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에세이

다시 생각해 보는 예전의「보릿고개」




최승범 / 시인, 전북대 교수

얼마전 외신이 전한 몇 장의 사진을 보고 애련한 슬픔에 젖지 않을 수 없었다. 아프리카 남부국가들을 휩쓸고 있는 가뭄의 참상을 알려준 사진이었다.

짐바브웨·보츠와나·모잠비크 등 나라의 이름도 귀에 설기만 한 아프리카 남부의 여러 나라는「유사이래 최악의 가뭄」,「세기의 한발」이라고도 했다. 이 가뭄으로 하여 강과 시냇물은 거북의 등딱지 같은 바닥을 드러내고, 목초가 다 타버린 들판에선 소들이 떼지어 죽어가고 있다고 했다. 가축뿐 아니라 기린·얼룩말·박쥐 등 야생짐승들도 퍽퍽 쓰러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지경이니, 사람인들 어떻게 견디어 내겠는가. 식수난도 식수난이지만 논밭의 작물을 가꿀 수 없으니 당작의 먹거리도 문제다. 제일 가슴저리게 하는 것은 어린이들의 굶주린 모습을 담아놓은 사진이다. 겨룸대처럼 강마른 팔·다리, 두 눈을 희멀금히 뜨고 퍽주거니 주저앉아 있는 모습들은 차마 바라볼 수도 없었다.

눈을 돌리자 옛날이 갈아든다. 보릿고개(麥嶺期)의 일들이다. 오늘날 우리의 어린이들은 보릿고개라는 말 자체를 잘 모를 것이다. 반세기 전만 해도, 「보릿고개가 태산보다 높다」는 말을 흔하게 들을 수 있었다. 보릿고내는 음력의 4∼5월이 고비였다. 특히 시골의 농가에서는 양식이 다 떨어져서 곡기를 챙기기 어렵게 되었는데,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은 때가 으례 4∼5월이다.

태산보다 높은 곳에서 끼니를 챙기려 애를 썼다

어려서 보면, 가을걷이 후의 삼동을 나면서도 어른들은, 「보릿고개가 태산보다 높다」며 다음해 보릿가을까지의 양식을 요량하면서 끼니를 챙기려 무진 애를 쓰는 것이었다. 해가 짧은 겨울엔 하루 두 끼만으로 때우려 하였고, 그것도 아침엔 밥이나, 저녁엔 시래기죽, 콩나물죽, 호박죽 같은 죽이기 십상이었다.

밥에도 잡곡을 섞었을 뿐 아니라, 시래기·콩나물·무·고구마 등을 섞어 짓기 마련이었다. 나는 그때 철부지였다. 할머니·어머니의 마음은 짚지 못하고 밥상 앞에서 곧잘 투정이었다.

「저녁에도 죽이네」「무밥먹기 싫어」 따위의 투정을 하며 어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여 드렸다. 지금은 별미인 무밥을 그때엔 왜 그렇게 싫어했던지. 그러면 할머니는 또 「보릿고개가 태산보다 높다」는 말씀으로 나를 달래시곤 하였다.

이렇듯 삼동을 나고 봄철이면 쑥버무리·개떡·송기죽·나물죽 같은 것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하였다. 이때의 먹거리들은 그런대로 먹을만 했다.

마을 어른들을 보아도 이른 봄철로부터 보릿고개까지는 참으로 전전긍긍하는 모습들이었다. 「아무네집은 부황이 났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그 집의 사람들을 보면 얼굴들이 제 얼굴이 아니었다. 늙은 호박빛으로 누르퉁퉁 부어오른 얼굴들인 것을 볼 수 있었다.

뒷날 「조선왕조실록」등 역사책을 들추어보자 보릿고개의 비참한 모습들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길가에 널린 시체들이 있는가 하면, 어린이를 버리고 유리걸식하는 어른들의 모습도 보인다. 지방의 수령들은 종자(種子)와 구황곡(救荒穀)을 풀어달라고 중앙에 말을 달려 아뢴 것도 볼 수 있다. 가위, 전국에 비상이 걸린 상태가 해마다의 보릿고개에 드러나 있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8.15해방 전의 몇 해의 동안이 가장 심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 때는 해가 짧은 겨울뿐이 아닌, 해가 길어진 봄으로부터 보릿고개를 넘기까지 두 끼를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었다. 산야의 초근목피도 견디어 내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때의 비참상을 생각하자면 몇 편의 시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 하나는 이영도의「맥령(麥嶺)」이다.

-사흘 안 끓여도 솥이 하마 녹슬었나/보리 누름철은 해도 어이 이리 긴고/감꽃만 줍던 아이가 몰래 솥을 열어 보네.

보리누름철이란 보리가 익을 무렵을 일컬음이다. 초여름에 핀 감나무꽃이 떨어지는 무렵이기도 하다. 등황색의 감꽃을 주워 강아지풀의 줄기에 꿰어 목걸이를 만들어 목에 걸고 놀기도 하였지만, 배가 몹시 고픈 아이들은 감꽃을 주워 먹기도 했다. 무슨 요기가 될 것인가마는 하도 굶주린 입이니 입이나 다셔보자는 것이었을 것이다.

사흘이나 불을 지피지 않은 솥임을 잘 알고 있는 아이기도 하다. 「끼니를 때우자」는 어머니의 부름도 없었으니, 솥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 리 없다. 그런데도 감꽃을 주워 먹던 아이는 부엌으로 가서「몰래 솥을 열어 보네」라고 하였다. 콧날이 찡해지는 것을 느낄수 있다. 그 어린이는 얼마나 배가 고팠던 것일까. 어린시절 보릿고개를 넘어 본 사람이면 저 배고품을 몇차롄가는 겪어 보았으리라는 생각이다.

황금찬의 시도 있다.「보리 풍작」의 시다. 우리의 시골에서 보릿고개가 사라진 후의 시다.

- 내가 보통학교 이학년 때/아침과 점심을 굶고/보리밭 머리에서/여물지도 않은 보리알을/뽑아 먹으며/울던 때가 있었다.

시인은「흰나비 몇 마리가 보리밭의 바다를 날고 반추하는 소는 구름을 보고 있는」언덕에 서서, 시인이 겪은 어린시절의 보릿고개를 회상하고 있음을 본다. 오죽 배가 고팠으면,「익지도 않은 보리알을 뽑아 먹으며」울었을까.

사실 보리가 익기를 기다리지 못해 아직 여물지도 않은 보리이삭을 뽑아다가 확에 갈아서 그것만으로「풋보리죽」을 쑤어 마시며 연명한 사람들도 있었다. 직접 마셔본 바는 없어 그 맛을 말할 수는 없으나, 푸르뎅뎅한 저 빛깔을 보는 것만으로도 저러한 것을 어떻게 마시는가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외할머니도 낀 한 가족이 눈물만 지으며 넘던 「보릿고개」

황금찬의 시에는 더욱 박진한 보릿고개의 시도 있다.

-보릿고개 밑에서/아이가 울고 있다/아이가 흘리는 눈물 속에/할머니가 울고 있는 것이 보인다/할아버지가 울고 있다/아버지의 눈물, 외할머니의 흐느낌/어머니가 울고 있다/내가 울고 있다/소년은 죽은 동생의 마지막/눈물을 생각한다.

「보릿고개」의 첫 연이다. 외할머니도 낀 한 가족이 보릿고개를 넘다가 끝내는 영양실조의 한 어린이를 잃고 만 것이다. 그 어린이의「마지막 눈물」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배가 고프다」거나 「밥을 달라」거나 할 기운도 있었을 것 같지 않다. 흘릴 눈물은 남았던 것인가. 희멀거니 뜬 두 눈에 눈물을 짓다가 그만 숨을 멈추고 말았을 것이다.

「보릿고개」의 끝연을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맺고 있다.

-굶으며 넘었다/얼마나한 사람은 죽어서 못 넘었다/코리아의 보릿고개/안 넘을 수 없는 운명의 해발 구천 미터/소년은 풀밭에 누웠다/하늘은 한 알의 보리알/지금 내 앞에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지난날의 보릿고개를 겪어 본 사람이면 이 표현이 얼마나 박진한 것인가를 새삼 느끼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의 아이들은 이 보릿고개를 알 턱이 없다. 이야기로 들려준대도 상상조차 따르지 못할 것이다. 「수퍼에 가면 산처럼 싸여 있는 게 먹을 것인데」의 반문이나 않는다면 덜 웃을 일일까. 이러한 아이들에게 외신이 전한 짐바브웨나 잠비아 어린이들의 기막힌 모습의 사진을 보여주며 우리의 지난날 보릿고개를 말하여 준다면 눈이라도 끔적여 줄 것인가.

며칠 전 신문에선 반가운 소식을 볼 수 있었다. 우리 문화예술인들이 아프리카 남부의 굶주림에 시달리는 저 어린이들을 돕자고 나섰다는 기사였다. 국립국악원 국악당에서 자선 국악공연회를 가져, 그 수익금을 유니세프(UNICEF)의 보내어 저 어린이들을 돕고자 한 것이다. 우리도 이제「하늘은 한 알의 보리알/지금 내 앞에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가 아닌, 마음의 여유를 가지게 되었는가 싶어 반가운 마음이 앞서게 된다.

또 하나, 저 국악공연이 끝나면 그 뒷풀이로「보리죽잔치」도 가지리라고 했다. 그 보리죽이나 보리밥·보리떡은 어떠한 맛일까를 상상해 본다. 어린시절 지긋지긋 진절머리나던 저 보리죽과는 어떻게 다른 맛일까를 생각하는데, 문득 떠오르는 의문 하나. 우리나라에선 보리 수입은 안하고 있는지. 지금 우리의 농촌에서는 보리밭도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