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리뷰 / 음악

음악으로 되살아난 8월의 함성




조익현 / 음악평론가

매년 8월이면 그 무더위 속에서도 지난날의 아픔을 생각하게 되며, 또 그것으로 인한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모습을 되돌아 보게 한다. 떠올리기도 싫은 「일제 치하 36년」이란 말이 당해보지도 못한 세대에게도 치를 떨게 하는 통한의 일이건만 당시의 선조들의 한 맺힌 사연이란 말해서 무엇하랴!

「울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가슴깊이 사무치는 처절한 자신의 모습을 노래로서 달래며 광복의 그날을 기다렸던 우리의 어머니와 아버지. 지금부터 47년전 8.15 해방을 맞은 그들의 기쁨을 어떻게 표현하리. 수십년이 지난 지금, 퇴색되어가는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며 그때의 감격과 기쁨의 함성이 이제 음악으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커뮤니케이션의 기능면에서 본다면 음악만큼 부정확한 것도 없을 것이다. 음악이 언어처럼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지도 못하고, 그림이나 영상처럼 직접적인 이미지를 전달하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은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 훌륭한 음악은 인간의 정서라고 불리우는 바에 대단한 공헌을 하고 있으며, 어떤 신비한 끈으로 하나 되게 하는 놀라운 기능을 가지고 있다.

지난 8월 14, 15일의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제47주년 8.15 광복절 경축 음악회」는 바로 음악의 이러한 위대한 힘을 여지없이 발휘한 축제의 한마당이었다. 이날의 메시지는 과거 어두운 시절의 아픔을 견뎌낸 한민족의 승리 그리고 기쁨과 희열, 그렇다고 그것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았으며 우리의 기쁨을 세계 인류의 기쁨으로 승화시켜 지구 평화를 기원하는 바로 그것이었다. 음악이 바로 이러한 메시지를 우리 모두에게 전달해 준 것이다.

자축만으로 끝나지 않은 이날의 연주

또한 이날의 연주가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우리의 기쁨을 자축만으로 끝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현대 작곡가의 한 사람인 폴란드의 펜데르츠키의 작품 「교향곡 제5번 <한국>」이 세계 초연되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관계기관이 지금까지의 관례를 깨고 외국인인 펜데르츠키에게 작품을 위촉한 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는 듯하다. 우선 외국인에게 위촉하여 광복절의 의미를 평화를 기원하는 세계 모두의 것으로 만들려는 의지가 엿보이며, 펜데르츠키의 조국 폴란드가 주변국가의 압제에 항거하여 자유를 위하여 싸웠으며 결국 그것을 쟁취하였다는 것이 우리와 비슷하기 때문에 펜데르츠키가 나라를 되찾은 기쁨을 충분히 이해하리라는 점, 거기에다 그가 위대한 작곡가일 뿐 아니라 자유평화를 위하여 행해 온 그의 작품 행적을 볼 때 가장 적격자라는 판단이 섰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날 연주된 세 작품 중 두 작품은 KBS 국악관현악단 상임지휘자인 이상규의 「햇살의 북소리」와 서울대 교수이며 한국의 현대 음악계를 주도해 온 강석희 교수의 「햇빛 쏟아지는 푸른 지구의 평화」가 초연되어 명실상부한 최고의 음악잔치임을 보여 주었다.

처음 연주된 이상규의 「햇살의 북소리」를 보자. 곡은 최승범의 시「8월의 문」과 「햇살의 북소리」에 의한 네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KBS 국악관현악단, 국립국악원, 천안시 충남국악관현악단으로 이루어진 연합국악관현악이 연주를 맡았다. 이 곡의 특징은 국악과 서양 음악을 접목시키려 했으며, 그것이 좋은 효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얼마전만 해도 그저 볼품없는 서양식 작곡기법을 채용하여 잘 되지도 않는 연주를 요구하여 국악의 품위를 손상시킨 것이 우리 현대 창작 국악계의 현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야금을 이용하여 말도 안되는 분산화음을 연주케 한다든지, 마치 서양악기를 누가 잘 흉내내는가를 내기나 하듯이 어처구니없는 상황만 만들어 내었던 것이 우리네 모습이다. 그러나 이날 연주된 이상규의 작품은 이런 모습들과는 사뭇 다른 점들이 내포되어 있었다. 물론 모든 것이 다 해결되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현대 창작 국악계에 대단한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 우선 성악 부분에 서양음악을 전공한 성악가의 소리를 빌어와 그것의 음색과 국악 전통의 음색을 접목시킨 것이 무리가 없이 매우 잘 어울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소프라노 김영애와 테너 박성원의 풍부한 성량의 역할도 컸지만 두 가지 서로 다른 장르를 껄끄러움 없이 이루어지게 한 이상규의 솜씨가 뛰어나 보였다.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33인의 뜻을 상징적 의미로 범종의 33번의 타종이 천천히 시작을 알리더니 아쟁이 조용하게 저음으로 역사의 시간을 되새기게 한다. 서서히 솟아오르는 해금의 절규하는 소리는 곧 전체 합주로 이어져 마지막 고빌 겪고 살아남은 목숨들이 환호하는 뜨거운 「8월의 문」으로 들어간다. 두 성악가가 햇살에 피어나는 북소리를 나타내듯 기쁨을 서로 주고받으며 조국의 앞날에 영광을 기원하며 장엄하게 곡을 맺게 된다.

말했듯이 곡은 대단히 세련되어 있었다. 전통적인 선율과 음 체계가 곡 전체를 지배하고 있어 현대적이면서도 우리의 것이라는 것을 잊지 않게 했다. 다만 아직도 서양식 수직적 텍스쳐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지휘법이나 종지의 화려함을 추구하려다 오히려 서양식 종지법을 답습하고 있는 모습은 해결되어야 하는 과제로 남아있었다.

한국적 이미지를 위한 노력이 역력한 「한국」

두번째로 연주된 펜데르츠키의 「교향곡 제5번 〈한국〉」은 부제로 〈한국〉이라는 제목을 붙였듯이 한국적 이미지를 위한 노력이 역력하다. 우선 그가 차용한 「새야 새야 파랑새야」의 선율이 직접 또는 변형된 형태로 곡 전체를 엮어가고 있어서 어려운 현대기법으로 만들어졌지만 우리에게 그리 어렵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또한 자유와 평화를 기원하는 그의 많은 작품 속에 나타난 인간애에 대한 이해가 우리와 처음 만나는 그의 작품을 그렇게 생경하게 하지 않게 하였던 것 같다.

왼손에 지휘봉을 든 특이한 모습으로 KBS 교향악단을 펜데르츠키 자신이 직접 지휘하는 모습은 이 연주회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단 악장 형식으로 된 이 곡은 「한국적」선율을 변주곡의 일종인 「파사카리아」의 기법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특히 한국적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국악기인 편종을 사용하여 「평화의 종」으로 사용하고 있음도 그에게 있어서 새로운 시도로 보여진다. 또한 특이한 악기 배치가 눈길을 끌었다. 네 명의 트럼펫 그룹을 좌측 3층위에 별도 배치한 것인데, 이것은 휘날레 부분에서 선명한 「새야 새야 파랑새야」의 선율을 연주하여 오케스트라 전체의 음향을 꿰뚫고 나오게 함으로써 그 장엄함과 더불어 배치 의도를 드러내고 있었다. 여기서 이 배치는 상징적으로 보이는데, 세계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오케스트라의 음향에 한국적 선율을 상징으로 하는 트럼펫의 음향을 관통시켜 한국의 기상을 보여준 것이 아닌가 싶다. 이미 세계 여러나라에서 초연 계획이 이루어져 있는데, 앞으로 이 작품이 연주될 때마다 한국적 기상이 예술적으로 승화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마지막으로 연주된 강석희의 「햇빛 쏟아지는 푸른 지구의 평화」는 이흥우 시에 곡을 붙인 대규모 칸타타이다. 일단 300여 명의 합창단의 규모가 말해 주듯이 이날 마지막을 장식할만한 거대한 작품이었다. 이상규의 작품이 과거의 한과 광복의 기쁨을 노래했다면, 펜데르츠키는 오늘의 우리의 약동하는 모습을 그렸으며, 강석희의 칸타타는 세계의 평화를 노래한 것이다. 펜데르츠키의 훌륭한 지휘가 곡을 더욱 빛내주었으며, 300여 명의 연합합창단의 사운드는 커다란 감동으로 와 닿았다. 근래에 보기 드문 수작이 틀림없다.

이날의 연주는 마치 하나의 서사극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47년전 8월의 함성이 오늘의 음악으로 되살아나 세계의 평화를 기원하는 우리 모두의 소망으로 승화하였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