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기획 / 한.중 문화교류의 위상과 전망

한·중 문화교류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김열규 / 문학평론가, 인제대 교수

중국이란 우리들에게 어떤 땅, 어떤 나라였을까?

그냥 이웃나라의 하나로고 하고 말기에는 무엇인가 너무나 아쉽다.

단순한 이웃나라가 아니란 것은 분명할 듯하다. 이 경우, 단순하지 않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어떤 관계에 있었던 것일까?

우선 국경이 있으면서도 그 국경이란게 매우 엉성했던 것 같다. 물론 지형적으로는 매우 분명했다. 하긴 고구려나 발해를 두고 얘기하자면 두 나라 사이의 국경조차, 그것도 지형적 국경조차 선명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적어도 통일신라 후기, 그리고 고려 왕조 이후로는 지형적 국경선은 사뭇 분명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하긴 이 경우에도 예외는 있어서 청나라하고 사이에서 백두산을 에워싼 이른바, 「정계」시비가 있었음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또 간도지역이 적어도 그 근린 우리 겨레에겐 우리 땅, 우리 국토인듯이 줄곧 의식되어 왔다는 것도 이 경우 아주 간과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지형적 정계를 말할 적에도 이같이 논의가 엇갈리기 쉬운데 하물며 역사적 관계, 문화적 관계를 말할 적에는 더 이상 말할 게 못될 듯하다. 사실 이 경우는 국경이란 게 있으면서도 없는 것, 없으면서도 있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점은 특히 한국으로서는 더욱 더 강하게 인식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역사적 문화적인 경지에서 두 나라 사이에 있었던 국경의 「무정계성」을 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인듯이 생각된다.

가령, 고려조와 조선조를 말하면 이 무정계성을 염두에 두고 두 나라 사이의 문화를 말할 수밖에 없는 국민이 있다는 것을 싫어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친등을 말하면 세황의 친생질이고 그의 공을 말하면 선제(先帝)의 공신입니다. 또 그의 조고(祖考)는 태조 선무황제의 초창때부터 외로움을 흠모하여 먼저 와서 신복(臣服)하였으며 때때로 근왕의 실적이 현저하니 그 공을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글은 고려의 천하 명유 이제현이 원나라의 숭상 백주(伯主)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다. 이제현이 제나라 왕의 친등(親等)이 원나라 조정과 맺여져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은 그것으로 왕이 당한(원나라 황제에게서 당한) 유형의 형벌에서 풀려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들은 차마 얼굴을 들 수가 없다.

『고려보(高麗堡)에 다다르니 집이 모두 새 이엉으로 이어서 몹시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묻지 않고도 고려보임을 알았다. 정축년에 잡혀온 사람들이 한 마음을 이루어 산다. 관동 천 여리에 물논이라곤 없더니 홀로 이 곳만은 불벼를 심고 떡, 엿 같은 물건이 많아 본국의 풍속을 지니었다. 옛날에 사행(使行)이 오면 하인들이 사 먹은 음식은 그 값을 받지 않는 일이 많았고 여자도 내외하지 않아서 말이 고국 얘기에 미치면 눈물을 지우는 일이 많았다.』

이것은 박연암이 중국 땅의 고려보, 병자호란에 볼모로 잡혀온 조선인들의 현지 마을인 고려보를 지나치다가 남긴 기행문의 일정이다. 앞의 글만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민족적인 비장감이 괴어 있다.

박연암의 기행문은 당시로서는 가장 전형적인 물자교류의 길이요 또한 문화 교류의 길이기도 하였던 사신행차에 관한 기록이다. 그것은 역사적인 무정계성이 다름 아닌 문화 영역에도 그대로 원용되어 얘기될 수 있음에 대해서 시사하고도 남는다.

예속의 지리지적 잔해

한국과 중국 사이의 문화적 「무정계성」은 물론 문화 전반에 걸쳐서 무작위적으로 적용될 성질의 것은 결코 아니다. 한국문화의 한 단면(물론 중요한 문화의 단면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불행하게도 실토해야 하는 것이지만)에 걸쳐서 한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부분적인 무정계성은 이미 신화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하신, 한국 고고학의 초창기 개척자이시던 김재원박사께서 고증하신 바로는 단국신화의 일부가 중국의 한 묘사(廟祠)의 벽화에 그려져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또한 신라 혁거세의 모신(母神)으로 전해져 있는 선도산 성모가 중국 당에 유연을 두고 있었던 듯이 말하고 있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남겨져 있다. 이같은 신화 시대에 이미 비롯하고 있는 문화적 무정계성은 근세에까지 미치게 되거니와 그것은 명·청 두 나라 유학사의 흐름이 마침내 청말의 고증학에 다다르게 되는 과정이 거의 비슷하게 조선조 후기유학사에서 지적되는 데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무정계성은 물론 적극적으로 내지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도 있다. 예컨데, 그 당시 아세아적 세계문화 내지 범지역적 문화 속에서 우리 문화가 차지하고 있었던 진취적 참여를 운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중국문화가 피치못하게 당대 범세계성을 향유하고 있는 문화라고 평가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매양 그리고 전적으로 우리들에게 듣기 좋은 꽃노래의 한계안에서만 논란을 하고 있을 수는 없다. 부분적으로는 문화의 예속성을 유감스럽게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같이 주로 한국을 기점으로 해서 두 나라 문화의 무정계성을 말하게 될 때, 중국은 우리들에게 너무나 크고 너무나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중국을 흔히 「대국」이라고 했고 또 「상국(上國)」이라고 했다. 한국에서 중국으로 가는 것은 「올라가는 것」이고 또 「들어가는 것」이었다. 한국은 도리없이 아래 있었고 밖에 있었다. 이것은 한국인의 지리지적 오리엔테이션이있다. 지형학으로도 역시 그랬다. 곤륜산을 천하의 정점이자 중심점으로 삼고 그 지맥의 작은 정점의 하나 및 작은 중심점으로 백두산을 의식하는 또 다른 지리지적 의식은 심지어 고산자조차 꺽지 못했다. 겨우 다산에 다다라서 의식의 개혁이 이루어진 것이다. 심히 유감스럽게도 그 뒤, 일본에 들어간다는 괴이한 말버릇 그리고 근자에 와서 미국에 들어간다는 회괴한 말버릇조차 듣게 되었음을 실토하는 것은 매우 괴로운 일이다.

再權될 무정계성어의 기대

이제 중국이 다시금 성큼 우리들에게 다가온 이 계제에 그리고 문화교류의 길이 열리게 된 계제에 부질없는 과거 회상을 한 흠이 없지 않다. 아픈 상처를 새삼 헤집어 낸 느낌 또한 없지 않다. 하지만 새로운 시작은 과거의 청산 없이 불가능하다. 우리들 지난날의 불행한 무정계성을 이제 오히려 더한층 철저하게 되돌아 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새삼스레 문화적 국경을 배타적으로 분명히 하자고 우기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정화를 치른 터전위에서 문화적으로는 어느 한도안까지는 오히려 새로운 「무정계성」이 이룩되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과거의 정산을 전제한다면 이제 얘기는 전진적으로 추구되어야 한다. 말이데올로기의 길을 전 지구촌이 큰 예외없이 추구해가고 있는 상황은 이제 바야흐로 세계질서의 재편을 재촉하고 있다. 한·중 양국의 문화교류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 세계 재편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제 동서의 축을 따른 세계의 세가름은 의미가 없다. 이제 한국과 중국은 서로 새로운 과제를 분담해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고 지구촌 남북의 분단선, 말하자면 경제적 부와 빈으로 갈라지는 남북의 분단선을 돌파하고 삭제하는 작업에 지금껏 남에 속해있었던 그러나 근자에 와서 그 말피를 어느 선까지는 이룩해 낸 두 이웃한 국가로서 몰두해야 한다. 이 과제는 단지 경제적인 울타리안에 갇힐 성질의 것이 아니다. 유교전통을 서로 함께 나누어가진 아세아의 국가로서 그 과제를 서로 분담할 때, 유교적 세계관·가치관 등이 성취동기로서 어느 만큼 도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를 가늠 하는 일은 문화적인 영역과 중복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남북 분단(지구촌 전체)의 극복 없이 지구촌의 참다운 안정, 평화 그리고 상호 우호적인 견제 등은 가망도 없는 일이란 것을 염두에 두고, 이제 그 방면 전진적인 선구자로서 혹은 전위로서 한국과 중국 양측은 유교적 전통 그리고 그에서 비롯한 인간관계 그리고 인간관리제도 등에 관한 활발한 논의를 양국간의 국제적 차원에서 진행시켜야 할 것이다. 이때 지금껏 한국이 중국과의 사이에서 견지해온 저 「무정계성」이 오히려 보다 더 적극적으로 기여하게 될 가망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란 점에 유념해 두고 싶다. 한국이 불행하게도 짐져 왔던 저 「무정계성」이 두 나라가 서로 나누어 가진 문화전통을 바탕으로 해서 시도할 남북분단의 돌파를 쟁취할 전략의 길을 의외로 쉽게 트이게 할 가능성이 전적으로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청나라의 이른바, 「신 유학」(New Confucianism)은 이미 그 이전의 관념주의와 합리주의에 강력히 항의하면서 실증주의, 인문주의, 그리고 민족주의 등의 기치를 내거는 일방, 근대서구의 문물에도 이미 눈떴던 것이다. 그리고 그 흐름이 우리의 실학사상에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것임도 이미 지적되어 왔다. 자생적이면서도 서구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아서 움튼 중국과 한국 두 나라의 근대화 움직임이 이제 바야흐로 그 가장 결정적인 그리고 우람한 열매를 따내려하고 있다는 것을 두 나라가 서로 철저하게 의식하고 그 사이의 경험, 앞으로의 전략 등에 관한 정보·지식, 학문적 성과 등에 교류가 어떤 다른 분야보다 앞서서 진행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이 과제는 두 나라가 다 같이 서구문화를 수용해 가는 과정에 관한 논란까지도 포함해야 할 것이지만 그와 동시에 일본의 선례에 관한 고려를 양국 공동의 처지에서 면밀하게 검토해야 옳을 것이다. 근대화의 길에 들어설 무렵 두 나라는 다 같이 식민지화하는 경험, 점령지화하는 동절한 경험들을 함께 겪어야 했다. 그러기에 서구가 선례가 된 근대화란 것은 어쩌면 고육지책과 다를 게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피치 못할 고육지책이다.

그리하여 전통적 유교문화를 배경에 깔고서 이룩될 본격적인 근대화 그리고 남북분단 돌파로 해서 두 나라는 분명히 다음 세기의 새로운 일류문화의 전범(典範)을 함께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른바 「그리크 로만 클라식」에서 비로소 움튼 서구문화가 오늘에 도달한 모습과는 다른 「중국고전」내지 「동양고전」에서 움터서 자라올 수 있었던 새로운 세계질서 그리고 문화를 두 나라는 더불어서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두 나라가 분담해야 할 그리고 부분적으로 일본도 참여할 수 있는 새 시대의 세계사적 과제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일본은 이미 서구와 다른 새로움의 전범으로서 무엇을 보여주었는가 그리고 앞으로 보여줄 수 있는가 등에 대해서는 우리 들 두 나라의 처지로서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간과하고 싶지 않다.

전화위복될 체재의 이질성

물론 앞으로 있을 두 나라 사이의 문화 교류의 과제 내지 목적이 앞에서 말한 초대 명제 하나에 국한될 수는 없다. 그 초기대과제를 위해서도 세부적인 전술적인 차원의 문화 교류 분야가 있어야 한다.

첫째, 근대화 초기까지 일종의 운명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던 두 나라는 그 동안 동서분단으로 해서 서로 다른 진영에 속해 있었다. 그리고 급기야 그것은 두 나라를 전쟁의 수렁속에 빠지게 하였다. 그같은 이데올로기의 이질성 그리고 체재의 이질성이 각자에 의해서 경험되는 동안 기왕의 유교적 전통 내지 동양적 전통에 어떤 변혁이 이루어졌는가에 대해서 그리고 파생적으로는 그같은 이질성이 그리고 그에 수반된 변혁이 이제부터 서로 이룩해 나가야 할 본격적인 남북 분단의 돌파에 무엇을 끼치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심각한 의견 교환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때, 그 사이에 창작된 이 방면 학문적 업적, 예술적 표현, 대중문화의 취향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상황 등이 서로 숨김없이 또 솔직하게 커다란 수용력 내지 소화력을 가지고 주고받아져야 할 것이다.

이같은 교류를 하고 있노라면 의외의 그리고 망외의 수확을 움켜쥐게도 될 것이다. 이데올로기로 해서 국가 분단과 민족 분단을 겪기는 두 나라가 서로 다를 바 없다. 그 상처를 되돌아보는 일은 당연히 앞으로 통일의 과제가 어떻게 추진되어야 할 것인가? 그리고 통일 이후의 분단된 두 집단 사이의 이질성 극복이나 융화는, 그리고 사회 변화에 대응할 적응력 등은 어떠해야 하는가? 등 시급하고도 고통스런 과제 해결을 위한 전략이나 전술에 관해서 양국은 서로 의견이나 방도를 교환하고 또 상호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중국은 한국에 대해서 공산주의를 경험한 처지에서 한국은 자본주의 내지 자유주의를 경험한 처지에서(물론 중국에 대해서) 각기 상대방에게 도움이 될 방도를 전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두 나라가 새로운 세계의 미래지향적인 부강하고도 민주적인 복지국가를 이룩함에 있어서 꼭 같은 길을 걸어서, 꼭 같은 결과에 다다르게 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서로 조금씩 다른, 또 더러는 결정적으로 다른 미래의 「새로운 선진국」을 형성하게 될 것이라고 가정하게 될 적에 그같은 경로의 차이와 결과의 차이가 어디서 무엇 때문에 생겨나게 될 것인가에 관해서 미리 전망을 세워서 상호 검토해보는 작업도 매우 의미있는 문화교류의 분야가 되리라고 예상된다. 이같은 21세기 지향적인 양국의 미래학적인 선택의 폭, 대상, 체재 등에 걸쳐서 질·양 양면으로 이 방면 문제가 서로 합동으로 추적된다고 가정해보는 일은 양국 문화교류를 말함에 있어서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고 여겨진다.

기왕 미래학적인 전망을 한 김에 또 다른 양국 공통의 이 방면 과제를 제기해 볼 수 있다. 새로운 세기에 가령, 중국의 상해, 천진 그리고 한국의 부산이나 인천 같은 초국가적 「글로벌시티」의 출현을 예상해 볼 수 있다. 한국 땅에 있긴 하지만 한국만의 것이 아니고 범 지구적 내지 범 동북아세아적인 지대메갈로폴리스의 출현을 미리 점쳐 보는 셈이지만 이같은 신도시 미래도를 함께 설계해 보는 것도 유익하리라고 예상된다. 기왕 내친 김에 한 수를 더 앞지른다면 가령, 상해와 부산 아니면 인천과 천진이 서로 사이의 중간 바다 밑에 건설된 해중도시 그리고 해중 통로에 의해서 서로 한 줄에 엮어진 도시가 될 어떤 환상적인 미래 전망도를 더불어서 두 나라가 검토하는 것 내지 꿈꾸어 보는 것도 양국 문화교류를 미래지향적인 방향으로 이끌고 가는 뜻에서 혹은 교류를 영구화한다는 뜻에서도 매우 바람직한, 그리고 신나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오늘의 양국 문화교류를 논의함에 있어서 한국측으로서 매우 다급하고도 요긴한 항목이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멀리는 발해, 고구려 그리고 부여에까지 순차적으로 소급해 올라갈 한국사의 영역에 관한 우리들의 과제에 관한 것이다. 부여이래, 발해에 이르는 한국의 북방사의 재구 그리고 재음미를 위한 작업은 우리들로서는 정신적인 귀향과도 같은 것이다. 이 방면 작업을 위한 학술연구, 발굴, 지리지 및 문화지 작성 등에 걸쳐서 중국이 우리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게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처해서 원거리적인 전망을 미리 세워서 일을 추진해나가야 할 것이다. 이 방면 과제는 중국측과의 적지않은 알력 내지 갈등을 예상해야 하는 만큼 그들의 협조를 얻어내기까지 상당한 녹녹잖은 노력이 경주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물론 학계만의 일이 아니다. 범민족적이고도 범국가적인 과제로서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다음 이 과제외 수반되어서 신라이래의 중국내 조선인촌(그 가운데는 장보고의 중국기지도 포함되어야 한다.), 고료보, 한인 집단주기지 드디어는 북간도나 연변 일대의 한인자치주에 이르기까지 문화조사, 생활풍습조사 등이 그리고 유적 조사 등이 우리들에 의해서 주동적으로 집행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독립군 및 임시정부의 행적이 이에 포함되어야 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런 조사 연구는 부여, 고구려 그리고 발해에 이르는 고대한국북방사 재건에 비추어서 근대한국북방사 재구라는 목표에 이바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경우 한가지 망각하지 말아야 할 필수적인 부차적 과제가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시베리아 원동 지역 및 중앙아세아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재러시아 동포들에 관한 과제나 이들 이민사, 생활사 그리고 그들이 누리고 있는 문화 등을 역시 또다른 한국민족사의 일부로서 수용하는 작업이 중국지역을 상대로한 비슷한 사업과 함께 추진되어야 한다. 이 두 지역 직업에 기왕이면 미주지역 그리고 일본지역 이민사 조사까지도 덧붙여질 수 있다면 우리들은 새로운 「근세 한국 범민족사」아니, 「근세 범세계적 한국범민족사」및 그 범주에 들 문화사를 능히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방면 과제는 우리 모국의 국민들이 해외 거주 동포 내지 해외이민 동포들에게 빚지고 있는, 반드시 갚아야 할 부담이라고 생각된다.

이럴 경우에 우리들은 중국에 대해서 그들의 소수민정책 중에서도 문화정책이 어떠했던가 물어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들 스스로 한국인이 거대한 숙주문화(현지문화) 속에서 어떤 기생 문화를 창조해 내었는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나아가서 한국문화가 지닌 남의 문화에 대한 적응성을 가늠하는 일을 겸하면서 더불어서 적응성과 견주어서 뒤쳐지지 않을 전통회귀성을 가늠하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중국문화와 친화를 이룩한 한국문화의 모습 그리고 한국문화와 친화를 이룩한 중국문화의 모습 등을 통해서 세계 여타지역의 문화와 공존하면서 세계화할 한국문화의 모습까지를 생각해 보게 될 것이다.

이만한 짧은 관찰만 가지고도 우리들은 중국과의 문화교류가 다른 나라와의 문화교류와는 비견도 못할 특이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개략적으로나마 헤아리게 될 듯하다. 이미 중첩되게 교류한 역사가 있고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역사의 여러 층은 중국과의 관계사의 다양한 층으로 덧씌워져 문화교류의 역사도 그 속에서 매우 두껍고도 넓은 중첩된 층을 이루고 있음은 새삼 말할 게 못된다. 이 모든 과거가 충분히 검증된 바탕위에서 새로운 문화교류의 항목 그리고 방법이며 정책이 결정되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중국은 위도 아니고 큰 것도 아니다. 들어가는 땅도 아니고 올라가는 땅도 아니다. 같은 지평 상에서 서로 왔다 갔다 할 나라요 땅일 뿐이다. 한국, 중국 그리고 일본이 언젠가는 이룩하게 될 동북의 선진 삼개국의 판도를 미리 내다보는 전진적인 조망속에서 문화교류의 길이 서로 다져져야 할 것이다. 중화만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요 동북아 삼국이 더불어서 새로운 세계의 중심이 될, 다극화된 지구촌의 중심의 하나가 될 전망이 선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문화교류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