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재조명 2

우의적 풍경과 향수의 의미




이태동 / 문학평론가, 서강대 교수

모든 감정은 각기 하나의 선험적인 대상에 결합되어 있으며, 따라서 후자의 제시는 전자의 현상학이다.

-「독일 비극의 근원」

상로(尙盧) 이태준은 시인 정지용과 더불어 한국근대문학을 완성시킨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 일컬어진다. 그러나 그는 식민지시대와 이어서 찾아온 혼돈된 「해방공간」에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다가 1946년, 그러니까 그의 나이 48세가 되던해 이북으로 넘어간 후 분단의 장벽 때문에 다시는 우리에게로 돌아오지 않았다.

6.25 동란이 일어났을 때 그는 이북 종군작가단에 가담하여 서울로 내려와서 포화 속에 낙동강 전선까지 다녀가는 등 폐허가 된 남쪽땅을 밟았으나, 9.28 수복 때 다시 북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약속의 땅이라고 생각했었던 이북에 가서도 결코 그가 그렇게 희구하던 유토피아를 발견하지 못했었던 것 같다. 최태웅의 「이태준 비극」과 선우휘의 「남북 문인들 문제」등과 같은 증언에 의하면, 이태준은 평양까지 올라갔던 한국군에게 은밀히 귀순의사를 밝혔다고 했다. 그러나 국군들은 그를 구출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후 1955년 김일성에 의한 남로당 계열의 숙청이 시작되자 그는 『문학분야에서의 부르주아 사상과 투쟁…』에서 비판을 받아 「함남일보사」의 교정원으로 추방되었다가 함흥시멘트 벽돌공장의 파철수집노동자로 전락했다. 그러다가 그는 1964년 경 북한 중앙당 문화부 창작 제1실 전속작가로 갔다는 증언이 있지만, 그후 그에 대한 소식은 묘연하다. 아마 그곳에 가서도 지금쯤 이렇다고 할만한 작품을 남기지 못하고 숨을 거둔지 오래가 될지도 모른다.

혜성처럼 나타나 한국근대소설을 끌어올려

이태준은 1930년대에「고아」나 다름없는 상황에서도 불우했던 역경을 극복하고 우리 문단에 혜성처럼 나타나 한국근대소설을 거의 완성단계로 끌어올리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지만, 원숙한 단계에서 그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분단의 벽」에 갇혀 이렇게 비극적인 종말을 거두게 된 것은 지극히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평론가 김치수 교수는 불행한 시대를 살다가 간 그의 비극을 두고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의 생애를 돌이켜보면 그것은 바로 우리 역사의 비극성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 같아서 그 개인의 선택을 탓할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의 선택이 우연이었는지 필연이었는지 이제 아무도 대답해 줄 수 없는 이 마당에 그는 지금 어디서 잠들고 있을까? …그가 고아의식을 극복하기 위해 그 많은 대가를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에게 남아있는 것은 무덤 없는 죽음인가, 이름 없는 재능인가?1)

비록 이태준은 「해방의 공간」이후 들끓었던 이념의 물결에 의해 시간의 지평선 너머로 실려가버렸지만, 열려지고 있는 듯한 분단의 문과 함께 그의 이름은 다시 살아나서 해방을 전후로 한 우리 근대문학사에 지울 수 없는 크나큰 획을 긋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김치수 교수의 지적대로 『어쩌면 그의 작가적인 생명은 1930.년대 후반에 끊어졌을지도 모른다. 그의 문학세계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그의 모든 작품이 모두 읽혀질 대 가능할 것이다.』2) 그러나 한 작가의 개별적인 작품, 특히 그의 대표작은 그의 문학세계와 「소설의 집」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의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그의 몇몇 대표작들을 살펴보는 일은 그의 작품세계를 연구하고 평가하는데 하나의 훌륭한 척도가 되는 동시에 길잡이가 될 것이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그의 문학의 정수에 해당되는 단편 몇 편을 중심으로 그의 문학세계가 무엇을 나타내고 또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를 깊은 애정을 가지고 살펴보고자 한다.

이태준은 해방이 되던 다음날인 8월 16일 고향인 철원땅에서 일본이 패전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상경해서 종각옆 어느 빌딩 앞에서 백철을 만난 흥분된 기분으로 『나도 이제 회고적인 감격 스타일이 아니고 미래를 투시하는 대작 로망을 집필하고 싶은 야심을 갖고 싶다』고 말했다. 이태준의 이러한 말은 흥분한 상태에서 은연중에 한 말이지만 그의 관심이 언제나 「역사적 비전」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그는 자신이 해방 전에 쓴 작품들이 「회고적 감격 스타일」로 이루어졌다고 자의식적인 고백을 했지만 그것은 그가 생각했던 미래의 작가적인 비전, 즉 역사적 상상력과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니라, 끊을 수 없이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 이와같은 사실은 그가 민족적인 정서를 정확히 표현하려고 했던 그의 탁월한 단편들이 「회고적인 감격 스타일」로 쓰여졌기 때문에, 그것에는 향토색 짙은 우울한 향수가 짙게 흐르고 침묵 속에 숨은 저항의식과 투철한 도덕성이 빽빽이 점철되어 있다.

이태준 작품에 숨겨진 저항의식은 일제 식민지시대에 부조리한 사회상황에 대한 것으로서 그의 도덕적인 비전과 합쳐져서, 단테가 칸 그란데 델라 스칼라 (Can Grande della Scalla)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시가 지닌 네 개의 차원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말한 우의적(寓意的):allegorical) 구성과 닮은 틀을 제공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네 개의 차원이란 『축어적(주인공이 저 세상에서 겪는 경험), 도덕적(그의 영혼의 궁극적 운명), 우의적(그가 겪는 것들이 그리스도 생애의 이런저런 측면의 재현인 차원), 신비적(analogorical:그의 드라마가 인류 전체의 최후 심판을 향한 진행의 전조인 차원) 등의 차원들을 말한다.』3)

우의적인 차원으로 나타낸 성스러운 희생자들

도덕적 차원이 「영혼의 궁극적 운명」에 관한 것이라면,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잃어버린 낙원을 다시 찾는 역사의 끝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영혼의 궁극적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하거나 부조리한 현상에 대해 저항하는 마스크를 쓴 성스러운 희생자들은 우의적인 차원으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이태준의 단편들에 나타난 여러 작중 인물들은 대부분 대개 식민지적인 역사적 상황에 의해 파괴되거나 외상(外傷)을 입고 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파괴되어 단절되지 않았던 통일된 전체성을 희구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잔해(殘骸)나 파편 혹은 성스러운 희생자들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통일된 과거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단순히 회고적인 행위가 아니라 미래 속에서 잃어버린 낙원을 구원하는 일, 즉 역사 속에서 구원을 찾으려는 의식적인 노력과 일치될 수 있다. 발터 벤야민도 추억과 회상은 무의식적인 행위가 아니라 의식적인 행위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태준 문학의 구심이자 그의 출세작인 「五夢女」의 경우부터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하자.

김윤식 교수와 김치수 교수가 김동인의 「감자」에 비유한 이 작품은 단순히 자연법칙에 지배를 받는 복녀와는 다소 다른 면을 지니고 있다. 오몽녀는 그 이름이 나타내 주듯이 꿈을 가지고 있고 본능적으로 행동을 하는 듯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수동적이라기보다도 능동적이다. 그리고 이 작품의 끝에 가서도 오몽녀는 복녀의 비극적인 종말과는 달리 자기에게 부딪친 비도덕인 덫을 벗어나서 건강한 사내 금돌이와 희망의 땅이 있는 해상 위로 탈출하는데 성공을 한다.

얼핏 보기에 이 작품은 순수한 자연주의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칡넝쿨처럼 얽혀 난맥상을 보이는 위험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자신에 부딪친 어려움을 어떻게 해서든지 극복하는 의지를 보인다는 점에서는 리얼리즘에 속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가장 중심적인 주제는 우의적인 성격에 있는 것 같다. 토착적이고 서민적인 한국인의 딸을 상징하는 오몽녀의 움직임은 조국을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빼앗기고 궁핍한 식민지시대에 살면서 안으로 생명력을 억압하는 낡은 인습에 묶여서 억압과 굶주림에 시달린 나머지 고향을 떠나 이국땅으로 떠나갔던 가난한 우리 민족의 삶과 역사를 우의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는 듯하다.

김치수 교수도 「그녀가 가정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 저곳 떠돌아다니며 유랑생활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일제에게 조국을 빼앗기고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수많은 사람들이 간도 등지의 유랑민으로 전락한 모습의 상징일 수도 있다」4)고 말했다.

오몽녀의 삶의 형태가 유교적인 시각에서 볼 때는 도덕성을 잃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보일지 모르지만, 리얼리즘의 시각에서 보면 그녀의 삶은 낡은 인습과 가난으로 말미암아 파괴된 상처입은 희생자의 삶이다. 그래서 그녀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녀의 건강한 삶을 위협하고 파괴하는 억압과 인습의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당연하고 정당하다.

오몽녀가 눈멀고 늙은 지참봉과 부부관계를 맺은 것은 순수한 사랑을 바탕으로한 대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가난으로 말미암아 나이 불과 9살 때에 그에게 팔려가서 이루어진 것이다.

두 아이의 아버지의 일본경찰 앞잡이인 「남순사」와의 관계도 오몽녀의 충동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강압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오몽녀가 생존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오몽녀가 겪은 비극적인 삶의 현실은 식민지 시대에 폐허가 된 우리민족의 역사적 현실과도 같다. 비록 오몽녀가 병적인 이들과 육체적인 관계를 맺은 것은 불륜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녀가 생존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란 것을 우리가 이해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녀가 모든 억압적인 사슬을 과감하게 끊고 건강한 생명력을 가진 청년 금돌이와 배를 타고 새로운 땅을 향해 항해하는 것을 볼 때 오히려 우리는 그녀에게서 새로운 도덕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태준의 또다른 대표작이나 그의 작가적인 재능을 잘 나태내주고 있는 「복덕방(福德房」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하면 이 작품 역시 우리민족이 식민지 시대의 전환기적인 삶을 살아야만 했던 수난의 역사를 짙은 도덕성을 바탕으로 해서 우의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한일합방 이전에 훈련원 참의로 있던 「서참의」가 시대적인 변화에 순응해서 생존해 남기 위해 복덕방을 경영해야만 하는 사실이 그렇고, 그와 대조적인 인물인 「안초시」가 고루한 자존심에 매달려서 현실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환상적인 삶을 살려고 하다가 낭패를 당해 자살을 해야만 하는 것 또는 그러하다.

어찌 이것뿐이랴. 아버지와의 인륜을 배반하고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돈을 벌려고 하면서도 자신의 하잘 것 없는 명예를 지키려고 하다가 「서참의」의 도덕적인 위협에 아버지의 장례식을 화려하고 경건하게 치뤄야만 했던 발레리나 안경화의 슬픈 행각 등은 모두다 식민지 시대의 충격으로 붕괴된 봉건사회의 파편들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주제도 도덕성에 철저히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가진 사람은 살아남고 그것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패배자의 길을 걷는다. 「서참의」는 훈련원 시절을 그리워하며 나라를 잃고 복덕방 거간 노릇을 해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눈물을 흘리며 고통스러워 하지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 속에서 고통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우정과 인간애를 나눈다.

반면 「안초시」는 아름다운 과거에 대한 추억도 없이 변화된 환경에 대처해서 그에게 부닥친 어려움을 능동적으로 극복하지 못하고 언제나 불만과 불평 속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가 바라는 일은 화투패를 떠보는데서 엿볼 수 있듯이 뜻밖의 행운이나 요행만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 결과 그는 현실에 대해 불평을 하는 것과는 걸맞지 않게 일본에 가서 무희로서 성공을 하고 돌아온 딸에게 의존해서 비루하게 살아간다. 그러다가 복덕방에서 만난 박희안으로부터 일제가 대륙진출을 위해 황해 연변에 신 항구를 개척한다는 정보를 잘못 듣고 그 부근에 있는 땅에도 투기를 했다가 실패하게 되어 궁지에 몰리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서참의」는 「안초시」가 살아있을 때는 그를 놀리기도 하고 우정있는 능멸까지도 했지만, 그의 죽음 앞에서는 그 누구보다 경건했다. 그래서 그는 물질주의로 타락한 안경화의 번쩍이는 명예를 담보로 해서 그녀의 아버지의 장례식을 제대로 치르게 함으로써 퇴색되어 가는 인간의 도덕성 회복을 무섭게 주장한다.

그는 도덕성이 있는 곳에 물질이 아닌 인간애가 있는 영혼의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다른 무엇보다 삶과 죽음, 그리고 생명을 이어가는 핏줄기와 관계된 인륜의 도덕은 서두에서도 언급한 것같이 인간으로 하여금 전체적인 통일성에 대해 귀속감을 느끼게 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역사 및 역사적 비전과의 관계를 기억하고 지키게 하는 유일한 단서이고 길이기 때문이다.

「돌다리」는 민족의식을 감동적으로 드러낸다

작품「돌다리」는 식민지시대에 위협을 받고 있는 민족의 전통과 그 뿌리가 깊은 관계가 있는 역사의식을 대단히 명확하고 감동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시골 지주의 아들인 창섭이 의사가 되어 서울에서 개업한 후 병원을 확장하기 위해 고향인 시골로 내려와서 아버지에게 농토인 토지를 팔자고 요청을 한다. 이 말을 듣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단순한 부의 증식과 육체적인 안락을 위해 그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아 그 위에서 일생을 두고 비옥하게 가꾸어 놓은 땅을 팔 수가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한다.

창섭의 아버지가 땅을 팔 수 없다고 아들의 간청을 거부하고서 자신의 뿌리와 바탕에 대해 위협마저 느끼면서 땅과 관계된 도덕관을 설파한 격적인 이야기는 역사를 통한 건강한 유토피아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시금석과도 같은 것이 된다.

「천금이 쏟아진 대두 난 땅을 못 팔겠다. 내 아버지께서 손수 이룩허시는 걸 내 눈으로 본 밭이구, 내 할머님께서 손수 피땀을 흘려 모신 돈으로 장만하신 논들이야. 돈 있다구 어디가 느르지논 같은 게 있구, 독시장밭 같은걸 사? 느르지 논둑에 선 느티나문 할아버님께서 심으신 거구 저 사랑마당에 은행나무는 아버님께서 심으신 거다. 그 나무 밑에를 설 때마다 난 그 어른들 동상(銅像)이나 다름없이 경건한 마음이 솟아 우러러보군 헌다. 땅이란 걸 어떻게 일시 이해를 따져 사구 팔구 허느냐? 땅이 없어봐라, 집이 어딨으며 나라가 어딨는줄 아니? 땅이란 천지 만물의 근거야. 돈 있다구 땅이 뭔지도 모르구 욕심만 내 문서쪽으로만 사 모기만 하는 사람들, 돈놀이처럼 변리만 생각허구 제 조상들과 그 땅과 어떤 인연이란 건 도시 생각지 않구 헌신짝 버리듯 하는 사람들, 다 내 눈엔 괴이한 사람들로밖엔 뵈지 않드라」......

「팔지 않으면 그만 아닙니까?」㐀

「나 죽은 뒤에 누가 거두니? 너두 이제두 말했지만 너 문서 쪽만 쥐구 서울 앉아 지주노릇만 허게? 그 따위 지주하구 작인 틈에서 땅들만 얼말 골른지 아니? 안된다. 팔테다. 나 죽을 임시엔 다 팔테다. 돈에 팔줄 아니? 사람한테 팔테다. 건너 용문이는 우리 느르지 논 같은 건 한 해만 부쳐 보구 죽어두 농군으루 태났던 걸 한허지 않겠다구 했다. 독시장밭을 내논다구 해봐라, 문보나 덕길이 같은 사람은 길바닥에 나 앉드라도 집을 팔아 살려고 덤빌게다. 그런 사람들이 땅 임자 안 되구 누가 돼야 옳으냐? 그러니 아주 말이 난 김에 내 유언이다. 그런 사람들 무슨 돈으로 땅값을 한 몫 내겠니? 몇몇해구 그 땅 소출을 팔아 연년이 갚아나가게 할테니 너두 땅값을랑 그렇게 받아갈 줄 미리 알구 있거라. 그리고 네 모가 먼저 가면 내가 묻을 거구, 내가 먼저 가게 되면 네 모만은 네가 서울로 그때 다려가렴. 난 샘말서 이렇게 야인(野人)으로나, 죄없는 밥을 먹다 야인인 채 묻힐 걸 흡족히 여긴다.」㐀

즉 아들 창섭이는 땅이 상징하는 근원과의 단절을 나타내고, 아버지는 홍수가 져서 흙탕물이 흘러도 움직이지 않는 「돌다리」에 관한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근원과 현재와의 연속관계를 나타냄은 물론 과거와 현재의 시간적인 차원을 넘어 인간적인 삶의 전체적인 통합구조를 이해하려고 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노인이 그의 아버지가 놓았던 돌다리를 두고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데서 더욱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비가 아무리 쏟아져도 어떤 한정을 넘는 법은 없다. 물이 분수없이 늘어 떠나려 갔던게 아니라, 자갈이 밀려 내려와 물구멍이 좁아졌던지, 그렇지 않으면 어느 받침돌만 제대로 보살펴 준다면 만 년을 간들 무너질 리 없을게다. 그저 늘 보살펴야 허는 거다. 사람이란 하늘 밑에 사는 날까지 하루라도 천리(天理)에 방심을 해선 안 되는 거다…」㐀

노인이 이렇게 생각한 것은 물의 흐름이 시간의 흐름을 상징한다면, 「돌다리」는 시간을 건너는 수단인 동시에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을 이어주는 통합된 존재의 뿌리를 나타내주기 때문인 것 같다.

우의성이 탁월한 그로테스크한 작품들

그러나 이태준 문학세계 가운데 우의성을 가장 탁월하게 나타낸 작품들은 아마도 순결한 희생자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그로테스크한 인물들이 서식하는 「달밤」, 「봄」, 「불우선생」, 「손 거부」, 「아담의 후예」그리고 「촌뜨기」와 같은 작품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순결한 희생자와 같은 인물들은 인간의 구원적인 순결을 나타내고 있지만, 그들은 식민지적인 상황에 의해 희생된 자들이다. 그들은 때때로 배우처럼 보이지만 그것보다는 상처입은 희생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추방당한 성자(聖者)와도 같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반어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면을 지니고 있는 광대와도 같다. 그들은 억압적인 식민지 사회에서 소외를 당하는 국외자(局外者)로서 현실에 대해 처절한 저항은 하지 않지만, 웃지 못할 웃음과 소멸의 페이소스 속에 반어적인 태도를 보인다.

「달밤」의 주인공 「황수건」은 다소 바보스러운 광대의 모습을 한 패배자처럼 보이지만, 그가 가진 순결과 다소 반어적인 태도 때문에 우리는 그로부터 완전한 패배자가 아니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작품「봄」의 주인공은 시골에서 땅을 갈다가 빚에 쪼들려 서울로 왔으나 더욱더 궁핍해져서 아내마저 잃고 딸아이와 함께 외롭게 산다. 어느 봄날 공원으로 벚꽃놀이를 갔다가 행복한 다른 아이들을 보고 부러워서 그의 딸에게 주려고 벚꽃가지를 하나 꺾다가 경비원에게 심한 봉변을 당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화풀이를 하다가 더욱 큰 손해를 본다.

이들 이외에 한말의 혼란기와 식민지 시대에 이곳 저곳 여관방을 전전하며 굶주린 생활을 하지만 부조리한 시대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비분강개하는 「불우선생」, 착하기만하고 머리가 좀 모자라는 듯하지만 순진한 정열로서 이룰 수 없는 대망의 꿈을 항상 꾸는 「손거부」, 뭍으로 간 딸을 기다리기 위해 부둣가에서 거지처럼 생활을 하다가 어느 서양사람의 도움으로 편안한 밥을 먹여주는 양로원에 수용되어 있다가 어느날 곡마단 음악소리를 듣고 향수에 젖어 그곳을 탈출하는 「아담의 후예」에 나타난 주인공 「안 영감」그리고 가진 논밭이 없어서 몇해에 걸쳐 화전민 노릇을 하며 산짐승을 잡아먹으며 구차한 생활을 하다가 산짐승을 잡기 위해 그가 파놓은 함정에 사냥 나왔던 순사부장을 빠지게 해서 유치장에 20여 일 동안 갇혀 있다가 나와서 가족들과 뿔뿔이 헤어져서 유랑의 길을 걷는 순박하기만 하고 저능한 「촌뜨기」등은 모두다 위에서 말한 식민지적인 상황에 희생된 자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그로테스크한 인물들이다.

프로이드가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이 이와 같은 정신적인 외상을 입은 듯이 신경증적인 반복을 보이는 것은 외부환경에서 받은 심한 충격이 의식에 의해 차단되거나 완전히 흡수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그것을 뚫고 나온 현상들이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앞에서도 밝힌 상징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기보다는 우의적인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서 식민지 시대에 있어서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소설로서 형상화하고 있다. 왜냐하면 상징은 쓰러지는 가운데 구원의 빛을 띤 「자연」의 얼굴을 보이는 반면에 우의의 경우 보는 사람의 눈앞에 얼어붙은 풍경처럼 펼쳐지는… 역사의 사상(死相)이기 때문이다.

『그 얼굴, 아니 그 해골 속에서는 온갖 시기적절하지 못한 것, 고통스러운 것, 무위로 돌아간 것 등의 역사의 모습을 드러낸다… 또 여기서는 인생전반의 성격뿐만 아니라 개인의 전기적인 역사성까지도 가장 자연스럽고 유기적으로 부패된 형태로서 불길한 조짐처럼 표현되는 것이다.』그리고 이것은 『어떤 이유에서건 사물이 의미, 정신, 진정한 인간실존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버린 그런 세계의 지배적인 표현양식』5) 이기 때문에 식민지시대에 우리의 일그러진 모습을 표현하는데 대단히 적절한 형태가 되고 있다. 이렇게 그가 대부분의 그의 작품에서 상징이 아닌 우의적인 성격의 글을 쓰게 된 것은 그의 작품이 낭만적이거나 초월적인 세계가 아니라, 통합적인 역사적 현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또한 말해 준다.

현실에 기초를 둬 유토피아를 건설한다.

그의 작품이 얼마나 현실에 그 기초를 두고 있고 또 얼마만큼 큰 도덕적인 의지와 사랑의 힘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했던가는 「까마귀」, 「바다」, 「코스모스 피는 정원」 그리고 「애정의 금렵구」등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까마귀」는 어느 가난한 작가가 어느 별장에서 만난 사랑을 느낀 폐병 앓는 여인이 까마귀 뱃속에 귀신이 들어 있어 무섭다는 말을 듣고 까마귀가 귀신을 몸에 지니고 있지 않으며, 죽음은 물론 저세상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 까마귀의 배랄 갈라 그곳에 귀신이 아닌 창자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슬거머니 겁이 나기도 했으나 뭉어리 돌을 집어 공중엣놈놈들을 위협하며 도랑에서 다시 덥풀 올려 솟은 놈을 쫓아들어가며 곧은 발길로 멱투시를 차 내던졌다. 화살은 빠져 떨어지고 까마귀만 여남은 간 밖에 나가떨어지며 킥-하고 삐들적거렸다. 다시 쫓아가 발길을 들었으나 그때 벌써 까마귀는 적을 볼 줄도 모르고 덮어누르는 죽음과 싸울 뿐이었다. 그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이 검은 새의 죽음의 고민을 내려다보며 그 병든 처녀의 임종을 상상해 보았다. 슬픈 일이었다. 그는 이내 자기 방으로 돌아왔고, 나중에 정자지기를 시켜 그 죽은 까마귀를 목을 메어 어느 나뭇가지에 걸게 하였다. 그리고 어서 그 아가씨가 나타나면 곧 훌륭한 외과의사처럼 그 검은 시체를 해부하여 까마귀의 뱃속에도 다른 날짐승과 똑같이 단순한 조류(鳥類)의 내장이 있을 뿐, 결코 그런 무슨 부적이거나 칼이거나 푸른 불이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리라 하였다.

아마도 작가가 이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까마귀가 귀신의 세계를 나타내는 상징이 아니라 인간이 애정을 가지고 친숙할 수 있는 검은 새로서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듯 그녀가 죽어서 타고 가는 영구차 위에 앉아 까악 까악 하고 그것의 독특한 슬픈 울음을 운다.

「바다」는 바닷가 갯마을에 사는 옥순이란 처녀가 배를 타는 왈룡과 오래전부터 정혼을 한 사이지만, 경제적인 사정 때문에 결혼식을 미루어 오다가 결국 고기잡이를 나갔던 왈룡이가 심한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혀져 익사하는데서 오는 비극을 다룬 작품이다.

고기잡이를 나갔던 왈룡이가 바닥에서 돌아오지 않게 되고 아버지의 빚이 눈덩이처럼 쌓이게 되자 마을 구장의 주선으로 청진에 있는 어느 청요리집으로 가서 일을 하기로 하고, 첫달 월급을 받은 것으로 아버지 빚을 갚지만, 배기미(梨津) 가는 배에 오르기 전에 자신의 순결함을 나타내듯 사용하지 않은 비누 하나를 바닷가에 있는 바윗돌에 올려놓고 바다에 몸을 던진다.

날씨는 아름답기보다 고요하였다. 잔물결 하나 일지 않았다. 해당화가 반이나 모래밭에 떨어진 것은 며칠전의 바람엔 듯하였다. 웅웅거리는 꿀벌의 소리, 반짝반짝 거리는 금모래, 정신이 다 아릿해지는 해당화 향기, 옥순은 깜박 잠이 들듯한 피곤과 정신의 마취를 느끼곤 하였다.

구름이 뭉게뭉게, 무슨 아름다운 동리처럼, 꽃밭처럼, 아득한 골짜기처럼 피어올랐다. 가깝거니 하고 쳐다보면 까맣게 바다 저 편이었다. 그 구름 동리, 그 구름 꽃밭, 그 구름 골짜기에 가면 꼭 왈룡이가 있을 것 같았다. 가만히 귀를 옹송거리면 왈룡이의 부르는 소리조차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여기서 옥순의 투신자살은 앞서간 왈룡의 환상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낭만적으로 묘사되고 있으나, 그녀의 결심은 어디까지나 「영혼의 숙명」이 요구하는 순수한 사랑의 실천으로서 유토피아적인 도덕성을 스스로 실천하기 위한 절대적인 저항의지이다.

한국역사의 황량한 풍경을 리얼하게 그린 작품들

그가 「코스모스 피는 정원」과 「애정의 금렵구」등에서와 같이 물질적이고 허위적인 사랑보다는 영혼의 사랑과 같이 하는 도덕성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인간의 고통과 아픔이 담긴 애정 소설을 쓰는데 많은 정열을 쏟은 것은 식민지 시대의 파괴적이고 억압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유토피아적인 비전의 실현과정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아무튼 어느 누구든지 이태준의 작품세계를 조금만 깊게 파고 들어가보면 그것이 일제 식민지시대의 억압적인 힘에 의해 파괴된 한국역사의 황량한 풍경을 리얼하게 의식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식민지시대에 우리의 민족정신이 얼마나 억압받았는가는 그의 데뷔작인 「오몽녀」를 개작해야만 했던 것으로도 충분히 증명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그가 식민지시대의 역사적 상황에 의해 폐허가 된 조국의 풍경을 짙은 페이소스를 가지고 묘사한 것은 단순히 감상적인 절망 때문만이 아니다. 우리가 그의 작품에 깊게 스며 있는 짙은 향수에서 느낄 수 있듯이 그것은 파편처럼 부서져 폐허가 된 상황을 극복하고 전체적이고 통합된 세계, 즉 식민지시대 이전에 우리 민족이 가졌던 자유로운 생명을 꽃피울 수 있던 자율적이고 유기적인 세계를 다시금 구원하고자 하는 욕망을 나타내고 있다. 다시말하면 향수는 무의식적인 기억과 구별되며 또 충만함이 있던 과거를 기억하려는 의식적인 행위로서, 현재의 상황에 대해 억제할 수 없는 불만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것은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식적인 마음의 움직임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작가 이태준이 해방 이전에 자신이 쓴 우수한 단편들을 두고 「회고적 감격 스타일」이라고 말한 것은 결국 일제의 압박과 설움으로부터 해방된 기쁨 때문에 그가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자신의 작업에 대해 너무나 자의식적인 반응을 보인 결과로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해방전 그러니까 1930년대에 그가 발표한 여러편의 아름다운 작품들은 우의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면서 향수와 함께 하고 있는 우울한 분위기 또한 그것들이 결코 감상적인 「회고」를 위한 「회고적 감격 스타일」로 쓰여지지 않고, 식민지시대의 억압으로부터 민족정신을 벗어나게 해서 잃어버린 도덕성과 생명력을 다시 회복하게 해서 그것을 통해 유토피아를 다시금 건설하고자 목적을 그 밑에 깔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들 전편에 깔려 있는 우울한 분위기는 발트 벤야민이 말한 것처럼 『아마 일종의 유토피아 혹은 과거를 떨쳐버리기보다는 흡수해들인 유토피아적 현재, 다시 말하면 일순간이나마 사물의 세계에서 이루어진 존재의 충만함 같은 것에 대한 배경』6) 되고 있기 때문이다.

1) 김치수, 「이태준 평전」(「이태준」서울지학사, 1990), p.363

2) 앞 책 p.363

3) 김치수, 앞 책, p.274

5) Balter Benjamin, Schriften, I pp. 289∼290 참조

6) 앞 책, pp.372∼373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