받아 들여 까딸란이라는 언어를 탄생시키게 되었다. 까딸란어가 다른 로만스어권의 언어들과 나란히 독자적인 언어 세계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그들보다 이 구어체들의 문자화에 있어 훨씬 앞서 있었다는 증거는 라틴어가 아닌 유럽의 현대어로 쓰여진 최초의 작품이 까딸란으로 쓰여졌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까딸란 문학의 시조로 불리워지는 시인이요, 철학자요, 소설가인 라몬 룰(Ramon Lull : 1232∼1315)의 작품들이 바로 그것들이다.

위대한 시인들 배출한 음유시의 까딸란 문학

물론 다른 모든 유럽문학들이 그러한 것처럼 까딸란 문학의 시초는 음유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흔히 우리가 프랑스의「롤랑의 노래」, 스페인의「미오 시드」, 독일의 「니벨룽겐의 노래」등을 그 대표작들로 꼽는 음유시는 11세기 말부터 14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다른 유럽국가들에서와 마찬가지로 까딸루냐에서도 가장 중심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던 문학장르였다. 밀라 이 폰따날스가 지적한 대로 대략 3시기로 나눌 수 있는 이 까딸란 음유시는 기예르모 데 뽀이띠에르스, 후에고스 플로레스 데똘로사와 같은 위대한 음유시인들을 배출시켰다. 비록 시가 그 주조를 이루고 있었지만 이 시기에 까딸라문학은 산문문학에서도 몇 가지 중요한 작품들을 남겼다. 13세기에 쓰여진「하이메 왕의 연대기」와 같은 일종의 역사저술들과 더불어 전기한 라몬 룰 등에 의해 쓰여진 많은 소설 작품들이 이 시기에 선을 보였다. 이 소설들은 도덕소설, 종교소설, 철학소설, 연애소설, 기사도 소설 등과 같은 하급장르로 미분화될 정도로 상당한 정도의 질적인 수준과 양적인 팽창을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의 독립적인 문학세계를 이루고 있었던 까딸란 문학은 중세 말기에 이르러 쇠퇴기에 들어서게 되고, 르네상스에 와서는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리게 된다. 이러한 까딸란 문학의 몰락은 스페인이 자리잡고 있는 이베리아 반도의 정치적, 사회적 변동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로마제국 멸망 후 이베리아 반도에는 여러 왕국들이 난립해 있었다. 이러한 이베리아 반도의 춘추난국 시대는 반도를 상당 부분 지배하고 있던 아랍족의 축출이라는 공통명제에 대한 공감대의 형성과, 왕국간의 결혼이라는 방법을 통해 통합의 형태를 띠어가기 시작했다. 그 당시 까딸루냐는 하나의 왕국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독립 영지로서 바르셀로나의 백작이 통치를 하고 있었는데 1151년 영지의 후계자인 라몬 베렝게르 백작이 인접해 있는 아라곤 왕국의 왕위 계승자 뻬뜨로닐라와 결혼하게 됨으로써 아라곤에 합병되게 되었다. 아라곤에의 병합으로 차츰 독자적 문화성을 잃어가고 있던 까딸루냐는 1479년 소위 ‘카톨릭 왕들(Reyes Catolicos)’이라고 불리우는 아라곤의 왕, 페르난도 2세와 까스띠야의 여왕, 이사벨의 결혼을 통한 양국의 통합으로 결정적인 몰락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특히 정치, 군사적 측면에서 아라곤보다 우위에 있던 까스띠야를 중심으로 유럽을 제패하게 되는 스페인 대 제국이 건설되고, 이 제국이 까스띠야 문화를 근간으로 영국과 더불어 문화의 황금기(Golden Age)를 맞게 되자 까딸란 문학은 이중, 삼중의 동화의 흐름속에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스페인 문학권에 재등장한 낭만주의의 까딸란 문학

이렇듯 명맥이 끊겨버린 까딸란 문학이 다시 스페인 문학권에 재등장한 것은 낭만주의에 이르러서였다. 까딸란 문학의 진정한 르네상스라고 불리울 수 있는 까딸란 문학의 이러한 부활은 18세기에 이그나시오, 그리고 안또니오 뿌이그 이 블랑쉬라 불리우는 두 형제가 까딸란어로 시를 발표하고, 삐우 빨로뜨가 까딸란어에 대한 연구서적「까딸란어의 문법과 장점, 1814」이라는 책을 발간하면서 발아하기 시작했다. 특히 스페인 최초의 낭만주의 잡지「엘 에우로뻬오」가 바르셀로나에서 발간되었다는 사실에서 보듯 바르셀로나가 새로운 문학운동의 중심지가 됨으로써 많은 뛰어난 까딸루냐 출신 작가들이 탄생했고, 그들 가운데서는 자신들이 일상의 삶에서 늘 쓰고 있는 까딸란어로 작품을 쓰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거대한 시작의 종은「엘 에루오뻬오」의 옛 편집인이었던 부에나벤뚜라 까를로스 아리바우(1798∼1862)가 새로운 낭만주의 잡지「엘 바포르」를 창간하고, 까딸란어로 쓴 시집「조국에게」를 발표하면서 울리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잊혀버린 언어에 대한 문학표현 수단으로서의 재발굴은 낭만주의가 작중무대로 도시보다는 시골을 선호하고, 시골에서는 까딸란어가 광범위하게 쓰여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까딸란어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인 문학사조적 측면의 요인을 부정할 수는 없게 된다. 그 배경이 어찌되었든 간에 까딸루냐는 낭만주의 운동의 여파속에서 후아낀 루비오 이 오르스(1818∼1899)를 필두로 까딸란 시인들의 출현을 목격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시에 비해 그 발전의 시기가 다소 늦긴 했지만 소설과 희곡에서도 까딸란 문학은 나르시소 오예르(1846∼1930), 호세 삔 이 솔레르와 같은 사실주의 소설가, 그리고 페데리꼬 솔레르(1839∼1895), 앙헬 기메라(1874∼1924)같은 훌륭한 극작가들을 탄생시키게 되었다.

유럽문학의 한 지류로 찬란히 꽃피워

그러나 오늘날 까딸란 문학이 스페인 문학 속의 한 지류로서가 아닌 유럽문학의 한 지류로서의 자리를 확보하게 된 것은 낭만주의, 부분적으로 사실주의에 기초해 새롭게 점화된 불꽃을 아방가르드 문학 속에서 찬란하게 꽃 피운 데서 비롯되었다. 이미 이때부터 까딸란 문학은 스페인의 지역문학이 아닌 스페인 문학과는 별개의 독자적 영역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까딸루냐가 아방가르드의 본산지인 불란서의 어느 주보다 가깝게 위치해 있었고, 까딸루냐의 많은 작가들이 스페인어 대신 까딸란을 자신의 문학언어로 선호했었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까딸란 아방가르드 문학이 스페인 아방가르드 문학보다 더 월등한 위치에 있었다는 주장을 매우 근거 있는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또한 까딸란어 연구를 위한 공식기관들의 잇달은 설립, 그밖의 많은 문학서클들의 결성과 잡지들의 발간과 같은 외적인 측면들도 까딸란 문학의 정착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스페인 98세대와 동시대인인 후안마라갈, 그 뒤를 잇는 호세 까르네르, 까를로스 리바, 호세 로뻬스 삐꼬아 같은 시인들, 쁘루덴시 베르뜨라나, 알폰소 마세라스, 세바스띠아 세라노와 같은 소설가들, 그리고 이그나시 이글레시에스, 호안 뿌이그 이포라떼르 등과 같은 극작가들은 같은 시대의 스페인 작가들과 비교해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 작품활동을 했거나 하고 있다. 그리고 1968년에는 스트라스부르그 대학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국제 까딸란어, 문학학회가 설립되어 까딸란어학 및 문학에 대한 본격적이고 학문적인 연구조차 성숙의 단계에 도달하고 있다.

까딸란어의 문학상이 창작의욕 고취에 기여

특히 근자에 들어 제정된 까딸란어로만 쓰여진 작품이나 또는 까딸란어로 쓰여진 작품에게도 문호가 열려있는 라몬 룰, 조셉 쁠라, 나달, 아벨 등과 같은 문학상들은 까딸란 작가들의 창작의욕 고취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중에서 쁠라와 나달상은 상당한 액수의 상금을 수여함으로써 스페인어 작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한된 숫자의 독자들을 가지고 있는 까딸란 작가들에게 많은 경제적 도움을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수준 높은 심사기준을 통해 해마다 뛰어난 작품성을 가진 문제작들을 발굴해내 까딸란 문학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고 있다. 최근에 이들 상을 수상한 작가의 작품들 중 주목해 볼 만한 작품들은 1988년 나달상을 수상한 후안뻬드로 아빠리시오의「애매모호의 초상들」, 1990년 라몬 룰상을 수상한「순수한 열정의 엘레지」, 1991년 뿔라상을 수상한 루베르뜨 데 벤또스의「신하와 그의 유령」등이다. 올 1월에 발표된 1992년도 나달상 수상자는 까딸란 작가가 아닌 산딴데르 출신 작가 알레한드로 간다라의 작품「눈먼 기다림들」에게 주어졌고, 까딸란으로 쓰여진 작품에게만 주어지는 쁠라상은 호르디 꼬까의「일본여자」에게 수상되었다.

후안 빼드로 아빠리시오의 ‘애매모호의 초상들’

이 작품들 중 작품이 가진 구조적 특성 때문에 가장 학계와 평단의 조명을 많이 받았던 작품은 후안 빼드로 아빠리시오의「애매모호의 초상들」이었다. 작품의 제목이 시사하듯 중심적인 작중인물을 설정해 그 인물 중심으로 사건을 전개시켜 나가는 전통적인 기법을 쫓지 않고 여러 인물들과 그들에 얽힌 이야기를 단편적으로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의 애매모호의 작중성은 루이스 곤잘레스-델-바예와 같은 교수로 하여금 ‘이 작품은 기본적 플롯조차 되어 있지 않는 실패작으로 다음 나달상을 뽑을 때는 심사위원들이 좀더 심사숙고해 작품을 뽑아야’될 것이라는 악평을 받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 작품에 대한 곤잘레스-델-바예 교수의 부정적 견해는 이 작품이 거부하고 있는 전통적 읽기 방식에 의해 이 작품에 접근했기 때문에 비롯된 것 같다. 현대소설이 시도한 여러 실험들 중의 하나로 우리는 주인공 중심적 작품성의 파괴라는 것을 들 수가 있다. 한 주인공 중심적 작품구조는 이 주인공 밖의 인물들이나 사건들을 주인공 또는 그와 관련된 사건들과 대립, 유사와 같은 동등항으로 보지 않고 종속항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지나친 주관화에 빠져 있다고 볼 수 있고,「애매모호의 초상들」에서처럼 여러 주인공들의 등장은 그러한 새로운 인식에 부응하는 새로운 글쓰기의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더불어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과 그들 주변에 얽혀있는 사건들을 발단-전개-종결이라는 과정을 통해 제시하지 않고, 미해결의 상태로 방치해 둔 것처럼 보이는 작품 구조 또한 바로 현대소설이 절망적으로 직면하고 있는 ‘정말 작가는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며, 설사 인식의 저 높은 단계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과연 그 인식을 절대적으로 객관적이라 볼 수 있는가’라는 회의적 명제에 대한 통렬한 절규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12개 장들이 전개하는 다른 작중인물과 사건

이 작품은 12개의 서로 단절된 장들로 나뉘어져 있다. 각 장에는 다른 장과 매우 개연적인 연관관계만 유지할 뿐 전혀 다른 작중인물들과 사건들을 전개시켜 나간다. 이들 에피소드를 전체적인 고리 안에서 묶어 주고 있는 것은 이들이 같은 도시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며, 그 도시의 범사회적 환경과 조건 속에서 생존을 영위하고 있는 군산들이라는 점 뿐이다. 특히 각 인물에 관한 이야기들도 앞과 뒤가 절단되어 있기 때문에 작품은 어떤 사건의 진행과정을 따라 전개되어 나간다기보다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뒤죽박죽으로 크로키되어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게 된다. 전통적인 소설에서는 완성도가 낮은 작품으로 매도할 수 있는 척도를 중의 하나인 이러한 파상성이 성취해내는 중요한 효과는 한 도시의 총체적 현장성과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인물들과 그들이 투척되어 있는 사건들을 아무런 등급없이 제시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바스꼬 사람들과는 달리 까딸루냐 사람들은 분리독립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페인의 한 주로 남아있는 데에 어떠한 불만도 표시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은 스페인 사회의 구조를 이루고 있는 까스띠야 전통에 완전히 흡수, 동화되는 것 또한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공존의 길을 택했고, 그러한 까딸루냐의 특수한 태도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언어를 지키고, 그 언어로서 문학작품을 생산해내는 문화적, 정치적 여건을 갖도록 만들어 주었다. 즉 그들은 스페인 문학 속에 또 하나의 다른 스페인 문학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까딸루냐 사람들에게 특별한 바르셀로나 올림픽

그런 측면에서 올림픽의 개최는 바르셀로나, 더 넓게는 까딸루냐 사람들에게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다. 올림픽이 국가단위로 취뤄지지 않고 도시단위로 치러지기 때문에 바르셀로나는 스페인의 한 도시로서 뿐만 아니라 까딸루냐의 수도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세계에 보여줄 수 있게 된 것이다. 2000년의 역사를 가진 바르셀로나는 로마, 아랍, 유태,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근대, 아방가르드 등 여러 시대와 여러 문화권에서 유입된 문화유산들을 많은 분야에서 보존,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문화적 풍부함과 특수성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바르셀로나 올림픽 위원회는 체육 올림픽과는 별도로 ‘문화 올림픽’의 야심찬 계획을 수립했고, 그것을 실행해 나가고 있다. 올림픽 개최가 결정된 1988년부터 매해, 88년은 ‘입구’, 89년은 ‘문화와 스포츠의 해’, 90년은 ‘예술의 해’, 91년은 ‘미래의 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92년은 ‘게임의 해’라는 타이틀을 붙여놓고 범세계적, 범스페인적 문화양식 뿐만 아니라 매우 까딸루냐적인 문화양식의 전시 및 공연을 통해 자신의 스페인 내에서의 독특한 위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