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럽고 천진난만한 아름다움
이상우 / 연극평론가
올해로 두 돌을 맞는「사랑의 연극 잔치」가 지난 6월 한달동안 비교적 조용하게 치루어졌다. 작년의 연극잔치에 비해 참가 작품 수도 절반인 21편에 불과했고 축제 기간도 두 달에서 한 달간으로 대폭 반감되었다. 게다가 서울의 각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치루어졌던 지난해의 경우와는 달리 이번 연극제는 대학로와 신촌 등 지역적으로 연극 공연장이 집중된 곳에만 국한되어 축제적 분위기를 훨씬 감소된 느낌이다. 작년에 비하면 한마디로 알게 모르게 치러지는 맥빠진 연극잔치가 되어버린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작년의 때아닌 연극 특수 경기는 우리 연극계가 혼자 힘으로 일궈낸 자력갱생에 의한 것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부(문화부)가 1991년을 「연극 영화의 해」로 지정해 주는 등 물심양면의 외적 지원이 있었고, 여기에 우리 연극인들이 마치 당장에라도 연극예술의 르네상스가 열린 것인양 한동안 흥분에 들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오히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연극예술이 차지하는 위상과 좌표를 솔직하게 증좌해 보여준 것이 이번 사랑의 연극잔치라고 보는 것이 보다 현명한 판단일 것이다.
때문에 작년의 경우와 대비해서 성급하게 우리 연극계가 또 다시 급전직하의 몰락이라도 겪게 된 것처럼 필요 이상의 호들갑을 떨 이유도 없는 것이며 여기에 위축될 필요는 더더욱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연극계의 현실에 만족하고 안주하자는 뜻은 아니다. 다만 정당한 비판과 평가가 우리 연극의 발전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비판과 평가의 올바른 준기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냉철한 현실인식의 전제하에서 우리는 이번 사랑의 연극잔치를 평가해야하며 또 비판해야 하는 것이다. 아직도 화려했던「연극의 해」의 꿈결 같은 미망에서 깨어나지 못하여 흥분과 매도로 또 다시 들떠서는 곤란한 일이다.
'92 사랑의 연극잔치는 외관보다 내실이 알차다
'92 사랑의 연극잔치가 외관상 작년에 비해 조촐한 소규모의 연극잔치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내용면에서 보자면 오히려 더 알차고 내실이 있어 보인다. '91 사랑의 연극잔치가 참가 작품수는 무려 42편에 달하는 것이었지만 참가기준이 불분명해 재공연 및 번역극 일변도의 무계획한 연극잔치가 되어버렸고 공연의 질적 수준도 그 편차가 매우 컸다. 그러나 올해의 경우에는 장기공연물 6편을 포함하여 뮤지컬 2편, 마임극 2편 등의 구색을 갖추고 있고 또 대략 절반 가량의 창작극과 번역극이 국내에서 처음 공연되는 수준 있는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다. 비교적 균형감 있는 안배와 내실 있는 계획의 수립을 위해 고심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많다. 아직도 연극잔치의 대다수 관객들을 흡입하는 것은 몇 편의 장기공연물들(그것도 주로 번역극)에 불과하고 이렇다할 만한 새로운 창작극의 수확은 쉽사리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저 동숭동 연극의 평년작들을 한꺼번에 묶어내고 거기에 몇 편의 신작들을 더 얹어서 연례행사식으로 관객들에게 일종의 패키지 연극 상품을 제공한다는 명분 이상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다. 바로 이러한 실정이 앞으로 사랑의 연극잔치가 나아가는 향방이 되어서는 곤란하리라 생각된다. 이것은 그야말로 사랑의 연극잔치가 연극예술의 정기 바겐세일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닌 무성격의 연극잔치로 전락해 버릴 것이 너무도 뻔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언제나 우리에게 새로운 가능성의 모색은 엄연하게 존재한다. 그 진중하고 순수한 가능성의 하나를 필자는 한 편의 어린이 연극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극단 연우무대의「날아라 새들아」(연우소극장, 6. 12∼7.19)라는 공연이었다.
연우무대 배우들의 공동 구성으로 쓰여지고 이두성, 김미경에 의해 공동 연출된「날아라 새들아」는 7명의 배우들이 꾸며내는 신명나고 천진난만한 연극놀이다. 배우들 자신이 그들의 어린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한 이야기들이 각각 독립된 9개의 에피소드(1. 새질서 새생활 운동 2. 분주한 아침 3. 넌센스, 세일즈 4. 소풍 5.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6. 나리의 비밀일기 7. 산딸기 8.통지표 9. 천천히 달리고 싶어요)로 짜여져 극을 이루고 있다. 거기에는 배우들의 과거 경험을 통해서 우러나오는 동시대적인 삶의 보편적이고 진솔한 공간과 더불어 차세대를 지향하는 삶의 소망 등이 매우 진솔하게 담겨져 있다. 게다가 천진난만한 동화적 상상력과 뛰어난 동심의 자연스런 표현력이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다.
물론 한 사람의 전문 극작가가 쓴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에피소드의 전체적인 구조가 일관된 플롯으로 짜여져 있지 못하고 다소 산만하게 나열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하나의 완결된 예술적 텍스트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의 결함을 십분 인정하더라도 이 작품에서 보다 중요하고 고무적인 미덕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점은 무엇보다도 허구적 예술(연극)과 솔직한 삶의 끈끈한 만남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이 특히「날아라 새들아」라는 일종의 교육문제극에서 성취할 수 있었던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변증법적 교호작용의 연극과 교육이 만나는 장
극단 연우무대는 이미 '86년의「꿈꾸러기」, '87년의「아빠 얼굴 예쁘네요」, '90년의「최 선생」등 일련의 어린이 연극들을 시도한 전력이 있는 데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방학기간을 이용하여 초, 중등 교사들을 상대로 한「교사를 위한 연극교실」을 개설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이 연극교실을「연극과 교육이 만나는 장」이라고 자처하듯이 이는 일종의 변증법적 교호작용을 불러일으킨 셈이다. 이를 통해 교사들은 연극예술을 응용한 교육의 질적 향상을 꾀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연우무대도 우리 교육 현실의 여러 문제들에 관해 생생한 실감을 교감할 수 있었던 듯하다. 이러한 상승적 교호작용의 덕택에「날아라 새들아」는「자연스러움」과「천진난만함」의 아름다움으로 다가설 수 있었다.
1장「새질서 새생활 운동」에서 9장「천천히 달리고 싶어요」에 이르기까지 이 작품에는 특유의 빼어난 동화적 상상력이 노래와 율동은 물론 무대와 소품 등에까지 처절하게 잘 어울려지고 있다. 어린이들의 연극놀이를 기초로 자기 표현욕구를 통해 매우 천진난만한 표현력으로 아이들의 삶을 둘러싼 문제점들을 들추어낸 점은 교육문제에 관한 진중한 현실 발언이면서도 자연스런 삶의 예술적 형상화 방식이 될 수 있었다.
1장「새질서 새생활 운동」은 아이들의 교통 놀이를 통해서 어른들의 편의주의적 횡포가, 6장의「나라의 비밀일기」에서는 어른들의 성적 횡포로 무참히 짓밟히는 아이들의 동심이 그려지며 기성세대들의 삐뚤어진 이기심이 어린이들의 순수한 놀이의 꿈과 생명을 앗아가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 또 3장「넌센스, 세일즈」, 4장「소풍」, 8장「통지표」, 9장「천천히 달리고 싶어요」등에서는 부모들의 왜곡된 교육열과 촌지경쟁 등이 아이들을 기능적 지식인으로 질식시켜 나가는가 하는 점들을 심각하게 보여준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5장「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7장「산딸기」에서 나타나듯이 신체적 성장에 따른 아이들의 조숙하고도 순진한 사랑이야기 등의 묘사장면이다.
이러한 장면들은 크게 보면, 사회와 학교, 가정 등에서 빚어지는 아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억압구조의 현실들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이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시선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실감으로 그려지고 있다. 간단한 나무상자들을 이용한 소도구의 활용과 무대 위를 지나가는 종이 케이블 카, TV 상자곽 속의 두루마리 그림 등의 소품은 마치 한 폭의 동화를 보는 듯이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상상력을 한껏 불러일으킨다.
극단 연우무대의「날아라 새들아」는 어른이 아이들과 더불어 함께 즐길 수 있는 연극이다. 우리 연극의 새로운 진로가 자라나는 내일의 세대들을 위한 연극교육에 의해 판가름 난다고 볼 때, 어른들만을 관객 대상으로 삼는「사랑의 연극잔치」의 허다한 기성 연극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이 작품이 유독「사랑의 연극 정신」을 담고 있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