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기획 / 한국 여성시의 특징

페미니즘과 여성시




김혜순 / 시인, 서울예전 교수

나는 이 글을 통해 우리나라 여성시의 여러 가지 특정적 요소들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여성 시인들의 시를 남성 시인과 구별해서 바라보려는 의도는 그동안 여성 시인들의 시를 따로 보아주는 시도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독특한 어법, 심리학적 기제, 상징 세계, 문체론적 특징, 여성의 육체로서 글쓰기, 여성들만의 고유한 이니시에이션 드라마, 입장 등을 갈라서 보아주는 시도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물론 여성의 모성성, 표피적 경험, 여성 해방적이고 선언적 언술에 대한 연구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여성으로서의 이데올로기, 여성으로서의 내면적 경험, 여성으로서의 사회, 문화 구성 원리(positionality)를 나누어 그것이 시에 투영된 모습(문학 내적 문맥)을 옳게 봐주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 부분에서는 시가 소설보다 훨씬 취약했다고 느껴진다.

여성시와 남성시의 언어를 나누는 확고한 변별 기준은 없다. 시인은 본질적으로 남성이건 여성이건 자신이 속한, 자신에 대한 세계, 혹은 대상을 타자화하고 그것에 억압을 느끼는 존재이므로 더욱 그러하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대표적 시인이라고 할 수 있는 김소월, 한용운의 시, 혹은 최근에 와서 이성복의 시들이 여성적 화자의 목소리를 내는 것도 그러한 이유이다.

그래서 나는 이글에서 A.Kolodny의 말처럼 ‘자신의 독특한 독해와 독해 체계들이 결정적이거나 구조적으로 완결돼 있다고 주장하지 않고, 오직 작가로서의 여성(woman as author)을 인정하는데 있어서의 유용성과 기호로서의 여성(woman as sign)을 양심적으로 해독(decoding)하는데 있어서의 유용성을 주장’(Annotte Kolodny, 페미니스트 연구, 6) 하는 것을 목표로 삼을 뿐이다. 왜냐하면 시는 현실적인 리얼리티라기보다는 독자가 나누어 가진 반영(Laslett, British Jornal of Sociology, 27)이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 젊은 여성들의 시는 매우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지나간 시대의 일부 여성 시인들의 감상적 제스처나 소극적 자세, 사랑 타령 혹은 남성적 세계 안에 편이된 행복한(?) 포기의 노래를 많이 벗어난 듯 보인다. 그것은 젊은 여성 시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나름대로 만들어 가는 과정 중에 있다는 표시도 되겠고, 남성적 세계의 허위와 폭력성을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말도 되겠다.

그와 아울러 남성적 세계와의 마찰을 견디기 힘들어하면서 나름대로의 컨텍스트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말도 되겠다. 여기서 남성적 언어란 남자/여자의 언어가 아니라, 합리적/감정적, 진지함/어리석음, 사려깊음/임의적임(Jonathan Culler, Deconstruction)의 부당한 구분 속에서 개인적으로 불편할 수밖에 없는 외국어(Carolyn Burke, Report from Paris)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여성 시인들을 불편하게 하는 모든 압제적 언어, 남근적 어원 발생학을 가진 언어, 여성 비하적 언어를 포함하는 언어를 일컫는다. 이러한 언어 구조에 대항하는 글쓰기란 새로운 언어를 창조한다기보다는 언어구조의 껍질 벗기기 같은 해석적 진술이라는 표현 전략, 혹은 일상어체의 수용, 은유적 원리 안에서 프로페셔널한 언어 구사를 하는 남성 언어 앞에 환유적 언어구사라는 아마추어적 대응, 모성 세계를 통한 언어의 새로운 덫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통한 억압적 남성 세계의 극화, 여성적 통과의례에 대한 제의적 대결, 자신의 육체를 해체하는 언어 구사 같은 전략을 모두 포함한다. 여기에서 페미니즘적 시각은 방법이라기보다는 전망이 될 것이다. 그것은 남성 언어를 어떻게 부수느냐의 도구보다는 남성언어와 세계를 들여다보는 전망이 될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은 여성시를 바라보는 나에게도 해당되는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 전망으로 시를 분석하는 도구를 페미니즘 영역 밖에서 존재하고 있던, 그리고 이미 적용이 된 문학적 방법론에서 끌어오려고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다른 영역에서 발생된 방법론이 여성시에 적용됨으로써 그 방법론을 선택한 사고체계를 변모시키기 때문이다.

1. 여성의 문체 전략

1-1. 여성시의 문체에서 가장 두드러진 모습은 대화체의 사용이다. 대화체는 여성시인들이 자신들의 언술을 상대방에게 전달하고 싶은 간절한 욕망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마치 ‘제인 에어’속에서 작가가 ‘독자여!’라고 부름으로써 독자를 소설 공간 안으로 불러들이는 것과 다르지 않은데, 시인은 자신의 여성적 언술이 독자들로부터 반응을 받도록, 다시 말하면 어떤 의미에선 공적 언술이 되도록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또한, 대화체는 관계를 희망하는 언술구조이므로 여성 시인들이 자신들만의 세계 안에 갇혀 있기를 바라지 않는, 희망의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다.

김승희의 문체 전략은 대화적 설의이다. 그는 모든 시에 질문하고 답하는 두 화자를 설정하는데, 대개 표면적으로 시에서 질문자는 제삼자이고 답하는 사람은 시적 주체 자신이다. 그러나 문맥 속에서 살펴보면 질문은 대답을 말하기 위한 의도적 장치임이 드러난다. 즉, 그는 자신의 시에 대답만의 단조로움이 담기는 것을 피하기 위해 어린아이와 같은 질문자를 상정하고 끈질기게 답변을 요구하게끔 장치한다.

그의 질문은 독자와 자신을 향해 동시적으로 던져진다. 묻고 답하는 형식은 단조로운 독백의 사적이고 개인적인 상황에서만 의미 있을 뿐인, 그래서 외적인 영향을 제거해 버릴 뿐인 단조로운 원자적 자아개념(atomic self)의 함정을 벗어나기 위해 사용된다고 볼 수 있는데 그는 그 자신의 언술이 사적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대화구조를 차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

매우 비슷하게

은막 비슷한 곳에서

너, 참, 무엇에 널 걸 거니? 응? 말해봐,

참, 무엇에든 널 걸어야 할 거 아냐?

「떠도는 환유, 5」중에서

의문형의 시행은 대화구조 안에서 분열된 자아를 표상하면서 아울러 이질적인 것들을 하나의 진술 구조안에 묶는 구실을 하기도 한다. 그는 ‘사랑도 눈물도 진짜가 아닌 것 같은’ 그러나 그런 것 비슷한 것들이 ‘생 비슷한 것을 이루고’ ‘죽음 비슷한 생’을 다시 꾸미는 것을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삶은 진짜 삶이 아니다. 그렇다고 죽음도 아니다. 다 ‘비슷한 것’들일 뿐이다. 그래서 시인은 어느 것에도 자신을 걸 수 없다. 모든 대상은 본질이 아닌 인접한 현상일 뿐 즉, ‘떠도는 환유일 뿐’이다.

김승희의 대화체는 통합된 인식 주체를 거부하고 자신을 관찰하는 또 하나의 시점을 설정함으로써 주체를 분열시킨다.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는 라깡의 명제로 그는 말하고 있는 듯하다. ‘엄마 비슷한 아내 비슷한 자식 비슷한 교수 비슷한 시인 비슷한’ 것으로 자신을 이해할 뿐 자신은 어느 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는 제삼자에게 말을 걸 듯 자신에게 말을 건다. ‘무엇에 널 걸 거니?’라고.

김승희의 대화체는 남성적 세계안에서 분열된, 여성적 자아 내의 존재들끼리의 대화를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도구적 구조로 이해된다. 그는 제삼자에게 말을 걸 듯, 자신의 한 부분에게 말을 걸어 자신이 자신의 시적 언술 구조 안에서나마 시적 주체가 하나임을, 그러나 분열된 존재로서 합일을 갈망함을 드러낸다.

나의 존재가 잠깐 파르르 떨어요.

지워진 자리에게 언제? 지금? 아닌 천년 전에?

물빛 이슬처럼 자유롭고 순결한 규정되지 않는

윤곽이 다시 시작되는 것을, 눈물이 나요-오 안녕

「에우리디체, 또는부재에 매혹당한 실존」중에서

김정란의 시는 김승희 시와는 달리 구체적 현상의 지목보다는 관념적 진술을 하고 있지만 자신의 부재를 대화체의 문장으로 찾고 있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그는 자신의 삶 속에서, 자신의 언어 속에서 자신이 부재한다는 것을 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존재가 더욱 확실히 보인다고 그는 역설적으로 말한다.

여성시인의 대화체 언술은 부재의 공간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아내려는 몸짓이다. 그들은 부재 안에서 분열된 존재를 향하여 말을 건다. 여성으로서의 자기 존재는 어디서 찾을 수 있겠냐고.

1-2. 여성시의 문체 중 고백체는 고전적인 방법이다. 최승자는 고백체를 방법적으로 차용한다. 로젠탈이 실비아 플리스나 앤 섹스턴의 시를 고백적 진술로 본 가장 큰 이유는 둘 다 자살한 시인이라는 점, 여성의 일상적 경험이 녹아 있다는 점, 개인적 삽화가 많아 시인과 퍼스나를 구별하기 어렵다는 점 등을 들고 있지만, 고백적 진술은 푸꼬가「성의 역사」에서 ‘억압받는 자의 행위 모델을 내면화한 글쓰기 유형’의 하나로 본대로, 이들은 그 경험이 녹아 있는 상황, 혹은 서사적 계기성 보다는 포괄적 이미지로 삶과 죽음의 문제를 교차시켜 삶의 문제를 더욱 투쟁적으로 나타내므로 단지 방법적으로만 고백적 문체를 차용하고 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고백체는 하나의 진술 방법일 뿐 체험 자체는 아니다. 그러니까 고백체의 시에서 고백은 일차적 경험의 직접 진술일 수도 있지만 전혀 다르게 간접적 경험과 사고의 의식화된 노출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소재 경험이기 이전에 사고 경험일 수도 있는 것이다.

네가 쓰러지기 전에

먼저 나를 차 주지 않겠니

다시는 내가 이 세상에 기어나오지 못하도록

모가지를 꿈틀거리며 기어나오지 못하도록

네가 쓰러지기 전에

먼저 나를 차 주지 않겠니,

다정한 내 사랑 내 아가야.

「너는 즐거웠었니」중에서

우리 나라에서 고백적 진술을 가장 먼저 차용한 사람은 김수영인데, 김수영보다 최승자의 시는 훨씬 고통스럽고, 역설적이다. 최승자의 시는 비명과 슬픔의 고백적인 자기노출로 읽히긴 하지만, 그것은 다만 자아와 외부의 갈등관계를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방법적 차용으로 보아야 한다. 그의 시에서 상대방은 남성적 세계의 정점에 있는 인물, 혹은 힘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의 자전적 고백체는 그 정점의 세력을 향한 항의의 절규이다.

1-3. 후기산업사회의 여성적 언술 구조는 은유 구조에 대항하는 환유 구조라는 생각을 가진 시인이 양선희이다. 그는 세상을 총체적으로 바라보고 규명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은유 구조는 엉터리 예언자들이나 교조주의자들의 몫이지 시인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여성시인에게 있어 총체적 억압의 문제는 남성적인 문제로 보일 수도 있고, 그래서 포스트 모던한 전략이 여성적 문제와 관계 깊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특히 모계적 관계는 환유적 관계로도 설명될 수 있는데, 남성들의 강력한 충동은 상징적인 본질을 갖는 고도의 문화적 발명을 가치 있는 것으로 유도한다. 즉, 남성들은 아버지와 그와 같은 이름을 가진 축소판, 유사성의 관계를 가치로 두지만 여성은 그 반대다(프로이드, 인어와 괴물). 여성시인은 보잘 것 없고 잡스러운 자신의 일상을 이것저것 늘어놓고, 날마다 다른 얼굴을 바꾸어 달고 나타나는 억압의 실체 같은 것에 휘둘리면서 너스레나 떨 뿐 더 할 일이 없다. 이럴 때 시의 언어는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배열된다. 시인은 대상과의 유사성을 찾으려는 노력보다는 시인 옆에서 시인과 함께 날마다 어리둥절해 하는 인접 대상이나 흔적을 배열할 뿐이다.

1. 밥상을 차리고

2. 뉴스를 속기하고

3. 여편네 몰래 전화를 받아주고

4. 재산 목록을 만들고

5. 지방신문과 연합통신과 중앙일간지를 스크랩하고

(1,3,4는 정말, 내게 만약 걸게 있다면 그걸 걸고 맹세컨대 계약에 없는 일이다.)

「나의 가롯유다」중에서

더 이상 전체를 말할 수도 없고, 전체를 통찰할 수도 없다. 시인은 자신의 억압적 실체도 규명 못한 채 끝없이 무엇에 사용될지 알 수도 없는 부스러기들을 게워낼 뿐이다. 그래서 시는 자연히 소서사의 형태를 띤다. 하루치의 일기 같은, 아니면 한 순간의 사전의 기록 같은 소서사들이 시의 내용을 이룬다. 더구나 양선희는 자신의 서사 구조를 중간 동사의 단위인 낱말로 깨고, 그것을 다시 한 음절 한 음절 질게 늘임으로써 그의 내적 충동이 나타나기를 바란다. ‘삐삐삐삐삐삐삐삐삐삐삐삐삐삐삐이이이이이이’ ‘우울우울고시시시이흑’ 등으로. 이 또한 환유구조로서 억압적인 실체에 도전하는 그의 표현 체계와 맞아떨어지는 형태 파괴적 진술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 여성적 이니시에이션과 제의적 대결

2-1. 죽음과 탄생이 피흘리는 곳

어디로인지 떠나기 위하여 모든 인간들이 몸부림치는

영원히 눈먼 항구

알타미라 동굴처럼 거대한 사원의 폐허처럼

굳어진 바다처럼 여인들은 누워 있다.

새들의 고향은 거기.

모래바람처럼 부는 여자들의 내부엔 새들이 최초의 알을 까고 나온

죽음의 잔해가 탄피처럼 가득 쌓여 있다.

모든 것들이 태어나고 또 죽기 위해선 그 폐허의 사원과 굳어진 바다를 거쳐야 한다.

최승자「여성에 관하여」

여성의 육체를 죽음과 탄생의 출발점으로 표현한 그의 시는 그러한 여성의 내부를 무덤과 항구, 폐허, 죽은 바다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지만 모든 탄생과 죽음은 일정의 어둠인 여자의 몸을 거쳐서 비로소 탄생된다. 이 죽음과 탄생이 거쳐간 폐허의 자리가 그의 시적 공간이 된다. 그 공간 안에선 죽음을 통해 삶이 탄생되며, 모든 인간이 떠나기 위하여 몸부림치고 있다. 그곳을 방문하는 길이 시인인 여성적 자아가 입문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그의 시에 등장하는 죽음은 몹시 은밀하고 고통스럽기는 하나 통과제의적이다. 그는 시안에서 죽음을 다뤄보기 위하여 죽음을 연습한다. ‘대낮에 서른세 알의 수면제를 먹는다’ (「수면제」)는 말은 그가 죽음을 통하여 형태 이전의 세계로 가보고자 하는 노력의 다름 아니다.

최승자는 자신의 시에서 능동적으로 제사처럼 죽음에 입문한다. 죽음은 또하나의 삶과 탄생을 향한 반복의 첫걸음이 된다. 그러나 탄생은 여성시인의 죽음을 거쳐야만 이룩되고 죽음만큼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는 죽음 위에서 삶을 다시 ‘스스로’ 시작한다. 죽음을 거쳐 탄생을 예비하는 모습은 여성시의 대표적 통과의례의 장치이다.

2-2. 김승희는 자신을 갇힌 존재로 생각한다. 그는 자신을 ‘가축원의 애완동물’, ‘어항 속의 금붕어’, ‘먹이 사슬 속의 토끼’, ‘괄호 속의 삶’, ‘캄캄한 몸’, ‘거미줄’, ‘물을 받아 놓은 욕조’ 속의 존재로 생각함으로써 자신이 현세적인 질서 안에 갇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안’의 삶을 벗어나는 대안적 행위를 시안에서 행하게 되는데 그 첫 번째가 상상계의 탐닉이고 두 번째가 질주이다.

강보에 싸여 있던 배냇저고리의

영토 속으로 들어가 본다,

아무것도 가리지 못했던

배꼽만한 옷,

바람과 비누방울의 영혼들과

짝을 이룬 포근포근한

숨결,

나에서 당신으로의 한이 없는

따스한 향기,

「유목을 위하여, 5」중에서

김승희는 나날이 줄어들어서 국민학교 때 입엇던 옷도 커져 버려 배냇저고리의 영토 속으로 들어가니까 비로소 포근하고, 따스하다고 하는데,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누더기 같은 나를 버림으로써, 세상의 피억류자(욕망)를 버림으로써 그렇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것은 ‘작게 아주 작게 환생하고 싶은 꿈’ 때문이라고 스스로 해석한다.

그의 시에 무수히 많은 소재로 등장하는 달걀 이미지를 사용한 시들을 보면 달걀은 줄어듦의 극한체로 등장한다. 달걀은 라깡주의자들의 말처럼 성(gender)이 남성과 여성으로 분리되기 이전 상태를 말한다. 그는 그 세계로 가고 싶어, 달걀에 하늘색을 칠하다가 아들에게 야단맞기도 하고(「하늘빛 달걀」) 언니의 멍든 얼굴 위에 달걀을 얹어 주고 문지르다가 그 따스해진 달걀이 깨지는 순간에 달걀이 오믈렛(달걀이 깨어져 오믈렛이 되듯, 아기는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을 알아보게 되는데 이것을 라깡은 리틀맨을 뜻하는 오물렛이라고 했다)이 되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거기서 언니와 자신이 머리를 꽝 부딪히는 순간 파란 병아리가 나오는 것을 보면서 그 행위 모두를 언니와 나의 ‘시작을 위한 난생설화’라고 이름 붙였다. 그는 달걀속 같은 상상 세계의 속으로의 퇴행 행위만이 안의 세계를 시작할 수 있는 계기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여성성이 침묵하기 이전 상태를 의미한다. 시인은 달걀이 깨어진 후 언니를 발견하고 새로운 씨스터 후드의 경험 속에서 ‘새로운 시작’을 나눈다. 그러므로 그의 상상계로의 탐닉은 여성성 회복의 전략이 된다. 그러니까 그는 상징계 안에서도 여성성이 확립되는 순간이 있다면 그 순간은 씨스터 후드의 발견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상상계의 탐닉 다음으로 김승희가 여성성 회복의 이미지로 선택한 것은 질주이다. 그는 토끼를 내세워 질주 이미지를 표상하는데 그의 시에서 토끼는 망각의 세월과 ‘안’을 뚫고 나갈 수 있을 듯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의 토끼는 실비아 플라스의 「토끼의 덫」에서 처럼 삶과 죽음, 탄생과 죽음이 하나인 토끼이다. 그러나 그는 토끼인 자신이 그의 집에서 기르는 개 ‘루키’처럼 목줄을 끊고 대문을 박차고 나가길 원한다(‘「집나간 개에 관한 명상」). 동시에 RH 마이너스 혈액은 없지만 그것이 필요한 병원으로 질주해 가길 원한다(「진주 기르기, 1」). 그럼으로써 자신의 질주가 자신이 갇힌 ‘안’의 문을 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그 안은 남성적 세계 안에 함몰된 일상적 삶의 진부한 공간이다.

김승희의 통과의례는 상상계의 포근함으로 퇴행할 때, 그곳을 빠져 나와서도 여성적 자매애를 발견할 때, 그리고 일상적인 삶의 테두리를 박차고 나올 때에 이뤄지고, 그는 그 과정을 형상화한다.

3.여성적 육체의 해체

3-1. 여성 시인들이 비생명적인 남성적 질서에 대항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자신의 육체를 스스로 절단하는 방법이다.

우선 머리통을 떼내어

선반 위에 올려 놓는다

두 팔과 두 발을 벗어

책상 위에 올려 놓고

몸통을 떼내 의자에 앉힌다.

최승자,「삼십삼년 동안 두 번째로」중에서

잘린 목이 떨어지는구나 검은 갈기를 날리며 해의 銀絲 백발처럼 한데 섞여 날리며 부릅뜬 눈 멀어져 가는 구나

오늘은 하지

죽음이 가장 긴 날.

「夏至」중에서

최승자의 시에선 자신의 몸을 잘라 꽃병에 꽂아 놓는다든지(「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선반과 책상 위에 올려놓고 도망치려 한다든지 하는 행동이 자주 보여진다. 그는 육체의 분리를 통해 죽음이라는 단절을 쳐부수려 한다. 그는 부숴진 육체를 가지고 죽음의 위용을 조롱하고, 단절을 건너뛰려 한다. 그 다음 그 빈자리에 그는 구체적이고 확실한 삶, 곧 사랑을 제시하려고 한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그것에 대항한다. 대항함으로써 그것을 벗어나 자유로워지려고 한다. 그의 시에서 죽음은 남성적인 실체, 그 자체이다.

이상희 또한 죽음의 정체성에서 벗어나고자 신체를 절단하거나 스스로 사라짐으로써 상징적인 죽음을 비껴가고자 한다. 이러한 행동은 자기 변형의 과감한 행동으로 보여진다. 그의 시에서 빈번히 나타나는 두통과 잠적, 절단은 다른 행동이지만 사실 한 나무에서 자란 다른 가지이다.「저녁 일곱시 이십분쯤」이라는 시에서 그는 앓는 머리를 옆구리에 끼고 회사를 나오고 있다.「夏至」에선 생의 아가리 속으로 잘린 목이 떨어지고, 「목을 치면」에선 목을 쳐달라 애걸하고,「새벽 산책」에선 호주머니 속에 죽어가는 얼굴과 숨커진 머리칼이 들어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도 절단이 절단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절단은 역설적으로 죽음과 삶을 가능한 친밀하게 근접시킨다. 아픔의 끝없는 호소로 그는 그의 정체성을 흔들어 놓기도 한다. 위의 싯귀 다음에 이어지는 싯귀를 보면 육체의 절단이나 해체가 얼마나 희망적인지 알 수 있다.

「저녁 일곱시 이십분쯤」에 보면 화자의 옆구리에 끼인 머리를 투구처럼 다시 쓰일 전쟁을 기다린다.「목을 치면」에서는 목을 치고 거기다 물을 채우면 키 큰 꽃 몇 송이쯤 꽂힐 거고 더구나 하얗게 질린 평화가 보일 거라고 토를 달고 있다. 「새벽 산책」에서는 죽은 얼굴, 식어가는 얼굴을 묻으러 가는 새벽은 길가의 창문이 켜켜로 얼어가지만 자신만은 따뜻하다고 설파한다. 즉 절단된 머리는 절단됨으로써 새로운 싸움에의 준비, 생명, 평화, 안락 같은 것을 예비할 수 있다고 그는 믿고 있다.

여성 시인의 육체 절단과 소멸에의 의지는 표면적으로 남성적인 세계로부터 도피하려는 의지를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도피는 역설적으로 해체의 과정을 거쳐 새로운 형태의 삶을 허락한다. 그러므로 여성 시인들의 시의 무시무시한 파괴행위는 고통을 넘어, 일상적인 반복을 지나, 남성적 세계에 편입되려는 시인을 정화시키는 역할 또한 수행한다.

4. 모성성 현현으로서의 글쓰기

4-1. 정화진의 시에서 중요한 모티프 할머니라는 큰 아니마의 현현이다. 할머니가 거느린 세계는 무속적이며 신화 원형적이고, 과거 지향적이나 시인의 미래를 감싸안고 있다.

금암댁이 대청마루에 새벽 안개 한 사발 담아둔다.

안개와 섞이며 사발 속에 익모초즙이 출렁이고

신열이 난다, 안방에서 앓는 아이 벼랑으로 내달리는 아이의 병을 긁어내는 근암댁

안개 한 줌을 더 부벼 사발 속에 넣으며, 먹어야 한다 먹어야 한다 얘야

「나의 방은 익모초즙이 담긴 사발이다」중에서

정화진의 시에서 할머니는 시적 화자의 병(폐렴, 말라리아 혹은 병명 미상의 병)을 고치기 위해 갖가지 무속을 행한다. 할머니는 고향의 한가운데에서 아흔 개의 옹기 항아리와 사발, 뚝배기, 놋대야, 가마솥, 쌀독, 채반, 반짇고리, 아궁이, 바가지, 누룩이 익는 독, 맨드라미 같은 둥글고, 붉은 것들을 거느리고 화자의 시들어 가는 육체를 살려내려 하고 있다. 특히, ‘불씨를 다독’이고, ‘방을 뜨겁’게(「쌀과 누룩이 끊는 마당이 문득」)하고 ‘붉은 물이 지나간 뒤 할머니는 토담 아래 맨드라미 씨를 뿌린다(「붉은 쥐」)같은 표현은 죽음 후까지 이어지는 할머니의 손길, 숨겨진 끈질긴 생명의 연결고리를 내보이는 언술이다.

살려냄을 위해 할머니는 자라의 목자르기, 익모초잎 달이기, 칼물 만들기, 개 모가지 자르기, 감자 썩히기 같은 일을 서슴치 않는다. 다시 말하면 할머니로 표상된 큰 아니마는 칼, 개, 자라 같은 남성적 표상들을 자르고, 물에 용해시키고, 거세하고 끓여내어 시적 화자로 표상된 자손의 생명을 연장하려 한다. 더구나 모든 어머니들의 어머니인 그 큰 아니마는 무당과 같은 제의적 행동도 서슴치 않는데 ‘할머니가 아이를 위해 마당을 깨끗이 쓸고난 후 마당 한가운데 땅을 긁어 십자표를 긋는다 노란 흙이 날린다 맞물린 삽자표식 위에 정확하게 칼을 꽂아 바가지를 덮어씌우는 할머니 말라리아의 가슴을 찍어 가르려 한다’(「칼이 확대된다」) ‘입술을 열고 붓던 자라의 피와 가느다란 영혼 하나를 할머니의 손을 나는 보았다’(「징거미 더듬이」)같은 행위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정화진의 시에 등장하는 할머니는 시적 화자의 할머니이면서 또한 사제적 신유의 능력을 갖춘 대모신(代母神) 이다.

그 품안에서 앓는 아이는 따뜻하다. 시인은 어른이 되어서도 할머니가 풀어놓은 이미지(할머니는 항상 물의 이미지를 동반하고 등장한다)안에서 원초적인 아름다움의 세계에 젖어든다. 할머니가 피어 올리는 젖물처럼 부드럽고 따뜻하며 푸근하고 축축한 안개 속에서 아이는 치료된다. 물의 이미지는 아이의 무의식적 인생에 중대한 영향을 끊임없이 전해주는 ‘상상적 의학’의 영역이다.

가지런하게 수십 개의 송편이 놓여지기 시작하는 소반

대낮에 그것도 여자를 산도라지 캐던 여자를

여자를 습격해 그것도 내장을

소반 위에 송편, 속을 넣는 손과 손 겹겹 희고 잘디잔 지믄 위로 손과 송편

그것도 내장을 파먹었더란다 그것은 점점 커지고 불어나

「붐비는 늑대」중에서

「붐비는 늑대」에서 여인들은 동그랗게 둘러앉아 조그맣고 동그란 송편을 빚고 있지만, 자신들의 이야기(전설과 대자연의 이미지)를 통해 더 큰 원을 빚는 것이 된다. 이러한 표현은 정화진의 시가 개인사적인 진술에서 여인들의 이야기를 진술하는 것으로 확대되는 구실을 한다. 그러나 여인은 안에 위치시키고, 그 밖에 내장을 파먹히는 세계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밖의 세계는 남자들이 갈 세계라고 말한다. 어린아이인 시적 화자는 안의 세계, 여인들만의 원안에 머물고 밖의 세계를 공포 속에서 느낀다. 그는 상상의 세계 안에서 상징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지 않고 빙빙 돈다. 상상계 안에서만 자유로운 여성, 밖의 세계로의 진입을 꺼려하는 여성, 대모신의 품안에서만 자유로운 여성은 앞으로의 시 쓰기에 많은 억압을 받을 것이다. 기호적인 것(시인으로서의 언어, 여성으로서의 아방가르드:Julia Kristeva)이 아버지의 법안에서 어떻게 질서를 부술지가 상상계의 세계 안에서 맴도는 시인의 앞으로의 과제이다. 그것이 대모신의 손길을 벗어난 시적 화자가 여성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4-2. 최승자는 여자인 자신의 탄생을 ‘슬퍼하기 위하여’‘이 세상에 태어났다’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 세계가 뭉뚱그려져서 그의 안에 들어왔고, 그는 그것을 끊임없이 생산하여야 하는 어머니로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아들들은 이 세계이다. 그러니 자연히 그의 남편은 이 세계를 창조한 자가 된다. 그런데 그의 남편은 시인과의 만남에서 항상 파괴적인 타자로 맞선다.

부슬부슬 녹이 슬고

허옇게 푸르둥둥하게

피어오르다 피어 박히고

사람들-나의 아들의 아들들

어린 개죽음들

………

그리하여 내 태초의 남편아 받아라

이 세계

이 거대한 핏덩어리를

「昏睡」중에서

「昏睡」에서 아들들은 어리디어린채 죽어 있는 거대한 핏덩어리다. 그들은 녹슬어 온 세상을 혼수 상태에 빠지게 한다. 그러면 시인도 혼수상태에 빠지면서 잉태하고 분만하는 일을 계속한다. 왜냐하면 그의 몸은 세상을 받는 그릇이고 세상은 그를 통해 재생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계속하는 것만이 이 세상의 혼수를 건설한 자를 만날 수 있고, 그와 혼신의 힘을 다해 결전을 벌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 보면 그의 남편은 거대한 손, 죽음, 남자, 니힐리스트, 미래 등의 이름을 갖고 있다. 그런데 한번도 그의 남편은 정상적으로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기를 선사해 준 적이 없다. 그는 그에게 사산된 아기를, 녹슬은 세상을, 사막을, 아기는 어디가고 양수만 질펀히 흐르는 세상을 선사했다. 그리하여 최승자 시의 문체는 표독스럽고, 서러운 울먹임, 청승맞은 손놀림, 자해의 제스처, 달래고 얼르다가 갑자기 꾸짖는 어조를 구사한다. 이러한 불행의 극단이 그가 그의 남편을 대하는 태도이고, 기다리는 자세이다. 그의 모든 시에서 억압기제는 자연히 남성성으로 현현되고 그는 그의 자식인 세상을 끌어안고 피투성이, 시(詩)투성이로 외치고 있다. 이것이 그가 여성으로서 세상을 끌어안고 억압기제에 대항하는 그의 시의 모습이고, 이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현대적 모성상의 비극적 현현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