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에세이 / 도예

자유, 그것을 밤하늘의 달처럼 빚어내기




한승원 / 소설가

우리들은 누구든지 자기의 무엇인가를 담을 그릇들을 만들고 있다. 그 그릇은 실제로 어떤 액체나 음식물이나 물건을 담을 그릇인 경우도 있고, 우리들의 의식 한 덩어리나 사상 한 아름을 담을 어떤 사고의 틀인 경우도 있다. 우리 선인들은 생각할 줄 알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러한 그릇을 만들어 쓰기 시작하였을 터이다.

그릇이란 대관절 무엇일까.

우리들은 곡식을 노적가리에 쌓아놓고 그 노적가리 속에 얼굴을 처넣고, 퍼먹는 짐승이 아니다. 그 노적가리에서 한 가마니나 한 멱서리나 한 바가지를 퍼내와야 한다. 그것의 양을 헤아릴 수 있는 <말>과 <되>가 있어야 한다.

최종적으로 식탁에 담아올릴 수 있는 그릇이 있어야 하고, 그 그릇에서 입 속에 떠 넣는 숟가락과 젓가락들이 있어야 한다. 우리들은 모두 그 밥그릇과 숟가락과 젓가락들을 가지고 뱃속이나 입속에 음식물을 떠 넣고 잘 씹어 소회시키곤 하는 것이다.

그 최후의 최소 단위의 그릇을 만드는 사람들이 도공들이다. 어떤 한 의식이나 사상을 가장 작은 단위의 그릇에 담아 독자들한테 내미는 사람들 가운데 한 부류가 소설가들일 터이다. 그런 의미에서 도자기와 소설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도예가의 열정보다 못한 나의 소설쓰기

나는 한때 도자기에 미쳐 있었다. 그 도자기 굽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보고 싶었다. 한데 나는 아직도 도자기와 그것을 굽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설에 담지 못했다.

처음 나는 그것을 쉽게 알았다. 자료를 수집하다보니 엄청나게 어려운 것이었다. 섣부르게 알고 아는 체하는 데면데면함을 견딜 수 없을 듯싶었다. 이후로 나는 도자기 굽는 사람들과 그들의 가마 주변을 얼씬거리기만 할 뿐 본격적으로 덤벼들지를 못했다. 언젠가 제대로 한번 써보려고 아직도 나는 단단히 벼르고 있다.

나는 흙보다 불에 먼저 매료되어 버렸다. 그것이 아마 얼른 도자기와 그것을 굽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지 못하게 된 까닭일지도 모른다. 가마에 불을 지피는 도예가들의 열정이 그 불 같음을 발견했다.

그때 나는 광주 변두리의 조기정씨 가마엘 늘 쫓아다녔었다.

’80년대 초였다. 조기정씨는 그 무렵 장작불을 때서 청자를 구워내곤 했다. 앞불을 다 때고 옆불을 땔 때 그는 미친 듯 싶었다. 그가 그렇게 밤새워 불을 지필 때 나는 가마 속의 불의 색깔이 달라지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불의 색깔을 보고 온도를 측정했다.

불의 색깔도 색깔이지만 그 불이 지르는 소리가 놀라웠다. 앓는 듯싶었다. 씹어대는 소리 같았다. 우응 우르르르 우르르르 하는 듯싶기도 하고, 화르르화르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그것은 도자기들을 품은 불가마가 지르는 소리였다. 불의 자궁이라고 해야 마땅하리라. 불의 자궁은 굴뚝으로 검붉은 불을 내뿜었다. 굴뚝 위로 솟는 불은 아귀의 혓바닥 같았다. 신화였다. 불의 자궁의 신화였다. 불의 창조 작업이었다.

도자기에 미친 조기정씨는 불의 가변치(加變値)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조어(造語)이다. 도예가가 애초에 노리지 않았던 어떤 것을 불이 만들어 주는 뜻밖의 변화정도를 말하는 것이다. 불의 창조, 불의 신화로 말미암은 불가사의인 것이다.

도예가는 흙으로 빚은 것을 불가마에 넣은 다음 불한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다. 불의 자궁은 그것을 천몇백 도의 열 속에서 오묘하게 품었다가 내놓는다. 그 가변치를 예측할 수 없으므로 대개의 도공들은 고사를 지내곤 한다. 돼지 머리와 과일들과 술과 떡을 차려놓고 불의 자궁을 향해 절을 하는 것이다.

불가사의한 불의 창조, 불의 신화

세상의 모든 돌은 불가마가 섭씨 천몇백 도의 열 속에 품었다가 내놓으면 보석이 된다. 물론 어느 정도의 가치 있는 보석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은 도예가와 불가마의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다.

나는 환원염으로 구워낼 때 태어나는 청자의 비색에 놀라곤 한다. 원래 세상의 모든 돌들은 천연 동굴에서 볼 수 있는 미끌미끌한 돌들이었으리라, 그것이 억겁 세월의 풍화 속에서 갈라지고 부스러져 모래가 되었고 흙이 되었으리라. 이제 도예가는 그 흙과 돌 부스러기를 이기고 뭉쳐서 불에 구워낸다. 환원염으로 굽는다는 것은 옛날 지구 상에 처음 태어났던 그 바위의 형상으로 되돌려 보낸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산소> 라는 것은 산 것의 목숨을 태어나게 하고 그 목숨을 부지하게 하는 것이지만, 이 세상의 파괴자이기도 하다.

환원염으로 구울 때 산소가 들어가면 그릇들이 새까맣게 변하고 만다. 지구를 파괴하는 것은 산소이고, 그것을 들이키며 사는 것들이다.

나는 바슐라르를 읽고 찬탄했다. 그가 이 세상의 원소라고 말한 물이나 불에 대하여 공감했다. 도자기 굽는 가마 속에 불을 지피는 것을 보고 불이 어떻게 이 세상의 가장 중요한 원소 가운데 하나일 수 있는가를 알았다.

그렇다면 내 몸 속의 불은 어떤 것이고 물은 어떤 것일까. 그 원소들은 우리 인류 우리 민족 우리들 개체 속에서 어떤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장편소설 <불의 딸>을 썼다. 물은 불을 만나면 증발되어 없어지고, 불은 물을 만나면 꺼지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물은 불을 만나지 않으면 타오를 수 없고, 불은 물을 만나지 않으면 생명을 지탱할 수가 없다. 그것이 불과 물의 어찌할 수 없는 변증법이다.

점을 치고 굿을 하고 제사를 지내는 무당이나 불교 천주교 기독교의 승려나 사제들은 촛불을 밝히고 정화수를 떠 놓고 소지(燒紙)를 하여 날려보낸다. 불과 물 없이 제사를 지내지 못한다. 우리들의 몸은 물로 만들어진 몸뚱이인 것이고, 거기에 불로 만들어진 영혼이 깃들여 있는 것이다.

나는 소설 <불의 딸>을 통해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아보려했고, 우리 인간의 원초적인 비극과 그것의 아름다움과 우리들의 존재 의미를 천착해보려고 했다.

결국 그것은 우리들의 이야기이고, 우리들의 그릇 이야기이고, 그 그릇 속에 담긴 사랑 이야기일 터이다.

흙에서 순화된 불의 예술적 조형성

내가 조기정씨를 좋아하는 것은 그가 이 땅의 흙부터 공부를 하고 그리고 불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얼마나 예술적으로 승화된 조형성을 획득했는가 하는 것을 따지지 않는다.

그는 젊은 시절에 등산배낭을 짊어지고 전국의 산과 들을 헤매면서 흙과 돌가루들을 파다가 구워보았다. 조개껍질을 구워보기도 했다. 비색(翡色)은 비밀스러운 색(秘色)이다. 고려청자는 그 유약의 비색의 비밀스러움의 대가 끊겼다. 그것을 이어보려고 그는 무진 애를 썼던 것이다.

임진왜란은 <도자기의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본은 우리나라에서 도공들을 끌어다가 자기들의 도자기를 만들었다. 일본인들은 그 도자기를 유럽 각국에 수출하였고, 그 돈으로 산업을 일으켰던 것이다. 오늘의 일본이 있게 한 것은 일본의 도자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일본의 도자기를 있게 한 것은 한국의 도공들이 아닌가.

우리나라의 도공들은 천민 가운데서 가장 괄시를 받는 천민이었다. 도공들은 자기 자식들에게 도자기 기술을 전수시키려 하지 않았다. 자기 한 대가 천민취급을 당했으면 되었지 그 천대를 후대의 자손들에게까지 물려주려 하지 않았다. 그것이 이땅의 산업기술을 낙후되게 하였다.

일본과 한국의 발전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일본 사람들은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장인>으로서의 자리를 물려주지만 한국 사람들은 끊어 없애려고 한 것이다. 일본 사람들은 떡집을 해도 그것을 아들이나 딸에게 물려주려고 한다. 한국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나는 떡장사를 했지만 너는 선비가 되어 손톱 밑에 때 묻히지 말고 편히 살아라>이런 생각으로 그 떡기술을 전수해 주지 않는 것이다. <장인정신> <장인기질> 이라는 것은 이미 무너진 것이다.

조기정씨는 자기의 도자기업을 가업으로 자식들에게 물려줄 생각을 일찍부터 가지고 있다. 아들 이름이 고현이고, 자기의 호가 고현(古現)이다. 속 모른 사람들은 아들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같다고 웃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속셈은 굳다. 광주에 도자기 명문 <고현가(古現家)>를 대대로 이어가게 할 참인 것이다. 고현가의 도자기를 세계에 떨칠 생각인 것이다. 그것이 진짜 장인정신이 아닌가.

나는 그에게서 배웠다. 나도 내 자식들 가운데서 어느 한 아이가 내 소설업을 물려받기를 희망한다.

불속의 달 길어올리는 위대한 도공

내가 깊이 사귀는 도예가 가운데 윤광조씨가 있다. 그는 스스로를 가리켜 <윤도공>이라고 말한다. 나도 그의 말을 따라 <윤도공>이라고 그를 부르곤 한다. 그렇다. 도예가라는 말은 어쩐지 간사스럽게 느껴진다.

<도공>이라는 말처럼 위대한 말이 어디 있으랴.

윤광조 씨의 가마는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에 있다. 가마 앞에는 구비쳐 흐르는 곤지암천의 물너울이 있고, 뒤에는 나지막한 동산이 있다. 그가 그의 제자들 둘과 함께 기거하는 한식 건물에는 급월당(汲月堂) 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철대문 안에 들어서는 사람을 거위떼들이 요란스럽게 고함치듯 노래하며 반긴다.

“술과 달과 시흥에 취한 이백을 그린 그림(汲月圖)이 있어요. 이태백이 달 건져올리려고 뱃전 밖의 물속으로 손을 뻗고 있는 그림 말입니다. 계옥호를 <급월당>이라고 한 것은 거기에서 연유한 것이지요. 이 옥호는 최순우 선생이 내려주신 겁니다. 뒤에 그분의 선친 별호가 급월이었다는걸 알고, 최 선생님이 저를 얼마나 사랑했었는가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어요”

그는 자기(광조라는 그의 이름)속에 들어 있는 해를 버리고 달을 찾아 이곳에 왔다. 풀속의 달(하필 그 땅의 이름이 草月面)을 빚고, 연못 속의 달(그 마을 이름 또한 하필 지월리)을 길어 올리고만 있다. 결국 그의 모든 작품 제작 행위는 물속의 달 길어올리기(汲月窯)인 셈인 것이다.

꽹과리와 단소를 맞추는 신명나는 급월당

“한 선생님 한번 오십시오. 우리 촛불 한번 밝힙시다.”

그는 가끔 장거리 전화로 나를 유혹하곤 한다.

몇 해 전에 나는 가방속에 꽹과리를 넣어가지고 급월당을 찾아갔다. 그의 가마 있는 강변의 집은 그것을 요란스럽게 두들겨대며 신명을 올리기에 안성맞춤인 외딴 곳이다.

“나 그 동안에 단소 많이 익혔습니다. 한 선생 꽹과리하고 한번 맞춰 봅시다.”

그는 얼마전에 나를 이렇게 유혹했다.

서울 경기 지역을 대홍수가 휩쓴지 사흘 뒤에 나는 그의 가마엘 갔다. 가마 어귀에서 그의 천진난만한 웃음이 나를 반겼다. 그것이 그가 늘 길어 올리곤 하는 달(汲月) 한테서 배운, 선객(禪客)의 그것 같은 웃음일 터이다. 또 그것은 신들린 사람의 웃음이다. 이들을 있는대로 모두 허옇게 드러내고 웃음소리를 죽이지 않고 마음놓고 깔깔거려버리는 웃음 말이다. 그는 그렇듯 신나게 웃어대고는 눈꼬리에 눈물까지 질금거리는 수가 있다.

그는 작업중이었다. 나는 그가 요즘 취해 있다는 그 일거리를 살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가 그 일과 병행하여 해오다가 잠깐 비닐로 씌워놓은 시꺼먼 조형물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것은 부정형으로 눈도 코도 입도 귀도 없이 쌓아올린 제주도의 돌하루방 같은 것이었다. 전라북도 진안에 있는 마이산 같은 것, 서울의 북한산에 있는 인수봉 같은 것, 거대한 남근 같은 것이었다.

아하, 하고 나는 속으로 소리쳤다.

그에 대하여 품고 있는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그의 전람회장에서 늘 발견되곤 했던 끊어낸 나무토막같이 뭉툭하게 빚은 작품에 대한 의혹이었다. 그릇을 빚는 친구가 무슨 꿍꿍이 속으로 이런 뭉툭한 것을 애써 만들곤 하는 것일까.

그 의혹이 풀리고 있었다. 그는 작업을 중단하고 마이산같이 쌓아올린 그 시꺼먼 것의 비닐옷을 벗겨주었다. 그것은 작업장 안에 하나 있고, 문밖의 처마 밑에 또 하나가 있었다.

“사람들은 왜 탑을 쌓고, 누워 있는 돌을 세워놓은가. 왜 불상을 세우고, 장승을 세우는가. 왜 성을 쌓고, 건물을 드높이 올리는가. 요즘 그럼 생각들을 했어요. 얼마전에 마이산을 다녀왔어요.”

내가 마이산 같이 빚어놓은 그것들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이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탑의 기를 하늘에 뿜어 올린다

나는 그의 말에 공감했다. 나는 얼마전에 <우리들의 돌탑>이라는 장편소설을 쓴 적이 있다. 탑은 새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세상의 모든 탑들은 나무처럼 지맥 속에 들어있는 어떤 기(氣)를 하늘을 향해 뿜어 올린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새처럼 날고 싶어한다. 발은 땅을 디디고 있지만 머리는 흰구름 속에 묻고 있다.

우리는 반야차를 마셨다. 한 스님이 빚은 것이라는 녹차의 맛은 그가 물속에서 길어올린 달 같은 그의 얼굴에서 번져오는 맛(질감)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이 가마엘 갈 때마다 그의 그릇들이 모두 욕심나 죽을 지경이지만 그에게 “윤 형 나 이것 가지고 싶은데….”하고 감히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그것은 구걸을 떠나 도둑질일 듯만 싶기 때문이다. 그의 영혼을 훔쳐가는 행위 말이다. 나의 이러한 소심함은 앞서 이야기한 조기정씨한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조기정씨의 조그마한 접시 하나도 못 가지고 있다.

“추상인 듯한 비정형의 뭉툭한 그것들이 사실은 가장 구상적인 것입니다. 그것들 쌓아 올리기가 참 재미있어요. 그릇을 만드는 작업은 저로서는 숭엄한 창조 행위인데, 저는 그 두 가지의 작업을 병행합니다.”

나는 윤 도공에게 이렇게 아는체 해보았다.

“그릇은 형식입니다. 인간의 삶이 있어온 이래로 그 형식은 있어 왔어요. 그것은 우리들의 우주이고, 넋을 담는 구멍이요. 윤 형의 그릇 빚어내기는 그 형식을 만드는 여성적인 행위이고, 뭉툭한 비정형의 쌓아올리기는 남성적인 행위라고 생각돼요. 윤 형이 병행하는 그 두 작업은 여성적으로 비워 놓은 정형 속에 남성적인 비정형의 것을 <담기>이고 <채우기> 아닐까요? 그것은 원초적인 남성 에네르기(陽)와 여성 에네르기(陰)의 조화 아닐까요.?”

틀을 가지고 그릇을 대량생산하는 음모

나의 아는 체 함에 대하여 그는 자기가 이때껏 그가 길어올리곤 한 달같이 하얗게 웃었다.

“지금 음모 하나를 꾸미고 있어요. 이때까지 두려워 했던 일이었어요. 틀을 가지고 그릇을 대량 생산하는 음모 말입니다.”

나는 그 음모에 어떤 의미가 실려 있느냐고 물었다.

“소극적인 창작 행위에서 적극적인 창작 행위로의 전환입니다. 그것은 돌려주기(回向)이고 함께 살기이고, 선민의식의 껍질 벗기입니다. 멋없이 큰 바위덩이를 들고 끙끙거리고 있었어요. 그것을 놓기로 했어요. 말하자면 자유입니다. 초월이나 해탈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그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틀을 가지고 그릇을 많이 생산하여 출하하는 사람들을 장사꾼들이라고 깔보고 비웃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허위에서 벗어나기로 했다는 것이다.

“전람회에 내놓은 내 그릇은 조그마한 것 하나에도 몇십만원씩 합니다. 그야말로 돈 있는 사람들만 그것을 사다가 쓸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제 그릇을 시장바닥에서 아주 싸구려로 구입해다가 쓸수 있도록 할 참이어요.”

나는 그의 얼굴을 뚫을 듯이 보았다.

“당신은 대관절 이 시대 이 땅의 무엇이요?”

내가 물었다.

“한국적인 삶을 도자기 속에 담으려 애쓰는 한 사람의 도공이요. 이 시대에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한 사람의 도공으로서 가야할 정도를 가려고 애쓰는…”

“가끔 절망하고 회의하지 않소? 나는 나 스스로에게 묻듯이 그에게 물어 보았다.

“왜 절망을 하지 않겠어요? 그렇지만 이제는 절망에 길이 잘 들어 있어요. 한가롭되 게으르지 않고 바쁘되 서두르지 않음으로써 극복하곤 합니다. 어차피 혼자서 어둠 헤쳐나가기 아닌가요? 절망에 빠질 때면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요. 그러면 얼마쯤 뒤에 일어설 수 있게 되곤 해요. 가끔 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기도 하지요. 차 안에 살림살이가 다 실려 있으니까 혼자 야영을 하고, 낯선 사암(寺庵)들을 헤매기도 합니다.”

바위덩어리를 내던지고 자유를 달처럼 빚어

지난해 1월부터 위종양, 간경화기가 있다 하여 이때껏 들고 있던 바위덩이를 내던지듯이 술을 끊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가족들을 서울의 한 아파트에 두고 중처럼 급월당에서 목탁을 치고 참선을 하고 흙을 주무르며 산다. 물속의 달 길어올리는(흙주무르는)미친기와 역마살과 독수공방살을 고루 갖춘 데다가 중 아닌 중노릇을 하는 그와 나는 쉽게 의기투합될 수 있었다.

나도 오래전부터 들어안고 낑낑거리던 바위덩이를 내던지고 살아온 터이다. 바위덩이란 어떤 것인가. 우리를 짓누르는 짐이다. 하늘을 잡고 뙈기를 칠 어떤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 놓겠다는 생각, 돈을 억수로 벌겠다는 생각, 역사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생각이 그것 아닌가. 그것이 우리를 결박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을 내던졌을 때 우리는 날을 듯이 가벼운 심사로(텅빈 마음으로) 참 자유 그것을 저 밤하늘의 달처럼 빚어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