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망태 지고 풀피리 불던「고향」
최승범 / 시인, 전북대 교수
초여름의 들녘이나 산자락에 서면 언제나 떠오르는 정경이 있다. 그것은 어린시절의 고향이다. 뒤에는 해발 4백여m의 노적봉이 있고, 앞에는 그리 넓지 않은 시냇물이 흘렀다. 그런대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세는 갖춘 마을이었다고 할까.
적봉을 서산(西山)이라고도 불렀다. 마을 앞 시내 건너엔 또 나지막한 산자락이 흐르고 있었지만, 그 산자락도 동구 밖에서 멈추었고, 동북쪽은 꽤 넓은 들이어서, 거기에서 나는 소출로 인근 마을의 양식은 해결되었던 셈이다.
여름지이로 삶을 이어야 했으니, 웬만한 집에는 외양간이 딸리고 거기엔 여름지이에 부릴 소가 있었다.
우리집에도 사랑채에 외양간이 있었다. 그리고 머슴이 거처할 방도 그 옆에 따로 한 칸이 있었고, 머슴도 한때는 상머슴과 꼴머슴이 있었다. 상머슴은 힘겨운 일을 할 수 있는 장정머슴이었고, 꼴머슴은 집안의 잔일을 거들며 주로 소에게 먹일 꼴의 마련이나 갈퀴로 나뭇잎을 긁는 일을 맡은 나이 어린 머슴이었다.
나는 상머슴보다도 꼴머슴과 가까이 지낼 수 있었다. 때로는 함께 들녘이나 시냇가에 나가 꼴을 베기도 하였고, 꼴망태 떼는 일을 거들어 주기도 하였다. 가을철이면 갈퀴를 들고 따라가서 솔향기 짙은 솔잎을 긁어 모으기도 하고, 긁어 모은 솔잎을 망태기에 눌러 넣는 일을 거들기도 하였다.
꼴을 베어 담거나 솔잎을 긁어 담거나 하는, 망태기의 미감을 잊을 수 없다. 꼴을 담으면 꼴망태요, 솔잎 따위나 가리나무를 담으면 그저 망태기라고 불렀다. 가는 새끼나 노를 엮어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멜빵이 달려 있다. 멜빵은 한쪽 어깨에 걸치게 된 것도 있고, 두 어깨로 편하게 짊어질 수 있는 멜빵도 있다. 작은 망태기이면 하나의 멜빵이었고, 넓죽하고 큰 망태기이면 두 개의 멜빵이었다.
아름다운 작품으로 회상되는 망태기에 관한 기억
잊을 수 없는 망태기의 미감이라고 한 것은 망태기를 엮은 가는 새끼나 노가 어쩌면 그리 쪽 고르게 꼬여 있고, 엮는데도 어쩌면 그리 촘촘히 날을 세우고 올을 둘렀을까 하는 데에서 오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고공품(藁工品)으로도 하나의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일찍이 일본의 민예학자 야나기 무네요시는 내 고향 가까운 임실(任實)에서 난 삼태기를 예술품이라고 극찬한 바 있었다. 거름이나 쓰레기를 담아 나르던 삼태기도 어려서 많이 보았던 것이나, 그 삼태기에 비하여 꼴망태의 예술성도 결코 못지 않으리라는 생각이다. 이제, 저 삼태기나 꼴망태를 구하여 걸어 두고 보재도 쉽게 구할 수 없게 되었다. 한 아쉬움이다.
다시 어린시절로 돌아가 본다. 마을안 꼴머슴들의 나이는 차이가 있었다. 또 남의 집 머슴살이에서가 아닌, 자기 집의 꼴을 베고 가리나무를 긁는 사람들도 있었다. 망태기가 아닌 지게로 풀이나 나무를 나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서로 어울리는 것을 보면 층하를 두지 않았다. 일을 하거나 쉴 때에도 스스럼 없이 어울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자치기, 돈치기, 낫꽂기 따위의 놀이로 쉴참을 어울려 보내는가 하면, 꼴을 베고 나무를 긁는 동안이나 망태기를 메거나 지게를 지고 층층이 오고가는 동안에는 노래를 주고받기도 했다.
저때에 뉘집 꼴머슴이든가 상머슴이든가가 곧잘 부르던 노래에, 「꼴망태 짊어지고 소를 모는 저 목동/ 고삐를 툭툭 치며 콧노래 부르다가/ 이랴 흥흥어서 가자, 정든님 기다리신다」가 있었다. 귀에 익은 저 가락은 지금도 홍결로 온다.
고정옥은「조선민요연구」에서 노동요의 한 갈래로「꼴베기 노래」를 들었다. 그리고「꼴베기 노래」는 특정한 노래가 드물다고 하며, 전남 곡성지방과 충북 단양지방의 노래를 보여주고 있다. 곡성은 나의 외가의 고을이기도 하다.
「동무야 동무야 꼴 베러 가자/ 낫을 갈아 질머저라/ 큰애기 무덤으로/ 풀뜯으로 가자」를 곡성지방의 노래라 했다. 이 노래를 어린시절에 직접 들어본 기억은 없다. 꼴머슴들이 이 노래를 불렀다 해도 집을 나서면서나 골목안에서 불렀을 것 같지는 않다. 마을을 나서서 불렀거나, 쉴참을 쉬다가 다시 꼴베기를 시작하자며, 우스갯소리 잘하는 한 꼴머슴이 불렀을 법하다. 한사람이 3행을 다 부를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처음 한 사람이,「동무야 동무야 꼴 베러 가자」하자, 쉴참을 같이 어울렸던 또래또래의 꼴머슴들이,「낫을 갈아 질머저라/ 큰애기 무덤으로 풀 뜯으러 가자」를 입 모아 부르지 않았을까. 여자 이야기도 할만한 나이또래였던 것 같다.
단양의「꼴베기 노래」에는 「쾌지나 칭칭나네」의 받는 소리가 아닌, 「네나 칭칭 나세」가 들어 있다. 그리고 주고받다가 입을 모으는 짜임새의 노래다.
「가세 가세 꼴 비러 가세/ 어데로 어데로 가려 하나/ 뒷산말 밑둥 꼴 비러가세/ 네나 칭칭 나네/ 가세 가세 꼴 비러가세/ 어데로 어데로 가려 하나/ 저기 소우골 꼴 비러 가세/ 네나 칭칭 나네」의 식이다.
임동권의「한국민요집」에서 볼수 있는 칠곡 지방의「꼴베기 노래」는 상머슴들이 불렀던 것인가,「동풍 서풍에 궂은 눈비 오고/ 서화나 연풍에 님상사로다/ 에헤에헤 에헤야/ 자귀야 울지 마라/ 울라거든 너 혼자 울지/ 네 어이 와서 잠든 님/ 깨운단 말이냐/ 에헤에헤 에헤야/ 산을 끼고 물을 안고/ 돌아보니 그 산이 번하다/ 님이 될 바 아니로다/ 참아라 님 그리워/ 후후야 구기야 구기야」로, 깊고 무거운 가락에 사설도 길다.
꼴머슴이나 꼴 베는 사람의 마음을 달래주던 풀피리
푸르름이 돋아가는 철이면 풀피리를 불기도 했다. 더러 흉내를 내보려 해도「-삐 피」소리일 뿐, 꼴머슴들이 부르는 저 멋진 가락을 멀리 가까이 흔들리게 할 수는 없었다.
조남익의 시「풀피리」를 읽자면 저 풀피리의 가락을 잘도 표현해 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보이지 않은/ 어둠의 땅/ 누우런 절망의/ 끄트머리에서/ 다시는/ 다시는/ 내려오지 않을 것처럼/ 하늘에다/ 아시아의 혼을/ 신나게 불곤 하였다」
제때 잘 불어 넘기는 풀피리소리를 듣자면「아시아의 혼」까지는 몰랐어도 어느 대목은 땅 속 저 끄트머리로 가라앉는 소리인가 싶으면, 또 어느 대목은 하늘로 너울너울 피어오르는 소리이고 다시 어느 대목은 아스라한 하늘 끝 구름 위에서 맴돌고 있는 소리인가도 싶었다.
풀피리는 꼴머슴이나 꼴 베는 사람들에겐 그들의 그때 그때의 마음을 달래고 푸는 하나의 악기 구실을 한 것이 아니었던가도 싶다. 한시도 소를 치는 아이들의 피리가 적잖이 등장한 것을 볼 수 있다.
내 고향 남원 태생의 여류시인 김삼의당(金三宜堂)의 「목적(牧笛)」도 그 하나다.
「봄바람 타고 어느 곳에서 오는 피리 소리인가/ 그 한 가락 해질녘을 흔드네/ 봄날이라 꽃다운 곳도 많으리/ 앞 시냇가에 소치는 아이 있었구나(東風何處笛一曲夕陽中 春日 多芳處 前溪有牧童)」
어린시절의 고향 정경에 다시 젖게 하는 시다. 마을 한켠엔 저수지의 긴 둑도 있었고, 거기서 흘러내리는 시내도 있어, 바로 김삼의당 시의 내용 그대로의 정취에 젖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고향을 떠나서 중학교엘 다닐 때의 국어시간에, 남구만(南九萬)의 저 유명한 시조,「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회들은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넘어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니」를 배우면서도, 나는 고향 사랑채 장지문의 밝은 빛살과 외양간의 암소와 송아지, 그리고 꼴머슴과 꼴망태에 어린 정경들이 눈앞을 갈아 들어 마냥 즐거움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고향에 가 본대도「꼴망태 질머지고 소를 모는 저 목동」은 커녕,「흥 흥」흥결의 콧노래도, 멀리 가까이 일렁이는 풀피리의 가락도 다시 실감할 수는 없으려니 싶다. 그동안 얼마나 바뀌고 달라진 농촌이라는 이야기이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