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에세이 / 탈문화

탈-‘오늘’을 낳은 ‘어제’의 얼굴들





심우성 / 우리문화연구소장

‘탈’이란 일단 섬찍한 분위기로 받아들여지는 말이다.

음식을 잘 못 먹어 배가 아플 때, ‘배탈’이 났다고 한다. 그 뿐이 아니다. 다친 곳이 덧나도 탈났다 하고 무슨 일이건 간에 잘못됐을 때, 탈났다고 한다.

실상 우리 민족은 탈이란 것을 생활 주변에 가까이 두기를 꺼려했었다. 장례 때 쓴 방상씨(方相氏)는 물론이요, 한 마을의 ‘지킴이’로 모셨던 탈들도 마을에서 좀 떨어진 ‘당집’안에 두었지 절대로 방안에 걸어 놓는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다.

탈놀이가 끝나게 되면 어느 고장에서나 불에 태워 없애는 것이 놀이의 마무리인양 꼭 지켜 왔다. 탈에는 갖가지 액살이 잘 붙는 것이니 태워 버려야 한다는 것이 오랜 속신(俗信)으로 여겨졌다.

이처럼 탈과 우리 민족과는 어느면 섬뾵하고 서먹한 관계였는데도 그의 유산은 숱하게 많다. 8도 곳곳에서 탈놀이를 놀면서 살아 왔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비단 우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 오랜 민족들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멀쩡한 제 얼굴을 두고 또 다른 모습의 얼굴, 바로 ‘탈’을 만들게 되었을까?

그 원초적인 궁금증을 풀어보자. 흔히 탈의 기원을 말할 때, 원시공동체 사회에서의 제의에서 찾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능력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었던 죽음, 질병 그리고 자연의 위력 앞에서 어떤 상징적인 형태의 조형물인 탈을 내세움으로서 신앙적 기능을 부여하고 인간과 신의 사이를 이어주는 역할로서 생겨났으리라는 생각에서이다.

또 다른 의견으로는 짐승을 잡거나 전쟁을 할 때에도 경우에 따라서는 탈이 긴요한 구실을 했을 것으로 믿어 수렵을 위한 탈, 즉 생산적 기능으로서의 기원을 주장하기도 한다.

예를 든다면, 지금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1930년대 초의 조사기록에 따르면 개성(開城) 덕물산(德物山)의 최영장군사당(崔瑩將軍祠堂) 창부당(倡夫堂 혹은 청계당)이 수광대(首廣大)라 부르는 나무탈 4개가 걸려 있었다 하는데 이것이 바로 신앙적 기능을 지녔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 모습에서 신성스런 분위기를 충분히 느끼게 한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본다. 신라 지증왕 13년이면 서기 512년에 해당한다. 이 때에 신라의 장수 이사부(異斯夫)가 우산국(于山國·오늘날의 울릉도)을 정벌할 때 나무사자(木偶獅子)를 썼다는 기록이 있다.

나무사자라면 탈이라기보다는 인형으로 분류되는 것이긴 하지만 이러한 것이 전쟁에 쓰여진 한 단서를 보이는 것이라 하겠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앞에서의 탈이 생겨나는 원인이 되었을 ‘신앙적 동기’와 ‘생산적 동기’의 두 의견은 아마도 떼어서 생각하는 것보다는 양자를 포괄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으리라는 생각이다.

탈의 유산들

‘탈’을 한자로 적을 때, 가면(假面)이라 하는데, 이것은 또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거짓 가(假), 낯 면(面)이니 가짜 얼굴이란 뜻인데 그 글자 풀이만으로는 속뜻을 가늠키 어렵다.

탈이란 물론 제 얼굴과는 다른 형상의 ‘얼굴 가리개’라고도 할 수가 있겠지만 그저 얼굴을 가리는데 그치는 것은 아니다.

어떤 탈을 씀으로써 본디의 얼굴과는 다른 인물이나 동물, 또는 초자연적인 존재인 신에 이르기까지 나름대로의 인격내지는 신격을 이루어 낸다.

이 방면의 전문가들은 탈을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다.

제의(祭儀)에 모셔졌던 신앙성을 띤 탈로는 신성가면(Holy Mask), 벽사가면(Demon Mask), 의술가면(Medicine Mask), 영혼가면(Spritual Mask) 등이 이 밖에도 죽은 사람을 본 떠서 만든 추억가면(Memorial Mask)이 있는가 하면 ‘토템’ 숭배에서 나타나는 ‘토템’ 동물로 분장하기 위한 토템가면(Totem-Mask), 또 비가 내려 주기를 기원하는 기우가면(Rain Making Mask) 등도 있다.

생산적 효용면에서 쓰였던 것으로는 수렵가면(Hunting Mask)이 있고, 이와는 성격이 다른 전쟁가면(War Mask)도 있는데, 이것들은 서로 확연히 다른 것이라기보다는 상호 보완·조화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 뒤를 잇는 것으로 해석되는 예능가면(藝能假面)으로는 크게 무용가면(舞踊假面)과 연극가면(演劇假面)으로 분류한다.

이처럼 다양한 탈들이 우리나라에도 지방마다 고루 전승되고 있으니 풍부한 ‘탈 유산’을 이어 받고 있다 하겠다.

그러면 우리나라에는 어떤 탈들이 얼마나 전승되고 있는가.

가장 오랜 유물로는 경주에서 발굴된 목심칠면(木心漆面)을 들 수 있겠고, 그 뒤로 하회(河回)와 병산(屛山)의 별신굿 탈과 방상씨(方相氏) 등이 있다.

오늘날까지 전국에 분포 전승되고 있는 ‘탈놀이’ 상황은 다음과 같다.

북쪽으로부터 ‘북청(北靑) 사자놀음’이 있고, 탈의 고장이라 일러오는 황해도 지방의 ‘해서(海西)탈춤’으로 ‘봉산(鳳山)탈춤’, ‘강령(康翎)탈춤’, ‘은율(殷栗)탈춤’이 현재 서울을 중심으로 월남한 연로 연희자들에 의하여 어렵게 전승되고 있다.

중부지방의 산대(山臺) 놀이로써는 ‘양주(楊洲) 별산대놀이’와 ‘송파(松坡)산대놀이’가 있다.

경상북도의 ‘하회 별신굿 탈놀이’, 경상남도의 ‘고성(固城) 오광대’, ‘통영(統營) 오광대’, ‘가산 (駕山) 오광대’, 부산의 ‘수영(水營) 들놀음’과 ‘동래(東萊) 들놀음’ 등 이밖에도 강원도 강릉의 관노가면희(官奴假面戱)를 비롯해서 ‘남사당패’의 ‘덧뵈기’가 있고 굿판에서 쓰고 있는 ‘범탈’을 비롯한 띠탈(十二支假面) 등에 주목하게 된다.

여기서 풍물패(농악대)가 쓰고 있는 ‘양반광대놀이’에서의 다양한 탈까지를 합친다면 줄잡아 3백여종의 탈 유산이 오늘에 전하고 있다.

이러한 탈들은 나무, 바가지, 종이를 주재료로 하고, 아교단청(阿膠丹靑)이라 하여 전통적인 염료로 칠을 했었는데 지금은 아쉽게도 잊혀져 가고 있다.

벗고 있는 몰골들

그러면 이번에는 우리 탈놀이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배역들을 순서없이 살펴보기로 하자. ‘샌님’은 양반이다. 그러나 양반이면서도 체신은 말이 아니다. 낙반(落班)한 시골 샌님은 봉건적 가족제도에서 있었던 일부다처를 흉내냄으로써 집안 꼴이 말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겉치레나마 하인 ‘말뚝이’를 부리며 위세를 유지하려 한다. 그러나 결국은 망신만 당하고 만다.

이처럼 못생기고 주책없는 샌님을 통하여 봉건적 지배질서의 모순을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대목에서 간과해서는 아니되는 교훈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신랄히 비판한 끝에는 스스로 어두운 면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사랑으로 마무리하려는데 주목해야 한다. ‘취발이’는 힘센 상놈이다. 파계한 중이 데리고 살던 젊은 여자(소무)를 빼앗는가 하면 샌님에게도 마구 대든다. 좌충우돌 무서운 게 없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들떠서 날뛰기만 했지 자기 분수를 모른다. 오늘의 우리 주변에도 ‘신판 취발이’는 얼마든지 있다. 아마도 그런 허황된 짓을 깨우치려는 뜻으로 ‘취발이’가 등장했을 것이다.

‘말뚝이’는 샌님의 종이다. 종이면서도 고분고분 하지를 않다. 때로는 샌님을 비난하고 욕까지 보인다. 한데 취발이와 마찬가지로 끝마무리가 흐지부지다. 너무도 못나다 보니 눈치만 남은 그런 면도 때때로 보인다.

‘먹중’은 파계승이다. 누구에게나 조롱의 대상이다. 그러면서도 젊은 계집만 보면 기고만장 한다. 끝내는 취발이에 쫓기고 말지만 음흉하기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없어졌는가 했지만 또 언젠가 다시 나타날 그런 음탕한 인물이다.

파계승의 성격을 세심히 살펴보면, 단순히 퇴폐한 행실에 대한 비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구잡이로 받아들였던 외세 내지는 외래종교를 응징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영노’란 놈은 제 입으로 자기는 사람도 짐승도 아니라 한다. 그저 무엇이든지 먹어 치우는 ‘불가사리’란다. 그런데 가장 식성에 맞는 것은 옳지 못한 양반이며, 그런 양반만 보면 군침을 삼킨다.

옛날 이른바 상민계층이 영노를 통하여 양반에 대한 분풀이를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때로는 끔찍하기도 하지만 해학스럽기도 하고 또 통쾌하기도 하고 여하튼 유별난 배역이다.

영노의 등장과 함께 그의 적극적이면서도 희화적(戱畵的)인 이중성격은 우리 탈놀이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홍백가’는 얼굴이 한쪽은 붉고 그 반대쪽은 흰, 한 얼굴에 두 개의 표정을 가진 역시 이중인격자이다.

아버지가 둘이라고도 하고 제 스스로 ‘간에 가 붙었다 쓸개에 가 붙었다’ 한단다.

옛날에도 이런 사람이 있었다. 홍백가가 득실거리는 오늘이고 보니 두 얼굴의 홍백가가 전혀 생소하지가 않다.

‘…내 한쪽 얼굴은 남양 홍생원이요, 또 한쪽은 수원 백생원일세…’.

그의 말대로라면 애비가 둘이련만 그건 또 그렇지 않단다. 그저 세상 살아가려면 이러지 않고서는 어렵다는 것이다.

홍백가의 등장은 물론 인간적 번뇌와 사회적 모순의 조합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차적으로 자기모순을 극복하지 못한 비극적 산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홍백가의 표정마저 끝내는 슬며시 웃고 있으니 이게 웬일일까….

이제껏 만나본 모든 배역들의 심성은 선과 악을 막론하고 있는대로를 숨기지 않으려 하니 일단은 구김살이 없어서 좋다. 홀홀히 알몸을 내 보이는 벗은 몰골들이어서 오히려 정겨움이 있다.

미소로 감싼 너그러움

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어 있는 ‘하회 별신굿 탈놀이’의 백정은 도끼로 소를 때려잡는 힘센 망나니련만 얼굴 가득히 미소가 흐르고 있다. 상식적인 표정의 나열이 아닌 마음속을 그리려한 깊은 계산이다.

‘봉산탈춤’의 취발이도 이마의 울퉁불퉁한 주름살로부터 밑턱이 툭 튀어나온 것까지 괴기스럽기만 하지만 그것들이 한데 어울린 전체 얼굴에서 풍기는 느낌은 조금도 무섭지 않고 오히려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탈판’이 무너져라 뛰어 오르면서 양손의 긴 한삼이 번개마냥 하늘을 가르는데, 그 힘차고 투박한 춤사위에서도 비단결보다 더 매끄러운 선율이 흐르고 있다.

‘동래 들놀음’의 ‘말뚝이’는 그 크기로 해서나 생긴 모양이 끔찍스럽기로 우리나라 탈 가운데 첫 손가락에 꼽힌다.

말뚝이면 역시 양반의 종에 불과한데 크기도 양반의 다섯 곱은 실하거니와 코는 열곱도 더 된다. 너풀거릴 만큼 큰 귀도 부처님을 뺨칠만 하다.

이 말뚝이가 말채찍을 휘두르며 굿거리 늦은 장단에 ‘덧백이 춤’을 추는 모습은 굵은 절굿대로 땅을 짓이기는 형상이다.

그 큰 입은 바람이 휭휭 통할만큼 떡 벌렸으니 아무것이나 그저 삼켜 버릴 것만 같다.

그런데 이 말뚝이가 재담을 던지며 춤을 추노라면 그 기괴한 얼굴에 어느덧 한 가닥 미소가 흐르니 무섭기는커녕 따사로운 얼굴이 되고 만다.

동해 들놀음에 나오는 숱한 양반 형제들이 이 말뚝이의 널푼수 있는 풍채에 눌려 아주 왜소해지고 만다.

못된 양반을 꾸짖는 방법 가운데 이보다 넉넉하면서 효율적일 수가 있겠는가.

‘고성 오광대’의 말뚝이나 ‘통영 오광대’의 말뚝이들, 그리고 그밖의 모든 고약스런 배역의 괴상스런 탈들에서도 결국은 넌지시 미소로 감싼 너그러움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탈들은 왜 이처럼 끝내는 웃고만 있는 것일까?

남편의 외도와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큰 마누라’로서의 체통을 지키는 ‘할미’와 고분 고분한 ‘마누라’들.

탕녀의 화신인 ‘왜장녀’와 ‘소무’들까지도 함께 어울리다 보면 모두가 끈끈한 이웃으로 변하고 마니, 바로 이것이 숨김없는 우리 겨레의 심성을 들어 내 보이는 것이 아닐까 한다.

어떤 사람은 우리 탈들이 너무 웃음이 헤프다고도 한다. 웃음이란 속이 편할 때 나오는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 조상들은 모두가 그처럼 속이 편했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지지리도 못사는 가운데서도 그 못사는 어려움을 이겨내는 슬기로써 웃음을 택한 것은 아닐까. 소문만복래라 했으니 일단 웃고 보자는 속셈이었을까.

그러나 웃음이면 다 웃음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 탈의 그 웃음 속에는 활짝 웃은 웃음, 씁쓸한 웃음, 찝찝한 웃음, 게슴치레한 웃음, 톡 쏘는 웃음까지 있는 것이니 그 웃음의 실체를 파악하기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 전통탈의 주종을 이루고 있는 탈놀이(假面劇)의 탈들을 보아도 비단 인간만사의 사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삼라만상 신의 세계까지를 얼싸안으며 그 표현의 영역을 무한대로 넓히고 있음을 본다.

‘오늘’을 낳은 ‘어제’의 얼굴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에게는 숱한 탈의 유산들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은 그렇지를 못하다.

전국 곳곳의 ‘부군당’, ‘당집’에 모셔졌던 탈들은 이제 단 한 점도 제자리에 보존되고 있는 것이 없는 것 같다. 혹시 있다 하더라도 호사가(好事家)의 깊은 골방 속에 갇히다 보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밖의 것들은 깡그리 외국으로 팔려 나가고 말았다. 대충 1960년대 이전에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이제와서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니다. 결국 우리가 저지른 일이 아니겠는가. 가능한 한, 외국으로 간 것은 그의 사진이라도 다시 수합을 해야 할 것이며, 국내의 유품들도 서둘러 박물관으로 나와 다시 햇빛을 보게 되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우리의 ‘탈 유산’과 주변 문화권의 그것들과를 견주는 가운데 우리 문화권의 발자취를 살필 수도 있고 그의 독창성을 찾아 낼 수도 있다.

또한 현재로써 참고할 수 있는 가능한 탈들을 수합하여, 그 하나 하나의 생김새에서 우리 탈의 전형성을 터득하여 헝크러진 ‘조형문화’의 기틀을 세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다.

그림 공부를 하는데 앞으로도 천년 만년 ‘쥴리앙’, ‘아그리파’, ‘비너스’의 쌍통만을 손가락에 못이 박이도록 그려댈 것이 아니라 다양한 탈들로 대상을 바꾸어야겠다는 생각이다.

혹시, 우리의 탈들이 호사스럽지 못하다는 비평을 하는 사람을 본다. 또는 투박해서 세련미가 없다고도 한다. 그런 면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탈이란 지난 역사의 발자취를 얼굴 형상으로 빚은 것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민중사의 거짓없는 거울로 보면 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리 탈의 모양새, 그 웃음은 사회 경제적 모순과 인간적인 번뇌를 한 얼굴에 담다보니 비아냥 하듯이 비꼬고 있는 면도 없지 않다. 그러면서도 이야기 줄거리의 마무리에 가서는 세상만사에 달관한 듯한 ‘너름새(넉넉한 표정)’를 보여주는 데는 마음속의 주름살까지 한꺼번에 활짝 펴지는 기분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탈이란 고착된 얼굴이다. 그 고착된 얼굴로 사랑도 해야 하고 이별도 해야 하며, 세상의 잘잘못과 맞서 부대끼기도 해야 한다.

숱한 우리 ‘탈유산’의 매무새들은 바로 ‘오늘’의 우리네 표정을 낳게 한 ‘어제’의 얼굴들이다. 이제 그 숨김없는 ‘어제’의 얼굴들을 마주하며, 더 밝고 포근할 ‘내일’의 얼굴을 기약해 본다.

평탄치만은 못했던 역사의 소용돌이를 헤쳐 오면서도 ‘희노애락’을 수더분한 미소로써 감싸고 있는 우리의 탈들… 그 의젓한 너그러움에 옷깃을 여미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