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문화와 모방문화
김대환
1. 문화란 무엇인가?
우리는 곧잘 문화라는 말을 쓴다. 그러나 그토록 쓰여지고 있는 문화라는 말이 간직하고 있는 참뜻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 보인다.
우선 미국·영국 사람이나 독일 또는 일본사람이 문화라고 할 때 거기에는 서로 큰 차이가 있다. 요즈음 우리 주변에서 문화라는 낱말의 접두어(接頭語)를 붙이면 통하지 않는 말이 없다. 청년문화, 기업문화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교통문화, 음식문화, 선거문화라는 말까지 나돌면서 그 어떤 거리낌없이 통용되고 있다. 이때 말해지는 문화란 생활의 방식이나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며 매우 가벼운 의미로 사용된다.
우리는 숟가락이나 젓가락으로 음식을 먹는데 반하여 서양사람들은 포크와 나이프로 대신한다. 그때 우리는 곧 그것을 문화의 차이라고 한다.
이렇듯 미·영에서는 문화란 지식, 신앙, 생활, 습관, 법률, 질서 등에 있어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만들어진 사고(思考)나 태도 그리고 행위의 복합태(複合態)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위와 같은 의미에서의 문화를 문화인류학적인 정의이고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과 대조적인 것이 있다. 그것은 곧 독·일적인 정의이고 개념이다. 그들은 문화를 가벼운 생활방식의 표현이나 습관으로 보지 않고 매우 중후(重厚)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즉 문화란 정신적, 이상적인 가치나 의미의 실현이며 그 속에는 철학, 종교, 과학, 문학, 예술 등을 종합적으로 포괄한 최고의 정신현상으로 그들은 간주하고 있다. 그것은 역사나 전통에 의해 긴 세월동안 온축(蘊蓄)되고 결정(結晶)된 것이며 그렇기에 그것은 어찌보면 민족이나 국가 그리고 가족이나 공동체와도 깊은 연관성을 지니면서 유지·발전되어 왔다 할 수 있다.
특히 그들은 문화를 민족정신이나 역사의식 속에서 가장 근원적으로 구현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거기에 비해 미·영은 처음부터 개인주의, 자유주의, 공리주의, 합리주의에 바탕한 개인중심의 시민사회이기 때문에 전기한 바와 같은 문화가 일반적인 것으로 인식케 되었다고 말해질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특히 미국인들에게는 역사가 짧기에 전통도 없고 물론 민족도 없다. 심지어는 가족의 구성도 핵가족이 일반화되고 있다.
그뿐 아니다. 문화에서 미·영과 독·일 사이에는 또다른 구별이 있다. 전자는 문화라 할 때 기술적·물질적인 수단과 도구를 의미하게 된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의 자연과 생활에의 적응수단으로서의 문명과 대동소이하다. 그렇지만 후자에 있어서는 문화라 할 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신적 소산이라고 보고 있다. 따라서 그들이 말할 때 문화란 정신문화를 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문화를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거기에 많은 착종(錯綜)과 혼란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때로는 갈등과 모순 속에서 불분명하고 문화라는 말을 분별없이 다만 편의적으로만 사용하고 있는 성싶다.
2. 창조문화와 모방문화
우리는 단일민족, 단일문화 그리고 단일국가로 긴 역사가 이어져 왔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혈연과 지연 그리고 심연을 함께하는 가족과 촌락이 바탕되는 민족사회를 구성하면서 전통을 유지하는 속에 긴 세월을 살아왔다. 이같은 단일민족, 단일문화로 구성된 단일국가는 세계에서도 그 유례가 많지 않다.
미국, 소련, 중국, 인도 등은 나라도 크고 인구도 많은 나라들이지만, 그들은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가진 복합적이고 이질적인 속성과 요소를 바탕한 국가들이다.
이 지구상에 수많은 국가가 있지만 우리처럼 단일하고 동질적인 민족성원으로 나라가 구성되고 역사의 전통이 이어진 나라는 전기한 바와 같이 독일이나 일본 등을 포함하여 그다지 많지 않다.
민족과 역사와 전통이 면면히 이어진 나라에는 그들 고유의 전통이 있고 문화가 있게 마련이다. 그 문화 속에는 정신, 사상, 신앙, 윤리, 관습, 율법, 문예, 학문, 기술, 과학 등이 포함된다. 그런 뜻에서 우리의「문화」의식 속에는 다분히 독일이나 일본과 같은 정신문화 즉 문화감각과 문화의식이 포함되고 있다 할 수 있다.
우리는 1945년 종전 및 해방과 함께 독립국가로 출범했다. 그보다 앞서 36년이라는 세월동안 일본의 식민지로서 질곡 속에 살아야 했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문화의 정통성과 자주성과 고유성이 여지없이 유린되는 진통과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사실은 광복과 더불어 우리 문화의 정통성 회복운동이 체계적, 조직적으로 활발히 전개됐어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는 남북이 양단된채 국토는 나누어지고 민족은 완전히 이산되는 비운의 역사 속에 살아야만 했다. 거기에다 6.25전쟁으로 민족상잔의 비운을 겪어야 했고, 그 후도 계속 남북간의 체제대립과 경쟁은 쉴새 없이 지속되면서 근 반세기 가까이 살아야만 했었다.
그같은 내외적인 조건과 상황은 현실생활에 지나치게 급급한 쪽으로 우리의 의식과 생활을 몰아가게 되었고 그 불안하고 위급하고 총망한 생활과정에서 우리는 우리문화의 올바른 정립을 위한 정통성의 회복과 그 전개를 위한 진지하고도 차분한 노력조차 기울일 마음의 여유도 여백도 없이 식소사번(食少事煩)하게 지내 왔었다.
공업화다 산업화다 근대화다 하는 당면 명제 때문에 우리는 오로지 잘 입고 잘먹는 데에만 급급하고, 우선 보릿고개라도 면해보려는 생존의 욕구 때문에 정신 즉 정신문화는 뒷전으로 밀리게 됐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우선 생산제일주의, 수출지상주의를 우리의 당면목표와 과제로 삼아야 했고, 그것을 위해 전력투구를 하다보니 우리는 어느새 황금만능, 물질지상주의자가 되었고 그것을 다급한 생활의 목표와 가치와 이상으로 삼기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문화는 정통성을 상실해 갔다. 우리의 기존의 문물과 제도는 반봉건적이다, 유교적이다, 일제의 잔재이다, 전근대적이다라는 이름으로 배격되거나 경멸케 되었다. 심지어는 전통적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아무런 쓸모 없는 내다버려져야 할 무가치,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케 되었다. 그같은 정치, 경제,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우리의 전통문화, 고유문화는 설 땅을 잃게 되었다.
그런 나머지 우리의 전통문화는 황폐해갔고 부정케 되었다. 그같은 공백 내지는 백지상태 위에 구미의 문물과 제도는 아무런 제약이나 구속없이 유입케 되었고 범람케 되었다. 거기에다 그 환경과 분위기에 불을 붙인 것은 전쟁과 전쟁 후의 복구를 위한 원조와 차관 그것이었다. 우리는 그 은혜에 오직 흥감한 나머지 유입되어 오는 외래문화에 순응하고 추종하고 모방하는 데만 급급하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교육, 종교, 매스컴 그리고 문예활동과 간행물에 이르기까지 그 같은 흐름에 크게 이바지하게 되었다.
그 어떤 문화나 문물이나 제도 등이든 그것이 합리적이고, 과학적이고 경제적이면 그것을 수용하는데 인색할 까닭은 없다.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서 보다 편리하고 쾌적하고 안락하고저렴한 생활수단과 방법을 바라는 것은 마치 물이 높은 곳으로부터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우리가 옛 생활의 구각(舊殼)을 벗고 우리의 생각과 태도와 삶을 개선하고 향상하는데 적극적인 것이 돼야 함은 당연하다.
그러나 거기엔 중요한 기본적인 조건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 어떤 문화나 문물이나 제도를 도입하고 수용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주인’이고 ‘주체’라는 사실의 자각과 강한 자의식이다. 그 모든 것이 취사선택은 바로 우리의 의사와 결단에 의거해야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수용 및 도입과정에서 오직 ‘모방’하는 데만 주력하였다. 우리의 의식구조나 사고방식 그리고 생활태도와 생활방식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우리것을 버리거나 접어둔 채 오로지 모방하는 데에만 주력하게 되었다. 그것은 정치에서도 그렇고 경제에서도 그랬으며 사회 및 가정생활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는 마음속에나 또는 우리들의 내면화된 생활속에 우리것을 뿌리로 간직하면서 구미의 좋은 점을 수용했어야만 했다. 그들이 갖고 있으면서 우리가 간직하고 있지 않은 것은 우리를 개방해서 받아들이고 배워야 한다. 사실 우리의 전통문화나 정신문화 그리고 생활문화 속에도 좋은 것이 있고 그렇지 못한 것이 있다. 그러기에 나쁜 것은 미련없이 버려야 하지만, 그러나 좋은 것 즉 생활의 미풍양속 같은 것은 지키면서 발전시켜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옥석구분(玉石俱焚)하는 것처럼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팽개치고 말았다. 우리는 오늘의 우리의 현실을 무엇이라 진단하고 규정해야 할까? 흔히 많은 사람이 지적하기를 우리 사회에는 ‘가치관’의 혼란이 심하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더 냉엄하게 진단한다면 우리사회에는 가치관의 혼란이나 갈등이 아니라, 바로 ‘가치관의 부재’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지금 전통문화를 부인하고 경시한 토대 위에다 구미의 문화가 우리의 의식이나 생활 속에 완전히 자리잡은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우리 것도 없애고 그렇다고해서 남의 것도 자리잡게 하지 못한 말하자면 어사지간에 정신문화의 공백을 만들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3. 소비문화의 범람
비판적인 이론에서는 소비문화라 할 때 그것을 정치적 또는 이데올로기적인 의미를 곁들여 사용하게 된다. 즉 사람들로 하여금 원시적이고 동물적인 욕구나 관심을 충동하여 정치나 현실문제로부터의 관심이나 관여를 이탈케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것으로 전향케 하여 끝에는 현실동조를 통한 현상유지의 기능을 도출하려는 문화를 소비문화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와 같은 거창한 표현이나 내용은 접어두기로 한다. 이 자리에서 말하는 소비문화란 상업주의적인 매스커뮤니케이션이나 기업의 영리주의가 교묘한 방법과 수단을 구사하여 일반 소비대중을 현혹케 하고 나아가서는 착각케 하여 실상과 허상을 혼동케 하는 문화를 뜻한다.
영리주의나 상업주의가 팽배해지면 그것은 인간생활과 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침투케 되고 조작을 하게 된다. 그것은 물질적인 사용가치뿐 아니라 교육, 예술, 사상, 이데올로기, 도덕 그리고 윤리에까지 손을 뻗어 파고들게 된다.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늙은이와 젊은이를 구별치 않으면서 그것은 파급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존재 그 자체뿐 아니라 사회나 국가까지도 그들의 최대한의 이윤추구의 대상으로 삼으려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사회의 존재 모두가 그 수단이 되고 도구가 된다.
그뿐 아니다. 그것은 원래 이윤추구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또한 되어도 안 될 의료, 종교, 복지, 봉사의 영역까지 파고들어 이윤과 이익을 극대화시키려 든다. 거기에는 오로지 자본의 논리, 이윤의 논리만이 통할뿐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거대화한 매스미디어와 합작하고 협력하여 현대사회와 문화와 인간을 지배하고 통제하려 든다. 정말 그것들은 놀라운 조직과 조작의 힘을 간직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우리는 얼마전에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불상사를 목격하고 경험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미국의 뉴키즈라는 보컬단원의 내한공연이 있었을 때 우리의 젊은 여고생 한 명이 이성을 잃은 듯한 흥분한 비슷한 또래의 관중의 발에 밟혀 죽은 일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당사자는 물론 그 가족들의 침통한 마음 헤아릴 길 없는 지경이다.
그 사건 이후 우리의 매스컴은 그것을 어떻게 다루었던가? 10대 소녀의 ‘광기’이다 ‘광란’이다 하고 대서특필하면서 보도 경쟁에 열을 올렸다. 심지어 그들은 사설이나 해설까지 지면과 화면을 할애해서 법석을 떨었다. 그러면서 그 책임을 묻기를 ‘청소년들이 즐겨 놀 수 있는 문화공간이 없다’, ‘기성세대가 잘못 가르쳤다’ 등등의 말로만 얼버무렸다.
정말 우리 청소년들의 의식이나 태도가 그렇다고 하면 그같은 젊은이들은 우연한 탄생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들의 그같은 생각과 태도와 행동을 길러주고 심지어는 부추기기까지 한 장본인이 과연 누구일까? 그것이 곧 일부 방송과 언론 즉 매스컴이 아니었던가? 물론 거기에는 교육도 종교도 그 책임을 면할 길이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방송도 신문도 그같은 자기반성이나 냉철한 자기성찰의 말도 구절도 국민앞에 밝히지는 않았다.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바로 매스컴의 컴머셜이즘이다. 언론과 방송이 모두 돈벌기에만 혈안이 되고 있다. 거기에 어찌 출판인들 뒤지겠는가?
우리는 정말로 보다 더 냉철해야 한다. 책임을 남에게 묻고 스스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자기오만이나 기만에서 우리는 벗어나야 한다. 현명한 국민들은 말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모두가 마음속으로는 그같은 현상의 인과관계의 진짜 원인을 짐작하고 있음이 현실이다.
4. 우리 문화의 자기혁신
모방문화나 소비문화에서는 창조적인 문화가 나올 수 없다. 정신문화 또한 그렇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우리의 도덕성이나 윤리문제를 염려하는 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사실 정치의 분산과 불신, 경제의 침체와 낙후, 사회의 혼란과 무질서 등 그 모두가 따져볼 때 바로 사람과 연관되는 것이다. 사람의 정신을 올바르고 정직하고 성실하고 신의가 있고 근면하고 책임감이 있고 절제가 있게 되면, 그 사회는 바로 정기의 사회로 발돋움하게 될 것이다. 국토가 넓고 자원이 풍부하고 인구가 많더라도 사람의 마음이나 정신이 병들면 그 사회는 기대할 바가 못되는 불행한 나라로 전락케 될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전술한 바와 같이 물질의 생산이나 경제의 발전에만 주력해 왔다. 그 나머지 우리는 최소한의 경제적인 기반을 구축하는 데까지는 성공한 셈이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물질 즉 경제 성장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물질문명과 함께 정신문화가 병행하여 계발되어야 한다. 그런 뜻에서 우리는 거기에 적절한 낱말을 상기하게 된다. 즉 삶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양으로부터 질로 전환시켜야 한다.
우리는 지금 신문, 방송 등 언론매체는 말할 것도 없고 출판에 있어서도 세계 10위 권에 들어간다. 연간 4만여 종의 책이, 권수로는 2억을 훨씬 넘는 책이 출간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양의 문제이다. 과연 그들 책이 어떤 내용의 것이며 어떤 수준의 것인지를 살펴보면 그 답은 자명할 것이다. 그들 책은 많은 경우 참고서나 수험준비서를 위시하여 스포츠, 오락물은 물론 거기에는 외설물과 만화책도 큰 몫이다. 그것들은 어찌보면 매우 저속하고 자극적이고 관능적이고 감각적이며 또한 충격적인 것으로 채워져 있다. 그것이 부녀자나 어린아이들에게 주는 악영향은 막심할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간행물 공해가 된다. 오늘의 우리의 황폐하고도 퇴폐적인 사회적 분위기나 굴절된 생활의식과 범죄 및 비행 등도 그같은 매체에 의해 적지않게 유인되고 자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병리적인 생각이나 생활태도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멀쩡한 사람들까지도 철저한 이기주의와 자기폐쇄주의에 빠져있고, 심하면 소극주의와 무관심, 무기력증에 젖어 있다. 그러면서 매일의 생활을 찰나적으로 이끌어 가면서 생산이나 창조보다 소비에만 골몰하고 있다. 전체 사회에는 이웃도 공동체도 없고 다만 흩어진 개인이 모래알처럼 고립, 산재해 살아가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기에 거기에 협동이나 양보나 관용과 아량이 개입될 수 없다. 모두가 절박하고 긴장속에 살면서 피곤에 찌들리고 있다.
그 모든 근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도덕과 윤리 및 생각과 행동의 구심점이나 공준(公準)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될 때 지극히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충동이, 각자의 생활을 지향케 된다.
물론 위와 같은 사실과 현상을 비관적으로만 단정할 순 없다. 일부의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그것은 과도적인 현상이며 전환기의 불가피한 징후라고 볼 수도 있다. 우리의 젊은이들 중에는 기존의 문물이나 문화성향에 대해 비판하고 반발하면서 우리의 전통이나 정신문화의 뿌리를 찾고 거기에로의 회귀를 시도하는 조짐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때로는 간헐적이고도 감상적인 것으로 시종되기도 한다. 그같은 시도와 노력으로 거의 고질이 되다시피 되고 있는 구조적인 우리의 문화의 황무지와 정신의 폐허가 실지회복을 하기에는 역부족같이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같은 병리현상 즉 아노미현상이 너무나 고질적이고 심각한 지경에 있기에 체념과 절망감에 사로잡히게 되기도 한다.
끝으로 강조코자 하는 것은 우리의 문화현실과 현상에 대한 객관적이고도 근원적인 분석과 현실진단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오늘의 문화여건과 상황이 그 무엇에 의해 연유되고 파생되었을까에 대한 냉엄한 반성과 함께 겸허한 심층분석과 원인진단이 있어야 한다. 그같은 진단에 따른 새로운 문화의 자기혁신과 자기정립이 선행하지 않는다면 심부의 고질은 수시로 재발케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염원인 민족문화의 정립의 큰 과제를 풀어가는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할 것이다.
원인치료가 곧 근치(根治)의 선결과제임을 재삼 강조하고 싶을 따름이다. 그것은 곧 물질문명에 선행하는 정신문화의 소중함에 대한 냉엄한 각성에서 비롯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