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리뷰 / 무용

국립발레단의 구조변화




김태원 / 무용평론가

지난해엔 공연을 놓쳤지만 이번 4월 초순경엔 국립발레단의「돈키호테」재공연(정기공연)을 볼 수 있었다. 오랜만에 본 활기 있는 무대였고, 그 이전에 다소 불충분한 전개와 달리 이번엔 프롤로그가 낀 전 3막이 클래식 발레의 구성대로 꽉 짜여지면서, 특히 최태지(키트리 역)와 문병남(바질 역)의 빠드되는 근자에 보기드문 스타적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국립발레단의 수준 전체를 한단계 높이 올려놓고 있었다.

문병남의 힘차고 날카로우며 자신만만한 대회전, 힘이 들어가 다소 거칠게 보였지만 만만찮은 체구를 가진 최태지를 한손으로 들어올리며 마치 곡예사나 마술사와 같이 그녀의 몸을 거의 수평으로 공중에서 눕히는 기술, 최태지의 속도감 있고 매끄러운 삐루엣이나 발랄하고 입체감 있는 표정은 그 둘이 아마 근자에 들어 거의 최초로 자신있게 어울리는 역을 맡고 있는 것 같았고, 특히 최태지의 키트리역은 한국현대발레사에서「심청」이나「지젤」에서 문효숙이 맡았던 역과 더불어 최상의 역으로 평가되어야 옳을 것이다(그런 점에서 우리 발례계는 최태지란 재목을 조련시킬 수 있었던 발레교사나 안무가를 가지지 못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공연내내 키트리를 놓고 바질과 다소 엉뚱한 삼각관계로 계속 놓였던 돈키호테의 역 설정도 이 공연에서는 일관성이 있게 처리되었고, 특히 2막 3장에서 돈키호테가 환상 속에서 보는 숲속장면은 V. 오쿠네브의 훌륭한 장면처리에 의해 오랜만에 청신한, 클래식 발레의 스펙타클성을 얻고 있었다.

마치 눈이 덮힌 듯 숲속은 회백색으로 처리되었고, 강세영을 비롯한 어린 발레요정들(예원학교생)과 둘시네아(이중혁)의 정돈되고 반짝이는 빛깔은 클래식 발레란 가장 먼저 관객의 시각을 자극시켜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예술적 모토를 성공적으로 구현화시켜 주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의「돈키호테」공연(그외 더 지적하고 칭찬해 줄 부분이 있지만)은 몇 년 전의 같은 국립의 무대에 올려졌던「노틀담의 곱추」와 더불어 확실한 국립발레단의 한 레퍼터리로 첨부되고 있었고, 둘 다 해외 안무가를 초빙, 성공적으로 작품을 만든 경우에 속했다.

「돈키호테」공연에 떠오르는 몇 개의 생각들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또 국립발레단의 역사와 그 미학적 방향을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러나 이번의「돈키호테」공연을 보면서 몇 가지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국립발레단의 운영의 방법과 연관되고, 또 올해가 공교롭게도 국립발레단이 30주년을 맞게 되며(국립발레단이란 명칭 자체는 1973년에 국립무용단에서 독립해서 얻게 되지만), 그 신임 단장의 선정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국립극장측이나 발레단으로서도 그 조직체와 운영방법의 이모저모를 사려깊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 이번「돈키호테」의 무대가 우리에게 희망을 주었던 사실은, 최태지나 문병남의 연기에서 그 표정을 역력히 읽을 수 있는 바였지만, 이 발레단이 훌륭한 지도자에 이끌려질 수 있다면 스스로 상당한 잠재력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어떤 측면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현대춤이나 한국춤에 눌려있는 듯한 오늘의 발레의 위상을 크게 높일 수 있을 것이란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90년대 우리 예술춤의 가장 큰 목표가 되고 있는 춤예술의 직업화와 대중화를 앞당기는 길이 되기도 한다.

이번 재공연을 위해 거듭 내한은 못했지만 볼쇼이의 마담 콘트라체바 여사는 국립발레단의 클래식 지향의 예술적 맥을 연속시키면서, 극적으로 요구되는 구성의 논리성, 장면의 성실한 처리, 발레리노와 발레리나들의 춤연기에 매우 극적인 강조점을 찍어주고 있었다.

거듭되는 공연을 통해 서로 확인케되는 훌륭한 타이밍 감각, 홍연택이 지휘하는 서울 오케스트라의 음악적 뒷받침은 그런 공연적 노력을 입증해 주고 있었던 부분들이었다.

두 번째는, 최태지나 문병남은 말할 것도 없고 이 공연에서의 투우사역의 민병수, 거리의 무희역의 이경란, 메르세데스(투우사의 애인)역의 정미자, 키트리 친구역의 손애란, 신인 신미호는 이제 서서히-사실은 너무 늦었지만-단순 주역이 아니라 발레계의 스타들로서 돋보이고 있다.

그들이 각기 자신의 체형이나 성격에 맞는 춤의 스타일을 갖게끔 이젠 제도적으로 뒷받침해 주고 부추겨 주어야만 할 것이란 점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는, 발레가 스타의 예술-특히 클래식일 경우-임에도 불구하고 누구가 누구로부터 구별되고 있는 것인지, 각 개인의 특성이 무엇인지 전혀 구별되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발레, 스타의 예술임에도 불구하고 구별되지 않는 특성

이경란이나 정미자가 갖는 안정된 춤의 자세나 묘한 맵씨미(특히 이경란), 혹은 표정에 대해서도 우리는 별반 크게 구별해서 평가하진 않는다. 마찬가지로 문병남과 구별된 수 있는 민병수란 재목에 대해서도 우리의 관심은 부족한 편이다. 흰색과 보랏빛을 섞은 의상에 의해 훨씬 돋보여졌고, 키트리역에 의해 얼굴의 표정뿐만 아니라 다리의 표정도 아주 건강하게 되살아났던 최태지에 대해서도 그 인물, 혹은 역의 연구는 그간 매우 빈약했던 편이다. 문병남의 잠재되고 더 발굴될 수 있는 기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요컨대 스타를 육성시키고, 인재를 보는「기술」과 「눈」이 모두 우리에게는 빈약한 실정이다. 그러나 지난해에 이어 이번의 「돈키호테」공연은 그런 인재들의 불거짐을 어느 정도 유도하고 있었고, 발레단의 춤꾼들도 그런 보이지 않는 주문에 적극 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 번째는, 역시 발레란 어느 예술보다 더 국제적인 예술이기 때문에 해외안무가, 발레교사들의 영입이나 계약이 계속 되어져야만 하고, 또 정선된 인재들이 국립발레단에 들어갈 수 있게끔, 좋은 의미로「엘리트화」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30년간 발레가 서구에서 발전된 예술임에도 불구하고 단기간의 계약에 의해 해외안무자의 초빙은 몇 번 있었지만 제대로 해외안무자나 교육자의 영입이 없었던 것은, 오늘의 발레계의 폐쇄성과 미성장의 중요원인들이 되고 있다고 보여진다.

다행히 올해 국립발레단은 후반기에 성 페터스부르고발레단의 보리스 에이프만과 계약을 맺고, 그를 초청하였다고 하니 어떤 측면으로 점점 문호를 개방하고 있는 듯싶다. 그러나 오늘의 교향악단의 운영이나 활동상황과 비교해 볼때는, 우리 발레계는 아직도 폐쇄적이며 어떤 측면으론 우물안 개구리식이다 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한 것이다.

따라서 단장을 포함해서 발레교사(지금은 지도위원으로 호칭되지만), 안무자의 직급에 있어서는 국내의 인재와 동시에 해외의 발레인력들을 계약제에 의해 과감히 수용하는 방안들이 적극 강구되어야 할 것 같고, 정선된 단원들에 의한 해외공연의 기회들을 늘려서 국제적인 감각을 획득하도록 시급히 애써야만 할 것 같다.

발레에 대해 관심있어 하는 대중들의 욕구에 비해서 우리의 발레계가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음이 요즘처럼 강하게 느껴질 때가 없다. 제도적 개선과 함께 시급한 체질개선이 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