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흐름

통일독일의 문화통합 전략




임영숙 / 서울신문 생활부장

드레스덴은 구 동독의 문화중심 도시이자 산업도시다. 「유럽의 심장부」「동구권으로의 가교」등으로 불리는 작센주의 수도인 이곳을 최근 찾았을 때 도시의 하늘엔 수십개의 크레인이 솟아 있었다. 2차대전 중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후 동독시절 40년 동안 폐허로 방치된 옛 건물들을 보수하고 새로운 건물들을 건설하기 위한 크레인들이었다.

밑빠진 독에 물붓기, 드레스덴의 정경들

동독문화기관의 60퍼센트가 자리잡고 있는 작센주엔 본 연방정부의 신연방주(동독)에 대한 '91년 문화지원금 9억 마르크중 절반이 넘는 5억 3천 마르크가 투입됐다. 그래선지 아우구스트 황제의 츠빙거 궁전, 재퍼 오페라 하우스, 전설적인 박물관 단지 알베르티눔 등이 모여 있는 구 시가지엔 관광객들의 발길이 붐비고 그들을 위한 화려한 가게와 레스토랑 등이 즐비했다. 모두 최근 새로 단장한 듯 싶었는데 내 숙소도 옛 성을 개조하여 지난해 처음 문을 연 호텔이었다.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잇는 드미트로프 다리는 둥근 테라스를 갖춘 로맨틱한 모양의 다리였고, 이 다리를 지나 금박 입힌 아우구스트 2세의 동상을 거쳐 이어지는 베프라이웅 거리는 세갈래의 산책로로 이루어진 매우 아름다운 길이었다. 자갈 깔린 중앙의 널찍한 산책로를 중심으로 양쪽에 가로수가 작은 숲을 이루다시피하고 그 양쪽으로는 화려한 쇼핑볼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가 잇대어 있었다.

그러나 이 거리의 바로 뒷골목은 유령이라도 나올듯이 황량했다. 쇼핑볼의 한 쪽 벽면, 로자 룩셈부르크의 얼굴이 부조된 곳에 뒷골목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었는데 2∼3층 높이의 옛 건물들이 어깨를 맞대고 선 그 골목엔 초저녁인데도 인기척이 전혀 없고 불켜진 창을 찾을 수 없어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듯 싶었다.

통일독일의 상징적 모습을 드레스덴에서 본 셈이다. 통일 전 동독인들이 그토록 선망했던 자본주의의 화려한 상품들과 풍요로움이 관광객을 위한 상점 속에 자리잡긴 했지만 그 도시의 주민들에게 그 상점들은 진열장일 수밖에 없는 현실, 독일정부가 5개의 신연방주 가운데 가장 많은 돈을 투자하여 급속도로 변모하고 있는 주요 도시라지만 하늘 높이 솟은 크레인들이 밑빠진 독에 물을 붓고 있는 듯한 느낌의 드레스덴. 남의 일처럼 가볍게 볼 수 없는 정경이었다.

지구상의 마지막 분단국가의 언론인으로서 독일정부의 초청을 받고 2주일간의 독일여행을 하게 됐을 때 우선 떠오른 취재항목이 「통일독일의 문화통합 전략」이었다. 정치·경제적 통합을 이룬 마당에 동·서독의 문화통합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남·북한 통일에 대비하여 우리가 참고할 만한 점은 무엇인가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통일 2주년을 맞으면서도 심각한 통일후유증을 겪고 있는 독일인들에게 좁은 의미의 문화통합은 거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들의 관심은 엄청난 통일비용으로 인한 경기 침체와 물가고, 실직의 위험 등에 우선 쏠려 있었다.

무너진 ‘베를린 장벽’, 우뚝 선 ‘경제장벽’

통일이후 지금까지 독일정부는 동독 지역에 우리의 10년 예산에 가까운 3백조원을 퍼부었으나 파탄상태인 동독경제의 회복기미는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독일경제연구소(IW)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동독의 생활수준 향상을 위해서는 오는 2천년까지 1조 5천억 마르크(약 7백 50조원)의 지원이 필요하며 이를 위한 연평균 지원액을 구서독 국내 총 생산액의 5퍼센트에 달할 것으로 집계됐다. 구 동독인들의 평균 생활수준은 서독인들의 3분의 2정도에 이르고 있으나 이들의 생산력은 서독인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동독인들의 소비성향은 서독인들의 2배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가난하고 게으르고 분수를 모르는 동생」을 돕기 위해 서독인들을 지난 6월까지 1년간 75퍼센트의 세금을 더 내야했다. 내년 1월부터는 부가가치세율이 1퍼센트 더 오르게 되며 담배·보험이자·석유등에 대한 세금이 오르고 전화요금·체신료도 인상됐다. 심지어는 임금이 싼 동독인(통일조약에 의거 서독인의 60퍼센트만 지급)에게 일자리를 빼앗기는 서독인들도 늘어나고 있다.

동독인의 입장에서 보면 사태는 훨씬 심각하다.

대부분의 동독 사람들은 통일이 되면 그들도 서독사람들처럼 금방 잘 살게 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래서 다투어 승용차를 사고 TV, 냉장고 등 가전제품을 사들였다. 그러나 동독인의 기대는 환상에 불과했다.

통일 후 물가가 폭등하면서 거의 공짜로 살다시피했던 집세가 생활비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엄청나게 커졌다. 연금생활자의 경우 동독시절엔 5백∼6백 마르크를 지불하고 살았는데 지금은 주택비를 지불하고 나면 남는 게 거의 없어 연금이 2배로 올라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월부로 서둘러 장만한 가전제품의 월부금이 한달 수입의 30퍼센트 가까이에 이르러 가계압박이 크다.

설상가상으로 동독지역의 실업율이 50퍼센트에 육박하여 동독인들은 실직의 공포에 휩싸여 있다. 직업을 가진 동독인도 서독인 보다 한 등급 아래 대우를 받는다. 동독인의 임금은 서독인의 60퍼센트에 불과한데 오는 '93년 7월부터 80퍼센트, '95년에 이르러서야 1백퍼센트 동등한 대접을 받게 된다. 그것도 2년 동안 1주일에 17시간씩 재교육을 받은 다음의 일이다.

동독인들은 믿었던 서독인들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스스로를 버려진 의붓자식이나 정복당한 2등 국민으로 느끼게 됐다.

통일후유증이 야기한 외국인 테러 현상

동·서독인이 함께 겪고 있는 이같은 통일후유증은 독일 사회에 극도의 긴장 상태를 초래하여 외국인에 대한 테러공격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올들어 9월초까지 독일거주 외국인과 망명신청자들에 대한 독일인들의 습격과 폭행은 8백 70건(동독 4백 60, 서독 4백 10)을 넘어섰다.

충격적인 이 폭력사태는 히틀러의 망령인 신 나치 극우세력이 독일에서 득세, 독일인의 이성이 다시 마비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독일인들은 무슨 일이 잘 안되면 외국인의 잘못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마존 수림이 죽어 가는 것은 브라질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세계의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일인 것처럼 유럽의 중심인 독일에서 외국인 노동자와 난민을 향한 폭력이 계속되는 것은 세계질서를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입니다.』동베를린의 한 지식인의 얘기는 그 우려를 뒷받침한다.

외국인 노동자를 향한 폭력공격에 가담한 독일인의 대부분은 신나치가 아니라 급속한 통일로 인한 사회변화로 가치관의 혼란을 겪은 청소년들로 밝혀지고 있다. 지금까지 옳다고 믿었던 공산주의 체제 아래서의 모든 가치와 규범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격변을 겪은 가난한 동독의 청소년들은 「디스코테크에서 춤추는 기분으로 화염병을 던지고 팝 뮤직을 부르듯이 「외국종자타도」를 외치며」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외국인에 대한 테러행렬의 선두에 서고 있다는 것이다.

동독 청소년들의 가치관 혼란이 어느 정도인가는 동베를린의 건축기사 P씨의 두 아들 이야기를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거역할 수 없는 흐름 로스트 제네레이션

P씨에겐 요즘 20대의 두 아들이 가장 큰 걱정거리다. 전자기술공인 큰아들은 중학시절부터 공산당 독재에 비판적이어서 급작스런 동·서독 통일 과정을 비교적 쉽게 겪어 냈다. 그러나 최근 그가 다니던 공장이 폐쇄되자 큰아들은 옛 동독시절을 오히려 그리워하게 됐다. 베를린에서 가장 큰 공장이었던 자신의 직장이 문을 닫아야 할 정도라면 독일통일에 문제가 있는 것이며 직장을 앗아간 통일보다는 비록 자유가 없었어도 모든 국민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주었던 동독시절이 오히려 낫다는 태도를 지니게 된 것이다.

반면 역사를 전공한 둘째 아들은 동독 정치를 적극 지지하여 18세 때부터 공산당원이 됐다. 따라서 그에게 통일은 엄청난 충격이고 악몽이었다.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모든 것이 하룻밤 사이에 붕괴되는 전면적인 가치관의 혼란을 겪은 끝에 그는 이렇게 말하기에 이르렀다. 『모든 정치는 다 나쁘다. 학교 선생님들이 우리를 기만했다. 지금까지 읽은 책도 믿을 수 없다. 앞으로 내가 직접 체험하고 판단한 것만 믿겠다.』

정치적 신념은 서로 다를지언정 나름대로 자신의 길을 잘 헤쳐 나가던 두 아들이 통일 후 이같이 변모하면서 건축기사 K씨의 가정엔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K씨 가족의 문제는 동독의 모든 가정이 겪고 있는 혼란이다. 통일 후 동독의 젊은이들은 대부분 정치에 무관심해졌으며 「가장 자본주의적이라 할」미국의 범죄영화에 탐닉하고 춤추기를 즐기게 돼 부모들의 걱정을 사고 있다. 『우리의 젊은이들은 로스트 제네레이션(Lost-Generation)이 되고 말았습니다. 통일의 가장 나쁜 효과지요. 젊은 세대에게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P씨의 아내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당장은 경제적 후유증이 크게 부각되고 있지만 그 해결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동·서독인 모두 10년후 쯤엔 동독인들이 서독인들과 똑같은 생활수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동독 청소년의 가치관 혼란과 동독인들의 「2등 국민의식」, 서독인들의 동독인에 대한 우월감과 피해의식 등이 해소되는 데는 보다 많은 시간이 요구된다. 동·서독 국민들의 경험과 배경이 근본적으로 상이하여 형식적, 정치적 간극을 넘어 진정한 내적 통합이 이루어지기까지는 1세기가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으나 마음속의 장벽은 더욱 높아지고 있습니다.』정치·경제적 통합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문화적 통합, 즉 내적 통합의 어려움을 밝히는 독일 지식인들의 얘기다.

문화통합 대안없고 현상유지도 난제

현재 통일독일의 심리적 문화적 갈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이 없는 상태며 독일연방정부 안에 문화통합 정책을 수행하고 있는 부서는 내무성에 단 2개 과가 있을 뿐이다. 문화통합을 위한 투자 역시 다른 분야에 비해 열악하여 단지 동독지역의 문화시설 보존 차원에 머무르고 있는 형편이다.

독일연방 각료회의는 '91년 「문화유지 과도 재정안」을 채택하고 새로 편입된 5개주(동독)에 총 9억 마르크를 지원했다. 독일정부가 1년에 1천 4백억 마르크를 동독지역에 지원하는 것에 비하면 매우 적은 액수다. 그나마 9억 마르크 중 절반이 넘는 6억 마르크가 문화시설 보호에 쓰여졌고 3억 마르크가 문화프로그램 지원에 쓰여졌다. 연방정부의 지원금은 앞으로 계속 줄어들 전망이며 우선 올해 ’92년엔 30퍼센트가 삭감됐고 '93년엔 약 60퍼센트 삭감된 3억 5천 마르크만 지원될 예정이다.

따라서 동독은 물론 서독의 문화인들은 「어렵고 위험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국가관리 아래 있던 동독의 예술가들은 통일 후 국가보조금이 없어지고 예술협회 등이 해체되므로써 거의 생존의 위험에 처하게 됐다.

독일통일조약 제35조는 문화관계를 규정하고 있는데 그 제4항엔 「지금까지 중앙집권적으로 운영되었던(동독의) 문화기관들의 관할권이 주정부의 지방자치단체로 넘겨진다.」고 명시돼 있다. 그러나 신연방주들은 거의 재정파탄 상태에 있어 문화에 투자할 여력이 없으며 통일조약에 의한 문화기금으로 겨우 문화시설유지만 해나가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그나마 연방 정부의 문화기금도 오는 '94년 말이면 끝나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원리를 전혀 모르고 국가의 보호에 익숙했던 동독의 예술인들에게 이같은 상황은 치명적인 것이다. 신연방주엔 아직 제 기능을 하는 화랑이 없으며 공정한 평론도 존재하지 않으며 개인의 예술품 구매력도 아직 성숙하지 않은 상태다. 예전엔 책을 읽던 동독인들이 이제는 가전제품을 장만하고 여행을 떠나느라 책을 사보지 않게 됐다. 그들에겐 서독의 신문을 읽는 일도 벅차다. 통일전 동독의 신문은 4∼6쪽에 불과했으나 서독의 신문들은 보통 20쪽이 넘는데다 신문값도 동독신문(4페니)보다 20배가 비싼 2마르크에 달하기 때문이다.

공산독재 아래서 기득권층에 속했던 지식인들도 큰 위기를 맞고 있다. 동독 지식인의 정리와 재편성 작업이 대대적으로 전개되고 있어 동베를린 최대의 대학인 훔볼트대학의 경우 오는 10월까지 약 80퍼센트에 이르는 교수가 축출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베를린 시의회의 훔볼트대학 재편성계획에 교수들은 반발하고 있으나 이미 지난 8월말까지 총 4천 2백 66명의 교직원 중 공산주의 관련학과 교수 등 1천 2백명이 정리됐다.

통일조약은 「구 동독지역의 문화적 실체는 그 어떤 손해도 받지 아니한다」(제35조 제2항)고 규정하고 있어 통독후 동독의 문화기관은 가능한 존속시킨다는 정책이 실시되고 있다. 그러나 동·서 베를린에 같은 성격의 문화기관이 많아 통합의 회오리바람이 불고 있다. 이를테면 예술원과 박물관 등이 하나로 통합되는 과정에 있는데 예술원의 경우 동독에선 국가가 회원을 결정했기 때문에 통합작업에 어려움이 크다. 서독 회원들 중 20여명이 그들과 함께 자리할 수 없다며 자발적으로 예술원을 떠나버렸으며 동독회원 가운데는 공산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30여 명이 축출됐다.

『통합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는 동독의 모든 기관이 서독의 문화기관보다 엄청나게 많은 인원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소장품이 같은 규모의 서독측 박물관엔 60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는데 동독측 박물관엔 2백 80명, 서독의 시립극장엔 70명이 일하는데 동독의 시립극장엔 무려 7백 70명이 일하고 있는 식입니다. 양보다는 질을 유지해야 하므로 인원의 대량 정리가 불가피합니다.』베를린시 문화 담당관의 말이다.

정치·경제적 통합보다 더 근본은 문화통합

독일통일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정치·경제적인 통합보다는 문화적인 통합작업이 더욱 근본적인 문제이며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치밀한 통일 준비를 해 온 독일은 문화통합에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나머지 1세기가 걸려야 해소될 동·서간의 마음의 장벽을 쌓았다. 독일이 못다한 우리 나름의 대비책을 서둘러 마련해야 할 때다.

독일에선 지금 동·서독 각 주정부간, 도시간, 단체들간의 자매결연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연간 3백∼5백만 마르크의 재정지원 및 행정지원도 이루어지는 이 교류는 동·서독 지역간의 문화적 동질성 회복에 기초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통일에 앞서 가능한 모든 문화교류를 활성화하고 통일에 대비, 충분한 문화통합 계획을 수립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