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기획 / 한국 여성문학의 전개와 전망

여성문학이 걸어온 길, 갈 길




박덕규 / 문학평론가, 서울예전 강사

여성문학에 대한 논의와 관심이 오늘날처럼 지대한 적은 거의 없을 것이다. 각종 문예지에 마련되는 여성문학 특집이라든가 페미니즘 이론의 대대적 수용 현상들 외에도 대부분의 대학 강당에서 개설된 여성문학 강좌에다 기타 여러 지면과 여러 문화단체에서 소개되거나 관심을 모으는 여성문학 관련 원고 등을 보면 단순히 우리 문학의 현장에서 여성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양적 질적으로 커졌다는 사실 이상의 어떤 문화사적 환경의 변화가 있으리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사실 ‘여성문학’이라는 말보다 ‘여류문인의 문학’이라는 말에 더 익숙한 필자와 같은 많은 문필가들의 처지로 보면 여성문학에 대한 최근의 논의가 얼마간 급작스러운 점도 없지 않으나마 곰곰 인식할수록 도리어 때늦고 그래서 더 활발하고 더 깊이있는 논의로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은 신문학 이후 우리의 여성문학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고, 지금은 대개 어떤 위치에 와 있으며, 나아가 우리의 여성문학이 어떻게 나아가게 될 것인지에 지극히 주마간산격으로 나마 개괄해 봄으로써 여성문학에 대한 그러한 본격적인 논의를 위한 한 가닥 길잡이라도 잡아본다는 취지로 씌어진다.

‘여성문학’으로의 인식시기는 신문명 수용기 때부터

문학이란 것이 그 창작 과정에 있어 아무리 개인성을 중시하더라도 하나의 기록물이 사회문화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비로소 나름의 문학적 의미를 가지는 과정이 수반되는 장르라 볼 때 우리나라의 뿌리깊은 가부장제의 전통 속에서 여성이 문학적 주체자로 내세워지는 일이 쉽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러니까 남녀 동등 자체가 당대 제도에 의해 무시되는 조선시대 사회까지 여성문학이 독자적인 형태로 꽃을 피우지 못한 사연은 애써 설명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아마도 여성들에 의한 문학이 굳이 ‘여성문학’으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문화적 분위기가 가꾸어지기 시작한 것은 남녀 동등의 사상을 교육이념의 하나로 삼게 된 신문명 수용기 때부터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최근 주목할 만한 평문에 따르면 (서정자,「여성주의 문학의 가능성을 보여준 중요한 업적들」참조) 소설의 경우 여성 창작가에 의한 여성문학이 선보인 것은 신문학 최초의 동인지인 「창조」동인들의 발표보다 빠를 뿐 아니라 1930년대에 이르러 10여 인의 여성작가들이 활동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들의 대부분이 새로운 교육이념에 의한 신교육을 받은 소위 ‘신여성’들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무렵의 여성소설들은 대개 봉건적 인습이 잔존하고 있고 아울러 식민지의 암울한 현실이 펼쳐지는 당대의 환경의 이중삼중의 모순 속에 서 있는 여성으로서의 번민과 고뇌를 그려 보인다. 이 중에서 특히 1990년대에 활약한 나혜석의 작품과 1930년대에 활약한 강경애의 작품들은 단지 여성 문학이라는 변별점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한국문학에서도 높은 성취를 인정받고 있다. 아울러 근대문학 최초의 여성소설로 평가받고 있는「경희」(나혜석)의 일본 유학 여학생의 여성해방적 관점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의 면모를 보여주는「소금」(강경애)의 계급해방적 관점으로 이어지는 다양하고도 동시대적인 인식은 재삼 평가되어야 할 대목으로 여겨진다.

식민지 시대로만 한정짓는다면 시 장르의 경우는 소설에 비하면 여성문학으로서의 성취를 크게 보여주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이름이야 노천명, 모윤숙 등으로 없는 것은 아니지만 수적으로는 열세인 것이 사실이고 질적인 면에서도 여리고 정태적 감성 세계의 매달려 있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공통된 견해인 듯싶다.

해방 이후에도 오랜 기간 동안 여성문학이 독자적인 형태를 가지지 못하다가 김남조, 홍윤숙 등의 시인들을 만나면서 숨통을 트게 된다. 그들의 시는 실존적 탐구가 강하던 당시의 문화적 환경과 적절히 교감하면서 섬세한 감성 세계를 펼쳐보았다. 이어, ’60년대 ’70년대로 이어가면서 김지향, 김여정, 문정희, 유안진, 김초혜, 허영자, 노향림, 강은교, 김승희, 강경화, 김옥영, 천양희 등의 많은 여성시인들의 등장과 활약이 있었다.

소설쪽에서 보면, 식민지시대 때부터 활약하던 최정희, 박화성, 임옥인 등이 한무숙, 강신재, 손소희, 박경리, 한말숙, 오정희, 박완서, 김지원, 박시정, 김채원, 서영은 등의 후세대 작가들과 더불어 양과 질의 면에서 괄목할 만한 세계를 펼쳐보였다.

이 중 시에서는 존재의 심연에 닿아 짙은 허무를 길러내던 강은교가 시대의 어두움을 체득하며 더불어 사는 삶의 의미와 미래를 탐색하는 육체언어로 변신해간 모습이며, 사물의 움직임을 실존적 감각으로 포착해가는 노향림의 시 등을 남다른 의미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여류’로 평가되던 반갑지 않은 문화적 잣대는

반면에 이 무렵부터 소위 여성의 여성으로서의 한계적 문학에 대해 ‘여류’라는 말로 평가하는 그리 기껍지 않은 문화적 잣대가 마련된 것을 보면 아마도 상당수의 여성문학이 세계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려는 인식 통로가 없다거나 현실도피적 정서에 함몰된 채 언어놀이에 빠져 있다거나 자아를 감추는 데서 오는 불명료한 인식체계를 섬세한 표현언어로 위장하고 있다거나 이국 취향적 감정을 방임한다거나 하는 잘못이 자주 발견되던 시기가 이때가 아닌가 한다. 가령, ‘여류로서의 한계를 극복하고…’라는 말이 오히려 그 여성문인을 향한 찬사가 되었던 시기였던 것이고, 이런 류의 인식은 지금까지도 당연하다는 풍토가 살아남아 있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기까지 하다.

역시 이 무렵의 소설에서는 일찌감치 장편에 승부를 걸어 한국근대사의 질곡 속에서 명멸해간 숱한 유무명의 삶을 어느 가족사의 비극으로 극명하게 제시하곤 했던 박경리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겠다.「전장과 시장」「김약국의 딸들」에 이어지는「토지」같은 소설은 우리 시대 한국 작가들 스스로가 인정하는 ‘한국소설의 대표작’으로 기록되고 있을 정도이다. 특히나 근세사에서의 민족적 부침과 가장 관련 있는 ‘땅’이야기를 민족해방, 계층의 갈등, 봉건과 근대성의 대립, 인간 본원적 욕망의 진실과 허위 등등과 어우러지게 만드는 주체자를 한 여성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문학의 가능성을 예감케 했다.

이어 뒤늦게 문단에 나온 박완서는 역시 단편보다 장편에 치중하면서 사회적 비극 속에 내재된 한국 사회 특유의 인습적 구조, 특히 운명론적 인식 등에 맞서는 의식을 강하게 드러냄으로써 여성문학의 위치를 공고히 했다는 문학사적 감성과 빛나는 문학성을 발휘한 좋은 예로 보여진다.

「먼 그대」를 중심으로 하는 서영은의 여성적 운명과의 대립 또는 초월 또한 우리 소설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다.

이러한 여성문학의 특징과 성과가 있었음에도 그것들이 곧바로 여성문학 논의를 이루어지게 하지는 않았다. 우리 문학의 양적 팽창과 더불어 무수한 여성문인들의 탄생을 보게 된 것이 대체로 급진적인 산업화 정책이 어떤 형태로든 고학력층과 중산층의 성장 또한 급진적이던 ’70년대 중반 이후였고, 이 양적인 팽창에 따른 그 문학 주체자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필요로 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중반에 소개되기 시작한 페미니즘 이론 유입과 관련 맺는 여러 가지 형태의 사회운동에 맞닿아 있다.

시의 시대로 평가되던 ’80년대에 걸맞게 김승희, 고정희, 김옥영, 최승자, 김혜순 등의 활약은 매우 두드러져 보였고, 그들 여성시인에 대한 여성주의적 이해가 필요하다는 인식은 비공식적으로나마 줄곧 제기되었다.

숙명적 고통과 대립하는 자학세계의 당당함

그 중에서 최승자가 보여주는 밖으로 열리는 자학의 세계는 기존의 여성시들이 보여주던 자폐적인 자아의 내면 흐름이 면모를 하나의 시적 기질이나 중요한 인자로 여기는 당당함으로 비쳐졌다. 물론 이 당당함이란 고통의 극복이나 슬픔의 승화 같은 고등학교 문학 참고서 같은 해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겨지지 않는 숙명적 고통과 처절하게 대립하고 있는 자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뜻에서의 당당함이고 시적 진실이다.

이밖에 김승희가 직시하고 있는 일상의 허구, 김혜순이 꾸며 보이는 운명의 극적 상황, 고 고정희가 보여주던 종교적 참여와 여성해방적 참여와의 합일세계 등은 기존의 ‘여류’라는 말이 더 이상 존재가치가 없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이러한 시에 뒤이어 ’80년대 후반부터 활약하기 시작한 황인숙, 김정란, 이상희, 김혜수, 김명리, 엄승화, 조은, 이진명, 박라연, 이선영 등의 시인들이 여성문학의 전통을 의미있게 이어가고 있으며 나아가 ’90년대적인 새로운 감수성을 엿보이면서 한국시단을 풍성하게 하고 있다.

김정란이 보여주는 존재의 표피성과 본질간의 대립세계, 황인숙이 보여주는 유니크한 부조리극, 이진명이 탐색하고 좌절하는 정서적 경험의 복원 등등 그들이 펼치는 세계는 다양하고 자유롭다.

소설에서는 ’80년대 들어 기존의 박완서, 강석경, 오정희, 서영은 등의 활약이 이어졌고, 거기에 양귀자, 윤정모, 김향숙, 신경숙, 정길연, 이남희, 김형경, 김인숙, 최윤, 이선 등의 작가들이 가세했는데, 시의 융성에 비해 소설 쪽이 열세를 면치 못하던 문학 전반적인 분위기와 거의 일맥상통한 형국을 이루어왔다. 특히 주목해야 할 작가는 양귀자로 그의 대표작「원미동 사람들」은 위성도시에서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삶을 세태소설적 기법으로 자잘하게 묘사해 나감으로써 당대의 현실이 처하고 있는 제모순들을 반성케 하면서 끝내 인간으로서 가야할 인간주의적 행로를 제시해 주는 귀중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그의 또 다른 소설「천마총 가는 길」은 ’80년대에 공안당국에 의해 자행되던 고문행위를 소재삼으면서 훼손된 가치관의 세계에서 진정한 가치의 세계를 지향해 가려는 열망과 그 과정을 보여준다.

최근들어 보면 여러 문화강좌에서 개설되는 창작강의의 대부분의 수강생들이 주부들을 중심으로 하는 여성들이고, 그 때문인지 각종 신춘문예나 추천제도를 통해 등단하는 사람의 과반수가 여성들이다. 우리나라 여성들이 문학을 사랑하고 스스로 창작 주체자로 부각되려는 열망이 지대한 일 그 자체로 보면 나쁠 것 하나 없지만 과연 그 일이 여성문학의 질적 성장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인가를 고려해야 된다는 소리가 높다.

실제로 단편 한 편을 잘 다듬어 신춘문예 당선을 하고 막상 그 후에 번듯한 작품 하나 내놓지 못하는 신진 ‘여류작가’들이 자주 목도되는데 이점이 어쩌면 지금껏 애써 쌓여 올라간 여성문학의 큰 성에 작은 균열을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수년 동안 주목받는 지면을 통해 등단한 여성작가가 십수명에 이르는데 막상 양적으로나마 ’80년대 여성작가들에 뒤이을 만한 작가는 거의 없다. 무엇이 그들의 소설 쓰기를 방해하고 있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행여 한때 상당수의 ‘여류’들이 가졌던 고급문화 취향으로서의 문학을 생각하고 있는지나 아닌지 염려스럽다.

여성만이 가지는 특장에서 세계를 해명하는 특장으로

지금껏 살펴본 것으로 앞으로 여성문학이 나아가야 할 길을 미리 가늠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여성문학이 한국문학이면서 동시에 여성문학 일 수 있는 특장 같은 것이 있다면 오히려 그것을 중시해야 마땅하다는 것.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그 동안의 우리의 여성문학이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특징은 가졌으되 상당수가 그것을 세계를 해명하는 특장으로 밀고 나가는 일에는 역부족이었다는 점. 시에서는 자아의 욕망이 드러나는 대목에서 너무 쉽게 비유적 표현으로써 그것을 감추거나 미화시켜 버린다는 점. 소설에서는 체험 공간의 협소함에 대해 아예 방임해 버리고 있다든지, 아니면 자잘한 일상의 나열이나 세세한 심리변화에 대한 묘사적 표현에 집착함으로써 체험의 ‘낯설음’을 제공해 주지 못한다는 점. 급변하는 시대 흐름에 대해 보다 냉철한 판단력을 견지하라는 것 등등. 이러한 지적이 기실 문학 전반에 대한 지적인 것인 바, 여성문학 스스로도 세계를 향해 타인을 향해 진정한 열림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점.

이러한 지적이 모두 오류로 증명되도록 여성문학의 한껏 열린 면모를 기대하며 글을 매듭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