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기획 / 한.중 문화교류의 위상과 전망

한·중 수교와 오늘의 중국문학 '92




김하림 / 조선대 교수

지난 8월 24일 한중수교가 마침내 맺어지고, 9월에는 양국 정상이 「띠아오위타이」의 연회장에서 술잔을 마주치는 장면이 TV를 통해 안방에 비춰지기도 하였다. 80년대에 들어 양국 간의 경제·민간 교류가 급증했다고 하나, 그동안의 적대적 외교관계에 비추어보면 새삼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일이었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와 중국과의 지정학적 밀접성, 유구한 역사적 관계를 흔히 「입술과 이빨(脣齒) 사이」라고 묘사해 왔다. 입술이 없어지면 이빨이 시린 것(脣亡齒寒)은 당연한 일이지만, 익히 알고 있다시피 그동안 우리나라와 중국의 관계가 언제나 상호 호혜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특히 '49년 중화인민 공화국의 수립과 '50년 한국전쟁에 중국이 「인민지원군」이라는 명목으로 군대를 파견하여 참전한 후로, 최근 40여 년간 한국과 중국은 「개와 원숭이 사이」였다.

이런 중국과 44년만에 공식적인 외교관계가 맺어진 것에 대해, 이데올로기 대립에 의한 냉전체제의 종식이며 한국전쟁으로 빚어진 대결구조가 평화구조로 전환되는 북방외교의 승리라는 정치외교적 측면, 개혁개방 이후 확대되는 중국시장에 대한 기대라는 경제적 측면, 북한의 개방유도와 이로 인한 통일분위기의 조성등 다양한 각도에서 한중수교의 의미를 평가하는 작업이 행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측면 외에도 양국간의 문화교류도 당연히 확대·심화되리라 여겨진다. 그동안 「한자문화권」에 속했던 우리나라가 중국으로부터 받아온 문화·학술방면의 장구한 영향은 컸으나, 이제는 호혜평등한 관계에서 문화·학술교류가 이루어지리라고 판단된다. 인적 교류 및 학술 교류가 활발해지리라는 것은 불문가지이고, 어떤 면에서는 40여 년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교류가 폭넓게 더 빠른 속도로 이루어 질 것이며, 양국이 그동안 서로 다른 사회체제를 유지하면서 축적해 온 학문과 문화를 어떻게 인식하고 수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중요하게 제기될 것이다.

중화의식 및 화이관에 대한 이해와 대처

그러나 몇 가지 경계해야 할 요소가 양국의 문화교류에는 내재해 있다.

개혁개방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해도 중국은 공식적으로는 사회주의 원칙을 여전히 견지하고 있다는 점을 우선 상기해야 한다. 따라서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나 낙후한 경제 등을 들먹이며 중국측을 얕잡아보는 태도는 양국교류의 장래를 위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둘째로는 ’49년 이후 변모된 중국 현실에 대한 이해가 요구된다. 문화학술 방면에도 이데올로기의 영향이 강하게 작용했고, 어떤 면에서는 수천년의 전통보다 더 강하게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런 변모양태를 숙지해가면서 점진적이며 신중한 접근과 교류방식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다음으로는 중국인들의 뿌리깊은 「중화의식」과 여기에서 비롯한 「화이관(華夷觀)」에 대한 경계이다. 적지않은 중국인들의 의식 속에는 여전히 「중심의 대국/변경의 소국」이라는 관념이 남아 있다. 즉 「입술이 없어지면 이빨이 시렵고, 대문이 부서지면 집이 위태롭다(屑亡齒寒, 戶破堂危)」라는 비유의 표층은 양자의 밀접한 관계를 의미하지만, 그 심층에는 「이빨과 집」이 보다 중요하고 「입술과 대문」은 그 다음이라는 차별적 인식이 숨어 있고, 중국인은 자신들이 입술이거나 대문에 불과하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중국문학 속에 표출된 한국에 대한 인식

양국의 작가·비평가·문학연구자들 사이의 교류가 활발히 전개되리라는 예측 속에, 떠오르는 궁금한 점은 '49년 이후 중국 작가들이 한국과 우리 민족을 어떻게 인식해 왔고, 작품에는 어떻게 반영되어 있을까 하는 것이다.

'49년 이전에도 ‘조선과 조선민족’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중국 작가들에 의해 조금이나마 창작되었다. 예를 들면 1926년 장광자(蔣光慈)가 발표한 「압록강 위에서」, '35년에 출판된 소군(簫軍)의 「8월의 향촌」등이다.

단편소설 「압록강 위에서」는 소련에 유학 중인 조선인 청년 이맹한(李孟漢)이 자신의 애정사에 얽힌 비애와 환희를 자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피압박민족의 처참한 현실과 일본제국주의에 강렬히 반항하는 정신이 잘 묘사되어 있다. 「8월의 향촌」은 일본군에게 점려된 만주를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로 일본군 및 이의 주구인 만주군과 투쟁하는 동북인민혁명군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개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인공인 중국청년 소명(簫明)과 조선처녀 안나(安螺)사이에는 격렬한 전투생활 속에서도 애정이 싹터오르나, 이들의 애정관계를 비판하는 사령관의 명령으로 안나가 다른 부대로 전출된다. 안나는 이에 반발하여 부대를 떠나겠다고 요구하나 사령관의 교육을 받고 이를 받아들인다. 이별의 고통속에서 샤오밍은 지휘력마저 상실하게 되나 다른 부대원들의 도움 속에서 항일투쟁의 의지를 되살린다.

이 두 소설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49년 이전에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과 조선민족의 고통, 조국독립 운동의 헌신 등을 작품의 주된 주제로 삼고 있다. 이는 당시 중국 작가들이 일본의 침략 위협에 놓여있는 중국의 현실 속에서 조선과 조선민족에 대해 동병상련의 감정을 품고 민족적 유대의식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음을 의미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불굴의 의지로 투쟁하고 있는 조선민족에 대해 긍정과 찬양을 표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49년 이후 중국 작가들이 한국과 우리 민족을 소재로 다룬 작품을 창작하게 된 계기는 6.25로 인해서 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겨우 9개월 전인 '49년 10월 수립된 중화인민공화국은 당시 황폐된 생산시설, 악성 인플레, 각 지방의 혼란, 단절된 국제관계 등과 같은 난제에 직면해 있었다. 따라서 국내의 산적한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연합군과 전쟁을 수행한다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그러나 '50년 말부터 「미제에 대항하고 조선을 원조(抗美援朝)하며, 집을 보호하고 국가를 보위하자(保家衛國)」는 명분하에 중공군(중국에서는 「중국인민지원군」이라 칭함)을 파병한 것은 일차적으로 만주지방의 국경에 대한 방어와 국제 사회주의 연대성의 도모, 대내적으로는 전 중국인의 애국적 단결과 토지개혁·사영상공업의 국유화 등과 같은 문제를 동시에 해결코자 하는 의도였다. 이는 각 정파와 모든 인간단체들이 연합하여 「중국인민 세계 평화방위 및 아메리카 침략 반대위원회」를 결성하여 친미사상비판, 교육과 선전, 애국의식 고양 등의 운동을 전개한 것을 보아도 명확히 드러난다. 이 과정에 문예계의 「항미원조」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었고, 많은 작가들이 직접 전투에 참여하거나 문예공작단선 전대에 참여하여 종군활동을 하였다. 작가들의 이러한 종군활동은 이후 시·신문·소설 등의 창작에 반영되어 한국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대거 발표되었다.

미앙(未央)을 중심으로 한국전쟁 체험시 발표

시 분야에서는 전간(田間)의 「부조시초(赴朝詩抄)」, 엄진(嚴辰)의 「전투의 깃발」과 「조선시초」, 미앙(未央)의 「조국이여, 나는 돌아왔노라」. 이영(李瑛)의 「전쟁터의 명절」, 장영매(張永枚)의 「신춘(新春)」등 시집이 발간되었다.

1930년 생으로 '49년 입대하여 한국 전쟁에 참가하면서 창작활동을 개시한 미앙은 가장 뛰어난 성과를 얻었다고 평가받았다. 그는 '53년에 「조국이여, 나는 돌아왔노라」는 처녀시집을 발간했는데, 이 시집은 자신의 체험에 근거하여 한국전쟁을 제재로 한 시들을 수록했다.

『그 최초의 나날들/소총/수류탄/국수 가락에/한 웅큼 눈송이를 보탠 게/바로 우리들 무기//…/우리는 적들을/압록강에서/한강 남쪽까지 몰아붙였다//아름다운 논밭은 황폐해졌고/웅장한 도시는 타버렸구나/학교의 사방에/아이들 시체가 가득/…//우리는 전사/우리의 무기는/우리의 마음뿐/우리의 마음을/6억 조국인민과/3천만 조선인민과/평화를 애호하는 세계인민에게 바친다//「우리의 무기」』와 같은 시는 한국전쟁을 침략전쟁으로 간주하고, 조국애와 이에 기초한 국제적 연대의식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차는 압록강을 지났다/마치 날아가듯이/조국이여, 나는 돌아왔노라/조국이여, 나의 애인이여//…나의 환희의 눈물이/너의 가슴에 떨어질 때/내 마음은/도리어 조선의 전방으로 내달린다//「조국이여, 나는 돌아왔노라」』는 중국에 사는 조선민족이 「인민지원군」에 참가하여 전쟁에 뛰어드는 모습을 그린 시로, 조국애와 희생정신을 찬양하고 있다.

이외에도 장영매의 『친애하는 아주머니/정말 죄송합니다/엊저녁 귀댁의 이곳에 머물렀습니다/당신의 허락도 없이//아주머니 눈자위는 붉어지고/한참 후에 입을 떼며/조선의 집은 곧 그대들 집인데/이처럼 눈보라 치는 밤에/어찌 처마 밑에서 밤을 샜단 말이요?//「처마 밑에서」』와 엄진의 『전사는 옷을 헤쳐/아이를 가슴에 품네/자신의 체온으로 아이를 덮히고/자기의 얼굴을 아이 얼굴에 비비네//찬바람 불고 또 불어/아이의 울음은 작아들고/전사는 묵묵히 눈물을 흘릴 뿐/나약해서가 아닌, 그것은 타오르는 원한//「용사, 자모(慈母)」』와 같은 시는 중조양 민족간의 유대의식과 희생정신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전쟁이 종결된 후에는 재건에 몰두하는 북한의 모습과 북한과의 연대의식을 구가하는 시들이 발표되었다. 예를 들면 엄진의 『최고의 경의를 그대에게 바치노니/평양, 영웅의 도시여/…//천만톤 폭탄의 폭우도/그대를 침몰시키지 못했고/폐허 위에서 나는 보았네/…새로운 오곡의 씨를 뿌려/푸르디 푸른 곡식들은 무성하고//「평양」』, 전간의 『평양-북경-평양/두 지방, 하나의 이상//이상은 이미 거대한 파도가 되어/흉용(洶湧)스럽게 동방으로 치닫네//「북경-평양」』등은 바로 이러한 내용을 표현한 대표적인 시들이다.

소설분야에서도 적지않은 작품들이 창작되었다. 강원도 금화 북쪽 상감령의 전투를 묘사한 육계국(陸桂國)의 상감령(上甘嶺)」, 노령(路翎)의 「첫눈(初雪)」, 「전사의 마음」, 양삭(養朔)의 「삼천리강산」등이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힐 만하다. 「첫눈」은 포탄이 작열하는 속에서 운전병이 전선 부근 부락의 민간인을 후송하는 내용을 묘사한 작품으로, 『정월의 매서운 추위 속에 황혼 무렵 류강과 왕덕귀는 부녀자들이 차에 오르는 것을 도왔다. 먼저 비교적 큰 물건을 얹고…부녀자들의 잡동사니 일용품을 보는 순간, 류강은… ’37년 일본 침략군이 상해 부근 자시의 마을에 들어오던 모습이 떠올랐다. 어머니와 누나는 바구니와 항아리, 크고 작은 보따리를 들고…그때 그는 17세였다.』처럼 일제가 자신의 고향을 침략하던 기억과 한국전쟁의 정경을 교차시키고 있다. 이는 작가가 한국전쟁을 이데올로기 대립에 의한 냉전의 성격과 한편으로는 제국주의 침략세력과 대항하는 민족해방전쟁의 성격이 중첩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양삭은 철도노동자들로 구성된 「인민지원군」과 함께 한국전쟁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 경험을 토대로 해서 철도노동자 부대의 교량보호작전과 운송작전중에 벌어진 전투를 중심으로 묘사한 최초의 장편소설 「삼천리강산」을 창작하였다.

시, 소설보다 더욱 활발하게 한국전쟁을 반영한 장르는 산문이다. 작가들 뿐 아니라 전쟁이 참가한 일반 병사들도 「보고문학」형식을 빌어 산문을 창작했고, 이의 대표적인 작품집으로 109편을 수록한 「조선통신보고선(1, 2, 3집)」, 5백 편에 달하는 「지원군의 하루(1∼4집)」, 60여 편이 실린 「지원군영웅전」등을 들 수 있다.

이 중 손꼽히는 작품이 위외(魏巍)의 「누가 가장 사랑스런 사람인가」로, 중국병사가 전투 속에서 조선 어린이를 구하는 내용을 통해 인간애와 용감한 희생정신 등을 칭송하는 내용이다. 다음으로 특히 산문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원로작가 파금(巴金)의 경우이다. 그는 '52년과 '53년 두 차례에 걸쳐 약 12개월 정도 북한에 머물렀는데, 이 기간의 경험을 토대로 산문집 「영웅들 속의 생활」, 단편소설집 「영웅들의 이야기」,「이대해(李大海)」등을 창작하였다. 이 작품들에는 「인민지원군」들의 조국애,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 영웅주의, 국제간의 연대의식 등이 강하게 표출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시기의 작품은 「애국, 연대, 영웅」이라는 도식적 주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나, 중국 작가들이 한국을 보다 깊이있게 인식하는 계기를 한국전쟁은 제공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후 중국 작가들, 나아가서 중국인들의 대(對) 한국관은 이 시기에 명성된 고정적 틀을 '78년의 개혁개방정책 이전까지는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즉 남북분단 상황에 대해 남한은 미제국주의의 식민지, 북한은 사회주의 형제국이라는 도식적 구분으로 일관해 왔고, 작가들도 이번 관점을 견지해 왔다고 판단된다.

이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 '78년에 발표된 위외의 장편소설 「동방(東方)」이다. 이 작품은 중국인민해방군문예상과 '82년에 제정된 제1회 모순(矛盾, 중국의 저명한 소설가로 문화부장을 역임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 한국전쟁에 참가한 「지원군」부대를 중심으로 이들의 용맹스런 전투와 희생정신, 조국애 등을 주제로 전쟁이 「승리」로 종결되고 주인공들이 고향으로 되돌아가 사회주의 새농촌을 건설하는데 몰두한다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 이는 바로 이 시기까지 중국의 작가들은 여전히 한국전쟁을 통해 획득한 인식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의 중국문학, 인간과 사상의 해방을 위한 고투(苦鬪)

'76년 「4인방」이 체포되고, '78년 공식적으로 개혁개방 정책이 선포된 후, 중국의 문학예술계는 다시 「백화제방, 백가쟁명」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79년 11월 북경에서 개최한 제4차 전국문학예술공작자대표대회에서는 새로운 시기를 맞이하여 작가들에게 『의식형태 영역에서 4개 현대화 건설을 방해하는 각종 사상습성에 대해 장기적이며 효과적인 투쟁을 진행할 것, 고도로 발전된 사회주의 정신문명을 건설하는데 적극적으로 기여할 것, 인민들의 생활 속에서 제재·주제·언어를 획득하고 인민들의 분발한 정신으로 자신을 키워나갈 것』을 결의하고, 『관이 주도하는 작품은 반드시 포기되어야 하고, 문예창작 및 문예평론 분야에서 행정식의 명령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문예창작의 자유와 예술의 민주를 획득하기 위한 중국 작가들의 이러한 고투는 '78년에서 '80년까지 문단의 주조를 이루었다. 「상흔」은 문화대혁명의 열풍 속에서 어머니를 비판하고 농촌에 내려간 여고생이 문화대혁명이 종료된 후에야 자신이 어머니를 오해했음을 깨달았으나,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는 줄거리이다. 여기에서 나타나듯이 문화대혁명 시기에 자행되었던 인간에 대한 폭력과 정치적 박해, 인간관계의 파괴와 정신세계의 파탄, 특히 부모와 자식간의 대립과 고발, 그리고 이로 인한 인간성 상실을 주된 주제로 삼고 있는 이 상흔문학은 또한 이른바 개혁파의 문화대혁명 비판과 부정이라는 역사적 평가와 맞물려 커다란 반항과 호응을 불러 일으켰다. 뒤이어 발표된 「내간(內奸)」, 「노래의 신(歌神)」, 「나는 누구인가」, 「참회」등이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79년 3월 장현(張弦)이 발표한 「기억(記憶)」을 시초로 삼고 있는 반사(反思) 문학은 범위를 문혁에 국한하지 않고 중국의 극좌노선과 정치정세가 인민들에게 끼친 폐해의 심층적 원인을 탐구·폭로하고 있다.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고효성(高曉聲)의 「이순대의 집짓기(李順大造屋)」은 사회주의 제도가 정착된 후 빈민이었던 이순대가 세칸짜리 자신의 집을 짓고자 하는 소망을 이루기 위해 일가족이 온갖 노력을 다하지만, 거의 실현될 무렵마다 다시 극좌노선이 대두하여 실패하고 마는 30년 동안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작자는 농민들의 선량하고 근면한 품격을 찬양하는 동시에, 이들이 지니고 있는 봉건적 사고와 인습의 중압 및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 그리고 극좌 노선이 오히려 이런 역사적 상황을 조장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즉 반사문학은 사회현실과 인간의 운명에 대한 일반적인 묘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현상이 벌어지게 된 사회와 개인의 심층 원인을 탐색해 보고자 한 것이다. 「허무(許茂)와 그의 딸들」, 「흑기」, 「사람아, 아 사람아」등이 이러한 조류에 속하는 대표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교조적, 영웅적 인간창조에서 인간과 사상의 다양한 접근시도

'79년 장자룡(蔣子龍)의 「교(喬)공장장의 부임기」에서 비롯한 개혁문학은 '82년에 제2, '84년에 제3단계에 달하는 발전사를 지니고 있다. 제1단계의 주요 주제는 국영 및 집단소유 공장체제의 모순을 폭로하고 이의 개혁을 주장하는 것으로, 관리체제의 혼란, 낮은 경제효율, 공장 간부들의 저열한 수준 등이 개혁개방의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는 내용이다. 「어느 공장 비서의 일기」,「개척자」, 「남자의 품격」등이 대표작이다. 제2단계에서는 정치경제체제의 변화가 사회구조의 전체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야 한다는데 주목하는 주제를 제기했는데, 특히 윤리 관계와 상응하는 도덕관념의 변화가 요구된다는 작품이 집중적으로 창작되었다.

「무거운 날개」, 「빨주노초파남보」가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제3단계에서는 실제적으로 개혁을 실천하는 대중들의 모습을 주제로 삼아 이들의 심층심리, 이익추구와 물질만능주의에 젖어드는 인간들의 내면적 비극성 같은 부정적 측면과 이를 무릅쓰고 개혁에 앞장서는 인물들을 형상화한 작품들이 창작되었다. 가운로(柯云路)의 「새로운 별」과 「낮과 밤」, 달리(達理) 「안녕, 헬리혜성」등이 손꼽힌다.

뿌리찾기(尋根) 문학은 '84, 5년에 흥기하였는데, 주된 주제는 중국의 전통문학, 철학, 종교, 역사문헌 등을 재해석하고 현대인의 감정에 맞게 고대 문화의 유풍을 계승하자는 내용이다. 한 대학생이 북쪽 지역에 있는 작은 강줄기를 탐색하는 도중에 개인과 민족간에는 강력한 정신적 연계가 존재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줄거리로 구성되어 있는 장승지의 「북방의 강(北方的河)을 시초로 한 뿌리 찾기 문학은 이후 아성(阿城)의 장기왕(棋王)」, 「나무왕(樹王)」등과 같은 중국문화의 일부분을 인격화시킨 일련의 계열성을 지닌 작품이 창작되면서 더욱 유행하였다. 그러나 신강, 몽고, 청해, 서장 등지의 소수민족의 독특한 문화와 문화의식을 작품화하는 경향을 끝으로 '86년 이후 점차 그 열기가 식어버렸다.

모더니즘 문학은 '80년 초 몽롱시(朦朧詩)파를 중심으로 활발히 창작되었다. 주요 시인으로 북도(北島), 서정(舒煢), 고성(顧城), 양소빈(梁小斌)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새로운 표현방식과 예술형식을 통해, 인생·역사·사회 등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코자 하였다. 인간의 내면세계 탐구와 철저한 자아탐색 및 해부를 주장한 이들은 표현수법에 있어서도 상징과 비유, 직관과 환상, 일체의 격식-장절의 구분, 글자수, 음운-에 대한 부정을 통해 기존 문단에 충격을 주었다.

북도(北島)의 「생활」이란 시는 단 한 글자 「망(網)」뿐이고, 채곤의 「주름살」은 「내 맘에 남아있는 바퀴자욱은/역사의 전도된 수레바퀴」처럼 두 줄에 지나지 않는다. 기존 시형식에 대한 극도의 부정 외에도 고도의 상징과 이미지즘을 통해 난삽하고 추상적인 내용을 노래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운명이고/모든 것은 연기이며 구름이다/모든 것은 완성이 없는 시작이며/모든 것은 금방 사라지는 모색이다//(북도, 「모든 것(一切)」「붉은 산호/너는 극진한 사랑의 화염/너는 바다를 점화시키고자 한다.//(고성, 「붉은 산호」)』등이 그 예이다.

반면에 『세계여, 너에게 고하노니/나는-너를-믿지-않는다!//(북도, 「회답」)』, 『그리하여, 나는 세계로부터 끊임없이 버림받고/해가 서쪽으로 기울면/나는 끌수록 길어지는 그림자로부터 버림받네/길게 늘어진 길과 같은…//(강하江河, 「여기에서 시작하자」)』, 『영혼, 고난의 영혼으로/다시는 유랑하지 않으리/집에 돌아가고파/서랍을 열고, 어릴적 사진을 뒤적이며/그리고 책갈피에 갈무리 한/진초록 토끼풀을 보고파//…//하늘은 또 비를 내리는데/나의 열쇠여/어디에 누워 있는가?//(양소빈, 「중국이여, 내 열쇠를 잃었습니다)』등은 세계와의 대립 속에서 자아를 탐색하는 영혼의 고통을 절실하게 고백하는 시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문화대혁명 당시 중고생 내지 대학생으로 문화대혁명에 열렬히 참가했으나, 그것이 결국은 인간을 파괴하는 집단적인 광란극에 불과했음을 인식하고 자신들이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라는 정신적, 심리적 모순구조와 이중적 회의 속에서 이와 같은 「몽롱」한 작품 창작에 이르게 된 것이라 평가된다.

몽롱시파를 계승한 시인들은 대략 도시(都市)시파와 학원시파로 구분된다. 도시시파는 ’86년 상해의 청년시인들이 「도시시인」이라는 시집을 상재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도시는 당대 문명의 핵심이자 상징이나 도시의 발전은 인간의 교육을 그 대가로 지불해야 하며, 따라서 개인은 군중과 함께 있기를 갈망하나 군중이 오히려 자신을 삼켜 버리는 현상을 경험하고 다시 새로운 고독을 추구하는 심령의 변증법을 도시인들은 체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들의 예술적 모토로, 『우리들은/21세기의 야수/고도문명의 야수//…/동물의 우애가 인간에게 감염되어 아이들은 친숙한 공간에서 뒹굴며 구술치기를 하고//…/무의식적인 전율/아마 나는 애통(哀痛)을 배설하려나//(장소파(張小波),「거리, 인간」)』가 그 예이다.

학원시파는 주로 '80년 이후 대학에 진학하여 전문적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은 시인들을 지칭한다. 이들은 비교적 현실과 직접적 연관을 맺고 있지 않는 「애정, 우의, 모정애, 생활」등을 소재로 다루면서, 과거의 절망과 미래에 대한 희망 사이에서 겪게 되는 개인적 좌절, 욕구 등을 집중적으로 탐색하는데 치중하고 있다.

이러한 정통문학 외에도 통속문학이 급속히 번창한 것도 오늘날 중국문학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80년대 초부터 맹렬히 불어닥친 통속문학의 바람은 주로 무협소설, 연애소설, 공상과학소설, 성애묘사소설 등이 주도하고 있다. 이는 그동안 문예에 대한 엄격한 정치적 표준과 규제, 그리고 이에 입각한 훈학작품에 식상한 대중들이 보다 본능적이며 감각적인 문학을 희구하게 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개혁개방시대의 중국 문예계는 이전의 사회주의 찬양, 노동 대중에 대한 송가, 영웅적 인물의 형상화 등과 같은 교조적이며 공식적인 틀에서 탈피, 인간과 사상에 대한 자유롭고 다양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중국인이 본 한국·한국사람들

'78년 개혁 개방정책을 표방한 이후, 한국에 대해 먼저 관심을 쏟기 시작한 곳은 중국의 경제계와 이와 관련된 학술분야였다. 특히 사회과학원(국가기관의 하나로 정치경제, 사회문화의 전반적인 이론을 담당하는 부서, 전국적인 성격의 중앙 사회과학원이 있고, 각 성(省)과 직할시에는 별도의 사회과학원이 있다)에 근무하는 4, 50대 연구자들이 중국의 개발전략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아시아의 「네 마리 용」중 한국의 경제발전과정과 경제발전정책-이른바 「개발독재」라고 지칭되는-을 주시하기 시작했고, 현단계 중국의 경제수준에 비추어 볼 때 한국의 모델이 가장 적합하지 않은가 하는 문제를 고민하면서부터 한국에 대한 관심과 인식이 달라졌다고 할 수 있다.

즉 '50년 한국전쟁 이후 형성되었던 한국에 대한 고정적인 인식들이 개혁개방정책을 통해 와해되기 시작한 것이고, 이의 첨병 역할을 담당한 것이 주로 경제학자들과 경제계, 그리고 개혁지향의 정치학자나 국제관계 전문가들이었다. 이를 입증하는 것이, 이들이 주축이 되어 편찬한 한국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서적이라 할 수 있는 「남조선 경제집단(요녕민족출판사, 1987)」, 「발전하는 남조선경제(광동인민출판사, 1989)」등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78년 이후 인간과 사상의 해방을 추구해 온 문예계에서도 한국의 작가와 문예작품에 대해 조금이나마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최초에는 주로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 출신 작가나 전문연구가들에 의해 단편적인 소개나 번역이 이루어졌고, 이후 한국의 중국문학연구자들이 한국에서의 중국문학 연구상황을 소개하면서 양국의 문학예술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전쟁 과정에서 북한을 소재로 한 작품이 활발하게 창작된 것에 반해, 아직까지 한국을 소재로 한 작품이 창작되지는 않았다. 이는 중국 작가들이 한국에 대한 경험이나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하고, 한편으로 현재까지는 문화교류의 깊이나 넓이가 일천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한가지 희망적인 관측을 이유(理由, 1938)를 통해 내릴 수 있다. 요녕성 출신으로 '73년부터 소설을 발표한 그는 '77년부터 「보고문학」의 일종인 기실(紀室)문학 창작에 주력했다. 대표작으로는 공산당 열사의 외동딸이 주위의 온갖 방해와 반대를 무릅쓰고 우파분자로 낙인찍힌 남자와 결혼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열렬한 사랑」, 펜싱선수가 각고의 훈련을 거치고 시합 중의 부상을 무릅쓰고 세계선수권에서 2등을 차지하는 과정을 묘사한 「서슬 푸른 기세」등이 있다. 그는 '86년 아시안게임 때 기자신분으로 한국을 방문했고, 귀국 후에 「한성만보(漢城-서울을 지칭-慢步)」라는 기행문을 발표하였다. 이 글에서 그는 2시간 비행만에 서울에 도착하게 되는 정경, 서울과 한강의 모습, 경제발전에 대한 인상, 서울시민의 대응과 숙소에서 일어난 에피소드, 경주와 부산을 방문한 인상 등을 세밀히 묘사하고 있다. 그는 끝부분을 『무뚝뚝하며 고집스럽고 강인한 이 민족은 때로는 섬세하고 연약하기가 소녀와 같다…그들이 짊어진 역사의 부담은 너무나 무거우나, 온갖 고통 속에서 오랜 세기를 지내왔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속에 두른 딱딱한 껍질을 벗고 외부 세계를 직면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이 있지만,… 이번 아시안게임에 참가한 것도 이미 과거가 되어 버렸다. 나는 갑자기 어떤 기성이 한말이 떠올랐다. 그는 말하길, 온 힘을 다해서 한 판의 바둑을 두고 난 후에는 안중에 흰 물이나 검은 돌은 보이지 않고 마음속에 오직 한 조각의 순수만이 남게 된다며…』로 맺고 있다.

이유의 글에서 나타나는 이와 같은 태도와 인식은 양국의 교류에 하나의 징검다리가 될 것이며 이는 양국의 문화교류가 좀 더 성숙되고 진지한 관계의 구축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의 표시로 받아들여진다.