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기획 / 한국 여성소설의 특징

여성소설과 사춘기의 문제




김경수 / 문학평론가

구체적으로 연령대가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사춘기는 미성년이 성인으로 성장해가는 전이단계를 지칭한다. 즉, 사춘기란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건너야만 하는 일종의 시련으로서의 시기적 정신적 과도기를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사춘기가 성인으로 가는 길목에 놓여 있는 통과의례의 과정과 상응한다는 점은 자명하게 드러난다.

다시 말하면, 사춘기란 그것을 잘 건너면 성인이 되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개인적으로도 심한 정신적 파정상태를 감수해야 하지만, 동시에 사회적으로는 미성숙한 인간으로 대접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제대로 성장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중요한 길목인 셈이다.

해서 사춘기가 갖는 이러한 과도기적 성격, 그리고 통과의례적 성격은 충분히 인식되어 왔는데, 이점은 인류학적으로 사춘기에 처한 인물들을 성장시키기 위한 수많은 입사식의 유형들이 존재한다는 점에 의해서도 반증된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사춘기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 시기가 자기정체성의 확립이라는 문제와 맺고 있는 긴밀한 관련성 때문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육체적으로도 더 이상 아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완전한 성인도 아닌 외견상의 특징에서도 드러나는 바이지만, 그러한 주변성이 자기 정체성의 위기를 반영하고 수반한다는 점 또한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하나의 문제는 성적 정체성의 확립

이렇게 사춘기의 당면과제를 자기 정체성의 확립이라는 것으로 규정지을 때, 우리에게 또 하나의 문제로 부각되는 것이 바로 성적 정체성의 확립이라는 문제다.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여러 차원들이 있을 수 있다면, 이미 출생과 함께 규범적으로 인지된 성격 정체성의 명확한 인식 및 수긍이야말로 그 중에서도 가장 본질적인 문제일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자신이 후에 아버지가 될 한 사람의 남성, 혹은 어머니가 될 한 사람의 여성이라는 각성은 다른 차원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업이 가능하기 위한 대전제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적 정체성의 확립이라는 문제는 점차 전통적인 성역할의 경계가 무너져가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더더욱 문제적인 것으로 제기된다. 그것은 오늘날의 사회가 원시사회처럼 제도적인 통과의례의 장치를 전혀 마련하고 있지 않아서 성장을 위한 전이의 제반과정이 순전히 개인의 몫에 맡겨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경우 사춘기인물이 성인으로 올바로 성장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문제는 철저히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로 귀결되고, 그것은 이후 그들이 삶의 국면을 근본적으로 좌우하는 중요한 원인으로 자리잡는다.

이러한 사춘기에 대한 탐색은 현대소설에서도 주요한 테마론을 형성한다. 그럴 것이 사춘기라는 전이단계는 개별적인 인간자아의 성숙을 다루는 소설쟝르에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작가들이 자신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보다 생생한 인물화를 위해 일반적으로 사춘기를 중심으로 한 젊은날의 경험을 주재료로 채택하고 있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현재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젊은날의 성장소설의 표본처럼 되어 있는 이문열의 「젊은날의 초상」과 김주영의「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가 그러한 대표적인 예를 제공해 주고 있거니와, 그밖에 정도는 다르지만 사춘기 인물을 주인공으로 그들의 성장에 궤적을 더듬고 있는 소설들을 우리 주변에서 찾아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사정은 여성작가들의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로 확인된다. 데뷔작「완구점 여인」을 비롯한 많은 단편을 통해서 사춘기의 경험을 소설의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오정희의 소설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되거니와, 그밖에도 서영은, 김채원, 박시정, 강석경, 김향숙은 물론 김형경, 신경숙 등의 최근작가에 이르기까지, 여성인물들의 사춘기적 경험은 여성작가들의 주된 소설적 테마가 되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남성작가들처럼 여성작가들도 여성인물들의 자기 정체성 확립의 과정을 그림에 있어서 그들의 여성으로서의 자기각성이라는 문제를 본질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준다.

성인의 위치에서 회고하는 사춘기의 의미

그런데 남녀 모두에게 있어서 사춘기는 직접 그 시기를 경험하는 인물의 시점으로는 질서화되고 의미화되기 어려운 시기로 남는다. 그 이유는 많은 소설들이 주인공들의 그 시절을 회고적인 시점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되듯이, 사춘기적 경험이 본질적으로 무척 혼돈스럽고 경험하는 즉시 정리될 수 있는 성질의 경험이 아니고, 필연적으로 성인이 된 위치에서 회고해볼 때만이 의미를 갖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 점은 몇몇 논자에 의해 ’80년대에 문제작으로 지적되는 강석경의「숲속의 방」의 소설적 파탄이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바다.

익히 알려져 있는 것처럼「숲속의 방」은 ’80년대에 대학생활을 시작한 소양이라는 여주인공의 사춘기적 방황과 종국적인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소설이다. 그러나 독자로서 우리는 소양이 대학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휴학계를 내고, 가정적으로도 점점 식구들과 벽을 쌓으며, 더 나아가 돈많은 사장의 접대부로 자청해서 나서는 등의 파행적인 행동을 하는 원인을 한번도 만족스럽게 알 수가 없다. 그것은 그녀의 모든 방황이 불연쇄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일기로서 우리에게 제시되는 그녀의 의식에 대한 직접적인 자기해부의 글조차 비유적(?)으로 표현되어서 명확한 의미 전달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물론 그녀가 꿈꾸는 자유로운 방으로부터 가정적 사회적인 감금의 상태를 읽어낼 수는 있지만, 소양 자신은 그러한 환경이 사춘기 인물에게 가해지는 통과의례의 장으로서의 일종의 ‘고래배’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역설적으로 소양 자신도 설명하지 못하는 방황의 뚜렷한 명분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자신의 성장과정을 회고적으로 반사해 주는 계기를 갖는 언니 미양의 자기각성의 이야기로 그 주제의 중심점이 옮겨가게 되는 것이다.

「숲속의 방」의 이러한 예기치 않은 텍스트의 의미전도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어떤 인물의 사춘기의 경험은 회고의 시선에 포착되었을 때에만 나름의 의미망을 형성한다. 오정희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시종일관 병적인 징후처럼 자신의 사춘기에 대해 예사롭지 않은 시선을 견지하는 것은 이런 점에서 인물들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끊임없이 자신의 유년과 사춘기의 시간대로 시선을 돌려 그 경험과 맞대면하는데, 그것은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 인물들이(그리고 작가가)그 시간대와 사춘기적 경험이 성적 정체성의 확인과 맞물려 있어 현재의 자아정체성의 위기를 넘길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여성인물들이 성인이 된 위치에서 회고해보는 사춘기의 경험과 그에 대한 해석은, 그들이 앞서 말한 것처럼 자신들의 사춘기를 일종의 통과의례의 장으로서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로서 받아들였는지의 여부를 알 수 있는 시금석이 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김채원, ‘봄의 幻’에서의 사춘기에 관한 독백

그러나 여성소설에 있어서 사춘기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최근에 발표되고 있는 여성작가들의 몇몇 소설들은 여성들에게 있어서 사춘기가 어느 연령대까지 연장될 수 있으며, 또 그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문제성 있는 현상들을 내보이고 있어 주목되는데, 구체적으로 김채원과 김향숙의 소설을 예로 들어보자.

1989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김채원의「겨울의 幻」을 보면, 소설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우리는 중년이 된 여주인공이 외부적인 어떤 계기에 다음과 같은 독백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정말입니다. 저는 이제껏 마흔세 살이라는 나이가 되도록 단 한번도 스스로를 여자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저는 단지 여자의 흉내만을 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때, 목욕을 하고나서 새 속치마를 꺼내어 입을 때, 혹은 화장을 할 때, 혹은 생리 냅킨을 꺼낼 때 자신이 여자의 흉내를 낸다는 느낌에 젖게 됩니다만 그 외에는 언제나 나의 용모나 성 따위를 전혀 잊고 있는 것입니다. 즉, 외부에서 보는 나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나 그것일 뿐입니다. 그런 연고로 당신이 그 말을 하셨을 때 저는 젊었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여자라는 성과, 그 성이 가지는 떨림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 것입니다. 그 말 자체에는 무언가 설레게 하는, 인생에서 어떤 신묘한 가능성까지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늙어가는 사람의 떨림이라기보다 늙어가는 여자의 떨림이란 말이 훨씬 자연스러운 것이고 보면 제가 스스로를 언제나 사람이라고 느끼던 것에서 저의 성을 찾아 여자가 된 것이, 그 자각이 이제라도 기쁨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위와 같은 진술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위와 같은 고백을 하기 전까지 자신이 여성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과 그러한 자각이 이미 사춘기를 넘어선 인생의 중반 무렵에 어떤 계기에 의해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

앞서 말한 대로 사춘기의 자기정체성 확립이라는 과제가 필연적으로 성적 존재로서의 자신에 대한 각성을 포함하는 것이라면,「겨울의 幻」의 주인공은 실제로 사춘기다운 사춘기를 중년이 되어서야 맞고 있는 것으로 이야기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작품뿐만 아니라「봄의 幻」으로 묶여져 나온 그녀의 소설집에 수록된 ‘봄의 幻’과 ‘오후의 세계’, 그리고 ‘無言歌’ 등의 작품을 보아도 이러한 징후는 확인된다. 즉, 익명의 중년여인들의 의식을 그리고 있는 이들 소설들에서는, 이제껏 가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왔던 크고 작은 사건들이 실제로 자신의 삶을 보증해 주지 못했다는 회의가 공통적으로 내보이고, 더불어 사회적, 역사적으로 철저하게 절연된 익명으로서의 삶, 즉 한 남편의 아내, 혹은 아이들의 어머니라는 역할이라는 견지에서 규정된 여성으로서의 일상적 삶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라는 자기의문이 강하게 확인되는 것이다. 그것이 사춘기에 처한 인물이 최소한도라도 치루어내야 했을 자기 정체성 확인의 한 과정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일까.

김향숙의 ‘문 없는 나라’ 사춘기의 또다른 문제 제시

1990년에 발표된 김향숙의 연작장편「문없는 나라」는 또다른 차원에서 여성의 사춘기의 문제를 드러낸다. 이 소설은 이정원이라는, 간첩죄로 잡혀들어간 남편과 이혼하고 딸과 함께 살고 있는 여인과, 현재 공장의 노조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장준구라는 인물의 결혼을 통한 관계맺음과 그 와중에서 서로가 겪게 되는 심리적인 갈등 및 변화과정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이러한 인물 설정 및 정황설정은 소설만이 누리는 개연성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능히 있을 수 있는 현상이고, 또 시대적 상황으로 보아서도 그만큼 소설적으로 의미있는 주제를 형성할 수 있다.

실제로 작가는 이 두 사람의 만남을 그들의 상이한 (계급적인 면에서) 성장과정 및 생활여건에 강조를 두어 사회적으로 이질적인 계층간의 만남이라는 의미를 더 부각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얼핏 보면 이러한 강조는 조금은 부자연스러운 듯이 생각되지만, ’80년대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가 가진 자와 못가진 자, 자본가와 노동자간의 의식의 대립이 더욱 첨예화되었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그 개연성을 탓할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이 소설은 그러한 플롯을 통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여성을 둘러싼 가정적 사회적 상황이 결코 단선적인 것이 아니라 여러 차원의 문제가 한데 맞물려 있는 다층적인 상황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는 의미에서 여성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상황이 여성으로서의 자아의식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이 소설의 주인공 정원이 작품 전체를 통해서 일면적으로만 그려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작품의 말미에서 정원은 자신의 딸 예인과 나누는 대화에서 자신이 결혼을 했던 이유가 ‘어른으로서의 삶을 살겠다’는 의도에서였으나, 그러나 자신은 계속해서 자신의 ‘생각에만 붙들려 있었을 뿐이었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정원이 어른으로서의 삶을 살겠다고 자신의 결혼 이유를 말한 대목은 그녀 자신이 장준구와의 만남 이전에는 어른으로서의 삶을 살아본 적이 없었다는 자기고백이다.

개인적인 자기정체성을 대타적 관계에서 확인

그렇다면 정원이 말하는 어른으로서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소설에서 드러나는 것이지만 정원은 자신이 성인으로서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증거를, 계급적으로 다른 성장과정을 겪었고 또 견지하고 있는 대 사회적 이데올로기조차 전혀 상이한 장준구와의 결혼과, 그로부터 자신의 계급적 한계를 벗어나고자 빈민촌의 놀이방에 자원봉사 나가는 행위 등에서 찾는다. 말하자면 정원은 개인적 차원의 자기정체성을 순전히 대타적인 관계에서만 확인하고자 할 뿐, 단 한번도 개인적인 차원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여성으로서의 성적인 정체성 따위는 이미 사회적인 자아로서의 정체성이라는 문제와 구별되어보다 하위의 문제로 치부되고 있는 것이다.

성적인 정체성과 사회적 자아로서의 정체성이 위계적으로 마련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이 소설의 주인공 정원의 어른으로서의 삶이 사회적 정황에 촉발된 작위적인 차원에서 추구된 것이지, 결코 자연스러운 전개는 아니라는 인상을 전달해 준다. 자신과 사회가 역동적으로 최초의 관련을 맺게 되는, 그리고 그럼으로써 자연스럽게 성인으로 이행해가는 사춘기적 통과의례의 문맥에서라면 개별적 자아로서의 자기정체성과 사회적 자아로서의 자기정체성이 상호 배척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김향숙의 인물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들이 처해있는 현실적인 맥락의 강도에 대응하느라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성장과정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으로도 생각될 수 있다(최소한 필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여성인물의 사춘기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또다른 문제적인 예가 되어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사회적 현실적 맥락에서 살펴본 여성으로서의 자기성장의 문제와 그것이 갖는 개인적 의미에 대한 천착은 또한 신경숙과 김형경, 그리고 정길연 등과 같은 신진여성작가들의 작품에서도 강하게 나타난다. 작가적인 취향에 따라 개인적인 성장의 궤적을 사회적인 전망 속에서 투시해보는 이들의 시각은 결코 같지 않지만, 그러나 필자의 느낌으로는 이들의 소설 또한 전통적인 여성소설의 테마였던 가족관계 및 집(혹은 집의 부재)의 문제 등을 거론하면서 동시에 그 구성원인 여성적 자아의 성장의 문제와 그 의미에 대해 결코 적지 않은 관심을 견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만큼 사춘기의 문제는 이들이 소설에서 마찬가지의 중요성을 띤 테마로 자리잡고 있는데, 이들의 작업에서 천착되는 새로운 국면들은 여성소설이 사춘기라는 성장의 과도기와 맺고 있는 의미를 보다 확충시킬 것이다. 그때 우리는, 사춘기가 여성소설의 시작이라는 명제를 다시한번 확인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