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를 위한 시
이 탄 / 시인, 한국외국어대 교수
8·15가 되면 생각나는 시인, 윤동주. 윤동주는 어떤 이유로 죽었을까. 흑룡강 조선민족출판사에서 낸 「조선족 문학연구」(1989년간)에 「윤동주론」이 실려있다(작자는 일철이라고 돼 있는데 그것은 권철의 호이다). 여기에는 죄목이 ①사상불온, 독립운동 ②비일본 신문 ③온건하나 서구사상이 농후함 등으로 나와 있다.
일철은 환갑이 넘었고 또 연변에서 오래 생활하였으므로 참고할 사항이 많을 것이다. 「윤동주 평전」(송우혜 지음)을 보면 감옥에서 주사를 거듭 맞은 모양인데 이것이 죽음의 원인이 될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
몇 달만 살았어도 8·15를 맞았을걸 애절하고 원통하다. 윤동주가 한글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평전을 읽다보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일본 시인이 윤동주에 관한 시를 지었기에 길지만 싣는다.
이웃나라 말의 숲
-이바라기 노리꼬
숲이 깊어
들어서면 들어설수록
가지가 엉기고 속은 깊어
외국어의 숲은 울창하다
한낮에도 어두운 오솔길을 혼자 터벅터벅
栗(구리)는 밤
風(가제)는 바람
오바께는 도깨비
蛇(헤비)는 뱀
秘密(히미쯔)는 비밀
芝(기노꼬)는 버섯
무서워 고와이
입구 쪽에서는
떠들석 하다
모두가 신기하고
명석한 음표문자와 깔끔한 울림
히노히까리 햇빛
우사기 토끼
데다라메 엉터리
愛(아이) 사랑
기라이 싫어요
旅人(다미비또) 나그네
지도위 조선국에 검은 먹칠하며
가을바람 듣다
啄木(다꾸보꾸)의 43년의 노래
일찍이 일본어가 걷어차 버리려고 했던 이웃나라 말
한글
없애려해도 결코 없애지 못한 한글
용서하십시오 유루시데 구다사이
땀을 흘리며 이번에는 이쪽이 배워야 할 차례입니다
어떤 나라의 언어에도 마침내 굴복하지 않은
굳은 알타이어 계열의 하나의 정수―
조금이라도 다가가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여
그 아름다운 언어의 숲으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왜놈의 후예인 나는
긴장을 풀면
삽시간에 한 맺힌 말에
먹혀버릴 듯
그런 호랑이가 틀림없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옛날 옛날 한 옛날을
「호랑이가 담배 피던 시절」이라고
말하는 웃음거리도 도한 한글이 아니고서는
어딘가 멀리서
웃고 떠드는 소리
노래
멍청이
바보
속담의 보고이며
해학의 숲이기도 한
큰 사전을 벼개삼아 선잠을 자면
「자네 늦으막하게 들어섰군」
尹東柱에게 점잖게 꾸중을 듣는다
정말 늦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늦었다고는 생각지 않기로 했습니다.
젊은 詩人 尹東柱
1945년 2월 橋岡(후꾸오까) 형무소에서 옥사
그것이 당신네들에게는 光復節
우리들에게는 降伏節의
8월 15일을 거슬러 오른 고작 반년전의 일이었다니
아직 학생복 차림으로
순결만을 동결시킨 듯한 당신의 눈동자만이
눈부시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라고 노래하며
당시 감히 한글로 詩를 쓴
당신의 젊음이 눈부시고 아프다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달빛처럼 맑은 詩 몇 편을
서투른 발음으로 읽어보지만
당신은 웃지도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일
앞으로
어디만큼 갈 수 있을까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다가다 쓰러지드라도 갈대의 벌판
<김광림 역>
원제는 「隣國語の森」인데 군데군데 우리 한글로 쓰고 있다. 「밤, 바람, 도깨비, 뱀, 비밀, 버섯, 무서워, 햇빛, 토끼, 엉터리, 사랑, 싫어요, 나그네, 한글, 용서하십시오」등 이바라기 노리꼬는 한글을 아는 듯싶다. 60살이 넘은 시인인 그는 한글과 윤동주를 특히 취급했다.
「순결만을 동결시킨 듯한 당신의 눈동자만이 눈부시다」「젊음이 눈부시고 아프다」고 한 시인은 윤동주의 속마음을 아는 것 같았다. 이러한 시인들의 윤동주에 관한 시를 한데 모아 시집을 출판하면 어떨지. 시가 모자라 한 권의 시집 분량이 안 될지도 모르겠다. 속죄하는 뜻에서라도 이제부터 새로이 쓰면 한 60편이야 모아지지 않겠는가.
용정 윤동주의 무덤이 알려진 것도 1985년부터라고 한다. 그것도 1985년 일본사람이 와서 무덤을 증축하였다고 한다. 연길시에 사는 임창연(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창작이론연구부 주임·작가)의 말에 의하면 윤동주의 시집도 없다고 한다. 다음은 임창연의 말을 추린 것이다.
▲내가 「문학과 예술」이란 월간지의 책임자로 일하고 있을 때 윤동주의 시 10편을 게재했는데 그것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1985년).
▲내가 신문 한 페이지에 걸쳐 「윤동주론」을 냈는데 그렇게 크게 다룬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임창연은 처음 데뷔할 때는 시를 하였으며 그후 평론을 하고 있다. 그는 그곳에서 중견작가로 활약하고 있다).
▲연길의 출판사정으로 윤동주의 시집이 간행되지 못하고 있다. 윤동주의 시·산문을 싣고, 윤동주 문학연구 등을 게재한 단행본이 나왔으면 한다(단행본 간행의 경우 이쪽에서 비용을 내야 할 것 같다. 그쪽에서는 자비 출판의 경우에만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윤동주가 다닌 학교에서 윤동주 문학상이 주어지고 있는데 성인사회에는 윤동주 문학상이 없다. 성인사회에는 권위있는 상이 주어졌으면 한다(이쪽에는 윤동주 문학상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또 매년 상금은 무엇으로 꾸려 나갈지).
▲윤동주의 전시관이라고 해서, 윤동주가 다닌 학교에 한면을 할애하여 사진 등도 붙여 놓았는데 이것도 생각해 볼 문제다(이것도 두고두고 생각해 볼 문제다. 윤동주의 묘를 그냥 둘지, 다른 곳으로 옮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연변에 나의 친구가 식당을 내기에 이름을 「동주관」으로 하였다. 사람들이 와서 보더라도 그 이름을 기억하기 쉬울 것이다.
대강 이런 얘기였다.
윤동주는 우리 교과서에도 실린다. 특히 「서시」는 입시에도 나왔던 것 같다. 대학도 연전을 나왔다. 뿐만 아니라 한글을 몹시 사랑했다. 한글 말살 정책에 그는 순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묻혀 있기로는 용정이란 곳이다. 시대의 아픔을 누구 못지 않게 가슴에 품고 살아야 했던 윤동주.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슬픈 족속」전문
연변에 윤동주의 시집이 없다니, 있어야 하겠다. 윤동주를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으면 묻는 사람이 얼빠진 사람이 되고 손가락질 당할 것이다.
또 윤동주의 밤과 같은 것도 있어야겠다. 1945년 2월 16일, 28세의 그 애절한 죽음. 경우야 어떻든 윤동주를 위한 일은 먼저 시집이 나와 연변 사람들도 즐겨 읽을 수 있어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
윤동주와 같은 시인. 해방을 눈앞에 두고 죽는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