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르포 / 여름문화예술 캠프 . 문학

창작촌 「지례」를 찾아




정대구 / 시인, 명지전문대 교수

지례 창작마을이란 어떤 곳일까. 나는 지례라고 하는 낯선 고유명사에 이상한 매력을 느낀다. 「지례」, 「지례」나는 입속으로 자꾸 되뇌여 본다.

그렇다. 지례라는 지명은 생각할수록 그 어감 탓일까. 지레 어떤 신비로움까지 내장하고 있는 듯하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한자어일까, 우리 고유어일까. 한자어라면 地禮 혹은 智禮로 쓰겠지만, 어쩐지 한자로 표기할 수 없는 우리말 어감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그것은 「지레짐작」의 지레나 지렛대의 「지레」에서 오는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착각이라도 지례는 진짜 순수 우리말이었으며 좋겠다. 지난해 우리가 캠프를 쳤던 그 아름다운 이름 꽃지 마을처럼 말이다.

참, 지난번 꽃지 마을에서의 문학캠프는 퍽 개방적이었다. 해변 특유의 그런 개방성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지난해는 출발하는 날 아침부터 억수같은 비가 쏟아져 주최측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던 걸 생각하며 끄물끄물한 날씨를 염려하여 올해에는 그런 일이 없기를 빌면서 행장 속에 우산을 챙겨 넣었다.

나는 한국 사람 어쩌고 추스르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지만 어쩔 수 없이 한마디해야겠다. 정말로 한국사람의 시간관념은 너무 개인적이다. 8시 30분에 모여서 9시에 출발한다는 것은 8시 30분부터 시작하여 예정된 인원이 다 모이면 9시 이전이라도 출발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늦어도 9시까지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현장에 나와 줘야 도리가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보면 지난번과 여전히 시간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있어서 주최측에서 전화를 걸고 어쩌고 부산을 떨다가 결국 9시 20분에서야 성대입구 시문화회관 앞을 겨우 출발할 수 있었다. 자기 혼자만을 생각하는 개인주의 때문에 많은 사람이 지장을 초래하고 고통을 받아도 아랑곳하지 않는 얌체족들은 언제나 근절될지. 어쨌든 시간을 지키지 않는 몇몇 사람들 때문에 8시 30분에 나온 나를 비롯한 상당수의 사람들이 거의 한시간씩을 낭비했다는 것은 봉사도 아니고 희생도 아니기에 정말로 억울한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

좁은 비포장도로를 따라 꼬불꼬불한 길따라

우리 일행은 두 대의 대형 관광버스에 분승했다. 나는 2호차를 탔다. 빈자리가 꽤 있어 보였다. 주최측에서 일반회원 100명, 초대작가 30명으로 잡고 있는데, 내가 헤아리기로는 일반 참가자가 80여 명, 초청문인은 20여명 정도로 보인다. 문인들만 해도 온다고 해 놓고 프로그램에 그 이름이 올라 있는데도 안 보이는 사람들이 꽤 되어 보인다.

중부고속도로를 일죽 인터체인지에서 벗어나 용원휴게소 부근에서 내가 탄 2호차가 고장이 났다. 무려 3시간 가까이 지체했다.

지 시인이 어제 우연히 스포츠신문에서 오늘의 운세를 보니까 교통사고를 조심하라고 나왔더란다. 그래서 오늘 1호차를 탈까 하다가 1호차보다는 2호차가 안전할 것 같아 2호차를 탔는데도 결국 이런 일이 일어났다며 차가 고장난 것을 자기의 일진이 나빴던 탓에 돌리고 있었다. 정말 사고에는 우연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장거리 운행에 앞선 정비공들의 정비불량을 고장의 원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사람을 충주로 되돌려 보내서 거기서 부속품을 사다가 갈아 끼우고 나서야 차는 다시 출발했다. 안동에서 목적지인 임동면 지례 마을까지는 거리상으로 40리가 넘고 길이 험하여 한시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고 했다.

안동시내를 벗어나서 임하댐 위로 높게 놓인 두 개의 다리를 건너자 마자 차는 좁은 비포장 도로를 따라 꼬불꼬불 산 속으로 점점 깊게 들어갔다. 어느때는 능선 위를 휘돌기도 하지만 차는 주로 꼬불탕꼬불탕 오르내리며 이렇게 40여분만에 드디어 길이 끝나는 곳까지 이르렀다. 길이 끝나는 곳, 그곳이 바로 영지산속 지례 창작촌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 산간도로가 오로지 이 지례 창작교실만을 위하여 뚫려진 것 같았다. 지례 창작교실을 중심으로 사방 몇 십리 안쪽에는 거의 다른 인가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50년대 말부터 속리산 입구에 말티고개를 비롯하여 아흔 아홉 굽이의 대관령 등 큰 고개들을 많이 넘어 봤지만, 지례 창작교실로 들어오는 영지산의 끊어질 듯 이어지는 아리랑 고개를 넘는 40분간의 감흥은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독특한 것이었다. 차의 고장으로 늦어진 것이 오히려 행운이라 할지, 덕분에 석양에 큰산을 넘게 되어 조망하는 산색에 아름다움이 더했다.

나는 자칫 이승이 아닌 꿈속의 세계로 넘어 들어가는 듯한 착각의 계속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남녀노소 모든 참가자들이 지각출발, 고장차량의 짜증과 피로를 한꺼번에 씻어내듯 환희와 탄성의 연발이었다.

우리는 지례 마을에서의 첫날밤을 맞이했다. 지례 마을이라고 했지만 다른 인기는 하나도 없고 오직 지례 창작교실 하나뿐이었다. 지례 창작교실은 250여년이 지난 웅장한 고가다. 주건물인 ꁁ자 모양의 안채가 있고 그 ꁁ자를 외곽에서 鑁형으로 받들고 있는 행랑채가 있고, 행랑채 중간에 높다란 솟을대문이 임하댐의 물끝을 향하여 정면으로 열려 있다. 그리고 이 주건물 오른편으로 지산서당이 자리잡고 그 넓은 뜰 앞에는 역시 높다란 솟을대문이 열려 있다. 주건물 왼편 위쪽으로는 꽤 큰 별당이 있고 별당과 주건물 사이에 사당집이 잠겨져 있다. 그리고 이 건물들을 둘러싸는 기와담이 길게 뻗어 있다. 한편 솟을대문 앞에는 헬기장까지 마련된 큰 운동장이 펼쳐져 있다. 지례 창작교실 구내가 5,000여평이 넘는다고 한다. 수용인원은 아마 많이는 200명도 수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문명에서 떨어진 오지에 예술창작촌 교실이

문명으로부터 사방 몇십 리씩 떨어진 이 산속 오지에 어떻게 이런 창작교실을 운영할 생각을 해냈을까. 창작촌 촌장인 김원길 시인의 말을 들어보면 임하댐 때문에 물속에 잠기게 된 자신의 종가집인 이 건물을 살리기 위하여 ’88년부터 지금 이곳에 그 건물을 옮기는 엄청난 일을 해왔다는 것이다. 더욱 놀랍고 존경스러운 것은 이곳이 관광지나 유원지로 개발되는 것을 적극 저지하고 오로지 예술창작의 장으로만 제공한다고 하니 참으로 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문학을 비롯하여 미술·음악 등 순수 창작을 위한 장소로서 이보다 더 좋은 곳은 별로 없을 듯 싶다.

이곳에서의 첫날 행사로서 우리는 본관에서 준비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지산서당 넓은 대청마루에 모였다. 100여 명이 편히 앉고도 남는 공간이다. 촌장인 김원길 시인의 지례 창작촌 건립의 유래와 취지의 말이 있었고 이어서 대회장인 정공채 시인의 인사말과 「문학과 인생」에 대한 강연이 있었다. 참가자들은 피로도 잊고 진지했다. 사회는 젊은 유용주 시인이 진행했다.

여류 유혜목 시인을 비롯하여 윤강로, 신형봉, 이성선 시인의 시낭송에 청중은 숨을 죽였다. 그리고 호서대학 식영과 이기영 교수의 「식생활과 건강」이라는 특강에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질문이 쏟아졌다. 역시 건강문제는 누구에게나 큰 관심사임을 입증하고 있었다.

나는 이날 대청마루에 휘영청 비치는 산간명월을 바라보면 문득 소동파의 적벽부를 읊어서 자리의 흥취를 돋구었다.

이튿날 아침 여섯시, 징소리에 맞춰 기상하여 애국가 제창과 체조로 일과를 시작했다.

아침식사를 마친 다음 우리는 각반별로 문학토론회를 열었다. 나는 소월반, 지용반, 만해반, 동주반으로 나누어진 가운데서 소월반에 속해 있었다. 주제는 「문학이 삶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토론은 진지했다. 회원들 중에는 대학교수, 대학생, 의대생, 회사원, 간호원, 개인기업체 사장, 교사 등등 다양했다. 따라서 문학과 인생에 대하여 보다 폭넓게 거론되었다.

두 시간에 걸친 열띤 토론회를 마치고 열두시 점심을 마친 뒤 자유시간을 이용하여 나는 이성선, 신현봉, 김추인 시인과 함께 차를 몰고 온 독자의 승용차 편으로 인근 영양군에 있는 조지훈 시비와 그의 생가를 순례할 수 있었다. 감동이 컸다.

역시 7시부터 저녁 스케줄로 들어갔다. 원료 박태진 시인의 「시와 현재성」, 원로 영문학자 유 영 교수의 「영시의 세계」 그리고 영화 평론가이자 시인인 김종원 님의 「영화에서의 시정신」이라는 강연을 듣고 이에 앞서 영화도 한편 감상했다. 이날 밤 시낭송에 참여한 시인은 안혜초, 신광호, 조성화, 지성찬 등이었다.

셋째날도 징소리와 함께 일어나서 하루의 일과가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다. 참가자들의 백일장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호수까지 몇 번 오르락내리락 하며 몇 점의 수석과 만났다. 점심식사 후 우리(지성찬, 안혜초와 나)는 예심을 통과해 온 작품(시, 수필, 동시)의 최종심을 보았다. 글제는 「산」과 「장마」였는데 「산」에서 좋은 작품이 나왔다. 역시 창작에 몰두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 때문이었을까. 지난해 안면도 때보다 훨씬 우수한 작품이 생산되었다.

저녁 때 대구에서 이하석, 문인수, 장석남 세 시인이 들어왔다. 오늘밤 행사에 합세하기 위해서다. 이날밤엔 이 세 분의 이야기와 시낭송을 듣고 이어서 김추인, 김태호 시인 그리고 독자들의 시낭송으로 열을 더했다. 열시부터는 대망의 캠프파이어로 들어갔다.

11시 취침시간에 노래소리가 그치지 않아

시문화회관 김경민 관장을 중심으로 한 스좜진의 노력으로 3박4일간의 일과가 진행표대로 진행되었지만 단 하나 첫날밤부터 지켜지지 않은 것은 11시 취침시간 이었다. 자정을 넘기고 새벽 3시, 4시까지 구미구미 밀어와 노래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마지막날 아침식사 후 지산서당에 전원이 모였다. 참가자 전원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일일이 일어나서 소감을 발표했다. 이구동성으로 유익하고 즐거웠다. 시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높아졌다. 내년에 다시 참가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점심을 먹고 1시 10분경에 지례마을을 떠났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모기 생각을 했다. 굶주린 모기에게 나의 피를 조금쯤 빼앗겨 헌혈공양한 것도 하나의 보시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