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전문 사진·비디오작가
김경애 / 무용평론가, 월간 「춤」편집장
8월 1일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퍼포먼스를 가진 백남준 씨는 그 스탭진과의 모임에서 주최측인 MBC가 전단을 보여주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사진작가에게 100$을 줘야 돼. 사진 쓸 때마다 사용료를 내거든. 내가 주지.』
우리의 실정을 미리 짚어서인지 그 분은 MBC측이 사진사용료를 내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내지』라고 말을 끝냈다. 그리고는 『사진 찍은 사람은 에리크 크롤(Erik Kroll)이야』라고 덧붙였다.
잠수안경 비슷한 것을 쓰고 지구를 양손에 들고 있는 듯한 이 전단에 쓰인 사진작가의 이름이 빠져있으니 꼭 넣으라는 간접적인 암시였다.
그 회의에서의 백남준 씨의 제일성(第一聲)은 좌중의 사람들에게 잔잔한 충격이었다. 아무도 그 전단의 사진작가 이름을 명시해야 한다든지, 사진 사용료를 내야 한다든지를 인식했던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사진에 대한 우리 문화의 정도를 알려주는 작은 사건이었다.
전문가에게 사진을 의뢰해 기록해야 한다는 인식
무용분야에서 전문가에게 사진을 의뢰해서 기록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해외에서 유학생들이 귀국하기 시작한 ’70년대 말부터였다. 특히 현대무용가 이정희 씨는 당시 중앙대에 재학생인 최영모 씨를 발탁해 공동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슬라이드를 춤작업에 직접 도입한 「살푸리」를 발표해 무대 밖의 기록에서 뿐 아니라 춤작품에 사진작가를 끌어들이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일을 해서 신선한 충격을 주었었다. 즉 사진예술을 춤의 동반예술로 확실하게 끌어들인 최초의 무용가라고 할만했다.
이사도라 덩컨이나 마사 그레이엄 등 위대한 족적을 남긴 무용가들을 보면 유독 그 사진자료가 많은 사람들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최승희 역시 마찬가지이다. 당사자들이 사진찍기를 좋아했다고도 전하지만, 이들은 「자기기록」이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진을 많이 남길 수 있었던 것이고, 이것은 그들이 위대한 무용가가 될 수 있는 한 요인일 수도 있는 것이다.
춤에 있어 사진은 기록과 예술성, 두 갈래를 생각할 수 있다. 공연의 막이 내리자마자 사라지는 일회성의 예술인 춤을 기록하는 문제는 무용가의 역사의식이 생기면서 대두되기 시작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1930년대 라반이라는 독일 출신의 현대무용가(그는 현대무용의 아버지라고 불리운다)는 음악의 악보처럼 무보(無譜)를 만들었다. 그 이후 500여 종의 무보들이 만들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라반노테이션이라 불리우는 가장 과학적이라는 것도 우리가 실제 공연물에 적용시키기에는 문제점이 많고 해독의 어려움이 있어 대중적이 되지 못한다.
춤의 기록에 있어 가장 고전적이고 널리 쓰이는 것은 사진이다. 춤공연이 끝나면 프로그램과 사진과 공연평이 남는다는 무용가들의 약간 자조적인 표현은 이 분야의 비애 같은 것을 느끼게 해준다. 사진은 무용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기록의 도구이다.
앞에서 이정희의 작업에 대해 언급했듯이 사진이라는 분야가 춤작업에 하나의 예술요소로서 증폭되는 경우도 이제는 보편화되었다. 현대 기계메카니즘을 이용해 춤을 더욱 더 돋보이게 하는 작업이 꼭 무대 위에서 같이 벌어지지는 않더라도 사진은 이제 기록적인 차원에서만 강조되는 것이 아니다. 앞의 백남준 씨의 경우처럼 지구를 양손에 들고 있는 사진 한 장에서 그가 위성예술을 실행해 보여주고 있는 예술가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무용가에게 있어 사진은 그 자신의 예술관, 작품의 우수성 정도를 가늠하게 한다.
영국의 어떤 무용 경연대회에서는 예선에서 필름 한 롤에 담긴 춤포즈만을 가지고 심사를 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말하자면 필름 한 통에 찍힌 춤포즈만 봐도 그 사람의 춤실력을 금방 알아낸다는 것이다. 춤실력이 떨어지는 사람을 사진이 아무리 예술적으로 기교를 부리고 우수한 사진작가가 아무리 잘 찍어내더라도, 춤을 잘 추는 사람의 사진은 당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만큼 사진은 또 솔직하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 무용을 담고 있는 사진작가들을 보면 최영모, 조대형, 최영태, 김찬복 씨가 주로 활동하고 있다. 김수남 씨 등 몇몇 전통춤이나 민속에만 관심을 갖고 작업을 하는 이들도 있다. 송인호(「옵서버」의 사진기자)씨 등 아직 무용계에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상당한 관심으로 무용계를 지켜보는 신진들이 있다.
최영모, 조대형, 최영태 씨는 중앙대 사진과 동문들로 30대 중반의 연배이고, 국립극장의 직원으로서 국립무용단 발레단을 주로 커버하고 있는 김찬복 씨는 연령적으로 이들보다 위이다.
현대춤에 관심 높았던 최영모 씨의 사진
’80년대 후반까지만해도 무용공연의 대개의 작업은 최영모 씨의 사진에 담겼다. 특히 최영모 씨는 현대춤에 관심이 높아 그 전위적인 작업들을 사회에 알려주는 이미지 작업을 담당한 셈이다. 현대춤이 우리 무용계에 뿌리를 내리는 ’80년대를 통해 그의 이런 공로는 정말 크다고 할 수 있다. 어떤 경우는 춤의 실제적 작업보다도 앞서가면서 그 이미지를 구체화해서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그것은 춤전문 인쇄매체들이 자리잡으면서 무용가들이 자기 홍보를 해야한다는 인식이 높아지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그래서 공연이 끝난 뒤의 기록사진들도 다음 공연에 앞서서 자기 이미지를 알리는데 많이 쓰였다.
최영모 씨의 사진은 흑백의 무대를 밀도 높고, 구성력 있게 장면을 살려줘서 독특한 분위기를 창출해 춤전문 사진작가로서 자리를 굳혔다. 사진전시회도 개최했었다.
현재 무용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춤사진 작가는 조대형 씨이다. 그는 월간 「객석」의 창간 때부터 무용·연극 사진을 찍어오다가 '91년 7월 프리랜서로 전향해 무용사진만을 찍고 있다. 현재 서울공연 전체의 2/3 이상을 그가 찍고 있다. 「국수호작품집」, 「한국의 춤」(김매자 저)등 사진 위주의 책도 간행했고, '87년 「객석」창간 3주년 기념으로 사진전도 개최했었다.
그는 무용사진이 다른 것보다 훨씬 작업이 까다롭다고 말한다. 촬영은 빛이 있어야 가능한데, 무대 조명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이유없이 어두운 창작무용에 대해 불평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 자신에게 얼마나 조명을 잘 다스리는 노하우가 있느냐가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좋은 사진은 조명에 달린 것이라고 못박아 말한다.
국립극장의 김찬복 씨는 공무원의 신분임으로 우선 직장에서 원하는 사진작업을 해야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시간을 쪼개어 한국 현대무용진흥회의 행사 및 공연은 거의 맡아하고 있다. 국립극장에서 '85년 첫 전시회를 가졌는데, 그 이후 춤관련 중요한 행사 때마다 작품전을 국립극장 로비에서 갖고 있다.
문예진흥원의 자료를 담당하는 임성규 씨는 '79년 문예진흥원 개관 무렵부터 공연사진을 찍고 있다. 유니버설발레단의 전속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최영태 씨도 근 10년 이상을 춤사진 전문으로 하고 있다. 그는 발레전문 사진작가로 독특한 개성을 보여주고 있다. 말하자면 현대춤이나 한국춤과는 달리 동작이 분명하고 그 분명한 동작을 일순간에 잡아내야 하는 발레에 훈련된 탓이라고 한다. 조승미발레단 등 발레인들은 최영태 씨의 이런 선명한 동작 포착에 매력을 느껴 그를 선호한다.
상업사진(광고물 제작)의 스튜디오에서 1년간 조수로 경력을 쌓다가 「객석」의 보도사진을 찍어온 조대형 씨는 보도사진의 표피적인 활동보다, 춤에 빠져서 하는 프리랜서로서의 전문작업이 훨씬 재미있다고 말한다. 보도사진은 작품의 특징적인 것만을 담으면 되는 표피적인 작업인 반면 춤전문 사진작업은 무용가와 같이 호흡하면서, 즉 무용가족이 되어서 극장에 살면서 해야한다는 것이다. 조대형 씨뿐만 아니라 사진작가들은 대개의 시간을 극장이나 무용가의 연습실에서 보낸다. 해당 무용가와 대화를 해서 중요한 장면을 고르고, 리허설을 보면서 그 장면들을 보다 효율적으로 살릴 수 있도록 점검한다. 이제는 가정의 경조사가 공연과 겹치면 공연을 택하는 것이 상례화되어 있다.
춤사진작가들은 가장 어려운 점으로 무용가들이 사진 인식도가 낮다는 점을 꼽는다. 무용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진이더라도 쓸 때마다 사용료를 내는 서구의 풍조를 생각할 때 너무나 쓸쓸하다는 것이다. 사진작가로서의 인정도 중견 무용가들의 깨인 의식에서 겨우 인정하고 있는 현 수준을 감안해서 참아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작품성을 인정해 작가로 대우하진 않는다고 해도 국산품이라곤 하나도 쓰이지 않는 사진 재료들을 감안하지도 않고 사진값을 청구하면 「비싸다」는 태도는 정말 프로의식에 상처를 준다고 말한다.
흑백위주의 사진들이 칼라·슬라이드로 바뀌어간다
현재 사진작가들은 의뢰받은 공연에 대해 대략 20∼30커트의 사진을 살려낸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흑백위주의 사진이던 것이 칼라·슬라이드로 바뀌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신문 등 매체들이 칼라사진을 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이 좋으면 사진작가들도 욕심이 난다. 안무가와 사진작가와의 시각차이가 있어 의견이 상충되기도 하지만 일단 의뢰를 받고 사진을 찍는 이상 안무자가 원하는 대로 맞추어 주려고 노력하는 것이 대개는 도리라고 믿고 있다. 최근 무용가들이 사진에 대한 눈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영화배우처럼 예쁜 사진만을 원하는 무용가들이 많다. 이들의 인식을 바꾸어주기 위해 설득하고 노력하는 것, 그것도 사진작가들의 몫이다. 그만큼 현재 활동하는 소수의 춤전문 사진작가들은 무용에 대한 사명의식, 계몽의식을 가지고 있다. 같이 성장해 나가야할 운명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춤전문 사진작가로서 가장 중요한 점은 직업의식이라고 말한다. 그 프로의식은 무용에 대한 애정에서 시작한다. 대개의 사진작가들은 현재의 영세한 자신들의 체제에 문제가 있음을 알고 있다. 무대사진을 찍으려면 적어도 5대의 카메라가 설치되고 그 카메라를 맡는 조수들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은 디렉터의 역할만 해서 나중에 사진을 자기 안목에서 골라 자기 사인을 해서 내보내는 완전한 디렉터 시스템이 되어야 함을 알고 있다. 그래야 사진을 여러 각도에서 잡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경제사정이다. 서구처럼 이런 시스템이 우리 무대문화에 도입되기는 어쩌면 불가능할런지도 모른다. 지금은 단 하나의 카메라에 의존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미욱하게 일하는 것,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무용가들의 외국공연에도 자주 동반해서 그 기록을 담고 있는 조대형 씨는 신진 사진작가들을 키워내야하는 자신들의 사명감에 대해 말한다. 춤사회에 사진 기록자는 앞으로도 영원히 필요한 것이 아닌가, 젊은 세대를 끌어들여 춤에 관심을 갖게 하는 일은 비단 사진작가들의 과제일 뿐 아니라 무용가들도 지도층들은 그 생각도 해주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무용가들은 대개 안면에 의해 편안하게 작업을 하려고 드는 편이다. 사진성격이 작가마다 다 다른데도 불구하고 작품 성격에 따라 맞추어 보려는 고려는 적은 편이다. 그리고 사진작가를 그저 내 공연에 필요해 쓰는 정도로 급급할 뿐이다.
이제 10여년을 무용가와 같이 호흡하고 살아온 사진작가 몇몇을 무대사진을 체계적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사명감 혹은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그 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각자가 조수를 두고 이들을 좀 키워봐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이다. 조대형, 최영모, 최영태, 김찬복 등은 권익옹호 및 교류를 위해 모임을 만들어보려는 시도도 없지 않았다. 연대해서 도와가며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시도였다. 예를 들어 천정이 보통높이의 2배정도 되는 스튜디오를 구하기 어려운 실정에서 이러한 전문 공간을 같이 구해서 쓴다면 보다 질 높은 사진들을 건져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시도였다.
공연, 작품 많이 보기가 자기연구에 도움된다
이들은 또 자기연구도 나름대로 하고 있다. 공연을 많이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자신에게 의뢰하지 않은 작품이더라도 거의 다 본다. 그리고 외국의 무용사진집, 비디오 작품을 구입한다. 전문가 이상으로 춤용어, 역사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불확실하지만 좋아서 하는 일, 더욱 보람을 가지려면 역사에 대한 긍지를 갖는 것이다. 무용가의 역사가 적어도 내손에 의해서 기록된다는 자부심 같은 것 말이다.』라고 사진작가들은 입을 모은다. 이들은 무용가에게 재삼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사진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 돈을 떠난 기록이다. 현재 춤자료가 불충실한 것은 무용가들에게 책임 있다』는 점이라고 덧붙인다. 한편 타 공연 예술분야와 비교해 볼 때 연극·음악가들이 사진에 대해 전혀 인식하고 있지 않은 현재, 무용은 이것이나마도 다행이라고 말한다.
'92년 문예진흥원의 영상자료 통계를 보면 총 3,718개의 비디오테이프 중 전통분야 464, 미술 420, 국악 464, 양악 960, 연극 168, 문학 65인데 비해 무용은 1,177로 가장 높다. 여기는 문예진흥원에서 구입한 자료와 예술가의 기증자료가 합한 것인데 통상 문예진흥원의 예산 중 무용분야가 가장 낮은 것임을 감안할 때 대개 무용가들의 기증본의 아닐까로 추측되는데, 이것은 무용예술의 특성상 기록에 대한 관심이 그 어떤 분야보다 높다는 것을 알게하는 일례이다.
춤 공연현장 기록을 담는 비디오 예술인으로는 지화충 씨와 천승요 씨 둘이 활동하고 있다. 지화충 씨는 현재 90% 이상의 춤공연 현장을 비디오로 옮기는 무용가의 동반자로 이름을 높은 사람이다. 문예진흥원의 영상파트에서 일하는 천승요 씨는 '79년 문예진흥원의 개관 때 입사, 전자공학도로서의 전공을 예술에 살려낸 인물이다. 비디오작업을 춤에 끌어들인 이는 천승요씨가 더 먼저로 기록된다. 「한국무용아카데미」등의 작업을 하다가 현재는 지화충 씨는 양적으로 넓게 수용하고 있어 무용계에는 없어서는 안되는 인물이 되었다.
천승요 씨는 춤공연 무대보다는 전통을 좋아해 전통예능의 현장을 비디오에 담았었다. '80년대에 진도시킴굿 등 같은 것은 10여 차례 이상 보면서 카메라에 담았다. 인간문화재가 되거나 세상에 알려지기 이전에 자신이 비디오로 먼저 담았다는 것도 그의 긍지 중의 하나이다.
춤비디오 작업에 관심이 있는 인물로 이정희와 「비디오와 댄스」 시리즈 작업을 해온 그녀의 남편 이동현도 꼽을 수 있다. 그는 이정희에 관련된 작업만을 하는데, 기록의 측면에서도 중요하지만 춤무대에 본격적으로 비디오라는 장르를 끌어들였다는데 의미를 두고 있다.
문예진흥원에는 '79년 5월 처음 자료관이 생겨 시청각실이 있었다. 방송국을 제외하고는 당시로서는 가장 성능좋은 기재를 갖고 있는 곳이었을 것이다. 천승요 씨는 이 기관을 바탕으로 직업적으로 충실하게 일해왔다. 무형문화재 지정 과정이나 그 이후를 담은 전통물에는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이 많다. 특히 인간문화재로 재정된 그후의 공연들이 점차 변질되는 것도 그의 비디오를 추적하면 알게 된다. 한 사람의 춤을 20여 차례 이상 비디오로 녹화한 것도 많기 때문이다.
비디오도 사진과 마찬가지로 당사자들은 기록성과 작품성을 생명으로 꼽는다. 방송국이 3∼5대의 비디오 기재를 동원해 일반인 대상의 감상용 작품으로 카메라에 담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안무자를 위해 촬영해야 하는 핵심이 있다. 즉 안무자가 훗날 어떤 비디오를 보고 거기에 담긴 춤을 재생해낼 수 있으려면 무대 전체를 담는 작업(기록적인) 작업이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체의 구도, 클로즈업, 세부적인 것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좋은 공연을 보면 카메라가 흥분한다.
현재 춤비디오를 찍는 작가들은 모두 혼자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과 마찬가지의 실정이다. 천승요 씨는 최근 조수를 두고 두 대로 촬영하는 것을 시도해 보았다. 그 효과는 물론 다르다. 카메라 두 대를 혼자하는 방법도 시도중에 있다. 그는 또 김근희의 「0시의 세계」를 통해 무용무대에 비디오를 직접 끌어올리는 작업도 해보았다. 시일이 촉박해 그 효과가 관객에게 어떻게 미쳤을지는 자신도 의문이지만 앞으로 공연예술가들이 비디오라는 매체를 어떻든 무대로 끌어들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강조한다.
비디오 전문가들도 10여 년의 춤과의 동반작업을 거치면서 이제는 춤전문인화 되었다. 좋은 공연을 보면 「카메라가 흥분한다」. 무용가가 공을 들인 작품은 로비에서부터 열기를 느낀다. 작품이 좋지 않은 것은 찍기가 싫다. 심지어 공연 중간에 처음보는 장면이더라도 무대에 등장해 들어오는 방향의 감을 잡을 수가 있다. 그 「감」이 어쩌면 비디오 예술의 생명인지도 모른다.
천승요 씨는 3천 편 이상의 비디오 작업을 해왔다고 말한다. 신진을 제외하곤 중견무용가들을 찍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런데 홍신자의 공연을 아직 카메라에 담지 못했다. 그는 앞으로 춤현장 촬영은 컴퓨터에 수록하는 시대가 곧 올 것이라고 말한다. 또 비디오가 디지탈화되면 비디오로 사진을 현상해 낼 수 있는 기록의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이라고 예견한다. 문제는 비디오에 대한 무용가의 인식부족으로 자기작품을 폐쇄적으로 비디오 공개를 하지 못하는 현실이다. 다른이가 모방할까 봐서라든지, 혹은 평가를 두려워하는 무용가로서의 프로의식 결여가 비디오 기록화에 장애가 되기도 한다.
일반 사진관의 결혼식 비디오나 사진출사비용의 1/5도 안 되는 가격으로 봉사하는 이들은 자신의 무용예술가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는 긍지에서 가능할 수 있다고 전한다. 10여년의 발아기를 거쳤으니 현재에 대한 점검, 말하자면 무용가의 비디오에 대한 인식전환도 필요한 시기임에는 틀림없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